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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_construct()
를 사용해주세요. in /webstore/pub/reportblog/htdocs/wp-includes/functions.php on line 3620 홍길동은 의적일까, 도적일까?… 장성 축령산 자락에 홍길동생가터 복원 - 마운틴
홍길동은 의적일까, 도적일까?… 장성 축령산 자락에 홍길동생가터 복원


홍길동이 의적일까, 도적일까? 도적과 의적은 똑 같은 행위를 두고 다른 가치와 입장에서 평가할 때 달리 표현될 수 있는 개념이다. 조선 후기 실학자인 이익은 그의 실학서 <성호사설>에서 연산군 때의 홍길동을 명종 때의 임꺽정, 숙종 때의 장길산과 함께 조선시대 3대 도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 연산군편(1500년)에서 ‘강도 홍길동이 옥정자와 홍대 차림으로 첨지라 자칭하며 대낮에 떼를 지어 무기를 가지고 관부에 드나들며 기탄없는 행동을 자행하고 있습니다’라는 기록이 나온다. 이외에도 <연산군일기>와 <중종실록>에 ‘강도’ 홍길동에 관한 행적이 여러 차례 언급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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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군에서 세운 홍길동생가터 복원 기념비.

이후 홍길동은 허균, 임꺽정은 홍명희, 장길산은 황석영이라는 소설가를 만나 소설 속의 ‘의적’으로 되살아났다. 이같이 여러 문헌에서 보듯 홍길동은 역사상 실존했던 인물이며, 시대를 뛰어넘어 도적과 의적으로 넘나들고 있다.


그 홍길동이 장성 축령산 언저리에서 ‘도적’이 아닌 ‘의적’과 민중의 영웅으로 조명되고 있다. 장성의 홍길동은 동서로 신출귀몰하게 출현하여 봉건제도에 맞서 만민평등의 이념으로 활빈당을 이끌고 이상국가를 건설한 인물로 묘사돼 있다. 기록보다는 소설 속의 인물에 가까운 홍길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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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에도 눈이 한껏 내려 홍길동생가터에를 덮고 있다.

홍길동은 조선 세종 22년(1440) 장성현 아치실에서 태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본 오키나와 박물관에 소장된 자료엔 1443년으로 기록돼 있다. 일본의 기록은 나중 홍길동이 일본에서 활동한 것으로 묘사돼 있다. 자세한 설명은 차차 설명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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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길동생가터의 뒷문.

할아버지 홍징(洪徵)은 고려 공민왕과 동서지간으로 밀직부사로서 이성계와 함께 황해도에 침공한 왜구를 격멸하기도 했다. 아버지 홍상직은 조선으로 넘어오면서 별다른 벼슬을 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길동의 어머니 옥영향은 관기로 홍상직의 총애를 듬뿍 받았다. 배 다른 두 형 귀동과 일동의 어머니는 남평 문씨였다.


홍길동 당대엔 뚜렷한 벼슬기록은 없지만 길동의 형제대에 와서는 가족들이 권문세가의 지위를 누린다. 형인 일동의 딸 숙용 홍씨가 연산군의 아버지인 성종의 후궁이었다. 또 그의 형 일동과 귀동도 높은 벼슬을 지냈다. 특히 누나 홍씨녀의 아들 유순은 영의정에 오른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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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길동이 아버지에게 무릎을 끊고 하직인사를 고하는 장면을 재현해 놓고 있다.

길동은 어렸을 때부터 머리가 영특하고 무예에 남다른 소질을 보였던 것으로 전한다. 그런 길동이 서자로서 벼슬길이 막히자 울분을 터트리지 않을 수 없었다. 급기야 이미 잘 알려진 대로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는 설움을 안고’ 아버지 홍상직에게 하직을 고하며 집을 떠난다. 자연 그의 심정은 양반으로부터 차별받는 소외된 민중의 입장에서 이들 세력을 규합해서 양반이라는 신분체계를 타파하고자 나섰을 것이다. 그가 내세운 활빈당이라는 명분은 세 규합에 힘을 더했다. 도적과 의적 홍길동의 출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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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실록>에 있는 홍길동 관련 기록을 홍길동생가터에 전시해 두고 있다.

홍길동은 백정과 광대라는 천민의 신분인 임꺽정과 장길산과 달리 양반가에서 태어나 도적과 양반이라는 정반대의 신분을 넘나들었던 인물이다. 어쩌면 임꺽정이나 장길산보다 더욱 울분이 치밀어 올랐을지 모른다. 명문가의 양반 자제지만 양반이 아닌 자신의 신분에 대한 좌절은 자연 양반에 대한 분노로 표출됐을 것이다. 탐관오리와 토호의 재산을 빼앗아 가난한 백성들에게 나눠주는 행동은 이를 잘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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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일기>에 있는 홍길동 관련 기록.

