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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과 山기운 만나는 명당에 터 잡은 적멸보궁 ‘사자산 법흥사’… 불 때문에 고초

부처님 진신사리 보장처의 형식은 몇 가지 특징을 띤다. 첫째, 통도사 같이 석종과 계단을 융합한 형식, 둘째, 오대산 중대의 적멸보궁처럼 지궁(地宮)만 둔 형식, 셋째, 사자산 법흥사처럼 지궁과 부도를 융합한 형식, 넷째, 정암사처럼 석탑 형식 등 네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이러한 네 가지 형식의 진신사리 보장처 앞쪽에 단층 건물을 짓고 불상을 봉안하지 않은 채 배례하는 장소로 삼으며, 적멸보궁 현판을 걸고 있는 것이다. 이같이 사자산 법흥사에는 진신사리가 안치된 보탑과 자장이 도를 닦았다는 토굴, 자장이 경전을 담아온 석함 등이 전한다.

강원도 영월에는 주천(酒泉)면과 인근에 수주(水周)면이 있다. 술이 샘솟는 마을과 물이 두루 넘치는 마을이다. 법흥사는 수주면의 끄트머리에 위치해 있다. 사자산의 산 기운과 수주면의 물 기운이 만나는 곳이다. 이른바 명당이다. 자장율사는 산 어딘가에 부처의 진신사리를 봉안했다. 그래서 산 전체를 숭배시 했고, 산 전체가 한때 융성했다. 산의 이름을 딴 사자산문이 활기를 띠었고, 그 중심 도량 역할을 했다.

물과 산기운이 만나는 사자산 명당에 자리잡은 법흥사는 불 때문에 쇠퇴하기에 이른다. 창건 초기엔 흥녕사였으나 1900년대 초기에 법흥사로 바꿨다.

물과 산기운이 만나는 사자산 명당에 자리잡은 법흥사는 불 때문에 쇠퇴하기에 이른다. 창건 초기엔 흥녕사였으나 1900년대 초기에 법흥사로 바꿨다.

중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자장율사는 문수진신을 친견하기 위해 오대산, 설악산, 사자산 등에서 간절히 기도를 하면서 절을 창건했다. 그 때 이름은 흥녕사(興寧寺)였다. 흥녕사라는 사찰이 더욱 이름을 떨치게 된 계기는 신라 말 헌강왕 때 징효(澄曉)에 의해 구산선문의 하나인 사자산문이 들어서면서부터다. 사자산문은 처음 도윤국사에 의해 화순 쌍봉사에서 문을 열었으나 제자 징효가 영월 흥녕사로 옮겨와 가장 번성한 문파가 됐다. 흥녕사에 사자산문이 들어서자 헌강왕은 중사성(中使省)에 예속시켜 보호하도록 했다. 안내석탑과 수호불좌상은 당시 얼마나 번창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그러나 진성여왕 5년(891년)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흥녕사는 화재로 소실됐고, 그 뒤 고려 혜종1년(944)에 다시 중건됐으나 얼마 뒤 다시 불에 타는 재앙을 겪은 뒤 급격히 몰락했다. 산의 기운과 물의 기운은 제대로 받았으나 불의 기운으로 고초를 겪고 쇠퇴의 운명을 맞은 것이다.

존재조차 없는 작은 절로만 명맥을 유지하던 흥녕사는 1902년 비구니 대원각 스님이 중건을 하면서 지금의 법흥사로 명칭을 바꿨다. 하지만 또 산불로 소실되고 중건을 거듭한 끝에 1933년 현재의 절터로 옮겨 지금에 이르고 있다. 그래서 본궁과 적멸보궁이 떨어져 있는 것이다.

법흥사의 적멸보궁은 절터의 제일 높은 곳에 있다. 전부 새로 단장한 터라 운치는 조금 떨어진다. 하지만 옛 기세를 느낄 수 있는 유적은 있다. 절 입구에 징효대사탑비는 보물 612호로 귀중한 유물이다. 탑비에서 바라보는 극락전의 모습은 고즈넉하다.

7세기 중엽 자장에 의해 창건된 흥녕사가 법흥사로 이름을 바꾸면서 불 때문에 고초를 겪으면서 1,400여년을 견뎌낸 세월의 무게를 적멸보궁을 바라보면서 조금은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지금은 다시 5대 적멸보궁의 명성에 맞게 전국에서 많은 기도객들이 줄을 이어 방문하고 있다.

My name is Garden Park. First name Garden mea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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