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은 옛 지도에서도 역시 최고의 명산… ‘청학동’은 시대마다 위치 달라

지금에 지리산은 민족의 영산이자 한국에 으뜸 되는 산이지만 조선시대에도 그랬을까? 지리산이 조선후기에 백두산과 함께 나라를 대표하는 산으로 인식되었던 증거가 1831년에 그려진 ‘중국전도’에 드러난다(지도1). 이 지도에는 한반도의 산으로 유독 백두산과 지리산만 뚜렷이 표현되어 있는 것이다. 

지리산은 일찍부터 나라의 명산이었다. 신라 때부터 오악의 하나인 남악으로 지정되어 국가적 제(祭)의 대상이었고, 그 권위는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에도 변함없이 지속됐다. 오악은 신라와 조선조에서 지정했는데, 다른 산들은 시대와 왕조에 따라 다 바뀌어도 지리산만은 그대로였다. 신라의 오악은 동-토함, 서-계룡, 남-지리, 북-태백, 중-팔공산이었고, 조선의 오악은 동-금강, 서-묘향, 남-지리, 북-백두, 중-삼각산이었다. 지리산은 신라에서 중사(中祀)로 제전(祭典)에 올랐음이 <삼국사기>에 확인된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신라에서 남악을 중사로 하였고, 고려와 조선도 모두 그대로 따라 중사로 해서, 봄·가을에 향·축을 내리어 관찰사로 하여금 제사지내게 한다”고 지리산에 대한 산천제의 지속 사실을 기록했다.

1831년에 발행된 중국전도에서 조선반도에 있는 산은 백두산과 지리산만 표기돼 있다.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1831년에 발행된 중국전도에서 조선반도에 있는 산은 백두산과 지리산만 표기돼 있다.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지리산은 전라도와 경상도의 지방 명산으로도 기록됐다. 그런데 전라와 경상 지방에서 생각하는 지리산의 관심도에 차이가 났다. <세종실록지리지> 경상도편에는 지리산이 “다섯 명산의 하나로서 진주에 있다”고 간략히 적고 있지만, 전라도편에서는 지리산의 별칭, 주위의 고을 이름, 산악경관과 기후, 전승되는 속설, 삼신산 관련 사실, 제사 정보 등을 상세하게 밝혀 놓았다. 지리산은 경상도보다 전라도에서 차지하는 의식이나 비중이 더 높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지방 군현의 진산으로서 지리산은 어떻게 고지도에 표현되었을까? 조선중기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구례의 진산으로만 기록돼 있다. 지리산의 위상은 고을 진산으로서보다는 나라 혹은 도의 명산으로서 강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군현지도를 보면 지리산 인근 고을은 대부분 지리산을, 그리고 고을 산줄기가 발원하는 근원지로 보고 있음도 확인된다.

지리산의 중심에 청학동의 위치가 표기된 1790년 발행된 팔도지도의 경상도 부분도. 규장각 소장.

지리산의 중심에 청학동의 위치가 표기된 1790년 발행된 팔도지도의 경상도 부분도. 규장각 소장.

지리산하면 전통적인 이상향으로서 청학동이 유명하다. 지리산 청학동은 선경(仙境)의 장소 이미지를 지닌 상상의 설화 공간이었다. 청학동이 조선시대의 지도에 표기되었다는 사실은 조선시대 사람들의 의식에서 지리산의 대표 경관으로서 장소적 중요성이 반영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옛 지도에서 청학동 위치는 지금 아는 것과는 다르게 표기됐다. 오늘날 청학동이라고 하면 경남 하동군 청암면 묵계리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역사상 청학동의 최초 비정지는 달랐다. 고려 후기 이후로 구전에 의해 전승된 청학동의 비정지는 지금의 하동군 화개면 운수리와 용강리 특히 불일평전・불일암・불일폭포를 중심으로 하는 지역이었다. 이곳이 청학동으로 알려지면서 조선후기나 20세기 전반까지도 문헌과 고지도에 반복적으로 나타난다(지도2). 후대로 가면서 청학동의 공간 범위는 인근의 의신, 덕평. 세석, 매계(악양) 등으로 확장되며, 다른 지방에도 청학동과 같은 지명이 생겨나서 구한말에 이르면 전국적으로 45곳의 청학동 지명이 나타난다.

