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백산과 태백산이 만나는 영월의 아늑한 산자락, 따뜻한 햇볕이 드는 양지 바른 그곳에 예사롭지 않은 묘지 한 기가 있다. 보기에도 여느 묘 같지 않다. 뭔가 한 세월을 풍미한 인물의 묘지 같다. 묘지의 비석엔 ‘詩仙蘭皐金炳淵之墓(시선난고김병연지묘)’라고 새겨져 있다. 바로 우리에게 방랑시인으로 널리 알려진 김삿갓의 묘지였다.
김삿갓, 우리에게 방랑시인으로만 알려져 있지 실제 그가 어디서 태어나 왜 영월에서 생활했으며, 어떻게 자랐고, 무슨 생활을 했는지에 대해서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30여 년간의 방랑생활 포함 57년의 생애 중 20년 가까이 생활한 영월 생가터에서 그가 다닌 길을 통해 그의 삶의 궤적을 따라 가보자.
영월 문화해설사인 ‘마대산김삿갓’ 최상식씨가 김삿갓생가터로 안내하기 위해 앞장 서 가는 모습이 영락없는 그 옛날 방랑시인 김삿갓의 재현이다.
그는 여러 설이 있지만 경기도 양주에서 1807년 태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왜 영월의 첩첩산중 골짜기에 생가가 있고, 묘지는 또 이곳에 있을까?
그의 삶을 얘기하기 위해선 우선, 순조 11년(1811년)에 발생한 ‘홍경래의 난’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당시 그의 나이 5세였다. 그의 할아버지는 평북 선천부사 겸 방어사 김익순이다. 선천부사와 방어사는 지금으로 말하면, 도지사와 도경찰청장 정도 되는 자리다. 지방의 행정과 방어를 도맡았던 할아버지는 반역자 홍경래에게 선듯 항복해 버린다. 정확한 상황이야 논외로 치고, 적에게 ‘항복’한 사실은 전후 상황을 설명할 필요도 없이 대역죄인으로 취급된다. 당연히 참수형을 당하고 가문은 멸문지화 된다. 그가 방랑생활을 하게 된 결정적 계기가 되는 사건이다.
그의 가족은 풍비박산 났다. 부모와 동생, 형과 그는 따로 흩어져 피신했다. 그 뒤 멸족에서 폐족으로 가문의 죄가 한 등급 감해지자 겨우 부모와 함께 생활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나이 9세 때인 1815년 아버지는 화병으로 사망했다. 폐족자라는 멸시의 눈을 피해 어머니는 가족들을 데리고 영월로 이주해서 삶의 터전을 마련했다. 그곳이 지금 생가터와 묘지가 있는 장소다.
매년 김삿갓길 걷기 행사마다 조성하는 곡동천 위의 섶다리. 그 위로 마대산김삿갓이 걷고 있다.
김삿갓문학관에서 생가터가 있는 곳까지는 2㎞남짓 된다. 문학관에서는 매년 10월 김삿갓길 재현 행사를 가진다. 올해는 김삿갓 탄생 203주년이었다. 영월 출신 명사 203명을 초청, 삿갓과 도포를 갖춰 입고 걷기 행사를 벌였다. 그들이 걸었던 길을 따라 문학관에서 묘지를 거쳐 생가터까지 김삿갓을 생각하며 걷기로 했다.
문학관에서 바라보이는 그의 묘지와 생가터는 영락없는 명당터였다. 왼쪽은 태백산의 끝자락이며 오른쪽은 소백산 시발점으로, 양백지간(兩百之間) 유지앵소(柳枝鶯巢)의 형국이라고 한다. 버드나무 가지에 있는 꾀꼬리 집이라는 말이다. 정감록에 기록된 십승지 중에 한 곳으로 에너지가 함축된 곳이라고 풍수지리적으로 설명한다.
마대산 정상에서 저 멀리 유유히 흐르는 남한강을 바라보고 있는 김삿갓. 방랑시인 김삿갓도 이곳에 올라 많은 상념에 잠겼을 것이다.
김삿갓은 영월 골짜기에서 다른 사람의 눈을 피해 화전민 같은 생활을 시작했다. 다행히 그의 어머니는 양반출신이었기 때문에 김삿갓에게 어릴 때부터 사서삼경을 가르쳤다.
어둠골로 올라 신선골로 내려와
그의 생가터 뒤로는 남한강이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마대산(1071m)이 있다. 앞으로는 남한강으로 흘러가는 곡동천이 있다. 마대산과 곡동천이 놀이터였고 주요 생활터전이었다. 영월장을 보기 위해서 마대산을 넘어야 한다.
‘마대산김삿갓’이 정상에서 앞에 흐르는 남한강을 보며 설명하고 있다.
