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 연출가 이윤택 교수 “산은 사색의 장이며 버티는 힘을 준다”


이윤택. 두 말할 나위 없이 한국 최고의 전방위 문화예술가다. 문화의 균형을 잡아주며, 시대를 앞서가는 실험정신이 탁월한 예술가이기도 하다. 이 시대 최고의 연출가, 실험연극의 기수, 대표적 문화 게릴라 등 그를 수식하는 말들은 너무나 많다.

실제로 그가 연극계에 본격 몸을 던진 86년 이후 문화 예술계에 주어지는 상은 대부분 수상했다. 86년 ‘우리는 지금 제네바로 간다’로 각본상 수상을 시작으로 89년 ‘오구-죽음의 형식’으로 한국평론가 협회 최우수 예술가상, 91년 ‘길 떠나는 가족’으로 서울연극제 대상, 2002년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등 문화의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면서 주어지는 상들을 모조리 휩쓸었다. 굵직한 상만 30개 가까이 된다. 한마디로 탁월한 꾼이다.


그는 연극인이자, 연출가, 영화감독, 시인, 극작가, 대학교수, 신문기자, 우체국 공무원, 한일합섬 염색가공과 직원, 한전 영업소 직원, 룸펜 등 보통 사람은 한두 개로 끝날 직업을 거의 10개 이상을 경험하면서 세상의 여러 단상을 다 지켜봤다. 연극을 만드는, 아니 세상을 바라보는 그의 힘이자 밑천이다. 그의 다양한 경험의 장면을 연극의 장면과 같이 하나씩 연상하면서 인간 이윤택과 예술인 이윤택을 그려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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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면1, 2007년에 동국대 연극영상학부 이윤택 부교수는 철저히 현장위주의 수업방식으로 진행했다. 그는 처음부터 학생들에게 선언했다. “난 현장 작업에 대한 훈련을 시키러 온 사람이다.” 학생들도 오히려 실전 냄새가 물씬 나는 수업을 더 좋아했다. 이윤택 교수는 제작실습 수업을 한밤에 시작해 새벽까지 밀어붙인 적도 있었다. 학생들은 프로가 된 기분이 들었다. 동국대는 처음으로 교수평가를 공개적으로 실시해 발표했다. 이윤택 교수가 전체 2위를 차지했다. 예술대에선 당연히 1위다. 베스트 티칭 어워드(Best Teaching Award) 상까지 받았다. 그의 삶과 방식이 먹혀든 반증이다. 세상을 제대로 읽고 있는 것이다.


장면2, 80년대 후반 민중이란 두 글자가 이 시대의 화두로 있을 때였다. 모든 사람이 민중이란 이름으로 거리로 쏟아져 나와 데모를 했다. 그와 함께 있는 배우들도 거리로 나갔다. 그는 발끈했다. “지금 뭐 하고 있느냐, 당신들이 ‘민중철새’ 운동권이냐. 연극하러 돌아가자.” 모두 데리고 들어가 연극연습을 했다. 이어 90년대 민중이란 화두가 소강상태에 있을 때였다. 사랑과 화해와 공존이 새로운 화두로 떠올랐다. 모두가 그 쪽으로 기웃거리고 쏠렸다. 그는 그 때 정치극을 주로 만들었다. 사람들은 조금 의아해 했지만 먹혀들었다. 정치적 허무주의자라는 표현까지 얻었다. 사람들이 한쪽으로 쏠릴 때 그는 본능적으로 다른 쪽을 본다. 휩쓸리지 않는다. 균형을 맞추는 게 체질화 됐다. 그 스스로도 말했다. “난 현상을 잘 읽는다. 세상의 빈 곳을 잘 찾아다니는 사람이다. 내가 성공했다면 바로 그게 비결이 아닐까 생각한다.” 한마디로 균형감각을 갖춘 허무주의자다.


