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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_construct()
를 사용해주세요. in /webstore/pub/reportblog/htdocs/wp-includes/functions.php on line 3620 국보만 17점 출토된 백제 무령왕릉… 삼국시대 왕릉 중 유일하게 주인 확인 - 마운틴
국보만 17점 출토된 백제 무령왕릉… 삼국시대 왕릉 중 유일하게 주인 확인

한국 발굴사상 최대의 학술적 의미와 역사적 가치를 지닌 무령왕릉이 공주에 있다. 백제시대의 화려한 왕관과 섬세한 세공기술은 1500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과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을 정도다. 1997년 영구 보전을 위해 일반인 출입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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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령왕릉은 영구보존을 위해 지난 1997년부터 일반인 출입을 통제했다.

무령왕릉은 삼국시대 왕릉 중에 유일하게 주인이 밝혀진 무덤으로, 백제 제25대 무령왕과 왕비의 합장릉이라는 사실이 지석에 그대로 쓰여 있다. 묘실 전체는 벽돌로 쌓아 1500여년의 세월을 견디게 했다. 고분군에 있는 다른 무덤들의 주인은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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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령왕릉의 내부 모습. 무열왕은 이곳에서 1500년 뒤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송산리고분군 중에 유일하게 도굴되지 않은 무령왕릉에서 나온 유물은 모두 108종 4,687점에 이른다. 이 중 국보로 지정된 것만도 12종 17점에 달한다. 대표적인 유물이 왕과 왕비의 금제관식, 금제 귀걸이, 청동거울, 족침, 석수 등이다. 발굴 당시 모두들 입을 벌어지게 했던 유물들이다. 다른 무덤도 도굴 당하지 않았다면 과연 어떤 찬란한 유물이 나왔을까, 안타까운 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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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제154호인 금제관장식. 왕의 머리 부분에서 거의 포개어진 채 발견됐다. 얇은 금판에 인동당초문과 화염문 장식을 투조하였는데 문양의 좌우가 비대칭이다. 줄기와 꽃에 지름이 5mm정도인 영락을 달았다. 영락은 둥글고 작은 원판이며, 여기에 작은 구멍을 뚫어 금실로 꿰어 4~6회 꼬아 달았는데 모두 127개다. [구당서(舊唐書)]에 ‘(왕은) 검은 천으로 된 관에 금꽃을 장식하고…’라는 기록을 근거로 왕이 평소 사용했던 비단모자의 좌우 혹은 전후에 꽂았던 장식품으로 추정하고 있다.

송산리고분군에서 나온 유물은 고스란히 인근 국립 공주백제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전부 감탄을 금치 못하게 하는 유물들이다. 백제의 역사를 고스란히 전하고 있다. 하나하나 살펴보면 한나절도 모자란 시간이다. 앞으로 국보와 보물을 하나씩 소개할 것이다. 많은 분들이 방문해서 즐기시길 바랍니다. 사진 C영상미디어 이신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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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제108호인 계유명천불비상. 충청남도 연기군 조치원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서광암(瑞光庵)에서 발견된 작품으로, 비석 모양의 돌에 불상과 글을 새겨 놓은 것이다. 사각형의 돌 전체에 불상을 새겼는데, 앞면의 삼존불(三尊佛)을 중심으로 좌우에는 글이 새겨져 있고, 그 나머지 면에는 작은 불상을 가득 새겨 놓았다. 삼존불은 연꽃무늬가 새겨진 반원형의 기단 위에 조각되어 있는데, 4각형의 대좌(臺座)에 앉아 있는 중앙의 본존불을 중심으로 양 옆에 협시보살이 서 있다. 본존불은 옷을 양 어깨에 걸쳐 입고 있는 것을 제외하고는 상체가 많이 닳아서 세부 모습을 알아볼 수 없다. 특징적인 것은 불상이 입고 있는 옷이 무릎 아래로 길게 흘러 내려와 대좌까지 덮고 있다는 점이다. 양 옆의 협시보살도 손상이 많아 세부 모습을 살피기는 어렵지만, 무릎 부분에서 옷자락이 X자형으로 교차되고 있어 삼국시대 보살상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불상들의 머리 주위에는 연꽃무늬와 불꽃무늬가 조각된 머리광배가 다른 부분에 비해 파손이 덜 된 상태로 남아 있다. 이 삼존불상 외에도 사각형의 돌 전체에 일정한 크기의 작은 불상들이 규칙적으로 새겨져 있는데, 깨진 부분에 있었을 불상들까지 감안한다면 천불(千佛)을 표현하려고 한 것 같다. 이들 작은 불상들은 모두 머리광배를 지니고 있으며, 옷은 양 어깨를 감싸고 있다.

이 작품은 삼존불 좌우에 새겨져 있는 글을 통해 볼 때 신라 문무왕 13년( 673)에 만든 것으로 추정되며, 백제 유민들이 망국의 한과 선조들의 명복을 빌기 위해 만든 작품이란 점에서 역사적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이 비상은 충남 연기지방(燕岐地方)에서 발견된 비상 가운데 가장 오래되고 큰 작품이다.

낮은 기단(基壇) 위에 직사각형의 비신(碑身)이 세워져 있고, 비신 위에는 지붕돌이 올려져 있는 전형적인 비상 형태이다. 비신부는 4면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앞면 하단부 중앙에 큼직한 삼존좌불상(三尊坐佛像)을 새겼으며, 협시보살(脇侍菩薩) 좌우로 비상을 조성한 조성기(造成記)를 새겼고, 머리 위로는 작은 불좌상(佛坐像)들을 9단에 나누어 촘촘히 나타내었다. 이 작은 불상들은 좌우측면과 뒷면 그리고 지붕돌에까지 표현되었는데 깨어진 지붕돌의 수까지 계산한다면 900여 구가 넘는 불상이어서 천불(千佛)을 나타낸 것으로 생각된다.

앞면의 삼존불좌상은 비상의 주존불(主尊佛)인데 본존불은 상현좌(裳縣座) 위에 결가부좌(結跏趺坐)로 앉아 있으며, 좌우보살상은 입상(立像)으로 삼각형구도를 보여 준다. 모두 연꽃대좌(臺座)와 보주형광배(寶珠形光背)를 나타내었으며, 본존불의 다소 딱딱해진 정면성(正面性)과 협시상들의 고졸성(古拙性) 등은 삼국시대(三國時代) 백제불양식(百濟佛樣式)이 짙게 남아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명문(銘文)에 보이듯이 신라(新羅) 문무왕(文武王) 13년(673)에 백제유민(百濟流民)들이 그들의 선조를 위하여 조성하였다는 사실과 더불어 이 비상의 역사적 의의를 잘 설명하고 있다. 문화재청 설명 인용.

무령왕비릉의 내부모습.jpg

무열왕 옆에 있는 무열왕비릉의 모습. 단순하게 보기로는 왕릉보다 더 화려해 보인다.

My name is Garden Park. First name Garden mea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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