그는 마대산 자락에 살던 어린 시절 비상한 머리로 사서삼경을 독파했던 것으로 전한다. 산골짜기에 사는 어린 소년은 어머니를 따라 영월장으로 가는 길목인 마대산 정상에 올라 남한강을 한눈에 내려다보며 호연지기를 키웠을 것이다. 그리고 ‘왜 내가 이곳에 살아야 하는가?’라는 의문과 동시에 ‘언젠가 세상에 뜻을 펼칠 기회가 올 것’이라는 포부도 충분히 가졌을 법하다.
그의 비상한 재주와 천재성은 그를 영월의 산골짜기에 살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그가 20세 되던 해 영월관청에서 실시하는 백일장에 응시했다. 그의 집 뒤 마대산을 넘어 평소 쌓았던 실력을 발휘하기 위해 영월관가로 향했다. 시제가 ‘論鄭嘉山忠節死嘆金益淳罪通于天(논정가산충절사탄김익순죄통우천)’이었다. ‘홍경래의 난 때 가산군수 정시의 충절을 논하고 김익순의 하늘에 사무치는 죄를 한탄하라’는 내용이다. 그의 할아버지를 통렬히 비판하는 내용으로 장원급제를 했다. 이 때까지 김익순이 그의 할아버지라는 사실을 몰랐다고 한다. 기쁜 마음으로 집에 돌아온 그는 어머니를 통해 김익순이 그의 할아버지라는 사실을 듣고 충격을 받아 방랑생활을 시작했다고 알려져 있다.
영월군 김삿갓면에 있는 김삿갓 시공원. 그곳에 있는 김삿갓 시비와 어린 동상.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과연 20세나 되는 가장이 그의 가족 내력을 몰랐을 리 없다. 과거와 그에 준하는 시험을 보기 위해선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옛날에도 어느 집안에 누구인지 가족관계를 반드시 기재해야 한다. 가족관계를 가명으로 작성해서 장원급제 했지만 폐족인 자신의 신분을 노출시킬 수 없었기 때문에 은둔이나 방랑했을 가능성이 없지 않다.
허위로 작성한 가족관계에 대한 양심의 가책과 조상에 대한 원망, 폐쇄된 양반사회에 대한 선망과 경멸 등 복합적인 감정이 작용했을 것이다.
그는 영월에서 신분을 속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한양으로 향했다. 벼슬길을 모색하기 위해 가명으로 권문세가의 자제들과 교류도 시도했다. 그러나 폐족으로서 도저히 입신양명은 어렵다는 사실을 절실히 깨닫고 2년 만에 낙향해 버린다. 능력은 있지만 폐족이라는 자신의 출신성분과 그로 인해 앞길이 막혀버린 좌절감과 울분 등 영월에서 겪었던 원망과 선망과 경멸 등의 감정에 더해졌을 것으로 보인다.
김삿갓면에 있는 김삿갓묘역.
처자식을 내버려두고 혈혈단신 빈털터리로 집을 떠난 김삿갓은 정해진 곳도 오라는 곳도 없이 구름 따라 바람 따라 발길 닿는 대로 전국을 떠돌아다녔다. 그게 22세 되던 해부터였다. 세상만사 마음대로 되지 않으니 그렇고 그런 세상 되는 대로 살자는, 그런 한탄하는 신세를 시로 읊었다. 좌절감을 절실히 엿볼 수 있는 대표적인 작품이 ‘化去竹(화거죽, 되는 대로)’이다.
‘이대로 저대로 되어가는 대로 / 바람 치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 밥이면 밥 죽이면 죽 생기는 이대로 / 옳으면 옳고 그르면 그르고 붙이는 저대로 / 손님 접대는 가세대로 / 시정 매매는 세월대로 / 만사가 안 되네 내 마음대로 / 그렇고 그렇고 그런 세상 지나가는 대로’
문학관에서 출발해서 묘지에 도착, 한동안 과거로 돌아간 듯 그의 인생에 대한 상념에 빠져 있었다. 늦가을 하늘은 더더욱 김삿갓의 삶만큼이나 을씨년스러웠다. 울긋불긋 단풍나무들은 이제 쭈글쭈글해져 가지를 앙상하게 드러내기 시작했다. 길 위로는 떨어진 낙엽으로 가득했다. 길을 안내한 영월 문화해설사 최상락씨는 “묘지터는 겨울에 해가 가장 빨리 떠서 가장 늦게까지 머무는 자리”라고 명당임을 다시 한번 강조했다. 최씨는 항상 김삿갓 복장으로 김삿갓길을 안내하는 자칭 ‘마대산 김삿갓’이다. 이젠 타칭이 된 지도 제법 오래됐다고 한다.