장면3, 79년 부산일보에 기자 모집 공고가 났다. 그의 학력으로는 지원할 수 없었다. 그의 최종 학력은 방송통신대 초등교육과 졸업이다. 모집공고엔 4년제 대학 졸업자나 동등 학력(學力) 소지자로 나와 있었다. 보통은 학력(學歷)으로 쓴다. 그는 바로 지원했다. 누군가의 실수로 이윤택에게 신문기자로 일할 기회를 제공한 것이다. 필기시험은 1등 이었다. 사장이 면접할 때 “왜 지원했느냐”고 물었다. “난 그만한 학력(學力)이 된다고 생각한다”고 대답했다. 포복절도했다. 무사히 입사했다. 편집기자로 혹독하게 훈련받았다. 글자 한자까지 가지는 의미에, 운율까지 맞추는 작업을 거쳤다. 그는 이미 시인으로 등단한 상태였지만 언어를 더 갈고닦는 계기가 됐다. 6년 반을 보내고 사표를 냈다. 한 달이나 지나서 사표수리 됐다. 그만큼 회사로서 보내기 싫었던 인물이었다. 그는 신문사 생활을 “남들은 6년여 동안 대학, 대학원을 다니지만 난 신문사에서 지낸 6년여의 세월이 나에겐 대학, 대학원이었다”고 평가했다. 그만큼 그의 인생에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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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태풍 연출 당시.

장면4, 룸펜 생활을 접고 우체국 공무원 생활하다 관두고, 한일합섬 염색가공과 염색기사로 있을 때였다. 76년 즈음이었다. 여공들이 하루 10시간 이상씩 한자리에 서서 작업하는 현장을 목격했다. 노동 강도도 문제였지만 주임이란 사람들은 여공들에게 성희롱을 예사로 일삼았다. 지나치면서 가슴이나 엉덩이 주무르는 건 약과였고, 아침에 일어나 주변을 보면 천이나 수건엔 정액이 묻어있었다. 도저히 그런 생활을 보고 있을 수 없었다. 제일 심한 주임을 철제 염색봉으로 후려치고 도망갔다. 동료의 도움으로 주임이 없을 때 몰래 짐을 챙겨 나와 염색기사 생활도 3개월 만에 끝냈다.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여성이 성녀나 창녀 같은 극단적인 인물의 성향에 영향을 미쳤을지 모른다.


그의 이러한 다양한 경험은 어린 시절 어려운 생활과 역마살 있는 아버지의 생활과도 무관하지 않을 듯하다. 그 스스로도 “유랑광대 기질은 타고난 것 같다”고 했다. 아버지가 무척이나 싫었다지만 역시 피는 속일 수 없는 것이다.

그의 아버지는 바람처럼 산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는 바람의 아들인 셈이다. 그 바람의 아들은 역마살로 피를 이은 게 아니라 문화예술계의 다양한 장르로 능력을 전화(轉化)한 것이다. 그의 아버지는 18세에 친구와 함께 일본으로 밀항할 정도였다. 집에서 생활한 적이 거의 없었다. 그가 초등학교 시절 집을 나가는 아버지에게 내일 소풍 간다고 하자, 그냥 휑하니 가버렸다고 한다. 며칠씩 들어오지 않은 것도 모자라 몇 년씩 모습을 보이지 않은 것도 예사였다. 몸의 문신을 볼 때 ‘일본 야쿠자의 일원이었지 않았나’ 하고 그는 추측했다.


그는 어머니에 의해 컸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대신해서 보따리 옷장수 등으로 생계를 이어갔다. 초등학교에 입학했지만 한글을 몰랐다. 학교에서 한글을 모르는 애들을 따로 모아 방과 후 수업을 했다. 7 ․ 5조 운율에 맞춰 한글을 배웠다. 언어의 정제, 조탁성도 자연스레 체득됐다. 한글을 깨치면서 시인의 자질을 드러냈다. 경남고 시절에 유감없이 발휘된다.


