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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해주서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나라 없는 설움’ 딪고 강인한 생명력 발휘

블라디보스톡에 남아 있는 고구려와 발행 유적과 연해주 이주 초기의 역사와 생활상, 블라디보스톡에서의 독립운동 등에 대해서 살펴본 바 있다. 이번엔 연해주에 있는 한인들의 중앙아시아로의 강제이주의 역사에 대한 부분이다. 연해주의 한인역사에서 빠질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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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디보스톡 항구 모습. 바로 옆에 러시아를 가로지르는 샹트페테르부르크까지 가는 시베리아 횡단열차인 블라디보스톡역이 있다.

한민족의 연해주 독립운동은 러시아 사회주의 운동이 일어나고 볼세비키 극동정부가 소비에트 연방에 흡수되는 과정에서 급격히 약화되기 시작한다. 1930년대 들어 스탈린이 집권한 뒤 ‘일국사회주의’를 표방하며 강력한 중앙집권 정책을 실현해 나갔다. 민족의식과 정치의식이 높은 한인들은 집중 경계 대상이었다. 한인 민족주의자들을 속속 숙청하기 시작하더니, 1937년 8월 소련인민위원회와 볼세비키 중앙위원회는 극동변경지역에서 한인들을 이주시킨다는 결정을 채택하기에 이른다. 동시에 중국과 소련은 불가침조약을 체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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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대 중반 시베리아 횡단열차가 설립된 초기에 사용하던 열차가 역에 전시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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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베리아 횡단열차가 1941~1945년까지 건립됐다는 내용이라고 한다. 블라디보스톡역에 있다.

한인들의 중앙아시아로의 강제이주에 대한 공식적인 이유는 ‘극동지방에 일본 정보원의 침투를 차단하기 위한 것’, 즉 일본과 내통할 수 있다는 것을 내세웠지만 본질은 소수민족의 해체였다. 1차 이주는 결의문 채택과 함께 시작되어 9월21일까지, 2차 이주는 9월24일부터 10월25일까지 집행됐다. 스탈린과 예조프, 내무성과 운수성의 공동작품이었다. 스탈린의 특명을 받은 류쉬코프가 총지휘를 맡았다. 1차 이주가 주로 국경지역에 거주하는 한인들을 조속히 이주시키는 목적이 있었다면, 2차 이주는 극동지방 전역의 한인들을 모두 이주시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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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자흐스탄에서 첫 겨울을 보낸 한인들 땅굴 유적비. 허허벌판 이곳에서 우리 선조들이 보냈다.

장장 6000㎞에 이르는 중앙아시아로의 강제 이주 그 순간부터 한인들은 새로운 고통에 시달려야 했다. 한인들은 먹을 것을 전혀 공급받지 못한 상태에서 이주했기 때문에 기차가 석탄이나 물을 공급받기 위해서 역에 정차하면 간이상점에 뛰어가 사람들이 먹을 수 있는 아무 것이나 닥치는 대로 사다먹으면서 갔다. 또 열차에는 화장실이 없었기 때문에 역에서 열차가 서면 모두가 뛰어내려 대소변을 봤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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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오지프 스탈린. 강력한 중앙집권정책으로 한인들이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로 이주하게 되는 정책을 폈다.

이러한 상황은 자연히 어린 아이들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이주 중에 아이들에게 홍역이 발생하여 아이들 사망률이 60%를 넘었다고 한다. 또 이주 중에 가족이 여러 열차로 흩어지는 바람에 이산가족이 다수 발생했으며, 크고 작은 사고도 매우 많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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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부터 1938년까지 벌어진 소비에트의 피의 대숙청은 내무인민위원을 맡았던 니콜라이 예조프에 의해 절정에 이르렀다.

중앙아시아 한인들이 버려진 곳은 카자흐스탄의 알마티와 인근 우쉬토베 지역, 우즈베키스탄의 타슈켄트 남부 제정 러시아 시대부터 유배지로 악명 높았던 허허벌판이었다. 예조프가 스탈린에게 제출한 최종 완료 보고서에 따르면 카자흐스탄에총 2만여 가구 95,000여명, 우즈베키스탄에 1만6천여 가구 76,000여명 등 모두 171,781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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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장 6천 킬로에 달하는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로의 강제 이주 경로.

버려진 한인들의 삶은 비참했다. 거주 이전의 자유가 없었고, 배움의 길도 막막했다. 국가기관 취업 등 사회진출의 기회도 주어지지 않았다. 주거 환경 또한 집단수용소나 다름없었다. 이주 다음해에 7,000여명이 사망했다. 그 다음해에는 4,800여명이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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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 한인들이 일궈낸 집단 농장 콜호즈.

그러나 이주 첫 해의 모진 학대와 고생을 이겨내며 농토를 개간하고 볍씨를 심어 대풍작을 이루었다. 강인한 생명력으로 3년 만에 자립기반을 이루는 기적을 일궈냈다. 중앙아시아의 모범적인 소수민족으로 새롭게 일어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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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아시아의 농업발전에 기여한 이주 한인의 모습.

한인들의 집념 덕분에 중앙아시아의 농업은 크게 발전했다. 우지베키스탄의 폴리토젤과 김병화 콜호즈, 카자흐스탄의 크질오르다 아방가르트 소프호즈 등 소련 전역에서 최고의 모범 집단 농장을 이들이 일궈냈다. 척박한 땅을 옥토로 바꾼 한인들은 소비에트 농업생산의 주요 축이 되었다. 한인들의 강인한 생명력은 중앙아시아에서도 빛을 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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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자흐스탄의 집단 농장 크질오르다 아방가르드 소프호즈.

소련이 해체된 후인 1993년 4월 러시아 의회는 과거 과오를 시인하고 고려인 명예회복 법안을 채택했다.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조치가 따랐던 건 아니지만 새로이 거주 이전의 자유를 얻은 고려인에게는 희망의 땅, 연해주로 가는 길이 다시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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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집단농장 콩로즈를 일군 김병화의 생전 모습. 소련 정부는 그가 죽자 타슈겐트에 ‘김병화 거리’를 만들 정도였다.

중앙아시아 고려인들의 역사적인 재이주는 1937년 이후 단절된 연해주의 한민족 역사를 새로 쓰게 하는 힘이 되고 있다. 특히 1990년대 들어 재이주는 눈에 띄게 늘었다. 전반기에는 중앙아시아 민족갈등에 따른 위기감으로, 후반기에는 경제적 생활고에 짓눌려 고려인들은 새로운 기회를 모색하고자 연해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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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화 농장 내에 건립돼 있는 그의 기념비.

현재 러시아 연방을 포함한 구 소련 내 한인은 약 45만 명으로, 인구수에서 120여개 민족 중 25위를 차지하고 있다. 러시아연방 내에 약 10만 명이 거주하고 있고, 우즈베키스탄에 약 22만 명, 카자흐스탄에 약 10만 명, 키르키즈스칸에 약 2만 명이 분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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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 이주된 한인 가족들이 농사 일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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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 이주 초창기 고려인 가옥의 모습.

My name is Garden Park. First name Garden mea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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