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산유곡 빼꼼히 고개를 숙인 듯 땅에 붙어 자줏빛 자태를 한껏 뽐낸다. 그렇다고 보란 듯 나서지 않는다. 소관목 사이에서 마치 바람을 피하려는 듯 마냥 웅크린 자세를 취한다. 흔하디흔한 그런 야생화가 아니다. 섣불리 지나치면 볼 수 없고, 특히나 남한에서 봤다는 사람은 아직 없다. 백두산 심산유곡에서나 살포시 보여준다. 그래서 이름도 깊은 산 두메산골에서 자라는 자운영이라고 해서 ‘두메자운’이라 붙었다. 다른 이름도 있다. 백두산에서 자란다고 장백극두(長白棘豆), 묏돔부, 두메돔부라고도 한다.
두메자운의 속명 Oxytropis(옥시트로피스)는 그리스어 Oxys(예리한)와 tropis(용골, 용골판)의 합성어로, 부리모양으로 돌출한 꽃잎의 용골판 모양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문순화 작가가 두메자운을 처음 본 건 고 이영노 박사와 함께 백두산에 가서였다. 문 작가는 항상 먼저 야생화 사진을 찍어 이 박사에게 보여주면서 이름이 뭔지, 족보가 어떻게 되는지 궁금증을 풀었지만 이번에 어떻게 됐는지 이 박사가 먼저 백두산에 같이 가자고 제의했다. 문 작가는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아마 이영노 박사는 한반도 식물도감을 완성하기 위한 작업의 일환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 때가 1990년.
문 작가는 이영노 박사를 따라 백두산을 방문했다. 남한에서 보는 식물군과는 완전히 달랐다. 거센 바람을 피하려는 생존본능 마냥 땅에 붙어 지내는 식물이 많았다. 진달래과의 좀참꽃나무도 키가 10㎝ 넘지 않았다. 진달래도 관목이 아니라 거의 야생화 수준으로 매복해 있는 듯했다. 야생화 사진 찍을 대상이 너무 많았다.
이영노 박사와 8년 동안 백두산을 방문했다. 매년 시간을 달리했다. 올해 5월에 갔으면 이듬해에는 6월에 갔다. 3월과 4월은 잔설이 그대로 있어 야생화를 볼 수 없었다. 9월에는 월초부터 바로 단풍이 들었다. 으스스 추웠다. 그렇게 8년을 다니고 백두산을 졸업했다.
이영노 박사는 백두산을 졸업했지만 문 작가는 마친 게 아니었다. 그 뒤 동북아식물연구소 현진오 소장이 같이 가자고 졸랐다. 그리고 야생화 사진작가들이 백두산 안내를 해달라고 해서 3번을 더 갔다 왔다. 문 작가는 백두산만 10번 이상을 다녀왔다. 그 때마다 야생화의 모습은 달랐고, 식생도 다른 모습을 띠었다.
문 작가가 처음 본 두메자운은 자줏빛꽃을 피운 것이었다. 실제 식물도감에도 자줏빛으로 등록돼 있다. 하지만 몇 번 더 방문한 뒤 흰색과 분홍색을 가진 두메자운 개체를 확인했다.
두메자운은 전형적인 북방계 식물이다.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는 문 작가지만 아직 남한에서는 보지 못했다. 실제 식물학계에서도 평안북도 낭림산, 함경남도 부전고원과 백두산 일원, 함경북도 관모봉 등지에 분포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돼 있다.
식물도감에 기록된 두메자운은 다음과 같다.
‘높은 산의 중턱에서 자란다. 전체에 비단털이 있고, 뿌리는 매우 굵으며 꽃줄기는 외대 또는 2~3대가 나오며 매우 짧다. 높이는 10㎝ 정도. 여러해살이 초본이며, 6~8월에 홍자색, 분홍색, 드물게 흰색의 꽃이 핀다. 꽃은 빛을 받으면 형광색으로 반짝인다. 관상용이나 벌이 꿀을 빨아오는 밀원보조용으로 쓴다.’
두메자운은 화려한 꽃 색깔 때문에 관상용으로 즐겨 키운다. 야생화 애호가들은 관상용 두메자운을 키울 때 한 가지 팁을 준다. ‘고산식물이기 때문에 기를 때는 언제나 바람이 잘 통하는 시원한 환경에서 노출시켜야 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