어릴 때부터 노는 게 주특기라고 할 정도였지만 공부는 곧잘 했다. 한글을 학교 들어와서 깨쳤지만 공부는 전혀 뒤지지 않았다. 경남고에 무난히 입학했다. 그 동네 한명뿐이었다. 교복 한번 만져보자고 모이곤 했다. 문예반에 들었다. 경남고 문예반 출신 시인이 안철환, 이유경씨 등이 있다. 그만큼 언어에 대한 감각을 지닌 사람들이 많았다. 당시 국어 교사가 와세다 불문과 출신의 길창순 선생이었다. 연극에 일가견을 가지고 있었다.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이윤택은 학교에서 시험을 치면 국어는 전교 1등,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수학은 꼴찌에 가까웠다. 그래도 성적은 중간 이상이었다. 서울대에 지원했다. 떨어지리란 생각은 별로 들지 않았다. 그러나 떨어졌다. 그의 인생의 큰 전환점이 된 낙방이었다. 떨어졌지만 우스운 사건이 하나 발생했다. 모 대학입시 잡지의 모범답안에 그가 쓴 국어 답이 그대로 게재돼 있었다.


어려운 가정형편상 재수할 상황은 못 됐다. 그의 다양한 인생내력의 출발점이기도 했다. 룸펜 생활의 연속이었지만 시작(詩作)과 연극 활동은 계속 했다. 72년 우연한 기회에 서울연극학교를 접하게 된다. 합격했지만 입학할 생각은 별로 없었다. 학교에서는 ‘ 왜 오지 않느냐’고 했다. 2년제였지만 강사진은 연극계에서 내로라하는 사람들이 다 있었다. 학장은 유치진 선생의 장남인 유덕형 선생이었다. 돈이 없어 못 다닐 지경이었다. 자퇴했지만 청강생으로 수업은 들었다. 부산으로 내려와 73년 겨울 시민회관 소극장에서 처음으로 작품을 올렸다. 몰리에르의 ‘억지로 의사가 되어’ 연극에 제작, 주연까지 맡아 공연했다. 대실패였다. 뒷문으로 나가면서 ‘10년 뒤에 연극계로 꼭 복귀하겠다’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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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가폰을 잡은 이윤택 교수.

그의 룸펜 생활은 계속 됐다. 음악다방에 하루 종일 죽치고 있었다. 클래식 음악에 도통했다. 데캉당스, 무정부주의, 룸펜 등이 당시 그의 생활을 적확하게 묘사할 단어였다. 군에 갔다. 3대 독자에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1년 2개월 만에 의가사 제대했다. 어머니까지 폐병으로 앓았다. 생활이 말이 아니었다. 돈이 필요했다. 취직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9급 공무원 시험을 쳤다. 첫 직장이 우체국이었다. 그의 직업내력의 시작이다. 특수 우편물 취급하면서 꿈은 잃지 않았다. 연극작업과 글쓰는 작업을 빠트리지 않았다.


우체국 직원, 한일합섬 염색기사 등을 거쳐 한전 밀양영업소에 자리를 잡았다. 동시에 방송통신대 초등교육과에 진학했다. 어릴 적 꿈은 국어 선생님이었다. 그 꿈 실현을 위해 한 발짝 더 다가섰다. 그러나 그의 운명은 그가 교사되는 걸 내버려두지 않았다. 도깨비 불, 천체수업 등의 시로 방송통신대 제1회 문학상을 수상했다. 심사위원이 시인 황동규씨였고, 당시 통신대 학보사 기자가 이승복 시인이었다. 전봉근 시인의 추천을 받아 시인으로 등단했다. 하지만 연극에 대한 미련은 접을 수 없었다. 밀양에서의 생활이 그의 마음의 안식처가 됐다. 그가 당시 받았던 밀양에 대한 향수가 너무 깊어, 이후 연극연출을 하면서 공동체를 만들어 한국 제일의 연극촌으로 키우고 있다. 그의 집도 밀양이다.


방송대를 졸업하고 신문기자로 입사했다. 그러나 이것도 그가 73년 연극에 실패하고 난 뒤 다시 복귀하리란 각오의 한 과정이었다. 그는 드디어 86년 사표를 내고 받은 퇴직금 700만원으로 연희단 거리패를 조직하고 부산에 가마골 소극장을 사들여 다시 연극에 도전했다. 실패를 몰랐다. 더더욱 도전적이었고 실험적이었다. 연극의 대중화에 크게 기여했다.


