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헌의 靈地기행… 주역 ‘천산둔’의 결정지 대둔산 석천암

역사적으로 볼 때 대둔산(大芚山)은 인생의 막바지에 몰렸던 중생들이 숨어들었던 산이기도 하다. 우선 이름부터가 범상치 않다. ‘둔’(芚)자가 들어간다. ‘둔’(芚)자에서 풀 ‘초’(艸)를 떼어내면 ‘둔’(屯)이 된다. 한자는 발음이 같으면 비슷한 의미로 통하는 법이다. ‘둔’(屯)은 다시 ‘둔’(遯)과도 통한다. 둔(屯)은 군대가 진을 친다는 ‘둔’자이다. 산세가 창검을 쳐들고 있는 것처럼 날카롭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 아닐까 싶다. 대둔산은 편안한 산이 아니다. 기운이 강하고 날카로워서 무골(武骨)이 좋아할만한 산이다. 자기 기질 따라 좋아하는 산의 스타일도 다르다. 원만한 성품은 둥글둥글 하고 흙이 많은 육산(肉山)을 좋아하기 마련이고, 지르기 좋아하는 과격 성품은 기암절벽이 솟아있는 골산을 선호하기 마련이다. 산의 팔자와 사람팔자는 둘이 아닌 것이다. ‘산인불이’(山人不二)라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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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 암벽으로 길게 늘어져 있는 대둔산은 주역 33번째 괘인 천산둔과 상당히 관련 있는 명당으로 알려져 있다.

석천암(石泉庵) 올라가는 산길은 가파르다. 길 주위를 둘러싸는 바위절벽들이 사람을 좌우에서 압박하는 형세라, 스마트폰과 보일러방에 익숙한 문골(文骨)들은 위협감을 느낄만한 지세이다. 그러나 나는 이런 바위산길이 좋기만 하다. 아스팔트와 네온사인과 아파트로부터 쌓인 ‘도시독(都市毒)’을 뽑아주는 데에는 특효이기 때문이다. 바위를 만지고, 바위에 코를 대고 숨을 들이시면 아랫배까지 숨이 내려오는 것 같다. 다시 바위에 뺨을 비비대어 본다. 암벽이야말로 ‘도시독’의 해독제 아니던가! 돼지고기에 새우젓이다.

적막강산의 석천암에는 음력 동지 섣달의 칼바람만 불고 있다. 앞산은 눈이 뿌려서 하얗다. 등산객도 보이지 않는 적막강산이다. 문득 ‘춥고 배고프다’는 단어가 떠오른다. 이렇게 추운 겨울산 암자에서 먹을 것도 없었던 옛날에는 얼마나 서러운 인생이었을까 하는 생각 말이다. 이 배고픈 암자의 주지는 천산(天山) 스님이었다. 이 적막강산의 석천암에서 10년 넘게 살았으니, 대둔산의 산기운을 받은 셈이다. 산기운을 받지 못하면 이처럼 바위절벽에 올라앉은 쎈 터에서 3년을 버티지 못한다는 게 필자의 평소 지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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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둔산 정상 능선이 범상치 않아 보인다.

“대둔산에 얽힌 사연을 이야기해 달라?”

“백제 계백장군의 오천 결사대가 최후까지 싸웠던 장소가 이 산의 수락계곡이요, 군지계곡이 아닌가 싶다. 전투는 황산벌에서 이루어졌다고 역사에 나온다. 백제와 신라의 정예 병력이 대회전을 벌렸던 황산벌은 바로 이 대둔산 옆이다. 그리고 황산벌 바로 옆에 벌곡(伐谷)면이 있는데, 벌(伐)은 ‘창칼로 치다’ ‘창칼로 베다’는 뜻이 있다. 역사적으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현장임을 암시하고 있다.

