부산의 명산 금정산, 하늘과 땅의 신화 간직하고 있으나…


부산의 금정산은 실제로 많은 등산객이 찾는 명산이면서, 그 찾는 것만큼 전국적으로 알려지거나 평가를 제대로 받고 있지 못하는 산에 속한다. 그 역사와 유물이 어느 산 못지않은 데도 말이다.

<세종실록지리지>에 금정산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금정산 바위샘(金井)은 동래현 서북쪽에 있다. 산마루에 세 길 정도 높이의 돌이 있는데, 그 위에 우물이 있다. 둘레가 10여 척이며, 높이는 7척쯤 된다. 물이 항상 가득 차 있어서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빛은 황금색이며, 그 아래에 범어사가 있다. 세상에 전해오기를 한 마리 금빛 물고기가 오색구름을 타고 하늘(범천, 梵天)에서 내려와 그 속에서 놀았다 하여 금정이라는 산 이름을 지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도 범천을 그냥 천(天)으로만 바꾼 것 외에는 똑 같은 내용을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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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정산 정상 올라가는 길에 있는 의상대. 여기서 저 멀리 광안대교와 남해바다가 보인다.

범천은 우주 삼라만상과 영생의 원리를 의미하고, 물은 창조를 뜻한다고 할 수 있다. 고대로부터 물은 인간 세상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낙원을 뜻하는 파라다이스(Paradise)는 페르시아어로 ‘우물이 있는 정원’을 뜻하는 말에서 유래되었다. 낙원도 결국 물이 없이는 구성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범천에서 내린 금어는 무엇을 뜻하는가? 금샘바위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영락없이 거대한 남근석이다. 바위가 워낙 커서 옆에서는 잘 모르지만 멀리서는 확연히 파악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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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샘바위. 생명의 상징이자 신화의 상징이며, 남근석의 상징이기도 한 바위다.

금샘바위(금정, 金井) 끝에 있는 금샘, 그리고 거기서 노는 금어, 이 모두 상관관계를 갖는다. 즉 하늘(범천)에서 인간 세상을 창조하기 위해 금샘(물)을 만들었고, 거기에 노는 금어는 생명잉태의 본질을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주와 지상계가 완벽하게 소통하는 통로인 금샘바위는 물을 가득 담고 있는 생명력의 근원이고, 천상의 생명인 금어가 지상에서 번식 증강하는 생명의 자리로 매김한다는 뜻이다. 그 금정샘은 실제로 금정산 최고봉인 고당봉 바로 밑에 우뚝 솟아 있다.

따라서 금정산은 역사의 산이고, 생명의 산이고, 신화의 산이다. 또한 하늘의 산이고, 땅의 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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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정산 정상 고당봉 올라가는 길. 분위기가 매우 좋은 호젓한 길이다.

신화의 역사를 간직한 금정산에도 원래 길은 있었다. 그 역사가 언제부터인지 아무도 모르지만. 주변에 가야토기까지 나오는 걸 보면 기원전부터 사람들이 생활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구체적인 문건은 찾을 수 없다. 현재의 기록으로는 임진왜란 직후 금정산성과 관련된 마을이 생성되고 본격적인 길이 만들어 진 것으로 보고 있다.


금정산의 현재의 길은 임진왜란과 맥을 같이 한다. 물론 지금 샛길을 제외하고 부산시에서 정비하는 금정산 등산로만 27개나 되지만 등산로의 개념이 아닌 ‘생활의 길’ ‘삶의 길’은 16세기 전후부터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중국의 문인 루쉰(魯迅)은 그의 소설 <고향>에서 ‘길’을 매우 간결하고 아름답게 표현하고 있다. ‘본래 땅 위에는 길이 없었다. 한 사람이 먼저 가고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곧 길이 되는 것이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길에 대한 압축적인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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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정산성. 산성 길이는 국내에서 가장 길다.

금정산길도 마찬가지다. 임진왜란 직후 고대로부터 있던 산성에 금정산성을 보강, 축성(1703년) 했고, 이후 산성마을이 커지면서 이전에 한두 사람이 다니던 길이 ‘삶의 길’로 확대됐다.

산 안에 분지의 형태로 마을이 형성된 곳은 거의 없다. 남한산성 안에 몇 가구가 살고 있긴 하지만 금정산성과는 규모면에서 비교할 바가 못 된다. 금정산성 안 산성마을엔 무려 440여 가구가 살고 있다.


