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알렉산드로스’로 불리는 고구려의 광개토대왕. 서양의 정복왕 알렉산드로스가 인도에서 열병에 걸려 33세의 젊은 나이에 죽지 않고 더 오래 살았다면 지금 서양의 역사는 달라졌으리란 예상과 마찬가지로 광개토대왕이 39세의 짧은 나이에 죽지 않았다면 아마 동아시아의 역사는 또 다른 판도로 전개되었을 것이란 짐작은 쉽게 할 수 있다.
호태왕비와 호왕릉을 가리키는 비석이 있다.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 374~412, 재위 391∼412)은 18세의 어린 나이인 391년, 제19대 고구려의 왕이 됐다. 왕위에 오르자마자 최전방에 앞장서서 정복 전쟁을 진두지휘했다. 북쪽으로는 연나라와 후연, 남쪽으로는 백제와 왜까지 무찌르며 중원 일부와 한강이남까지 고구려의 영토를 넓혔다. 그가 정복한 고구려의 영토는 아들인 장수왕과 더불어 우리 민족이 가장 넓은 차지한 시기에 해당한다.
광개토대왕비석을 유리벽집을 만들어보존하고 있다.
뒤에서 본 광개토대왕비석. 사람 키와 비교해보면 그 크기를 짐작할 수 있다.
광개토대왕의 본명은 요즘 드라마에 하듯 담덕(談德)이다. 그의 완전한 묘호(廟號)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다. 이를 줄여서 광개토대왕, 또는 호태왕으로 부른다. 호태왕은 주로 중국에서 부르는 호칭이기도 하다. 재위 시 칭호는 영락대왕(永樂大王)이었다. ‘영락(永樂)’은 우리나라에서 사용된 최초의 연호로 알려져 있다.
광개토대왕릉을 가리키는 비석.
광개토대왕의 아버지는 드라마에서 보듯 고국양왕이다. 고국양왕의 바로 위의 왕이 바로 소수림왕이다. 소수림왕은 광개토대왕의 큰아버지인 것이다. 소수림왕이 아들 없이 죽자 동생인 고국양왕이 왕위에 올랐으며, 고국양왕 3년에 12세의 나이로 태자로 책봉됐다. <삼국사기>엔 광개토대왕을 가리켜 ‘나면서부터 허우대가 컸으며, 뛰어나고 활달한 뜻이 있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광개토왕릉으로 알려져 있는 보잘것 없는 토릉. 고분 내부엔 벽화가 있다.
중국 길림성 집안현에서 농부가 원체 큰 비석을 우연히 발견했다. 그 비석이 바로 광개토대왕비석이며, 여기에 광개토대왕의 업적에 대해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왕의 은택이 하늘까지 미쳤고, 위엄은 온 세상에 떨쳤다. 나쁜 무리를 쓸어 없애자 백성이 모두 생업에 힘쓰고 편안하게 살게 되었다. 나라는 부강하고 풍족해졌으며, 온갖 곡식이 가득 익었다. 그런데 하늘이 이 백성을 불쌍히 여기지 않았나 보다. 39세에 세상을 버리고 떠나시었다.’
무슨 공사를 하는지 토릉 주변엔 돌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다.고분으로 들어가는 입구.
광개토대왕비는 그의 아들인 장수왕 3년(414)에 세워졌다. 광개토대왕이 죽고 2년 뒤의 일이다. 비석의 높이는 6.39m, 글자는 모두 1,775자 정도 되는데, 이 가운데 150여 자는 판독이 되지 않는다고 한다. 일제가 장난친 부분도 판독되지 않은 글자를 자의적으로 곡해한 부분에 해당한다.
고분으로 들어가면 암벽 바위가 내부를 굳건히 둘러싸고 있다.
광개토대왕은 즉위 18년, 곧 408년에 왕자 거련(巨連)을 태자로 삼았다. 나중의 장수왕이다. 장수왕은 도읍을 지금 중국의 길림성에 있는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천도를 했다. 그리고 백제를 남쪽으로 더욱 밀어내고 한강 이남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광개토대왕릉 내부엔 있는 고분 벽화.
그러나 광개토대왕릉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장수왕릉이 있다. 어찌된 일일까? 보통 도읍에 왕의 무덤이 묻히는 게 일반적이다. 아버지 광개토대왕 옆에 묻히고 싶어서일까? 아니면 평양성으로 도읍을 옮긴 건 일시 남하정책을 펼치기 위한 전략적 선택이었을까? 장수왕만이 알고 후대의 역사가는 모르는 일일까?
광개토대왕릉의 고분벽화엔 습지가 채여 원래의 모습이 점점 퇴색돼 가고 있다.
습기가 더욱 채여 원형을 점점 퇴색시키고 있다. 원형보존이 시급한 실정이다.
광개토대왕릉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장군총이라 적힌 장수왕릉이 있다. 유일한 피라미드형 석릉이며 출입통제구역이다. 화강암 표면을 정성 들여 가공한 절석을 8단의 스텝 피라미드형으로 쌓은 무덤이다. 기간의 한 변 길이가 33m로, 가장 튼튼한 기하학적으로 쌓아올렸다고 한다. 무덤 주변엔 피라미드형 석돌이 무너지지 않도록 받치고 있는 긴 바위가 여러 개 있다. 높이도 13m에 달한다.
장수왕릉으로 알려져 있는 석릉 장군총. 주변 큰 돌이 피라미드형의 왕릉을 떠받들고 있는 형국이다. 실제로 기하학적으로 계산해서 쌓았다고 한다.
아직까지 일부 학자들은 광개토대왕릉과 장수왕릉을 헷갈리고 있는데, 대체적인 의견으로는 토성인 태왕릉이 광개토대왕릉으로, 석릉인 장군총을 장수왕릉으로 보고 있다.
장수왕릉인 장군총엔 출입금지라 볼 수 없으며, 광개토대왕릉 내부엔 벽화가 그려져 있다. 중국 당국의 관리부실인지, 사람들 출입이 너무 잦아서 그런지, 벽화에 습기가 차서 계속 손상되고 있었다. 참 안타까운 현실이다. 벽화 내용은 중국 말로 설명하는데,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다. 아는 사람이 자세한 설명을 해주길 부탁드린다.
장군총 들어가는 입구엔 국가문화재 장군총이란 이정표가 세워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