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이 나들이 때 머물렀던 궁을 행궁이라 한다. 행궁은 평화로울 때는 왕의 휴식처나 능원 참배로 사용됐지만 혼란스러울 때는 일종의 도피처였다. 외침 등으로 왕이 왕궁을 비우고 휴식 또는 피신해 있었거나 피신할 목적으로 행궁을 건립했던 성으로는 남한산성, 강화산성, 진도 용장산성, 북한산성, 수원 화성 등이 있다. 여러 개의 성 중에서 남한에 지금 원형대로 보존된 행궁은 없다. 그나마 가장 원형에 가까운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행궁이 수원 화성이다.
수원 도심 속에 있는 화성 성곽둘레길은 평일에도 많은 시민들이성곽을 도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우선 화성(華城)이라는 이름은 정조가 1793년(정조 17) 1월12일에 수원 팔달산에 올라 팔달산 아래의 신도시를 ‘화성’이라 명명한데서 유래했다. 화(華)자는 현륭원 뒤편에 있는 화산(花山)의 화(花)자를 딴 것이라고 전한다.
사적 제3호인 수원 화성북문인 장안문의 웅장한 모습. 왼쪽 돌출된 건물이 수원 화성만의 독특한 방어성이다.
왼쪽 돌출된 부분을 가까이서 담았다.
보물 제1710호인 서북공심돈이다.
수원 화성은 정조가 효심에서 근본이 되어 서울에 버금가는 대규모 신도시를 건설한 뒤, 당파정치 근절과 왕도정치의 실현, 국방의 요새로 활용하기 위해 과학적․실용적으로 쌓은 대규모 성이다. 정조 18년(1794)에 성을 쌓기 시작해서 2년 뒤인 1796년에 완성했다. 성곽의 둘레는 약 5.7㎞ 되며, 성인 걸음으로 한 바퀴 걷는데 2시간가량 소요된다. 성벽의 높이는 4~6m에 달한다. 실학자인 정약용과 유형원이 설계를 맡았고, 거중기 등을 이용해 쌓았다.
외국인들도 올라와 유심히 살피고 있다.
성 안팎으로의 출입은 4대문과 암문 다섯 곳을 통해 이뤄진다. 창룡․장안․화서․팔달문 등 4대문과 북암문․동암문․서암문․서남암문․남암문 등 그것이다. 수원 화성이 한양 도성의 남쪽에 있는 관계로 북문인 장안문이 사실상 정문이다. 장안(長安)이라는 말은 수도를 상징하는 동시에 나라의 백성들이 행복하게 산다는 뜻이다. 이 문은 국보1호인 숭례문보다 커며,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성문이다.
수원 화성의 서문인 화서문. 현판 편액은 체재공이 쓴 글씨가 유일하게 남아 있어 보물 제403호로 지정됐다.
화서문에 대한 설명.
창룡(蒼龍)은 청룡과 같은 뜻으로 동쪽을 의미한다. 팔달문은 수원성의 남쪽 문으로 서쪽에 있는 팔달산에서 따왔다. 서쪽 대문은 화서문으로, 편액은 초대 화성유수였던 채제공이 썼다. 원래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보물 제403호로 지정된 문이다.
수원 화성의 북수문인 화홍문.
북 수문에 대한 설명.
화성의 특징적인 시설로는 성곽 주위와 비상시 적의 동향을 살피기 위해 공심돈을 건립했다. 공심돈은 화성에서 처음 설계된 것이다. 화성에는 서북공심돈․동북공심돈․남공심돈이 있었으나 지금은 서북․동북공심돈만 남아 있다. 서북공심돈은 화서문 옆에 위치하고 있으며, 옛 모습 그대로 보존돼 있다. 비상시 군사들이 이 안에 들어가서 작은 구멍으로 총을 쏘고 큰 구멍으로는 불랑기포를 쏘면서 방어할 목적이었다.
서노대의 웅장한 모습.
서노대에 대한 설명.
그외 성안의 부속시설물로는 내포사․사직단들이 있었으나 현재는 행궁의 일부인 낙남헌만 남아 있다. 수원 화성은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조만간 수원 화성의 행궁에 대해서도 한번 살펴보기로 하자.
성벽을 타고 올라오는 적을 무찌르기 위해 성벽을 돌출되게 만든 부분을 치성이라고 한다.
치성에 대한 설명.
사적 제3호인 장안문에 대한 설명.
수원 화성의 서북각루.
서북각루에 대한설명.
johan
09.23,2012 at 10:21 오전
우리동네에다녀 가셨군요… 헌데 설명과 사진이 다른게 많군요..장안문이라 설명하신 사진은 서문(화서문)이구요..서노대라 하신건 서장대(화서장대)입니다. 화서문이라 하신건 동문인 창룡문이구요…
박정원
09.23,2012 at 3:12 오후
대단하십니다. 저가 찍은 순서대로 체크하고 설명을 쓴 것이 아마 순서가 뒤엉켰던 것 같습니다. 물론 저가 잘 몰라서 그런 것이지요. 이런 분이 있기에 저가 더 열심히 공부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