금정산성 안에는 죽전, 중리, 공해라는 3개의 자연마을이 금정산성으로 둘러싸여 있다. 이 3개 마을은 모두 국방과 관련이 있는 마을이다. 죽전(竹田)마을은 화살을 만드는 대나무가 많이 생산됐고, 중리(中里)마을은 중성문이 있었기 때문에 붙여졌다. 공해마을의 공해(公廨)는 관청을 뜻하며, 산성 내의 좌기청, 군기고, 화약고, 내동헌, 별전청 등의 관위가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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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정산성 북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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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문 옆으로 길게 산성이 뻗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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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문에 대한 설명.

산성마을의 정확한 유래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지만 그 시초는 300여 년 전쯤 조선시대 군용물자 저장소로 사용되면서부터 마을이 형성됐다고 구전되고 있다. 마을 원주민인 이춘지(81)옹은 “토박이로 12대째 산성마을에 살고 있으며, 가장 오래됐다”고 말했다. 12대째면 대략 360년 이상 된다는 얘기다.


금정산성(사적 제215호)은 임진왜란으로 전국이 초토화된 경험을 다시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 조정에서는 다양한 해결책을 강구했다. 특히 부산은 왜구의 전초기지로서, 적 진로를 차단하고 시간을 지연시킬 필요가 있었다. 조선 숙종 때 이르러 전국적으로 일제히 산성을 축성하기 시작했다. 금정산성도 그 일환으로 기존의 산성을 보완 국내에서 가장 긴 18㎞로 축성한 것이다. 그 때가 숙종 29년 1703년이었다. 산성 축성 시기와 마을 형성시기가 비슷하게 맞아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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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정산에는 유달리 소나무가 많다. 한국에서 가장 먼저 재선충 소나무가 발생한 지역이기도 하다. 지금은 재선충이 거의 박멸된 상태다.

마을이 형성되고 사람들은 먹고 살 길을 마련해야 했다. 금정산성 안에 둘러싸진 마을은 기본적으로 농사를 지을 경작지가 절대 부족했다. 지금은 음식점이 주류를 이루고 있지만 당시는 주점이 생길 상황도 아니었다. 자연히 돈 될만한 것을 내다팔고 필요한 물건을 사와야 했다. 그게 누룩이었고, 그 누룩으로 만든 산성막걸리였다. 누룩은 산성마을의 특산물이었으며, 산성의 누룩제조가 동래와 부산의 쌀값을 좌우했을 정도라고 한다.


산성마을은 풍수적으로 옥녀금반형으로 옥녀가 소반을 받쳐 든 형상이다. 마을은 옥녀가 벌린 다리 사이에 자리하기 때문에 음기가 강하다고 한다. 그래서 여자들이 생활력이 강하고, 또 그렇게 해야만 잘 된다고 믿고 있다. 현재 마을의 주 생계수단인 음식점업 역시 여성들의 노동력을 많은 요구하는 일이다. 실제로 산성마을의 인구도 20대를 제외하고는 전 세대에서 여성들의 숫자가 훨씬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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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달리많은 소나무가 그 모양도 다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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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총 같이 생긴 소마무다.

그 역사의 마을을 뒤로하고 다시 하산이다. 산 위에서 다시 산성마을을 쳐다보니 산 능선이 마을을 포근하게 감싸고 있었다. 금정산은 많은 역사를 간직하고 말하려 하고 있지만 사람들이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듯했다. 그것을 정리하고 기록해서 금정산의 본모습을 후대들에게 전달하는 작업을 서둘러야 할 것 같다.


한편 부산시에서 몇 년 전에 금정산을 도립공원이나 국립공원으로 추진하기 위해 사유지를 조사한 적이 있었다. 그 결과 70% 가량이 사유지로 나타나 재산권 행사의 문제나 토지수용문제 등이 걸려 무산된 적이 있었다. 이런 문제로 인해 부산의 명산, 금정산이 제대로 관리, 보존되지 못하는 결정적인 문제점으로 지적됐다.

My name is Garden Park. First name Garden means.......

1 Comment

  1. 우성강남

    04.28,2010 at 3:50 오후

    금정산에 대하여 아주 좋은 글을 남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스크랩해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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