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악산은 고대로부터 ‘설악’이라고 했다. <삼국사기>(1145년)에 설악에 대한 나라의 제사 기록이 나온다. 고려시대에도 설악이라고 했다가, 조선후기에 와서 설악산이라는 이름이 일반적으로 쓰였다. 왜 설악이라고 불렀는지 옛 선인들도 궁금했던 모양이다. 조선시대에 설악산을 유람했던 지식인들이 의문을 품고 그 대답을 글에 남겼다. “바위로 된 봉우리나 돌의 빛이 희고 깨끗한 눈과 같아 설악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설악산의 역사를 알 수 있는 옛 자료는 고지도를 포함하여 지리지, 유산기 등의 문헌이다. 이 자료들은 만들어진 당시의 설악산 현황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것과는 다른 새로운 사실도 알 수 있으며, 연대순으로 자료들을 비교 분석하면 변천 상황을 시계열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시대적 범위를 보면, 지리지는 고려 말에서 조선후기에 걸쳐있으며 조선후기가 다수를 차지한다. 고지도는 대부분 18세기 중엽에서 19세기 후반까지의 조선후기에 제작된 지도들이다. 유산기는 16세기 중후반에서 19세기 중반의 작품으로 구성되어 있다.
조선후기를 대표하는 지도인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를 통해 설악산을 들여다보자.(지도1) 가운데 설악산을 두고 위로 천후산(울산바위)과 아래로 한계산이 구분되어 표현되어 있다. 사찰로서는 서쪽의 백담사와 동쪽의 신흥사가 표기되었다. 설악산에 두 사찰의 대표성을 드러낸 것이다. 천후산 위로 영동과 영서를 관통하는 길인 연수파령은 지금의 미시령고개다. 불과 150년 전까지만 해도 지금과 다른 이름이었음이 확인된다. 옛 문헌에서 고개 이름은 다양한 명칭으로 표기되었다. 현재의 미시령은 고지도에서 미시파, 미시파령, 연수파령으로도 나온다.
김정호가 대동여지도 이전에 그린 청구도를 보면, 영동과 영서 지역이 다른 색깔로 채색되어 구분되어 있다.(지도2) 기본적으로 행정구역의 영역을 표시하는 의도이겠지만, 조선시대에 산줄기를 기준으로 한 동서의 지역인식이 뚜렷했음을 알 수 있다. 백두대간의 마루금을 경계로 분수계가 나뉘어 동쪽의 영동과 서쪽의 영서는 문화권의 차이가 나타나며, 사투리나 가옥구조 등의 요소에서도 다른 지역성을 보인다. 이러한 인식은 설악산에서도 반영되어 속초와 양양지역의 외설악과 인제지역의 내설악으로 구분되는 기준이 되었다.
그런데 옛 지도와 문헌을 살펴보면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설악산에 대한 상식과는 다른 사실이 눈에 띈다. 우선, 조선시대의 설악산은 오늘날의 설악산과 공간적인 범위가 달랐다. 예전에는 대체로 현재의 외설악에 해당하는 대청봉을 중심으로 설악산이라고 했고, 한계령 북쪽의 산은 따로 한계산 혹은 오색산이라고 불렀다. 조선시대에 한계산은 일반적인 명칭이었고, 오색산도 지방의 고지도 자료에 표현된 것으로 보아 지역에서 한계산과 같이 불렀던 지명이라는 것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울산바위도 천후산(天吼山)이라는 다른 이름을 가졌다. 천후산이란, 바람이 세게 불면 바위에 부딪쳐 소용돌이치면서 마치 하늘이 울부짖는 듯 소리가 난다고 해서 유래했다. 천후산은 이산(籬山)이라고도 했다. 생김새가 울타리(籬)를 쳐 놓은 것 같아서 유래되었다. 실제 울산바위를 아래서 보면 바위로 둘러친 큰 울타리 같다. 그 울타리의 울산이 후대에 와서 지역명인 울산(경남)으로 와전되어 ‘울산바위’ 설화가 만들어졌다.
