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우화집’ 낸 70 노익장 소설가 김주영 “자연 통해 가식 없는 삶 발견”

소설가 김주영씨가 70의 나이에 상상우화집을 냈다. 참, 대단한 열정으로 느껴진다.

그의 소설은 대부분 인간에 대한 이야기다. 인간도 상류층이 아닌, 서민의 잔잔한 삶에 얽힌 곡절에 대한 스토리다. 대표 소설 객주도 그렇다.

그의 주된 관심도 가족과 인간관계다.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를 여하히 밝혀내려고 한다. “살아가면서 저지르는 실패와 실수, 욕망과 반성의 과정을 그려낸다. 문학하는 것, 소설 쓰는 것 자체가 반성문을 쓰는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한다. 끝없이 기도하고, 참회하듯 소설을 쓴다. 그만큼 인간에 대한, 사람에 대한 애정을 깊이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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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김주영씨가 파라다이스 문화재단 이사장실에서 서재를 배경으로 책을 읽고 있다.

그는 사람을 찾아 세계의 오지를 찾는다. 이미 알려진 명승지는 대상에서 제외다. 히말라야의 고산 산악지대와 아프리카 마사이족, 남미 아마존 강, 고비사막, 인도네시아 열대지방, 필리핀 화산지대 원주민 등 못살지만 소박하게 만족하면서 사는 사람들을 찾아다닌다. 그들의 모습에서 인간 본연의 맑고 깨끗한 심성을 읽는다. 그들의 순수한 눈망울과 함께 지낸 며칠은 세상이 너무 행복하게 느껴진다. 부족하지만 부족함이 없는 세상이다. 부정도 없고, 부족도 없는 긍정과 만족만 있을 뿐이다. 그들에게서 인간의 체취를 느낀다. 그들의 삶의 모습을 그대로 가슴에 담는다. 이와 대비되는 속세의 살기등등한 모습을 확인하기엔 그리 긴 시간도 필요 없다. 돌아가기 위해 공항 가는 차에 몸을 싣는 순간, 공항에서 많은 사람들의 얼굴을 보는 순간 전혀 다른 인간과 세계를 만난다. 세속에 찌든, 욕망에 불타는 군상들의 살기 띤 듯한 섬뜩한 눈빛을 접한다. 조금 전에 있었던 세상과는 극과 극이다.

한국에서도 마찬가지다. 전국을 다니지만 이름난 곳, 한 번 가본 곳은 잘 가지 않는다. 알려지지 않은 장터, 시골국밥집, 여인숙, 외진 곳 등 세속의 손이 덜 탄, 사람의 정이 느껴지는 장소를 찾아다닌다. 그들의 모습을 오래도록 가슴에 담아둔다. 그들에게서 인간을 발견하고자 한다. 삶의 모습, 본질을 찾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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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영씨가 인터뷰 하면서 활짝 웃고 있다.

그가 79년 시작해서 5년여에 걸쳐 40대에 쓴 장편 역사소설 <객주>는 4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지금도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그만큼 역사의 주역이면서 항상 외면돼 왔던 서민들의 삶을 잔잔하게 주인공 없이, 모든 사람들의 애환을 잘 그렸다는 반증이기도 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와 닿았고, 감동을 준 영향도 무시 못 한다.

이 대하소설은 19세기 후반 한말의 사회적 변동을 보부상, 노비, 타락한 관료, 농민 등의 갈등과 유착관계를 통해 살펴봄으로써 역사소설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는 평가도 동시에 받았다.

그는 이 소설을 쓰면서 “왜 내가 젊은 시절에 공부를 조금 더 하지 않았나하는 자괴감에 수없이 빠졌다”고 했다. 지금 나이 들어 다시 읽어보니 “어떻게 내가 이런 소설을 썼을까”하는 뿌듯함도 동시에 느꼈다고 한다. 스스로도 대견스럽게 느껴지는 작품이다. 그는 이 소설을 쓰면서 경제와 역사에 대한 지식을 보충하기 위해 300권 이상 관련 서적을 읽고, 시대적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 당시 사용했음직한 토속적인 우리말을 일일이 찾아가면서 썼다. 적절한 어휘 하나를 선택하기 위해 밤 새워 관련문헌을 뒤적이기도 했다. 40대의 모든 열정을 쏟은 작품이었다. 그는 “지금 그런 소설을 쓰라고 하면 자신 없다”고 바로 손사래 쳤다.


그는 그가 지닌 문학적 소질에 비해 비교적 늦게 문단에 등단했다. 다 가정사 때문이다. 고교 때까지 아버지의 말 잘 듣는 든든한 아들이었다. 공무원이면서 농사짓는 아버지는 당연히 자신의 뜻을 이어받아 아들이 고향의 집에서 농사를 지을 줄 알고 있었다. 아들 김주영 또한 대구농림고등학교 축산과에 다녔으니 아버지의 그런 기대는 일견 당연했고, 합리적인 선택 같아 보였다.