생가터 복원으로 탐방객 줄이어
묘지에서 마대산 생가터로 향해 걸었다. 마을 성황당이 식수 옆에 자리 잡고 있다. 지나는 탐방객들은 삼삼오오 절을 했다. 올라가는 길은 차가 한 대 지나갈 수 있을 만한 널찍한 임도다. ‘마대산 김삿갓’ 최씨의 죽장에 도포와 갓을 쓰고, 괴나리봇짐에 짚신과 호리병을 묶은 모습은 영락없는 김삿갓이었다. 늦가을의 고즈넉한 길과 딱 어울렸다.
김삿갓생가터를 찾은 방문객들의 사진을 찍어주고 있는 마대산김삿갓. 생가는 지금 마대산김삿갓이 살고 있는 집이다.
최씨는 영월군에서 복원한 김삿갓 생가터에 살고 있다. ‘현대판 김삿갓’인 셈이고, 지금 그의 집으로 가고 있는 것이다. 당시 김삿갓은 화전민 생활을 했으니, 제법 산 중턱으로 올라야 했다. 산이 그의 집이었고, 생활터전이었다. 어쩌면 좌절을 느끼기 전에 산 그 자체에 취해 있었는지 모른다. 그의 시에도 산을 예찬한 작품이 자주 나온다. ‘看山(간산, 산구경)‘이라는 시다.
‘게으른 말을 타니 산 구경하기가 더 좋아 / 느리다고 채찍 들어 때리지도 않네 / 바위 사이로 겨우 오솔길 하나 / 연기 나는 곳에는 초가 서너 채 // 꽃이 예쁘게 피었으니 봄이 왔는지 / 시냇물소리 들리니 비는 지나갔는가 / 물소리 들으며, 돌아갈 것을 까맣게 잊고 있는데 / 하인이 말하기를 해 저물어 간다고 하네’
어느 봄날 산에 올라 자연의 풍광에 흠뻑 빠진 자신의 심성을 그대로 읊은 듯하다. 아마 그의 생가터를 떠올리며 지은 시 같기도 하다. 산을 노래하면 그의 고향에 대한 향수가 조금은 달래졌을까? 그의 울분이 조금 삭혀졌을까?
그는 특히 금강산을 많이 찾은 것으로 알려졌다. 김삿갓은 고산자 김정호와 동시대에 살았고, 비슷한 연배로 추정된다. 전국을 누빈 김정호와 전국을 방랑한 김삿갓이 금강산에서 한번 만났을지도 모를 일이다. 김삿갓은 봄․가을마다 금강산을 찾아 그 절경에 흠뻑 취했다고 한다.
‘松松栢栢岩岩廻(송송백백암암회) / 水水山山處處奇(수수산산처처기)’
‘소나무와 소나무, 잣나무와 잣나무, 바위와 바위를 돌아가니 / 물에 물, 산에 산, 곳곳이 절경이로다!’
자연에 식히던 그의 울분은 급기야 선비에 대한 조소와 해학으로까지 이어졌다. 대표적인 작품이 ‘辱說某書堂(욕설모서당, 서당을 욕하다)’이다.
‘書堂來早知(서당내조지) / 房中皆尊物(방중개존물) / 生徒諸未十(생도제미십) / 先生來不謁(선생내불알)’
‘서당에 일찍 와서 보니 / 방안에는 모두 존귀한 분들만 있고 / 생도는 모두 열 명도 못되는데 / 훈장은 나와 보지도 않더라’
방랑생활 중 서당 훈장에게 홀대를 받자 즉석에서 걸쭉한 육담시를 지어 훈장을 조롱했다. 발음 나는 대로 읽어도 욕이고, 그 뜻도 또한 욕이다.
마대산 정상에서 호연지기 키웠을 듯
김삿갓 생가터 올라가는 길에 두 갈래 길이 나왔다. 생가터가 있는 왼쪽은 어둠골이고, 오른쪽은 신선골이다. 왼쪽으로 250년 이상 된 밤나무를 지나 그의 생가터에 도착했다. 이미 탐방객들이 몇 명 와 있었다. 생가 입구 안내판에는 ‘이곳은 조선 말엽 전국을 바람처럼 떠돌며 날카로운 풍자로 상류사회를 희롱하고, 재치와 해학으로 서민의 애환을 읊은 방랑시인 김삿갓이 생전에 거주하였던 곳이다. (후략)’ 라고 적혀 있다.
김삿갓생가터 바로 밑에 있는 250년 이상 됐다고 하는 밤나무.
집 주변은 고염나무, 돌배나무 등이 그대로 자라고 있다. ‘마대산 김삿갓’ 최씨는 “모두 250년 이상 된 나무들”이라고 했다. 나무들에게 ‘생전의 김삿갓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느냐’고 속으로 물었다. 묵묵부답이다. ‘……’
김삿갓이 영월로 다녔을 마대산옛길로 올라가보기로 했다. 생가터의 고도가 550m 가량 됐다. 마대산 정상이 1071m니, 500m 남짓 고도를 높여야 한다. 죽장에 도포입고 삿갓 쓴 김삿갓 최씨도 흔쾌히 동의했다. 마대산 올라가는 ‘김삿갓등산로’는 지금도 화전민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늦가을 을씨년스런 분위기와 마찬가지로 좁은 공간에 다랑이로 논밭을 일궜던 자취는 한눈에 알아볼 정도였다.
