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해를 마무리해야 할 때가 왔다. 초겨울의 정취를 만끽하면서 혼자만의 사색과 명상을 즐길 만한 고즈넉한 산책로가 어디 없을까? 단풍잎 지는 스산한 바람이 부는 을씨년스런 계절엔 평탄한 길보다는 조금 땀을 흘리면서 걷는 길이 제격이 아닐까 싶다.
전남 순천의 조계산 도립공원 양옆으로 천년고찰 선암사와 송광사가 자리 잡고 있다. 송광사와 선암사로 접어드는 길은 둘 다 이미 ‘한국의 아름다운 길’로 대상을 받은 족보 있는 길이다. 더욱이 조계산 일원은 사적 및 명승 제8호로 지정(1998년 12월23일)됐다가 문화재의 효율적 관리를 위해 송광사와 선암사 경내는 사적으로, 송광사와 선암사를 둘러싼 조계산 송광사․선암사 일원은 명승지역으로 재분류됐다. 절을 포함한 산 자체가 사적 2곳(제506호와 507호), 명승 1곳(제65호)으로 지정된 곳은 한국에서 몇 군데 없다. 그만큼 유서 깊고 경관이 뛰어나다는 얘기다.
선암사 뒤에 있는 편백나무숲에는 겨울에도 걷는 기분은 남다르다. 한해를 마무리하는 마음으로 그 숲을 한번 걸어보라. 상큼하고 상쾌한 분위기에 빠질 것이다.
순천시에서는 최근 걷기붐에 따라 ‘남도삼백리길’을 조성했다. 남도삼백리의 제9 코스가 조계산의 선암사~송광사에 이르는 8.4㎞ ‘천년불심길’이다. 천년불심길이라고 부르기 전에는 ‘조계산 굴목재길’이라고 불렀다. 길을 안내한 순천시 도립공원 탐방관리소에 있는 박태현씨는 “선암사만 걸어도 좋고 조금 부족하다면 조계산 능선 중간지점을 거쳐 송광사까지 내려간다 해도 배낭 없이 빈손으로 출발해도 전혀 위험하지 않은 길이 바로 이 길”이라고 자랑했다.
고려시대 조성했다는 연못인 선암사 선인당.
<동국여지승람> 권40에 고려 명종 때 입만 열면 시가 되고 문장이 되었다는 문장가 김극기(金克己)가 노래한 ‘선암사’란 시가 있다.
‘적적한 골짜기 안에 절 / 쓸쓸한 숲 아래 스님 / 세간정분 다 떨치고서 / 슬기로운 물만 정히 맑게 고였네. / (중략) / 나 여기 와서 구슬단지의 얼음을 마주하듯 / 들뜬 근심 다 지우네.’
선암사 경내에 있는 천연기념물 제488호인 선암사 선암매.
2010년 경인년(庚寅年)을 정리하는 마음으로 ‘들뜬 근심 다 지우기 위해’ 김극기가 노래한 선암사에서 출발하기로 했다. ‘한국의 아름다운 길’인 선암사 올라가는 길은 계곡을 따라 걷는다.
길옆에 우뚝 선 장승을 만났다. 마을 어귀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장승이지만 이곳의 장승은 특이했다. 둘 다 남성 모양을 하고 있다. 중성일까? 마을에 있는 장승과 차별하기 위해 만들었을까? 아마 장승이 마을 어귀에 있듯이 이제부터 절로 들어온다는 의미이지 않을까 싶다.
선암사 대웅전 올라가는 길 주변으로 야생녹차밭이 있다.
장승이 있는 불과 10m 남짓 위로는 보물 제400호인 승선교(昇仙橋)가 있다. 작은 승선교는 1700년 전후 건립 당시 그대로라고 한다. 300여년의 세월을 견디면서 선계로 오르는 전설을 전하고 있는 듯하다. 신선이 내려서고 신선이 승천하는 신비경의 그 전설을. 조계산 일대는 선암사, 승선교, 강선루, 임선교 등 선계 일색이다.
편백나무숲 바로 아래에 있는 자연체험장.
선암사 경내를 안내한 문화해설사 조인숙씨는 “선암사는 초봄엔 시각이, 늦가을엔 후각이 말로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상쾌하다”고 한마디로 표현했다. 초봄엔 천연기념물 제488호인 선암매를 비롯 왕매화가 경내를 가득 채워 장관이고, 늦가을엔 은목서와 금목서의 꽃향기가 조계산 전체를 뒤덮을 정도로 풍긴다. 하지만 지금은 초겨울이다. 모든 풍경은 사라지고 채도 낮은 낙엽만 길을 울긋불긋 수놓고 있을 뿐이다.
