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마지막 왕 경순왕릉이 있는 곳은 어디일까?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경주에 있을 것 같은데 전혀 의외의 장소에 있다. 서울에서 승용차로 2시간 거리의 남한 최북단에 있는 경기도 연천에 있으며, 사적 제244호로 지정돼 있다. 신라의 여러 왕들 가운데 유일하게 경주를 벗어난 신라 왕릉이다. 경순왕릉은 연천 고랑포 나루터 뒤편의 남방한계선과 인접한 나지막한 구릉의 정상부에 유유히 흐르는 임진강을 바라보며 자리 잡고 있다.
경기도 연천에 있는 신라 마지막 왕 경순왕릉. 사적 제244호로 지정된 곳이다.
‘경순왕릉이 왜 이곳에 있을까’라는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경순왕은 이미 국운이 기운 신라를 고려에 그대로 갖다 바친 왕으로 알려져 있다. 얼핏 보면 한심하고 책임감 없고 겁 많은 왕으로 볼 수 있지만 당시 상황을 조금 들여다보면 꼭 그렇게 판단할 것은 아닌 듯하다.
경순왕은 927년 경애왕이 후백제 견훤의 습격으로 사망한 뒤 왕위에 올랐다. 경순왕이 왕위에 오를 당시에는 한반도가 후백제, 고려, 신라로 다시 후삼국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그 중 신라는 후백제의 잦은 침입과 지방 호족들의 군웅할거로 국가기능은 이미 마비상태였다. 민심도 신흥 강국인 고려로 기울어지자 경순왕은 무고한 백성들의 더 이상 희생을 막기 위해 신하들과 아들 일의 반대를 무릎 쓰고 고려 왕건에게 나라를 넘겨주고 왕위에서 스스로 물러났다. 이후 태자 일은 마의(麻衣)를 입고 풀뿌리와 나무껍질을 먹으며 보냈다고 하여 후에 마의태자라고 불렀다.
경순왕릉이 이곳에 있게 된 이유를 설명하는 안내판.
과연 경순왕의 이 선택이 옳았을까? 아니면 잘못된 판단이었을까? 많은 논란을 불렀다. 그 논란은 결국 실리와 명예의 문제로 귀결된다. 무너져가는 신라의 운명과 궤를 같이하며 많은 백성을 함께 장렬히 전사하는 명예를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백성들의 희생 없이 자신의 노후도 보장받는 실리를 택할 것인가의 문제였다. 경순왕은 후자, 실리를 택했다.
왕위를 스스로 물러난 경순왕은 태조 왕건의 딸 낙랑공주와 결혼하여 여러 자녀를 두며 왕위를 물러난 43년 후에 세상을 떠났다. 비보를 접한 신라의 후예들은 경주에 장례를 모시고자 했으나 고려 조정에서는 ‘왕의 구(柩)는 백리 밖으로 나갈 수 없다’고 하여 연천 고랑포 성거산에 묻히게 된 것이다. 고려의 도성은 개성이었기 때문에 연천에서 개성까지는 90리가 된다고 한다. 불과 30㎞남짓 되는 거리다.
경순왕릉 올라가는 길이다.
고려왕이 아닌 경순왕의 능은 사후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잊혀졌던 것을 1747년 조선 영조 23년 후손들이 왕릉 주변에서 묘지석을 발견함으로써 다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따라서 경순왕릉은 경주에 신라의 왕들과 형식면에서 다른 조선 후기의 양식을 띠고 있다.
1000여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남북이 대치하고 있는 연천에서 당시를 회상하면 묘한 생각이 연상된다. 국운이 다한 북한의 김정일이 백성들을 위해 과감히 국가와 민족의 이름으로 모든 걸 포기하고 남한과 통일하는 결단을 내린다면? 아마 경순왕보다 훨씬 더 평가받는 세계적인 지도자로 남지 않을까 싶다. 그럴 가능성은 현실적으로 0%에 가깝겠지만.
경순왕릉의 구조를 나타내는 안내판.
고랑포는 일제시대까지 한반도의 중심으로 굉장히 활발했던 해상 요충지로 알려져 있다. 일제시대에 가장 컸던 화신백화점의 분점이 고랑포에 있었을 정도라고 한다. 지금은 분단의 최북단 지역으로 군사보호시설이 98%에 이를 정도로 개발이 제한돼 있다. 정말 통일이 되면 임진강과 한탄강을 끼고 한반도 중심으로 가장 활발하게 개발될 지역이지 않을까 싶다.
경순왕릉 옆에 있는 신도비. 강가에 버려져 있던 것을 찾아 제자리에 뒀다. 글씨가 거의 지워져 보이지 않고 전체 글자 중에 겨우 12자만 알아볼 수 있을 정도라고 한다.
아일린
06.17,2010 at 9:03 오전
제 직계조상에 대한 상세 자료 감사합니다(여태 거기 계신지도 몰랐어요, 부끄럽…)
지도자의 현명한 분별력이 국민의 운명이나 행복과 직결되니 투표가 겁나고, 북한에도 행운의 여신이 머잖아 꼭 강림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