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서울지역으로 뻗어 나온 산줄기의 흐름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함경도 안변부 철령에서 나온 한 맥이 남쪽으로 500~600리 달리다가 양주에 와서 자잘한 산으로 되었다가, 다시 동쪽으로 비스듬하게 돌아 돌면서 갑자기 솟아나 도봉산의 만장봉이 되었다. 여기에서 동남방을 향해 가면서 조금 끊어진 듯하다가 다시 우뚝 솟아 삼각산 백운대가 되었다. 다시 남쪽으로 내려가 만경대가 되었는데, 한 가지는 서남쪽으로 뻗어갔고, 다른 한 가지는 남쪽으로 뻗어 백악(북악)산이 되었다. 백악산은 형세가 하늘을 꿰뚫는 목성의 형국으로 궁성의 주산이라고 한다. 동․남․북쪽은 모두 큰 강이 둘렀고, 서쪽으로 바다의 조수와 통한다. 여러 곳 물이 모두 모이는 그 사이에 백악산이 서리어 얽혀서 온 나라 산수의 정기가 모인 곳이라 일컫는다.’
도봉산 포대능선으로 등산하는 등산객들과 그 위로 도봉산 정상인 만장봉이 우뚝 솟아 있다.
북한산으로 넘어가기 전의 산인 도봉산의 도봉이란 이름은 조선왕조를 여는 길을 닦았으니 도봉이고, 뜻있는 지사들이 학문을 연마하고 민생을 구제하고자 도(道)를 닦았다고 도봉이라 붙였다고 한다. 실제로 도봉산에 있는 천축사, 회룡사 등 사찰에는 이성계의 왕조 창업과 관련하여 무학대사의 중창기록이 있다. 경관이 뛰어난 계곡에는 조선 중기 조광조를 모시는 도봉서원이 건립되어 국사를 논하기도 했다. 이 서원은 서울 지역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다.
포대능선 바로 아래 있는 망월사. 현판은 청나라의 위안스카이가 썼다고 한다.
도봉산에는 도봉주능선, 오봉능선, 송추남능선, 보문능선, 다락능선, 포대능선, 회룡능선 등 여러 능선이 있다. 그 중 대표적인 능선으로 포대능선과 다락능선을 꼽는다. 포대능선과 다락능선은 도봉주능선 못지않게 도봉산의 전체 경관 조망이 가능하고, 스릴 있는 등산로와 노송이 우거진 숲속길을 동시에 즐길 수 있는 등산로이기 때문이다.
다락능선에서 바라본 망월사와 포대능선.
도봉산은 한북정맥 연봉을 따라 내려오다 북한산에 이르기 전에 화강암으로 된 봉우리가 겹겹이 우뚝 솟아 그 위세를 과시하는 산이다. 그 겹겹이 우뚝 솟은 자운봉(도봉산 젇상 739.5m), 선인봉, 만장봉 등의 봉우리를 만들기 위한 사전 정지작업을 한 곳이 바로 포대능선이다.
포대능선은 이전에 대공포대가 있었던 649봉에서 자운봉과 마주보는 신선대까지를 말한다. 포대능선이란 이름도 대공포대가 있었기 때문에 유래했다.
도봉산의 정상 봉우리들인 만장봉, 자운봉, 선인봉이 삼각 모양을 이루고 있다.
도봉산 정상 봉우리에 대한 설명 안내판.
포대능선을 넘어갈 때는 649봉에서 신선대 방향으로 남하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신선대 넘어가기 바로 직전에 다소 위험한 등산로인 Y계곡은 신선대 방향으로 일방통행이다. 신선대에서 포대능선 방향으로 넘어가려고 하면 공단 직원이 진입 직전 그 앞에서 통제를 한다. 특히 주말에는 공단 직원이 항상 지키고 있다. Y계곡은 철밧줄을 잡고 겨우 오르는 길이어서 초보자에게는 매우 위험하다. 뒤로 돌아가는 우회 등산로도 있다. 우회 등산로와 Y계곡으로 가는 등산로 갈림길에 이정표가 있기 때문에 원하는 길로 선택해서 가면 된다.