조선후기로 가면 설악산이라는 이름은 한계산(오색산)과 천후산을 대표하는 지명의 명칭으로 굳어져서 전국과 인근 고을에서 쓰이기 시작했다. 이처럼 지금의 설악산은 조선시대에 설악산, 한계산, 천후산이라는 각각 다른 이름을 가졌던 것이다. 설악산이라는 이름이 세 산을 대표하는 지명이 된 것은 조선후기에 와서 비롯됐다. 이와 관련하여 『동국여지지』(17세기 중반)에 “한계산: 양양 사람들은 설악산이라고 부른다”고 하여, 그 무렵 지방(양양)에서는 한계산을 설악산으로 통칭하여 부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김정호도 『대동지지』(1864)에서 “한계산-설악산과 본래 같은 산이나 달리 부르는 이름이다”라고 한계산과 설악산 지명의 같은 유래를 기록했다. 조선후기 고지도에서도, 조선팔도지도에 와서는 한계산도 설악산이라고 표기하고 있다.(지도3)
그래서 조선시대에 설악산 권역은 크게 양산(兩山) 구도와 삼산(三山) 구도로 나타난다. 양산 구도는 18세기 중엽에 제작된 여지도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설악산과 현 한계령 북쪽의 안산(1430m) 주변의 한계산으로 표현하고 있다.(지도4) 북 설악산과 남 한계산으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오늘날 한계령 일대를 남설악이라고 하는 것은 여기에서 연유된 것이다. 한편으로 삼산 구도의 설악산 권역 인식도 여러 고지도에서 드러나고 있다. 설악산, 한계산에다 현 울산바위인 천후산이 따로 구분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전국지도 뿐만 아니라 지방지도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18세기 중엽에 제작된 <비변사인방안지도> 양양부 지도를 보면, 설악산 위 아래로 천후산과 오색산의 세 산이 서로 다른 산으로 뚜렷하게 그려졌다.(지도5)
그밖에도 설악산 지리정보에서 보이는 조선시대와 오늘날의 차이는 몇 가지 더 드러난다. 오늘날 한계령도 조선시대에는 오색령이라는 이름이었다. 대부분의 고지도에 오색령이라고 일반적으로 표기되어 있어서 대표적인 명칭임을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이 한계령이라고 표기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중엽에 편찬된 지도인 동여도부터다.(지도6) 당시부터 지방에서 오색령이라는 지명이 한계령과 함께 불러졌을 가능성이 있다. 산이름으로 한계산과 오색산의 같은 호칭은 고개이름으로서 한계령과 오색령을 같이 부르는 배경도 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설악산의 대표적인 폭포인 현 대승폭포도 조선시대 고지도에 대승폭(大乘瀑) 혹은 대폭(大瀑)으로 나온다. 청구도에 대승폭이라 했으며, 대동여지도에는 2곳의 대폭이 표기되기도 하였는데, 대승폭포와 함께 현 토왕성폭포로 보인다.
설악산을 접하고 있는 조선시대 인제, 양양 등 고을의 지방지도에는 설악산이 어떻게 그려지고 있을까? 당연하게도 설악산이 고을의 주요한 자연경관으로 표현되었다. <해동지도>의 강원도, 양양읍지도를 보면, 설악산을 포함한 백두대간의 산줄기가 강조되어 인상적으로 그려졌다. 신흥사 등의 주요 장소가 표현되었고, 한계령의 옛 이름인 오색령도 뚜렷하다.(지도7) <1872년 지방지도>의 강원도, 양양부 지도는 회화식으로 설악산의 봉우리들의 빼어난 모습과 주요 장소들을 사실감 있게 그렸다. 점선으로는 설악에서 발원한 물길을 표현하였고, 채색한 실선으로는 설악의 주요 산길을 드러냈다. 비선대, 영혈사, 계조굴 등의 주요 승경지와 청초호도 보인다.(지도8)
역사적으로 설악산이 명산으로서 어떤 위상을 지녔고, 어떻게 변해왔는지도 궁금하다. 설악산은 일찍이 신라시대부터 산천제의 대상이 된 명산이었다. 신라에서 전국 24명산의 하나로 소사(小祀)를 지냈다고 <삼국사기>는 적고 있다. 고려와 조선전기에도 지방 명산의 지위는 계속 유지됐다.