‘동국대총’과 ‘여지도’에는 지리와 함께 방장이 병기돼 있다. 규장각 소장

‘동국대총’과 ‘여지도’에는 지리와 함께 방장이 병기돼 있다. 규장각 소장

옛 지도에서 지리산은 두류산, 방장산 등으로도 표현됐다. <고려사지리지>에, ‘지리산(지리, 두류 또는 방장이라고도 한다)’이라고 적은 것으로 보아, 고려 말에 이미 지리산은 삼신산의 하나인 방장산으로 거론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조선시대 관찬지리지에서 지리산이 방장산이라는 별칭은 일반적으로 보인다. 조선후기의 ‘여지도’, ‘동국팔도대총도’ 등의 전국 지도에서는 지리산이 방장산이라는 명칭과 함께 기록되었다(지도3). 18세기 중엽에 그려진 ‘동국대총’에서는 한반도의 삼신산으로서 한라(영주), 지리(방장), 금강(봉래)가 나란히 표기되었다. 이 지도를 보면 백두산은 크게 강조되어 표현됐고, 나라의 주요 명산으로서 묘향산, 구월산, 송악산, 비백산, 삼각산, 감악산, 목멱산, 계룡산, 속리산, 태백산, 금성산이 그려졌다. 삼각산과 목멱산(남산)이 포함된 것은 수도 한양이 지닌 정치행정의 중심지적 장소성 때문이다(지도4).

 ‘동국대총’에 그려진 조선의 명산과 지리산. 서울역사박물관이 소장한 1849년 발행된 ‘지도서’에 나와 있다.

‘동국대총’에 그려진 조선의 명산과 지리산. 서울역사박물관이 소장한 1849년 발행된 ‘지도서’에 나와 있다.

두류산이라는 지리산의 또 다른 명칭은 고려 말 신진 사대부들에게 본격적으로 나타나다가 조선시대 중후기의 선비들에게 널리 쓰였다. 유학자들은 두류산이라는 이름을 가장 선호했다. 그런데 두류(頭流)라는 글자의 뜻이 백두산의 맥이 흘러내려온 것으로 해석된 것은, 조선 중후기에 백두산이 국토의 종산(宗山)으로 인식되고 백두에서 지리로 이어지는 대간의 산줄기체계가 정립되면서 새로 이루어진 것이다. 지리지를 봐도 그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조선초기의 <경상도지리지>와 <세종실록 지리지>에서는, 지리산을 일명 두류라고 한다면서 인근 고을로부터의 방위 정보만 기록하고 있다.

조선국팔도통합도에서 강조되어 표현된 국토의 산줄기. 지리산에 닿는 백두대간의 줄기가 뚜렷하다. 1800년대 간행된 지도로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조선국팔도통합도에서 강조되어 표현된 국토의 산줄기. 지리산에 닿는 백두대간의 줄기가 뚜렷하다. 1800년대 간행된 지도로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그런데 조선중기의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와서는, ‘지리산은 산세가 높고 웅대하여 수백 리에 웅거하였으니, 여진 백두산의 산맥이 뻗어내려 여기에 이른 것이다. 그리하여 두류라고도 부른다’라고 하여, 지리산을 두류산이라고 일컫는 근거가 분명히 언급되었다. 같은 견해는 조선후기 지식인들의 글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유몽인(1559~1623)은 “두류산은 백두산에서 뿌리내려 4천리나 면면이 뻗어온 넉넉하고 충만한 기운이 남해에 다다라 엉켜 모이고 우뚝 일어난 산”이라고 했다. 이규경(1788~1856)도 <지리산변증설>에서, ‘백두의 맥이 흘러 지리에서 그쳤기 때문에 일명 두류산이라고 한다’고 적고 있다. 지리산이 백두산의 맥에서 이어지고 있다는 초기적 인식은 고려 말 이인로(1152~1220)의 <파한집>에서 보인다. ‘지리산은 백두산에서 비롯하여 꽃 같은 봉우리와 골짜기가 면면이 이어져 대방군에 이르러서 수 천리에 맺혔다’고 했다. 이렇듯 백두산에서 맥이 뻗어 지리산에 이르는 장면은 1800년대 지도인 ‘조선국팔도통합도’에도 인상적으로 표현되었다(지도5). 또한 ‘지도’의 경상도 도엽에는 태백산에서 맥이 영남지역의 둘레를 울타리 치면서 지리산에 이르는 모습의 산줄기가 흥미롭게 그려졌다(지도6).