선암사에서 송광사로 넘어가는 조계산 굴목재.
낙엽은 무더웠던 여름의 사연을 전하는 동시에 겨울을 알리는 증표다. 바람에 흩날리는 낙엽은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니며 서로의 사연을 주고받는 듯하다. 이젠 가지에 달린 잎도 거의 없다. 조계산은 단풍이 무성한 참나무 활엽수가 군락을 이룬 대표적인 산이다. 낙엽이 많을 수밖에 없고 단풍이 아름다운 산으로 손꼽힌다. 더욱이 조계산은 산세가 순후하고 토질이 두터운 육산에 가깝다. 숲이 울창하고 계곡의 수량이 풍부하여 동식물이 잘 자라는 생명의 산이다.
굴목재 바로 직전엔 앙상한 가지만 드러낸 참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
조계산은 무성한 참나무로 여름엔 하늘을 볼 수 없을 정도로 시원한 느낌을 준다. 하지만 그 잎들은 자연의 섭리에 따라 앙상하게 가지만 드러내고 있다. 참나무를 지나면 대규모 편백나무숲이 기다리고 있다. 편백나무는 항암작용을 일으키는 피톤치드를 가장 많이 방출하는 수종이다. 몇 년 전 실험으로 밝혀진 사실이다.
송광사로 넘어가는 길은 참나무 낙엽이 길을 덮고 있어 더욱 푹신한 느낌을 준다.
편백나무숲 사이로 들어섰다. 활엽수와는 또 다른 분위기다. 침엽수는 사시사철 푸르름을 유지한다. 을씨년스럽긴 하지만 그래도 생동감이 느껴진다. 평일인데도 많은 사람들이 편백나무숲의 피톤치드를 즐겼다.
편백나무숲이 끝나자마자 당단풍, 쪽동백, 층층나무 등이 모습을 드러냈다. 한국의 대표적인 수종인 소나무가 오히려 찾기 힘들 정도다. 길 자체는 등산로와 별반 다르지 않다. 그 길을 따라 송광사로 간다.
송광사 옆으로 지나고 있다.
큰굴목재까지는 조금 가파른 길이지만 이 고갯길만 지나면 무난하다. 조계산에 굴목재는 여러 곳 있다. 굴목재의 유래는 여러 설이 있다. 첫째는 일제시대 지하로 ‘굴’로 뚫릴 ‘목’이라 하여 굴목재라 했다는 설이다. 지금 실제로 좌우로 주암댐과 상사댐을 연결하는 수로가 지하로 뚫려 있다. 그러나 일부 학자는 이 설은 원래 지명과 전혀 무관하다고 한다. 어원의 유래로 ‘골짜기를 가로막고 있는 목재’란 뜻의 골목재나 수백 년 동안 조상들이 사용해온 ‘굴맥이재’로 사용해야 옳다고 주장한다.
그 큰굴목재에서 10여분 걸어가면 조계산의 명물 보리밥집이 나온다. 굳이 여기까지 온 것도 바로 이 보리밥집 때문이다. 조계산을 빈손으로 올라도 전혀 걱정하지 않아도 될 이유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송광사 초입의 소나무 군락.
송광사로 내려가는 길은 전형적인 초겨울의 풍취를 즐길 수 있다. 이 길부터는 참나무 군락이 서서히 적어지고 소나무가 제대로 모습을 드러낸다. 송광사가 가까워질수록 기품 있는 소나무들이 눈에 자주 띈다.
송광(松廣)이란 이름도 소나무가 널려서 유래했다고 한다. 송광사는 조계종의 발상지이며, 한국 선(禪)수행의 본산으로 불린다. 그 길은 사색과 명상하기에 안성맞춤이다. 2010년 한 해를 돌아보며 의미를 되찾는 12월이다. 길을 걸으며 생각에 잠겨보자. 그리고 다가올 2011년 신묘년을 준비하자.
선암사 들어가기 전에 있는 보물 제400호 승선교. 선암사 주변엔 전부 선자가 붙은 지명들 뿐이다.
知 命
12.18,2010 at 12:55 오후
잘보고 여러분들에게 보이려 담아 갑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