길재와 무등산, 월출산 등지에서 활동하던 길동은 관군에 쫓겨 전라도 영광 앞바다로 근거지를 옮겼다. 영광 앞바다는 후일 오키나와에 해상왕국을 건설하는 기반이 된다. 권문세가의 집안 자제로 권력의 비호를 받은 듯한 길동은 신출귀몰 했지만 그 권력의 비호는 결국 자수 반 체포 반 형식으로 포획된다. 남해로 유배 되었으나 바로 탈출하여 일당들을 데리고 오키나와로 건너가 홍길동 해상왕국, 즉 ‘율도국’을 건설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허균은 왜 홍길동을 의적으로 묘사했을까?’ 이 부분이 궁금했다. 왜 그랬을까? 여기엔 허균이 홍길동에게서 상당부분 동병상련의 감정을 느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홍길동은 한국 최초의 국문소설 ‘홍길동’을 쓴 허균보다 100여년 앞선 인물이지만 소설가 허균을 통해 역사에 나온 기록과는 정반대의 평가로 되살아났다. 이는 허균의 개인역사를 보면 이해되는 부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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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길동이 아버지에게 하직인사를 고하는 장면을 옆에서 담았다.

허균(1569~1618)은 29세 때 장원급제하여 황해도관찰사가 되지만 한양기생을 가까이 한다고 탄핵받고 파직된다. 그 후 복직됐으나 불교를 믿는다는 이유로 다시 탄핵받자 스스로 관직을 내놓고 불교에 몰두한다. 그의 누이 허난설헌의 시를 중국에 출판한 공로로 삼척부사가 되나 또 불교를 가까이 한다고 세 번째 파직을 당한다. 그러나 그의 학식을 높이 평가한 조정은 그를 공주목사로 임명하나 이번엔 서얼출신들과 어울린다는 이유로 네 번째 파직된다. 파직 후 산천을 유람하며 기생 계생과 함께 지낸다. 중국으로 건너가 조선 종묘사에 대한 잘못된 기록을 발견하고 이를 정정시켜 광해군의 신임을 얻어 다시 형조참판이 되고 좌참찬이 되어 인목대비 폐모론을 성사시킨다.


허균은 파직, 복직을 거듭하는 와중에 자신이 모아온 세력을 바탕으로 반역을 도모하고 있었다. 그는 신분제도를 없애고 붕당을 혁파해야 한다는 이상을 가졌다. 결국 이 사실이 그의 부하에 의해 발설되고, 반란 핵심인물로 체포돼 역모혐의로 능지처참되는 운명을 맞았다. 그 허균이 소설 홍길동을 썼다는 사실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지 모른다. 소설 속의 홍길동을 통해 그가 꿈꾸던 이상세계를 미리 그려봤을 것이다. 물론 현실에서는 결국 좌절됐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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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홍길동의 정의는 무엇일까?

‘홍길동의 정의’는 무엇일가? 얼마 전 국내외서 베스트셀러로 인기를 모았던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저자 마이클 샌델(Michael Sandel) 교수는 ‘진실을 말하는 것이 잘못인 때도 있는가’ ‘도덕적으로 살인을 해야 하는 때도 있는가’ 등에 대해 설득력 있게 풀어가고 있다. 샌델 교수의 정의대로 라면 홍길동은 의적일까, 도적일까? 이럴 때 “그 때 그 때 달라요”라고 한다면 문제의 핵심을 너무 가볍게 보는 것 같다.

My name is Garden Park. First name Garden means.......

1 Comment

  1. Old Bar^n

    01.27,2012 at 12:29 오후

    당시에는 의적, 의인 칭호를 얻지 못하였으나
    지금 조명해 본다면 우리가 지금 맞는 정치를 한다고 보는걸로해서
    그는 의인이거나 의적입니다.

    그는 잘 살려고 했겠지요?
    누구나처럼
    그런데 당시의 제도 때문에 굴레가 씌워져 있었지요.
    거기서 머물러 그냥살았다면 당연히 범인이지요.

    자신의 앞길을 개척하고자 노력하는것은 인간인 이상
    누구나 해야 할 사명입니다.
    그 사명을 관철 시키느라 애쓴 결과가 부족한면이 많았겠으나
    잡히지 않고 도망가려는건 인간 누구나 제목숨을 지켜야 하는
    순리일것입니다.

    새나라를 건설하려던 길동이 율도국이던 무슨나라던 세우는것은
    당연한 수순일것 같습니다.
    그 덕분에 오늘의 우리가 있는지도 모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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