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에 토종벌이 사라지고 있다. 산뿐만 아니라 들판에서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벌이 줄어들었다. 최근 몇 년 새 일이다. 무심코 산에 다니는 등산객들도 말한다. “산에 벌이 안 보인다. 왜 그런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벌이 현저해 줄어든 것 같다”고.
왜 이런 현상이 발생했을까? 전문가들은 낭충봉아부패병(囊蟲蜂兒腐敗病․Sacbrood)때문이라고 한다. 일명 ‘꿀벌 에이즈’라 불리는 전염병이다. 꿀벌 유충에 발생하는 바이러스성 전염병을 말하며, 이 병에 걸린 유충은 번데기가 되지 못하고 말라죽게 된다. 뿐만 아니라 일벌들은 병든 유충들이 들어있는 벌방을 청소하고 말라 죽은 유충들을 제거하는데, 이 과정에서 일벌들도 감염돼 죽는다. 따라서 낭충봉아부패병은 대부분의 일벌이 없어지고 여왕벌과 어린 일벌 소수만 남아 있는 벌집에는 애벌레와 번데기만 나뒹굴게 된다. 이런 현상을 미국 꿀벌과학지에서 CCD(Colony Collapse Disorder. 꿀벌 봉군붕괴 증상)라고 지적했다.
유럽에서는 꿀벌의 꽃가루수분 역할에 의해 경제적으로 중요한 세 번째 가축으로 인정하고 있다. 경제가치로 따져 벌은 닭보다 앞서고 소․돼지에 이어 세 번째로 큰 역할을 한다
우리나라에서 2009년부터 3년간 낭충봉아부패병이 퍼져 지역별로 다소 차이는 있지만 전국 토종벌의 약 95~99%가 몰살했다고 농촌진흥청 산하 국립농업과학원 잠사양봉소재과 최용수 박사는 밝혔다. 양봉농가가 거의 폐사직전에 있는 것이다.
국립검역검사본부 꿀벌질병관리센터의 자료에 따르면 2010년엔 꿀벌 실태가 정상이었던 2008년 대비 95% 피해가 추정되고, 2009년은 2008년 대비 99% 피해에 이른다고 한다. 올 6월 현재 2008년과 비교하면 약 95% 피해가 예상된다고 밝혔다. 정확한 실태는 꿀벌들이 애벌레에서 깨어나 본격 활동을 시작하는 8~9월쯤 알 수 있다. 따라서 국립검역검사본부는 올 11월 전국 현황조사를 일제히 실시할 예정이다.
꿀벌들이 줄어들면 1차적으로 양봉농가들이 피해 직격탄을 맞지만 2차 피해는 더욱 심각하다. 한국토봉협회 자체 조사에 따르면 2009년 현재 우리나라 토종벌은 33만 6780여 통 정도이며, 토종벌 농가는 1만7368가구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반면 서양종벌 농가는 토종벌 농가보다 조금 많은 1만7956가구이지만 전체 양봉생산량은 4배 가까이 된다. 왜냐하면 서양종벌 농가는 본격 양봉업으로 벌을 키우지만 토종벌 농가는 부업이나 취미로 벌을 기르는 가정이 많아 벌통의 개수는 서양종의 약 4분의1 수준밖에 안되기 때문이다. 이들 중 토종벌이 지역별로 다소 차이는 있지만 거의 95~99%가량 몰살한 것이다. 벌도 죽고 벌로 인한 꿀 생산이 급감, 농가들의 수입이 대폭 줄어든 결과를 낳았다.
꿀벌들의 몰살로 직접적인 피해뿐만 아니라 2차 피해도 어마어마한 규모다. 미국 양봉협회 자료에 따르면 꿀벌의 꽃가루수분 기여가치로 1차 양봉생산물이 1억3000만 달러 규모인 반면 2차 생산효과인 과실수가 33억 달러, 종자와 목초에 미치는 영향이 84억 달러, 낙농 부문에 71억 달러 등 총 190억 달러에 이르러, 1차 생산물의 143배에 달한다고 밝혔다. 유럽에서는 꿀벌의 꽃가루수분 역할에 의해 경제적으로 중요한 세 번째 가축으로 인정하고 있을 정도다.
미국 코넬대학은 2000년 주요작물 생산액의 꿀벌 기여가치를 조사했다. 작물의 화분매개 수단을 곤충에 100% 의존하는 작물 중 꿀벌이 매개하는 비율은 아몬드가 100%, 사과․양파․브로콜리․당근․해바라기․멜론 등이 90%, 목화가 80%, 대두 50% 정도인 것으로 나타났다. 꿀벌의 기여가치를 금액으로 환산하면 총 146억 달러에 이른다고 발표했다.