태백산에서 지리산에 이르는 산줄기가 경상도의 울타리로서 인상적으로 그려졌다. 1800년대 간행된 지도로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태백산에서 지리산에 이르는 산줄기가 경상도의 울타리로서 인상적으로 그려졌다. 1800년대 간행된 지도로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고려시대에도 지리산이 표기된 지도가 그려졌지만 현존하는 것이 없고, 우리가 볼 수 있는 옛 지도의 처음은 1402년에 제작된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이다. 여기에는 지리산과 산줄기, 섬진강, 그리고 인근 고을의 행정지명만 개략적으로 표기되었다. 조선중기에 그려진 <동람도> 역시 지리산만 그렸고 내용이 단순하다. 지리산권의 지도정보가 상세하지 않은 것은 임진왜란 전까지만 해도 지리산권은 수도인 한양과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어서 지리적인 중요성이 덜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조선후기에 와서 지리산권은 국토 영역에서 가지는 중요도가 완전히 달라졌다. 특히 16세기 말의 왜란과 17세기 전반기의 호란은 국방에 대한 관심을 크게 높이는 계기가 됐으며, 변방과 해안에 대한 중요성을 인식시키는 대외적인 계기가 되었다. 17~18세기의 상품유통경제의 발달도 지도제작의 활성화를 가져오는 큰 요인이 됐다.

동여도의 지리산. 산줄기 형세가 강한 필치로 표현되었고, 천왕봉과 반야봉이 대표지명으로 표기돼 있다.

동여도의 지리산. 산줄기 형세가 강한 필치로 표현되었고, 천왕봉과 반야봉이 대표지명으로 표기돼 있다.

조선후기의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반영하듯이 정조대에 제작된 지도첩인 <여지도>는 조선 초기와 중기의 지도에 비하여 지리산권 지역이 자세하게 그려지고 정확한 위치로 표현돼 있다. 특히 전국 지도로서 정상기(1678~1752)의 동국지도, 그리고 김정호(1804~1866)의 청구도와 동여도, 대동여지도에 이르러 지도의 발전은 절정에 달했다. 청구도와 동여도를 보면 지리산의 주봉인 천왕봉과 함께 반야봉이 대표지명으로 표기되어 있고, 주요 사찰인 쌍계사, 연곡사, 칠불암, 신응사 등의 이름도 눈에 띈다(지도7).

조선시대의 군현별 지리산권역은 현재의 행정구역과는 달랐다. 지금 진주는 산청을 사이에 두고 지리산과 떨어져 있지만, 조선시대는 접해 있었다. 산청은 진주를 사이에 두고 지리산지 외곽에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현재의 운봉(읍)이나 단성(면), 안의(면) 등도 어엿한 지리산권역의 한 고을이었다. 산청의 원래 이름은 산음(山陰)이었는데 1767년에 바뀐 것이다. 그래서 1767년을 기준으로 이전에 제작된 지도에는 모두 산음으로(지도8), 이후에는 산청으로 지명이 표기되어 있다. 오늘날 지리산에 접한 산청의 행정구역은 1906년에 새로 개편되면서 이루어진 것이다. 천왕봉에 오르는 최단코스 시발점인 시천면 중산리도 그때부터 산청군 구역이 되었다.

1767년 산청으로 이름이 바뀌기 전에 산음으로 표기된 해동지도. 지도의 상단 왼쪽에 ‘지리산에서 맥이 내려왔다(智異山下脈)’이라고 고을 산줄기의 연원을 밝혀 놓았다.

1767년 산청으로 이름이 바뀌기 전에 산음으로 표기된 해동지도. 지도의 상단 왼쪽에 ‘지리산에서 맥이 내려왔다(智異山下脈)’이라고 고을 산줄기의 연원을 밝혀 놓았다.

군현지도는 한국의 지도사에서 가장 풍부한 자료와 종류를 가지고 있고, 또 가장 자세한 지리정보가 표현된 지도다. 해동지도, 비변사인방안지도, 지승, 광여도, 1872년 군현지도 등 다양한 종류로 현존하고 있는 군현지도는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후반까지 관주도로 집중적으로 제작되었다. 18세기 중엽에 제작된 군현지도인 <해동지도>의 지리산권을 보면, 고을을 둘러싸고 있는 산수의 형세가 자세하게 표현되었고, 행정지명, 옛 읍성도 표현되었다. 도로망도 붉은 실선으로 그려져 있고, 읍치의 주요 경관 및 기타 인문 경관도 기록됐다. 지도의 바탕에는 해당 군현의 산천, 인구, 토산물 등의 정보를 요약하여 담았다. 필사본 형식의 군현지도 중에 대표적인 지도를 꼽는다면 <1872년 군현지도>이다. 이 지도는 회화적인 가치도 있지만 마을의 명칭 및 위치에 대한 상세한 지리정보도 잘 표현돼 있어 주목된다.

이렇듯 지리산권의 옛 지도는 문화와 경제, 생활사, 국토인식과 지리정보, 정치와 국방 등을 총체적으로 재현하고 있는 텍스트라고 할 만하며, 지리산권에는 조선 초기 이래 수많은 고지도가 시기별로 현존하고 있어서 풍부한 자료원으로 활용될 수 있는 유산가치가 충분하다.

<최원석 교수의 옛지도로 본 山의 역사>

My name is Garden Park. First name Garden mea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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