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은 자타가 공인하는 양반문화의 대표적인 도시로 꼽힌다. 왜, 언제부터 안동이 양반문화의 대표도시로 자리 잡았을까?
안동은 과거부터 ‘안동도호부’ 등이 있으면서 도시 규모는 컸지만 양반문화의 본류는 아니었다. 특히 고려시대까지는 더더욱 그랬다. 조선시대 들어서 사림의 본거지로 자리 잡으면서 안동이 양반도시로 자리 매김하게 된다.
안동에 있는 퇴계종택 입구의 모습. 안동에는 전국에서 가장 많은 고택이 잘 보존돼 있다.
안동은 사림의 본고장으로 중앙에 진출하지 못한 지방유림들의 핵심도시로 부각했다. 조선의 개국공신들은 전부 훈구세력으로서 당시 조선 개국에 반대 입장이었던 사림은 중앙으로 진출하지 못한 채 지방에 머물러 있었다. 그대표적인 도시가 바로 안동이었고, 안동은 사림의 본거지였던 셈이다. 지방에서 학문을 쌓고 세력을 키운 사림은 과거(科擧)를 통해 중앙으로 진출해 더욱 세력을 넓혀 갔다.
그러다 원래 중앙에 있던 훈구세력과 부딪힌 사건이 을사사화, 기묘사화 등의 당쟁이었다. 이 때 많은 사림이 죽임을 당해 일부는 다시 낙향하기도 했지만 이미 사림은 무시할 수 없는 조선의 정치세력으로 성장해 있었다.
퇴계종택에 대한 설명.
그러나 단순히 사림의 본고장이라고 해서 양반도시가 되지는 않는다. 안동은 전국의 어디에서 볼 수 없는 많은 종택들이 그대로 보존돼 있다. 사실은 여기에 양반문화의 핵심이 있는 것이다.
안동을 양반문화라고 하지만 서민문화의 상징인 하회탈로도 유명하다. 양반과 하회탈, 이는 안동이 양반문화와 도시로서 존재하기 위한 가장 큰문화적 요소다. 안동의 서민들은 하회탈을 쓰고 양반문화를 통렬히 비꼬고, 풍자를 통해 스트레스를 해소했다. 일종의 ‘하회탈 카타르시스’를 즐겼던 것이다. 양반들도 그냥 “허허” 웃으며 같이 즐겼다.
양반들은 그런 서민을 박해했다면 더 이상 안동은 존재하지 않았다. 하회탈을 통한 서민들의 소리를 안동의 양반들은 문화의 한 형태로 인정했다. 아마 후덕한 퇴계가 그랬던 것처럼.
서민들은 양반의 그런 아량을 존경하게 되었고, 양반들은 서민들의 문화를 인정하며 서로 공존했다.
퇴계종택의 내부 모습. 우리 옛날 전통식 가옥 그대로다. 문 위에 길게 붙은 문종이에 퇴계 후손들의 이름이 하나씩 적혀 있다.
안동은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 등과 현대에 들어선 한국전쟁까지 많은 격전을 치르면서도 전쟁의 주역이었던 서민들은 안동의 양반문화를 인정하고 보호해주려 했다. 그 결과가 지금의 안동, 즉 한국최고의 종택을 보존한 도시가 되고, 양반문화의 대표적 도시로 거듭날 수 있었던 것이다. 문화의 공존은 존경을 낳고 서로 발전하는 교훈을 안동을 통해서 볼 수 있다.
無影塔
06.22,2010 at 2:58 오후
추로지향의 안동
선비문화의 본고장
안동하면 떠오르는
안동양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