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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와 결혼했던 그녀 조안 리, 암벽 밧줄을 잡다.

산을 통해 신의 존재, 하느님의 존재를 느낀다면…. 누가, 어떤 사람이 그 정도로 산을 느낄까?

한국 알파걸의 원조격인 알파우먼 조안 리(63) 회장이 그렇다. 조안 리 회장의 인생은 한마디로 도전으로 점철돼 있다. 그 도전 대부분을 성공으로 이끌었다. 그것도 남성 중심적인 한국사회에서 여자의 몸으로. 그녀의 운명은 어쩌면 가톨릭 신부와의 결혼으로 세상에 떠들썩하게 예고편을 알리면서 시작했는지 모른다.

그 예고편 이전에 징조와 복선은 이미 있었다. 초롱초롱하고 똑똑한 소녀 시절, 공부 좀 하는 학생이면 누구나 명문 여중으로 진학했지만 그녀는 스스로 성심여중을 선택해서 진학했다. 가톨릭 재단에서 세운 학교다. 그녀 운명의 서곡이다. 여중 3학년 때 영세를 받기 위해 이름도 조안 리라고 본인이 직접 세례명을 지었다. 불어의 ‘잔 다르크’가 가톨릭식 발음으로 ‘요한나’가 되고, 이게 영어식 발음으로 ‘조안’이 된다. 조안 리라는 이름은, 인물은 이렇게 탄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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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안 리 회장이 인왕산에 올라 포즈를 취했다.

사회적 상황이 인간의 존재를 구속하고, 개인의 이름이 그 사람의 운명을 일정부분 결정짓는다고 보면 조안 리는 이미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짓기 시작했다. 학교 선택에서부터 개명까지. 나아가 고교도 같은 재단인 성심여고로 진학했다. 고집 세고 자존심 강하며, 어렸을 때부터 자신의 일을 알아서 한 조안 리는 고교입학해서도 공부는 곧잘 했다. 정신적으로도 꽤 성숙했다. 자연히 사람의 심리에 관심이 많았다. 서울대 심리학과 가기로 마음먹었다. 실력도 충분했다.

그러나 그녀의 운명은 그 길이 아니었다. 교장 수녀의 손에 이끌려 서강대 설립자이자 초대 학장인 케네스 킬로넨(Kennenth Kiloren, 한국명 길로연, 그녀는 그를 켄이란 애칭으로 불렀다)에게로 갔다. 교장 수녀는 그녀에게 “넌 신앙심이 약하니, 이 학교에서 신앙심을 더 키워 훌륭한 인재가 돼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그 운명도 아니었다. 그녀와 케네스 신부와의 운명적인 첫 만남에서 그녀는 한눈에 온 세상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말씀과 모습이 너무나 인상적이었고 한순간에 어린 가슴을 온통 지배해버렸다. 세속적인 말로 한눈에 빠져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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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 중 만난 등산객에세 사인을 해주고 있다.

그녀는 바로 방향을 틀었다. 서강대에 가볍게 합격하고 장학금까지 받았다. 장학생들만 따로 학장과 면담자리를 가졌다. 서로 못 알아볼 리 없었다. 훗날 케네스 학장은 그녀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다른 학생들은 모두 두렵고 어려워하는데, 조안 리는 전혀 주눅 들지 않고 당당한 모습이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그게 바로 조안 리회장의 모습이다. 남녀 성에 대한 고정관념과 이데올로기를 훌훌 던져버리고 남성보다 뛰어난 모습과 활동을 보이는 알파 걸(alpha girl). 급변하는 현대 사회에서 2007년에 나온 신조어로서 새로운 사회계층을 이르는 말이다. 이들은 그 원조격인 알파우먼이 있기에 가능했다. 한국 알파우먼의 1세대가 조안 리다. 미국에서는 콘돌리자 라이스나 마돈나 같은 인물이 꼽힌다. 알파 걸의 특징은 당당하고 적극적이며,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다. 남성과 다른 여성의 특성을 알고 적극 활용한다.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사회적 출세와 성공적인 재테크를 중요하게 여긴다. 과학, 공학, 비즈니스에 관심이 많고 이성적인 편이다. 그녀는 이 특징 대부분을 갖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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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2년부터 암벽 등반을 시작했다. 도전하면 끝을 보는 성격이다.

그녀는 입학한 뒤 케네스 신부의 한국어 교사였고, 산행 안내자였다. 서울의 모든 산을 두루 섭렵했다. 산이 그들의 데이트 코스였다. 지금 운명을 달리한 신부가 그 산에서 그녀 곁에 있을 것 같아 그녀가 산을 좋아하는 것 같다고 했다.

