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은 백제 무왕시절의 도성 익산과 더불어 세계문화유산 우선 등재지역으로 지정된 곳이다. 문화재청은 2012년이나 2013년쯤 유네스코에 세계문화유산으로 신청할 예정이다. 우리나라 산성축성술의 전형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산성이기도 하다. 남한산성의 지리적 여건을 보고 <여지도서>는 ‘天作之城(천작지성)’이라 했다. 가운데는 평평하고 바깥은 험하고 형세가 웅장하여 마치 산꼭대기에 관을 쓴 것 같은 형상이라는 말이다. <택리지>에서도 ‘남한산성은 안쪽은 낮고 얕으나 바깥쪽은 높고 험하여 청이 처음 왔을 때 병기라고는 날도 대지 못했고, 병자호란 때도 끝내 성을 함락하지 못했다. 그런데 인조가 성에서 내려온 것은 다만 양식이 적고 강화가 함락된 때문이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올해 초 완공한 남한산성 행궁터. 일반에 제한개방하고 있다.
그 남한산성이 해방 이후 방치돼 있다, 1971년 도립공원으로 지정된 이후 1975년부터 점차 성곽복원이 이뤄졌다. 1997년 성곽 5.1㎞가 복원되면서 남한산성의 원래 모습을 찾기 시작했다. 2010년엔 남한산성 전체 성곽을 연결시켰고, 2011년 올해엔 행궁이 완공되면서 완전한 모습을 되찾았다.
남한산성은 천혜의 요새로 꼽힌다.
외성과 옹성을 제외한 본성의 둘레만 총 7545m에 이르는 성곽둘레길을 도립공원 관리사무소와 성남시, 경기도 경기문화재단 등에서 각각 나름대로 길을 조성하고 있다. 경기문화재단은 문화체육관광부에 의해 ‘이야기가 있는 문화생태탐방로’로 선정된 남한산성길을 2개 코스로 사업을 진행시켰다. 1개 코스는 몽촌토성~남한산성에 이르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남한산성 성곽둘레길이다. 길 조성사업은 이미 끝냈고, 5월 중순쯤 남한산성 성곽길에 이정표와 안내판 설치 등을 끝냈다.
남한산성 성곽길 공사를 끝냈다.
남한산성은 행정구역상으로 서울, 하남, 광주, 성남 등 4개 시에 걸쳐 있다. 찾아오는 등산객들이 당연히 많을 수밖에 없다. 더욱이 남문으로 올라가는 입구엔 유원지가 있어 등산객뿐만 아니라 유람객까지 찾아 인산인해를 이루는 실정이다. 2000년대 초 경기도 조사로 방문객이 연 200만 명을 넘었다고 발표했다. 지금은 어림짐작으로 연 400만~500만 명이 찾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단위면적당 방문객으로 환산하면 전국 최고 수준이다. 남한산성의 면적은 36.45㎢. 지리산이 440㎢다. 지리산의 10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지만 방문객은 거의 2배 수준에 이른다.
남한산성을 찾는 탐방객을 단일 면적으로 우리나라 산에서 가장 많은 규모다.
그렇게 많이 찾는 남한산성을 성곽을 따라 한번 걸어보자. 4대문 환주는 대략 8㎞ 남짓 된다. 외성과 옹성을 제외한 본성의 둘레만 7.5㎞지만 성곽을 조금 둘러가는 길이 있기 때문에 조금 더 길다고 보면 된다.
남문에서 올라간다. 남문은 지화문(至和門)이다. 남한산성 4대문 중에 유일하게 현판 글씨가 남아 있는 문이기도 하다. 조선 정조 3년 성곽을 개보수 할 때 지화문으로 불렀던 것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고 바로 앞 안내판에서 설명하고 잇다. 남문 바로 아래는 수 백년 된 느티나무가 성을 떠받치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 느티나무를 심어 가파른 지역에 성을 축성할 때 무너지는 것을 방지하려 했던 것 아니냐고 추정하고 있다. 그만큼 둥치도 크고 세월의 무게를 더해주는 느티나무다.
남한산성 4대문 중에 유일하게 이름을 가진 남문 지화문이다.
