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은 한국의 대표적인 양반문화를 간직한 곳으로 유명하다. 최근엔 하회마을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받아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다’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한국의 고택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곳이 안동이기도 하다. 종가는 고택을 낳고, 고택은 문화를 남긴다. 고택이 남긴 안동문화는 퇴계 이황이 만든 도산서원과 더불어 조선시대 유교문화의 본산역할을 톡톡히 했다. 도산서원 앞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 중간에 있는 시사단은 지방에서 최초로, 유일하게 과거시험을 치른 곳으로도 알려진 곳이다. 과거는 걸어갈 수 있었지만 지금은 안동댐 건설로 배를 타고 건너야 한다.
지방에서 최초로 유일하게 과거를 치른 시사단. 안동댐 건설로 침수돼 지반을 올렸다.
도산서원은 해동주자라 불리는 퇴계 선생이 서당을 짓고 유생들을 교육하며 학문을 쌓던 곳이다. 도산서당은 퇴계 선생이 직접 설계하고 지었다고 한다. 퇴계 사후 6년 뒤 퇴계 선생의 뜻을 기리고 유지를 받들기 위해 도산서원으로 크게 지었다. 1969년 사적 제170호로 지정된 도산서원은 구한말 대원군이 전국의 서원철폐운동을 벌였을 때에도 영주의 소수서원․숭양서원 등과 더불어 정리대상에서 제외된 서원이기도 하다.
도산서원의 전경. 도산서원을 들어서면 오른쪽으로 퇴계 선생이 기거했던 도산서당이 있다.
퇴계 선생이 제자들에게 강론을 하던 곳이 보물 제210호로 지정된 전교당(典敎堂)이다. 현판은 조선시대 명필가 한석봉이 직접 썼다. 또 퇴계 선생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 사당인 상덕사는 보물 제211호로 지정돼 있다. 매년 봄․가을(음력 2월과 8월) 두 차례 이곳에서 향사를 지낸다.
퇴계 선생이 직접 제자들을 가르치며강론을 나누던 곳, 전교당이다.’도산서원’ 현판은 조선시대 명필 한석봉이 직접 썼다.
퇴계 선생이 거처하던 완락재와 제자들이 기숙하며 공부하던 농운정사가 있다. 농운정사는 제자들에게 공부를 열심히 하게 하기 위해 건물 모양을 한자 工 자로 지었다. 그리고 책을 보관하던 광명실(현판은 퇴계 선생 친필), 서원에서 찍어낸 책의 목판본을 보관하던 장소인 장판각 등이 있다.
제자들의 기숙사 농운정사.공부에 열심히 매진하라고 工자로 지은 건물이다.
농운정사.
도산서원 조금 못 가서 이육사문학관도 있다. 육사는 퇴계 선생의 14대손이다. 육사는 안동 생가의 들판에서 눈 내린 날 강물을 바라보며 그의 유명한 ‘광야’를 지었다고 한다. 문학관은 육사의 유일한 혈육인 친딸 이옥비 여사가 지키고 있다. 그녀도 일흔을 훌쩍 넘겼다.
퇴계의 14대손 이육사문학관이 도산서원 멀지 않은 곳에 있다. 학생들이 많이 찾는 곳이며 얼마 지나지 않아 이육사 생가터도 있다.
이육사문학관에서 안동쪽으로 조금 가면 퇴계종택이 있다. 퇴계종택은 그의 후손들이 안동댐이 수몰된 후 한 곳으로 건립한 건물들이다. 육사문학관과 퇴계종택 중간쯤에 있는 건지산 끝자락에 퇴계선생의 묘지와 그 한참 아래에 그의 며느리가 있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안동 하회마을에 가면 꼭 같이 둘러볼 만한 곳이 바로 도산서원과 그 주변이다.
퇴계 종택도 있다.
도산서원에 있는 광명실에 대한 설명과 광명실.
퇴계 선생이 기거하던 도산서당에 대한 설명과 도산서당.
도산서당에서 식수로 사용하던 우물의 흔적을 남겼다.
퇴계 선생이 도산서원 내 우물을 만들어 연꽃을 키웠던 정우당.
도산서원 내엔 유난히 매화가 많다. 정원을 아예 매화원이라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