설악산은 조선후기 저술인 이중환의 <동국산수록>(1751)에서 ‘나라의 큰 명산’으로 기록됐다. 여기서 이중환은 설악산이 오대산, 태백산, 소백산, 속리산, 덕유산, 지리산과 함께 국토의 등줄기에 있는 명산이라고 했다. 또한 성해응(1760-1839)의 <동국명산기>에도 설악산은 수록되었다. 조선후기 지식인들에게 설악산은 지방 명산에서 나라 명산으로 격상되어 인식된 것이다. 여기에는 당시 국토 산줄기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아지고, 그 중추인 백두대간과 설악산의 중요성이 부각된 것이 배경이 됐다. 설악산은 백두대간의 허리에 자리하면서 위로 금강산과 아래로 오대산을 잇는 중요한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명산유람 문화가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크게 유행하면서, 금강산과 함께 설악산의 빼어난 경치가 널리 알려진 것이 명산 승격의 또 다른 이유가 됐다.
설악산은 조선시대 유학자들에게 유람하고 싶은 대표적인 산의 하나이기도 하였다. 설악산은 금강산으로 가고 오는 길에 들러야 할 경로였다. 그들이 남긴 설악산 유산기는 수십 편이 남아있어 설악산의 생생한 스토리텔링으로 전한다. 조선 전기 생육신의 한사람이었던 남효온(1454~1492)은 설악산과 금강산을 유람한 후, “설악산의 수십 봉우리가 모두 흰 봉우리를 드러내고, 시냇가의 돌과 나무도 모두 흰색이어서, 세상에서 설악산을 소금강산이라 하는 말이 결코 헛말이 아니다”고 적었다.
조선시대 설악산 유산기의 주요 경로를 분석해 보면 4가지 정도의 코스로 압축된다. 가장 빈도수가 높은 일반적인 유산 행로는 백담사-오세암-신흥사 코스였다. 현재의 백담분소에서 시작하여 수렴동과 백담사를 지나 영시암, 오세암, 마등령을 오르고, 아래쪽으로 비선대 및 와선대로 내려와서 신흥사를 거쳐 토왕성폭포까지 이르는 코스이다. 사람에 따라서는 역 코스로 유람하기도 하였고, 단축 행로를 택하기도 하였다. 두 번째 노선은 토왕성폭포를 다녀와서 비선대, 와선대로 오르고 봉정암, 오세암을 거쳐 한계폭포 혹은 대승폭포로 하산하는 코스이다. 이밖에도 한계사지를 출발하여 대승폭포에 올라 유람하고 백담분소 쪽으로 내려오는 코스가 있었다. 그리고 미시령에서 바로 울산바위 아래의 계조굴과 울산바위를 유람하고 신흥사를 거쳐 비선대와 와선대를 둘러보는 단축 코스도 확인된다.
요즘 전국적으로 둘레길, 산길 만들기가 대유행이다. 설악산도 인근의 인제, 속초, 양양 등의 시군 지자체와 국립공원에서 ‘설악산 선비의 길’이나 ‘금강산 가는 길’ 등의 테마길 코스를 개발하면 어떨까? 기록유산을 효과적으로 활용해서 옛길을 브랜드화하는 전략이다. 유람길 중간 중간에 안내 간판을 만들어 옛 설악산 지도도 보여주고, 설악의 풍경과 명승지에 대한 선인들의 멋들어진 묘사도 읽을거리로 만들어주면 설악산 콘텐츠가 풍요로워져 산행의 재미도 배가될 것이다. 이제는 그동안 무턱대고 따라했던 서구인들의 알피니즘적 등산(登山)에서 선조들이 오랫동안 해왔던 인문적 유산(遊山)으로 되돌아갈 때가 됐다. <최원석 교수의 옛지도로 본 山의 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