전남 곡성군 죽곡면 농가에서 전통적인 방식으로 토종벌을 채취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조선일보DB
꿀벌의 기여가치는 우리나라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2008년 한국양봉학회에서 사과․배․복숭아․감․밀감․포도․수박․애호박․오이․딸기 등 국내 16개 작물의 매개곤충으로서 꿀벌 기여가치를 조사했다. 사과는 총 생산액 1조3677억원의 69%, 배는 9929억원의 50%, 수박은 7185억원의 80%, 오이는 1327억원의 80%, 애호박은 8313억원의 80%, 멜론은 4146억원의 80%, 고추는 1조5110억원의 51.8%, 딸기는 7175억원의 80% 등으로 나타났다. 따라서 국내 16개 작물의 총 생산액은 12조 3832억에 이르며, 이 중 꿀벌의 기여가치는 약 48.4%에 해당하는 5조 9897억원에 달한다.
작물의 매개곤충으로서 어마어마한 역할을 하고 있는 꿀벌이 줄어들었을 때 생활과 직접 관련된 결과는 꿀의 생산하락으로 꿀 가격상승을 가져온다. 이어 꽃이 수분을 하지 못해 과실수에 과일을 맺지 못하는 결과도 초래한다. 따라서 생산의 대폭 감소로 과일가격 상승으로 연결된다. 뿐만 아니라 초목이 제대로 자라지 않아 낙농업계에도 타격을 받고 결국 우유가격에 영향을 미치고 나아가 동물사료 부족사태도 발생, 사료비 상승도 부추긴다. 이 같은 현상이 몇 년 간 반복될 경우 자연 생태계 전반에 영향을 미쳐 생태계가 파괴되는 결과를 맞게 된다.
꿀벌의 감소와 이로 인한 생태계 위기는 현재 전 세계적인 현상으로 확산되고 있다. 미국에서는 2008년 정확한 원인을 알 수 없는 꿀벌 봉군붕괴 증상, 즉 CCD 영향으로 1년 사이에 22개주의 꿀벌 수가 36%까지 줄어든 것으로 조사됐다. 이후 농업 수확량이 급감해 과일․채소값이 치솟았고, 아몬드 블루베리 등의 수확량 감소로 세계 아이스크림 가격까지 올랐다. 유럽에서도 2008년 CCD 영향으로 89%까지 꿀벌이 몰사했고, 아프리카엔 2009년 중동엔 2010년에 비슷한 증상으로 직격탄을 맞았다.
아시아 지역도 예외는 아니다. 1980년대 후반 인도․네팔․태국․미얀마 등지에서 꿀벌의 낭충봉아부패병으로 최대 95%까지 꿀벌들이 몰살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중국에서는 우리와 비슷한 시기인 2009년부터 발병하기 시작, 아직까지 회복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외에도 뉴질랜드․영국․네덜란드 등 세계 곳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CCD증상이 확산 중이다.
충북 청원 낭성 메밀꽃밭에서 토종벌을 기르고 있는 김대립씨가 토종벌을 들어보이고 있다. 조선일보DB
전문가들은 이 같은 현상의 주요 원인으로 지구온난화로 인한 기온상승의 영향과 이로 인해 밀원식물 식생의 변동과 돌발 병해충 발생, 그리고 화밀분비 감소, 1987년 이후 따뜻한 겨울의 지속으로 월동 꿀벌 봉군의 불안정 상태 초래, 지난 36년간 평균 강수량 증가로 꿀벌의 화분매개와 수밀활동의 위축, 일조시간 감소로 주요 밀원식물의 화밀분비량 감소, 고온․저온․홍수․가뭄 등과 같은 이상 기상증가 현상으로 꿀벌들의 스트레스 증대와 번식장애, 환경오염 및 농약피해 증가 등을 꼽고 있다.
휴대전화의 전자파 등을 문제로 지적하는 학자도 있으나 아직 과학적으로 검증되지 않고 있다. 벌은 자기방향시스템이 탑재돼 있어 어디를 가도 벌통으로 돌아오게 돼 있는데, 최근 공기 중에 지나친 휴대폰 전자파의 영향으로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면서 중간에 길을 잃고 폐사하는 경우가 잦아진데서 원인을 찾은 것이다.
전문가들은 꿀벌 폐사 현상이 아직 위험한 수준은 아니라고 한다. 국립농업과학원 최용수 박사는 “벌은 90% 이상 죽어도 이전 상태로의 증식이 가능하기 때문에 아직 우려할 수준은 아니다”며 “단지 지금 필요한 것은 기존 방식의 양봉보다는 관리기술의 개선이 시급한 실정”이라고 지적했다. 최 박사는 전통 방식의 양봉은 한계에 봉착했으므로 벌통 개량으로 내부를 들여다 볼 수 있게 개량하고, 이에 따라 전염병의 조기진단이 가능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지금과 같이 봉군 밀도를 지나치게 높게 하지 않고, 여왕벌도 한번씩 바꿔줘야 한다고 대책을 제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