도봉산에는 유난히 소나무가 많다.
바위 옆 노송이 더욱 운치를 자아내고 있다.
포대능선 바로 아래에 있는 망월사는 신라 선덕여왕 8년(639년)에 해호(海浩) 스님이 창건한 절로 전한다. 당시 해호 스님이 머물렀던 동대(東臺)의 옛 산성 이름이 망월성이었기 때문에 망월사라고 했다고 한다. 이 절은 이름 있는 선원으로서 매우 전통이 깊고, 근대의 고승인 만공(滿空)․한암(漢巖)․성월(惺月) 등이 후학들에게 선(禪)을 가르친 곳이기도 하다. 신라 말기에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가 이곳에 은거했다고 하며, 고려 문종 20년(1066년)에는 혜거(慧炬)국사가 절을 중창했다. 문화재로는 1793년에 건립한 천봉탑과 천봉탑비가 있고, 부도와 탑다라니판 1매 등이 있다. 특히 망월사 현판은 청나라 황제 위안스카이(袁世凱)가 직접 썼다고 한다.
우이능선에서 바라 본 도봉산 주능선과 정상 봉우리들.
포대능선의 바로 옆에 있는 다락능선은 서울시 도봉구와 경기도 의정부시의 경계를 이루는 능선이다. 다락능선이란 이름의 유래는 옛 다락원이 이곳에 위치하여 다락능선으로 붙여졌다고 한다. 능선 상에는 작은 암봉들과 까다로운 바위길의 연속이다.
등산로에는 바위 사이로올라가거나,가파른 바위 위로 올라가는 코스도 많다.
다락능선을 향해 올라가는 길에 저 멀리 도봉산 정상 자운봉이 보인다. 그 옆으로 만장봉, 선인봉 세 봉우리가 연달아 우뚝 솟은 모습이다. 화강암의 희고 큰 바위벽이 하늘을 향해 치솟아 만장봉이 되고, 높은 산봉에 붉은 빛의 아름다운 구름이 걸리니 자운봉이라 했다.
경관이 뛰어난 계곡에는 유희경, 송시열, 이재, 김수항 등이 도봉산 계곡에 침류대․침류당을 마련하고 시화를 즐기고 암벽에 이들이 남긴 글귀들이 아직 남아 있다.
도봉산 정상을 지나 우이능선으로 가는 등산로는 여성봉과 오봉으로 가는 갈림길이 나온다.
도봉산 정상의 장엄한 봉우리들과 포대능선의 시원한 능선길.
우뚝 솟은 정상 봉우리는 언제 봐도 시원하다. 정상 봉우리와 도봉산 산세에 대한 설명.
우이암 능선에서 저 멀리 오봉이 보인다.
포대능선의 우람한 모습.
우이암.
바위를 뚫고 소나무가 솟아나 있다. 소나무가 끝까지 자라 바위가 갈라질까? 아니면 결국 바위는 그대로 유지하고 소나무가 고사할까? 지나가는 등산객이 내기를 걸었다. 과연 누가 이길까? 여러분들의 의견은 어떻습니까?
무
08.08,2010 at 7:46 오전
망월사 현판은 청나라 황제 위안스카이(袁世凱)가 직접 썼다고 한다
위안스카이 (袁世凱(원세개) ; 1859~1916.6.6)
중국의 군인 ·정치가로서 자는 웨이팅[慰亭]이고, 호는 룽안[容庵]이다. 허난성[河南省] 샹청[項城] 출생이다. 과거에 실패한 뒤 경군통령(慶軍統領)인 우창칭[吳長慶]의 막하에 들어가, 1882년 우를 따라 임오군란의 일어난 조선에 부임하였다. 조선 궁정의 전쟁에 개입하였고, 1884년에는 이홍장(李鴻章)의 명을 받아 조선 주재 총리교섭 통상사의(總理交涉通商事宜)가 되어 서울에 주재하며 조선의 내정 ·외교를 조정 ·간섭하고 청나라 세력을 부식(扶植)하고 일본에 대항하였다. 1894년 청일전쟁에 패퇴한 뒤 직례안찰사(直隷按察使)가 되었고, 톈진[天津] 부근에서 서양식 군대를 훈련시켜 돤치루이[段祺瑞] ·펑궈장[國璋] 등의 부하를 양성하여 북양군벌(北洋軍閥)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이것이 훗날 위안스카이의 정계진출의 초석이 되었으며 이곳에서 양성된 부장(部將)이 민국(民國) 성립 후의 북양군벌의 수뇌가 되었다.