그러나 아들의 반란은 시작되고, 부자간의 인연의 끈은 조금씩 갈라지고 있었다. 아들의 문학적 소질 때문이었다. 아들 김주영은 고교 때부터 대구 일간지에 단골로 시와 산문을 발표했다. 촉망받는 유능한 시인이자 문인으로 꼽혔다. 아버지는 아들 김주영의 이런 자질을 도저히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아버지는 농대로 가라고 강요했다. 아들은 문학하겠다고 반발했다. 갈등의 골은 깊어만 갔다. 호적 파낸다는 얘기까지 나왔다. 아들은 야반도주로 서라벌예대 문창과 장학생으로 합격했다. 집에 찾아 갈수 없으니 돈이 없었다. 외삼촌과 친구들에게 생활비를 얻었다. 입에 풀칠할 정도밖에 되지 못했다. 마음도, 생활도 안정이 안됐다. 아버지와는 상종도 안할 정도로 갈라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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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수봉을 배경으로. 김주영씨는 전국으로, 세계로 자연을 찾아 다닌다.

졸업 후에도 뚜렷한 직업이 없었다. 건달 비슷한 생활 연속이었다. 현실에 부딪히면서 뭔가 직업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기 시작했다. 직업 구하기 힘든 시절이었다. 할 수 없이 농고 졸업 학력으로 고향의 연초조합에 취직시험을 쳤다. 6개월 교육받고 근무를 시작했다. 그의 정신과 육체를 황폐화시킨 처음이자 마지막 직장생활이었다.


“당시 조합이나 협회는 부정부패의 온상입니다. 일제시대 때 만든 관변 단체로서 농민들 등쳐먹는 그런 인간들이 사는 곳이지요. 이들과 함께 직장생활 하는 게 한편으로는 지옥이었습니다. 이들과 대화도 안됐고, 더욱이 인생을 나눌 대상도 없었어요. 오로지 한 가지 일만 했죠. 업무 마치고 술 마시는 일 외엔 할 일이 없었어요. 엄청나게 마셨습니다. 한달에 26일을 마셨으니, 아마 상상이 안 될 겁니다. 워낙 마셔 장파열로 입원하기까지 했죠.”


어느 날 문득 깨달았다. 인생을 이렇게 허무하게 보낼 순 없고, 내가 존재하는 의미를 찾아야겠다고. 그는 10년 가까이 다니던 연초조합에 과감하게 사표를 냈다. 일년 동안 틀어박혀 습작으로 다시 소설 쓰는 작업에 돌입했다. 월간문학에 당선되고, 그 와중에 연초조합에 우여곡절 끝에 다시 복직했다. 이듬해 서울의 일간지에 연재소설을 쓰기로 하고 시골 생활을 완전 청산하고 다시 서울로 올라왔다.


그 때가 그의 나이 30대 초반이었다. 그의 본격 소설 작업이 시작됐다. 늦게 입문한 문단에 마치 한꺼번에 봇물 터지 듯 작품을 쏟아냈다. <휴면기>(1971), <깊은 강>(1972) 등을 시작으로 70년대 후반까지 매년 3편 이상씩 발표했다. 75년엔 한해에 8개의 작품을 내놓았다. 한번 터진 상상력과 창조 작업은 거침이 없었다. 79~83년 <객주>를 발표하면서도 작품에 대한 열의는 그치지 않았다. <달무리 목에 걸고>(1980), <외촌장 기행>(1982) 등을 독자들에게 선보였다.


그의 초기 작품은 인간 희화적, 풍자적 모습을 그린 작품들이 많다. 개발도상국에서 나타나는 속물적 인간 군상들이 드러내는 욕망을 풍자적으로 묘사하는데 주안점을 뒀다. 그러나 그는 풍자가 가지는 한계를 느꼈다. 재미는 있을지 몰라도, 인간의 깊이를 그릴 수 없다는 점 때문에 고민했다. 보다 진지한, 진정성을 가지고 긴장감을 주는 소설을 쓰기로 방향을 전환했다. 초기 5년간의 작품이 풍자적, 희화적 성격을 띠는 것도 그가 이러한 한계를 절실히 느꼈기 때문이다. 그 이후 풍자는 없더라도 인간이 있고, 성공이 없더라도 적나라한 욕망을 보여주는 작품을 썼다.

그가 여태까지 쓴 작품 중에 가장 애착을 가지는 것도 그 이후에 쓴 소설들이다. <객주>, <천둥소리>(1984), <홍어>(1997) 등이다. <천둥소리>는 시골에 사는 세상물정 모르는 젊은 여인이 6.25를 전후해 유린당하면서 겪는 적나라한 인간 군상들의 모습과 사회변동 상황을 잘 묘사하고 있는 소설이다. 풍자와 희화보다 인간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홍어>도 비슷하다. 집 나간 바람둥이 아버지를 기다리는 어머니의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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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라다이스 재단 바로 앞 정원에서. 서울의 명당으로 꼽히는 자리다.