왼쪽으로 영춘정을 거쳐 수어장대에 도착했다. 수어장대는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1호로, 지휘와 관측을 위한 군사적 목적에서 지은 누각이다. 남한산성 축성과 함께 축조된 동(내․ 외)․ 서․ 남․ 북 5장대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장대다. 주변을 잘 살펴볼 수 있도록 가장 높은 곳에 우뚝 솟아 있다. 인조 2년(1624) 남한산성 축성 때 단층 누각으로 지어 서장대로 불리던 것을 영조 27년(1751년) 이층 누각으로 증축하면서 수어장대로 이름을 바꿨다.
수어장대.
성곽길을 계속 된다. 성곽 밖으로는 절벽이다. 정말 천혜의 요새 같은 성이다. 서문에 이르렀다. 서문은 우익문이라고도 하지만 현판은 지금 없다. 인조 15년(1637)인조가 세조와 함께 통과하여 청나라 진영에 들어가 화의를 맺고 항복했던 그 문이다.
바로 아래엔 국청사가 보인다. 국청사는 인조 3년 각성대사가 창건한 절로, 병자호란으로 인한 수모를 다시 겪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승군을 훈련하고 군기․ 화약․ 군량미를 비축했던 절이다. 당시에는 절과 승려들이 국방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 사실을 알 수 있게 해준다.
국청사와 함께 중요한 역할을 했던 장경사.
산성 성곽길은 대부분 산책길이다. 산성에 접근하기까지가 등산로이고, 오르고나서는 평지에 가깝다. 몇 걸음 걷지 않아 국가 사적 제57호라고 쓰인 연주봉 옹성이 나온다. 남한산성에서 실제 사적 제57라고 쓰인 문화재를 자주 보지만 사적 제57호는 남한산성 전체에 지정된 것이다.
북쪽에 있는 연주봉 옹성.
옹성은 성문을 보호하기 위해 성문 밖으로 한 겹의 성벽을 둘러쌓은 이중의 성벽을 말한다. 남한산성에는 모두 5개의 옹성이 있다. 남쪽에 제1, 2, 3 옹성, 북쪽에 연주봉 옹성, 동쪽에 장경사신지옹성 등이다.
남한산성엔 좁은 지역에 원체 유적지와 절이 많아 잠시라도 눈을 뗄 수가 없다. 순간 한 눈 팔면 문화재를 그냥 지나치기 때문이다. 북장대터를 지나 북문인 전승문에 이르렀다. 남문에 있는 현판이 없다. 그냥 스쳐 지나간다.
연주봉 옹성에서 북문쪽으로 향하고 있다.
북문을 출발한지 10분 만에 군포지가 나온다. 군포는 성을 지키기 위한 초소 건물이다. 조선시대엔 남한산성 내 군포지가 125개소에 달했으나 지금은 한 군데도 없고 그 흔적만 남아 있다.
다시 10여분쯤 지나 성곽 바깥으로 통하는 동장대 암문이 있다. 성문 밖으로는 벌봉이 0.6㎞ 앞에 있다는 이정표가 보인다. 벌봉을 거쳤다 오더라도 불과 1.2㎞밖에 안 된다.
남문의 반대편에서 바라봤다. 남문인 지화문에는 항상 등산객들로 붐빈다.
동문을 향해 계속 성곽 따라 가면 장경사신지옹성에 도착한다. 곧 이어 장경사다. 인조 2년(1624년) 남한산성을 축성할 때 팔도 도청섭으로 임명된 승려 각성이 전국의 승려를 징집해서 사역을 시키기 위해, 이들의 숙식을 해결할 목적으로 건립한 절이다. 쭉 한번 훑어보고 동문으로 향한다.
드디어 동문이다. 좌익문이라고도 한다. 남문까지 1.7㎞라고 이정표가 가리키고 있다. 암문과 제3 남옹성, 제2 남옹성, 제1 남옹성을 지나 원래 출발했던 남문인 지화문으로 다시 돌아왔다. 약 8㎞로 긴 것 같지만 길지 않은, 그러나 문화재 살피기 바쁜 그런 남한산성 성곽길이다.
남한산성 지도.
장광덕
06.22,2011 at 11:43 오후
멋지게 소개를 하셨습니다. 꼭 가보고 싶은 곳인데 아직 마음 뿐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