1898년 무술변법(戊戌變法:百日改革) 때에는 탄쓰퉁[譚嗣同] 등 개혁파의 부탁을 받았으나 그들을 배반하여 변법을 실패시키고, 서태후(西太后)의 신임을 얻어 산둥순무[山東巡撫]로 승진하였다. 1900년의 의화단(義和團)의 난 때에는 산둥성에 있으면서 의화단을 진압하고 외국인을 보호함으로써 열강의 신임을 얻었다. 1901년 이홍장이 죽은 뒤 그의 뒤를 이어 직례총독(直隷總督) ·북양대신이 되어 자기 세력을 확대시켜 나가며, 자기 밑의 신식군대, 즉 신건(新建)육군을 증강시켜 일종의 독립정권을 형성하였다. 그러나 청나라 귀족들의 시기를 받아 외무부 상서(尙書), 군기(軍機)대신으로 전보되었고, 1908년 선통제(宣統帝)가 즉위한 뒤 섭정이던 순친왕(醇親王)의 명령으로 정계를 물러나 있었다. 1911년 신해혁명 발발로 다시 군사의 전권을 장악하게 되었고, 11월 내각총리대신이 되어 청나라 조정의 실권을 잡았다. 그는 청나라의 무력(無力)과 혁명군의 약체를 간파하고 혁명군과 연락하는 한편, 황제를 퇴위시켰다.
무
08.08,2010 at 7:46 오전
즉, 당시 긴박하게 진행되는 상황에서 위안스카이는 보수세력이나 혁명세력 모두에게 나라의 분열을 막고 평화롭게 사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로 간주되었다. 그결과 베이징의 청 황실과 난징[南京]의 중화민국 정부 양자가 모두 위안스카이가 중화민국의 초대 대총통으로 취임하는 것에 동의했다. 당시 국고는 텅 비어 있었고, 각 성은 지방군벌이 장악하고 있었으며 헌법은 제정중이었다. 그는 새로 구성된 의회가 국익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대규모 해외차관 도입계획이 의회의 반대에 직면하자, 그는 국민당의 당수 대행인 쑹자오런[宋敎仁]을 무자비하게 암살하고 의회의 분열을 책동했다.
마침내 그는 혁명파의 임시 대총통 쑨원[孫文]을 사임시키고 1912년 2월 임시총통에 취임함으로써 중국을 정식 탄생시키고 수도를 난징[南京]에서 베이징[北京]으로 옮겼다. 그 뒤 1913년 3월 국민당 당수 쑹자오런[宋敎仁]을 암살하고 다수파인 국민당을 탄압하였으며, 열강과 차관협정을 맺어 그 힘으로 리례쥔[李烈鈞] ·보원위[柏文蔚] 등의 토원군(討袁軍)을 진압하였다. 이것을 제2혁명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 해 10월에 정식으로 초대 대총통에 취임, 국민당을 해산시키고 대총통선거법을 개정하여 독재체제를 확립하였다.
황제가 되려는 야심을 품고 1915년 5월 일본의 21개조 요구를 받아들였으며, 황제추대운동을 전개시켜 1916년 1월 스스로 황제라 칭하고, 연호를 홍헌(洪憲)으로 개원(改元)한다고 선언하였다. 1915년 윈난[雲南]봉기를 계기로 도처에서 일어난 반원(反袁)운동의 확대(제3혁명)로 인하여 영국 ·러시아 ·일본 등 주변 강대국도 황제제도 취소를 권고, 1916년 3월 황제제도 취소를 선언하였다. 그 후 계속되는 반원운동의 소용돌이 속에서 죽었다.
<두산대백과사전>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