그녀와의 잦은 만남이 학교는 물론 교구, 나아가 교황청에게까지 소문이 났다. 세상이 발칵 뒤집혀졌음은 물론이다. 급기야 신부를 교단에서 연금하고, 정신병원에 입원까지 시킨 뒤 미국으로 돌려보냈다. 그러나 그 격리는 조안 리에게 사랑을 더욱 깊게 만들 뿐이었다. ‘길은 멀어도 마음만은’ 정도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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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밖으로 나간 한비야씨와 함께 산행하면서.

학교에서는 소란을 일으켰으니 자퇴하라고 압력했다. ‘내가 왜 그만 두냐’는 식으로 오기로 버텨 졸업했다. 그 해 바로 미국으로 날아갔다. 주변의 탄원으로 여권과 비자가 나오지 않았지만 새 학장을 찾아가 ‘나를 그냥 보내주는 게 소문을 없애는데 더 좋을 것’이라고 담판지어 끝내 비자를 받아냈다. 도전하면 포기하지 않는 그녀다.

교황청의 결혼 허락까지 받아내고 미국 성당 안에서 조촐하게 식을 올렸다. 그 때 그녀 나이 23세였고, 신부는 49세였다. 마침내 도전을 성공시켰다. 그러나 신부의 경제적 능력은 제로였다. 일주일간 고민 끝에 냉정하게 결론 내렸다. “남자가 못 벌면 내가 벌겠다”고. 그녀의 세상에 대한 선전포고(?)였다.


미국에서 결혼직후 일리노이대학원에서 심리학 석사을 받았다. LA주정부 민원 담당 공무원으로 첫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약 3년간 공무원 생활을 끝내고 한국 조선호텔 홍보 코디네이터로 자리를 옮겼다. 그게 73년이다. 한국에 홍보란 이름조차 생소한 시절 그녀가 새로운 장을 열었다. 갈등도 있었지만 여자의 섬세함으로 조직과 사람마음을 장악해 나갔다. 업무능력도 자연히 인정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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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992년 아버지 부시 대통령이 방한 했을 때.

그러나 그녀는 여기서 안주하지 않았다. 그녀는 기본적으로 편안한 것을 싫어한다. 편하고 쉬우면 오히려 뭔가 불안해진다. 이게 그녀가 가진 정신력이다.

4년여 간의 코디네이터 생활을 청산하고 한국 사회 첫 홍보회사를 만들었다. 32세에 스타 Executive-service를 설립한 게 77년이다. 초기엔 호텔에 오는 비즈니스맨들을 위한 서비스회사였다. 사업은 번창했다. 돈도 많이 벌었다. 업종을 전문화 하기위해 국제 홍보에 초점을 맞추기로 했다. 회사명도 스타커뮤니케이션으로 바꿨다. 지금까지 이 회사와 거래한 기업도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스위스 연방은행, 제너럴 일렉트릭, 루비똥, 비자 인터내셔널, 유나이티드 항공 등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기업이 수두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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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린턴 대통령을 만나서.

그녀의 성격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는 일이 차세대 전투기(Fighter Experimental)사업에서 벌어졌다. 미국의 맥더널 더글러스사가 스타커뮤니케이션에 한국의 차세대 전투기사업인 율곡 사업에 지명될 수 있도록 홍보를 부탁했다. 다른 몇 군데에서 기안을 올렸다. 기안서는 제일 훌륭했다. 당연히 선정될 줄 알고 있었는데, 결정은 계속 미뤄졌다. 그래서 물어봤더니, 한국은 남성위주의 사회여서 여성이 사장으로 있는 회사를 쓰면 과연 홍보효과가 제대로 있을 것인가를 놓고 내부 논의 중이고, 회사 관계자들은 사장이 어떤 사람인가 파악하기 위해 방문하고 싶다는 답이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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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왕산 정상에서 시내를 내려다보며.

조안 리 회장은 일언지하에 “나는 내가 여자란 사실을 바꿀 수 없으니 당신네들이 결정되면 나한테 연락해라. 만약 그 와중에 회사 관계자가 다시 나를 보기 위해 찾아온다면 시간당 300달러를 내야할 것이다”라고 말하고 끊어버렸다. 그리고 잊었다. 일주일 뒤에 선정됐다는 연락이 왔다. 왜 뒤늦게 결정했냐고 물었다. 엄청난 금액이 오가는 율곡 사업을 한칼에 잘라낼 수 있는 여자 같으면 아무리 한국사회라도 같이 사업할 수 있을 것 같아 결정했다는 답이 돌아왔다. 그녀의 냉철한 판단력과 추진력이 사업을 성공으로 이끈 것이다.