그는 고희에 접어든 지금도 열정적인 활동을 끊이지 않고 있다. 그의 본업인 소설쓰기가 우선 주업이다. 현대문학에 연재소설을 쓰다 잠시 쉬고 다시 써고 있다. 모 일간지에 김주영의 그림읽기란 제목으로 상상력을 키우는 산문을 연재했다. 이번에 낸 책도 연재한 글 등을 모은 것이다.


문학을 제외한 많은 부문에 사회적으로 탁월한 기여를 한 인물을 발굴해서 연말에 시상하는 재단 이사장직도 맡고 있다. 파라다이스 문화재단이다. 특히 젊은 인사들에게 많은 기회를 주고 힘을 실어줄 작정이다. 올해 벌써 6회째를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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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와 대화를 나누며 작품의 주요 무대가 되는 지역을 답사하고 있는 김주영씨.

문학사랑이란 단체를 조직해서 문학도 서비스 차원에서 독자들에게 다가서는 작업을 독려하고 있다. 작가들의 주요 작품 무대가 되는 지역을 찾아 현지답사하고 돌아오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문경새재, 통영, 상주 등지엔 벌써 독자들과 수차례 다녀왔다. 후원업체가 있어 독자는 2만원 내외의 싼 가격에 저자의 생생한 목소리를 들으며 작품해설과 함께 주요 무대가 되는 지역을 즐겁게 찾고 있다. 독자들에게 문학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기 위해 김주영씨, 정호승씨, 성석제씨 등이 만들었다. 김주영씨는 임의 이사장을 맡고 있다. 곧 사단법인화 할 예정이다.


그 외 시간이 나면 세상을 찾아 떠나고 있다. 그 스스로 역마살이 낀 인생이라고 말한다. 점쟁이에게 점을 보거나, 관상을 보면 공통적으로 역마살을 타고났다고 한다. 그도 부인하지 않는다. 네팔 트레킹까지 갔다 왔으니 웬만한 등산객 수준이상이다.


“나이 70에 그만큼 술을 마셨으면서도 젊은 사람들한테 신세지지 않고 네팔 트레킹 다녀올 정도의 체력을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에 너무 감사하고, 스스로 선택받았다고 생각한다.”


그는 여생을 그동안 신세 진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빚을 갚고 소리 없이 남을 도우면서 살기를 원한다. 이사장을 맡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나 방랑기질이 있어 그런지 마음만큼 행동이 따르지 못한다. 그 방랑벽 때문에 그는 웬만한 거리는 걸어 다닌다. 인사동에서 장충동 사무실까지 예사로 걷는다. 종로의 노점상을 보며 우리들의 진정한 삶의 모습을 느낀다. 가식 없고 가면을 벗은 알몸의 인간 모습이다. 자연 속에서도 걷다보면 사색에 잠겨 발가벗은 인간의 모습과 순수성을 엿볼 수 있다. 지난 봄 네팔 트레킹을 다녀온 후 남다른 감동을 느껴 다시 갔다 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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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주된 관심은 인간과 자연이다.

자연을 접하고, 사람을 만나는 일이 그의 주된 관심사다. 전부 그의 상상력의 소재들이다. 책을 통해 얻는 것보다 훨씬 가치 있고 풍부하다. 무한한 상상력의 원천은 바로 자연과 사람에게서 나온다. 자연은 인간에게 무한한 교훈을 준다. 그 교훈은 바로 가식 없는 모습으로 세상을 살라는 거다. 트레킹 가는 것도 그 일환이다. 걷다보면 모든 가식이 저절로 훌훌 벗겨진다. 인간 본연의 깊은 사색에 잠긴다. 사색은 인간을 더 인간답게 만든다. 그 사색은 결국 자연과 사람의 원래 모습이다. 인간들이 잊고 산 형상을 깨우쳐 주는 게 자연인 것이다. 그 자연은 항상 작가 김주영의 가슴속에 품어져 있어 오늘도 새로운 자연을 찾아 떠돈다. 그게 70의 나이에도 풍부한 상상력으로 소설을 쓰고 우화집을 내는 원동력이다.

My name is Garden Park. First name Garden means.......

1 Comment

  1. 김규용

    03.27,2011 at 4:43 오후

    김주영작가 님을 존경하는데 이분은 왜 우리를 황폐하게한 6.25 동란을 자료로 해서 해방전의 황량한 배경을 소재로하여 해방후의 혼란상황과 6.25 전쟁을 소재로 대한민국이 얼마나 황폐하여졋고 공산군에게 유린당한 이땅의 국민들과 이르 쳐나가는대소설의 소재가 있느것을 외면 하는지 이해가 가지안읍니다 ! 누구보다도 더 자세한 경험과 자료가 있는데에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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