마대산 올라가는 길에 낙엽송이 죽죽 뻗어 있다. 시원한 느낌이다. 최씨는 “낙엽송이 많은 산은 화전민이 살았던 흔적”이라며 “화전민을 내보내고 다시 들어오지 못하도록 성장이 빠른 낙엽송을 특히 많이 심었다”고 말했다. 가장 대표적인 지역이 소백산이라고 덧붙였다. 그러고 보니 죽령옛길 근처에 유난히 낙엽송이 많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가파른 산길을 올라 마대산 정상에 섰다. 굽이져 흐르는 남한강의 강줄기가 길게 펼쳐져 있었다. 동북쪽으로는 소백산 정상도 희미하게 보이는 듯했다. 마대산 김삿갓이 정상 바위에 걸터앉았다. 실제 김삿갓은 이곳에서 무슨 상념에 젖었을까?
그의 시 ‘自嘆(자탄)’이다.
‘높고 높은 하늘인데 머리 들기 어렵고 / 넓고 넓은 땅이건만 다리 뻗을 곳조차 없네 / 새벽 누각에 오르는 것은 달구경을 위함이 아니고 / 사흘이나 굶는 것은 신선이 되고자 함이 아니네’
정해진 곳도 없으려니와 오라는 곳도 없이 떠난 유랑길, 구름 따라 물결 따라 발길 닿는 대로 떠도는 신세, 행장이라곤 괴나리봇짐이 전부였다. 스스로 읊은 대로 ‘빈 배처럼 가쁜한’ 삿갓 쓰고 죽장 짚고 괴나리봇짐 하나 짊어진 것이 다였다.
어느 날 지나가는 사람이 특이한 복장을 한 김삿갓에게 물었다. “왜 얼굴도 보이지 않게 그렇게 큰 삿갓을 쓰고 다니시오?” “하늘 아래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고, 세상 보기 부끄러워 그러오”라고 대답했다고 전한다.
정상을 밟고 처녀봉을 거쳐 신선골로 내려왔다. 올라갈 때는 어둠골이었는데 하산길은 신선골이다. 김삿갓의 안타까운 삶 때문일까? 신선골로 내려왔는데도 별로 신선이 된 듯한 기분이 들지 않았다.
마대산김삿갓이 삿갓 쓰고 도포 입은 채로 생가터 뒤에 있는 마대산을 향해 오르고 있다.
‘정처없이 떠도는 내 삿갓 빈 배와 같고 / 한번 쓰니 사십 평생 다 가는구나 / 소먹이 아이들이 들에 나서며 쉽게 걸치고 / 고기잡이 노인 갈매기 벗 삼는 것일세 // 술 취하면 구경하던 꽃나무에 걸어놓고 / 흥 오르면 달뜬 누각에도 걸치고 오르네 / 세상사람 의관은 겉모습 치장뿐이지만 / 내 삿갓은 비바람 가득 몰아쳐도 홀로 걱정 없어라’
삿갓을 노래한 그의 시 ‘笠(립)’이다. 신선골로 내려오는 김삿갓. 그렇다, 그는 이미 시선(詩仙)이 된 신선이었다. 세상에 꽃을 피우지 못한 시선이었다. 죽어서 영원히 꽃을 피운 시선이었다. 그는 세상에 좌절해서 울분을 터뜨렸지만 결과적으로 ‘자연으로 돌아간’ 자연주의자 혹은 도교주의자의 성향을 깊게 지녔던 것으로 보인다.
떨어지는 낙엽을 보며 생명의 환희로 승화시킨 ‘深秋落葉(가을낙엽)’에서 보면 그의 서정성 짙은 자연주의자와 도교주의적 성향을 짙게 엿볼 수 있다.
‘깊은 가을 나뭇잎 하나 / 모진 서리에 병들어 / 미풍에 떨어지니 / 모진 서리 때문인가 / 실바람 때문인가’
좌절로 끝나지 않은 그의 삶을 느껴지는 듯하다. 지금 영월 ‘김삿갓길’에 가면 그가 시선이 돼서 아직 길 위에 살아있음을 절실히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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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7,2010 at 10:48 오후
이렇게 살아도 펺치 않고 저렇게 살아도 펺지 않았다면
가족과 함께 살았어야 하지 않을런지요.
기발한 시가 많고 스스로는 세상을 두루 누리며 살았는지 모르지만,
시선이라고 까지는 할만한 시가 없는것 같습니다.
인간적으로는 저도 괘 좋아하는 옛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