사실 그녀의 어릴 적 꿈은 정치인이었다. 알렉산더, 시저 등 위인전을 즐겨 읽었다. 그러나 그녀의 결론은 정치는 타협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그녀 스스로 타협하기를 싫어했다. 그녀가 정한 원칙이 있을 뿐이었고, 그 원칙을 지키면서 일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녀의 원칙은 첫째, 국가나 사회가 필요로 하는 일을 하면서 돈을 벌겠다. 둘째, 종교적 양심에 어긋나는 일은 절대 하지 않겠다. 셋째, 학연, 지연, 혈연하는 ‘연’없이 실력으로 제대로 해보겠다는 것이다. 그녀는 이 원칙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켰다. 누구나 사업하려는 사람은 본인의 원칙을 가지고, 그 원칙을 꾸준히 지키면 성공한다고 조언한다. 특히 미래사회는 여성다운 섬세함을 갖춰야 유능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역시 알파우먼 다운 충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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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왕산을 오르다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다.

그녀의 능력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주한 미 상공회의소 수석부회장 등을 거쳐 지금은 월드 미스 유니버시티 세계조직위원회 겸 세계 대학생 평화봉사 사절단 위원장과 국제백신연구소 모금 홍보 특별고문으로 활동하고 있다. 사업하면서 세계 50여 개국을 오가며 쌓은 인맥은 나이 50을 넘기면서부터 봉사와 헌신의 삶으로 활용하고 있다. 어쩌면 많은 사람이 공유했어야 할 신부의 사랑을 혼자 독차지했던 여성 사업가가 뒤늦게 그 사랑을 남편 대신 베풀고 있는 셈이다. 이 베품과 헌신의 삶도 운명적인 사건으로 발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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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왕산 약수터 쉼터에서.

지난 2000년 업무 차 독일에 갔을 때 일이다. 호텔 욕실에서 바쁘게 전화 받으러 나오다 넘어져 갈비뼈가 부러졌다. 그 부위만 치료하고 지나쳤다. 한국에 돌아와 몇 달 뒤 두통으로 병원에 갔다. 호르몬 등 온갖 검사 다 하고 이곳저곳 촬영해 봐도 아무 이상 없었다. 마지막으로 의사가 퇴근하기 직전 농담 삼아 뇌MRI 검사를 해보자고 했다. 3개월 전 독일에서 넘어졌을 때 부딪힌 뇌에서 서서히 피가 나와 응고되기 시작했던 게 나왔다. 조금 더 늦었으면 세상을 달리할 순간이었다. 즉시 입원했다. 마침 미국에 있는 딸도 한국에 와 있을 때였고, 딸과 잘 아는 친구 아버지인 명망 있는 의사와 쉽게 연결되어 수술을 받았다. 우연 치고는 너무 짜 맞춘 듯했다.


완쾌된 지금 봉사의 삶을 살고 있는 그녀는 “어쩌면 내 인생은 너무나 운명적이라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중학교의 선택, 케네스 학장 신부와의 만남, 미국으로 유학, 취업 및 회사 창업, 봉사와 헌신의 삶 등 짜여진 각본에 의해 움직여진 느낌이라는 것이다. 그녀의 얼굴엔 지금 한결 여유가 있어 보인다. 그 이면엔 도전적이고 치열하게 살았던 흔적들이 언듯언듯 남아있다. 도전정신은 아직 남아 지난 2002년부터 암벽등반을 시작했다. 적지 않는 나이에 못 말리는 열정이다.


많은 사업을 하고, 세계 각국을 돌아다녔지만 한국의 산만큼 그녀의 마음을 끄는 것도 없다. 네팔, 아프리카, 미국, 유럽, 뉴질랜드 등 세계의 웬만한 산을 트레킹과 사파리를 통해 다 경험했다. 하지만 한국의 산은 언제나 포근하고 친숙하게 다가온다. 그녀는 산을 통해 하느님을 보고 존재를 느끼기 때문이다. 아니 어쩌면 케네스 신부와의 다니던 모습을 상상하고 있는지 모른다. 아련한 기억에 남는 그 옛날 애틋한 감정으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40년 전으로 돌아가서 말이다. 그녀는 “내 곁에 항상 켄이 있는 것 같다”고 했다. 그게 바로 산을 통해서 얻는 만족감일 것이다. 산은 그녀에게 남편이고, 하느님이고, 신이었던 것이다.

My name is Garden Park. First name Garden mea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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