그는 특기를 독심술이라고 했다. 자신의 장점을 스스로 독심술이라고 말할 정도면 특이했지만 상당한 듯했다. 그의 말을 들으니 이해가 됐다. “연출하다보면 배우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잘 읽혀지더라. 뿐만 아니라 연출가는 자기 생각만 하지 말고 타인에 대한 관심을 기울여야만 성공적인 작품을 내놓을 수 있다.” 한마디 덧붙였다. “나는 혼자 있으면 심심하고 같이 있으면 재미있는 사람이다.” 바로 그의 인생과 연극을 말하는 것 같았다.


그는 고교시절부터 산에 자주 올랐지만 신문사에 있으면서 본격적으로 다녔다. 그의 대표작 중의 하나인 바보각시는 월악산 오르는 중에 영감을 받았다. 바위에 새겨진 마애불에 얽힌 설화를 듣고 쓴 작품이다. 영남의 산과 한국의 유명한 산은 대부분 한번씩은 가봤다.


그는 산 정상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산에 올라도 항상 정상 주변에서 머문다. 그의 허무주의의 발로이기도 하고, 겸손의 다른 형태이기도 하다. 정상에 서면 더 이상 오를 수 없다는 사실 자체가 슬프다는 거다. 주변을 빙빙 돌면서 정상을 바라보는 것만큼 좋은 게 없다고 한다.


그는 항상 2인자라고 자처했다. 1인자는 그의 스승 오태섭 선생이라고 추켜세웠다. 야망인지 겸손인지, 진심인지 엄살인지 아무도 모른다. 단지 최선을 다해 예의를 갖추는 게 바로 이윤택이다. 이것도 산에 오랫동안 다니면서 쌓인 내공이다. 산에 가서 정상엔 오르지 않고 주변에 머물려 정상을 바라보는 그의 습성 때문일 것 같기도 했다.


산은 그에게 버티는 힘을 줬다고 강조했다. 삶의 들끓는 현장에서 피곤과 스트레스에 시달릴 때 산에 가면 스스로 버티는 힘을 받는 걸 경험한다. 덤으로 사색할 시간도 얻는다. 삶의 현장과 일정시간 거리를 두면 충전의 차원이 아니더라도 힘을 받는다. 그가 산에서 얻은 힘이다.


요즘은 마음은 산에 있지만 몸은 떨어져 있다. 그가 이룰 꿈이 너무 많아 너무 바쁘다. 그는 지금 한국의 판타지를 만들 생각으로 가득 차 있다. 반지를 찾는 외국의 어설픈 판타지가 아닌 우리 전통 설화에 바탕을 둔 어머니를 찾는 판타지를 몇 년 내 선보일 계획이다. 반지 찾는 허무함보다 훨씬 더 감동을 주며 인간적인 작품을 한국과 전 세계에 내놓을 작정이다. 다른 하나는 김수로왕의 왕비인 인도의 허왕옥이 어떻게 해서 신라까지 왔는지에 대한 판타지를 뮤지컬이나 소설로 쓸 생각이다. 작품구상은 끝났고 자료도 웬만큼 수집된 상태다.


그의 목표는 일단 여기까지다. 이루고 나면 또 알 수 없다. 새로운 것에 대한 끊임없는 도전, 바람과 같이 떠돈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피는 어느 형태로 전화될 지 모른다. 산은 그에게 항상 도전하지만 2인자로 자리매김하면서 1인자를 조망할 수 있도록 가르친다. 산이 주는 또 다른 교훈이다. 그가 더 도전할 수 있는 힘의 원천이기도 하다.

My name is Garden Park. First name Garden means.......

1 Comment

  1. 인댜

    07.29,2009 at 10:04 오전

    존경하는 연출가이십니다. 가장 한국적이면서도 가장 현대적인 작품 세계 좋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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