석천암은 행정구역상으로 충남 논산시 벌곡면에 포함된다. 계백의 군대는 신라군에 몰려서 아마 이 대둔산 군지계곡까지 왔을 것 같다. 군지(軍止)계곡은 ‘군대가 머무르다’는 뜻이다. 계곡 양쪽이 수십 미터의 절벽으로 둘러싸고 있는 아주 좁은 협곡이다. 이 계곡 끝자락은 역시 수십 미터의 절벽이 가로막고 있는 외통수 지형이다. 더 이상 갈 데가 없다. 이런 지형은 소수의 병력이 자기보다 숫자가 훨씬 많은 전투를 끝까지 치러낼 만한 형국이다. 병목의 앞만 방어하면 되니까 말이다. 황산벌, 벌곡 전투에서 밀린 병력들이 군지계곡으로 후퇴하여 최후까지 저항하지 않았나 싶다. 수락계곡도 현재 한자는 ‘수락’(水落)으로 되어 있지만, 내가 생각하기에는 ‘수급(머리)이 떨어졌다’는 ‘수락’(首落)이라고 추측된다. 계백장군의 목이 떨어진 곳이 바로 ‘수락계곡’인 것이다. 계백장군과 백제 결사대가 신라군에 맞서 최후까지 항전한 장소가 바로 이 대둔산이요, 수락계곡과 군지계곡이라고 추측된다. 석천암은 이 계곡을 통과하여 올라오게 되어 있으니 의미가 심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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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둔산 험한 절벽 끝에 석천암이란 암자는 인적이 드물고 숨어서 공부하기 좋은 곳이다.

대둔산은 동학군의 최후 저항지이기도 하다. 10만이 넘는 동학군이 공주 우금치 전투에서 기관총으로 무장한 일본군에게 거의 몰살당하다 시피 하였다. 공주 우금치 전투에서 살아남은 동학군 일부가 가까운 거리에 있는 이 대둔산으로 들어왔고, 일본군은 대둔산 일대를 샅샅이 뒤지면서 토벌작전을 벌였다. 마지막 동학군이 사살된 지점은 대둔산 장군봉이다. 장군봉 옆에는 윗부분이 넓적한 바위 절벽이 있다. 사람이 쉽게 올라가기는 힘든 험한 절벽이다. 천산스님의 설명에 의하면 이 바위절벽 위에는 약간의 물도 나오기 때문에 사람이 거처할 수 있었다고 한다. 마지막 동학군 7명이 여기에서 일본군에게 죽었다. 남자 3명, 여자2명, 어린아이 2명이었다. 당시 동학군은 가족단위로 움직였던 것이다. 일본군은 어린아이까지 포함된 이 7명을 사살해서 대중에게 전시를 한 다음에 마지막 동학군 토벌을 끝냈다고 선포하였다. 몇 년 전에 동학연구 단체가 장군봉의 이 바위절벽 위에서 동학군들의 유품을 발견하였다고 신문에 보도된 적이 있다.

동학군 이후에는 6.25 때 빨치산들이 이 대둔산에서 치열하게 저항하였다. 석천암 올라오는 길 초입에는 이때 전사한 경찰들의 진혼탑이 있다. 1천명 넘는 경찰이 죽었는데, 빨치산도 이와 비슷한 숫자라고 한다. 지리산의 빨치산 대장이 이현상인데, 이현상의 고향이 바로 대둔산 자락에 있는 ‘진산면’이다. 대둔산의 기운이 진산면 자락으로도 강하게 흘러갔다. 이현상도 지리산에 가기 전에는 이 대둔산에서 빨치산 투쟁을 했던 것이다. 박 대통령 때 야당 당수가 유진산이다. ‘왕사쿠라’라 별명을 들었던 유진산이었지만, 정작 본인 앞으로는 한 푼도 챙기지 않았던 협상의 귀재 정치인이었고, 고향이 또한 진산면이었다. 진산면과 금산면은 60년대 중반까지는 전북에 속하였지만, 60년대 중반이후에 충남으로 편입된 지역이다.

이현상과 유진산은 같은 고향친구였다. 초․중등학교를 같이 다녔고, 부잣집 아들이었던 유진산은 가난했던 이현상을 물심양면으로 많이 도와주었다고 한다. 유진산이 이현상에게 옷도 주고, 빵도 사주고, 공책도 같이 나눠쓰던 사이였다. 두 사람이 아주 절친한 둘도 없는 친구사이였다고 진산면의 촌로들은 전한다. 한사람은 대둔산에서부터 빨치산을 하다가 결국 지리산에서 총을 맞고 죽는 팔자가 되었고, 야당 당수였던 유진산은 낮에는 박정희와 대립하였지만, 밤에는 같이 술을 먹고 동생 형님을 하면서 정치협상을 하는 정치인의 길을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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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암 송시열이 석천암에서 공부하다가 바위에 새긴 것으로 알려진 침석과 수천 두 글자가 보인다.

둔(屯)이 군사적 맥락이라면 발음이 같은 ‘둔’(遯)은 주역(周易)의 뜻을 담고 있다. 주역의 64괘중에 33번째 괘가 바로 ‘천산둔’ 괘이다. 위에는 건(천)이 있고, 아래에는 간(산)이 있다. 하늘아래 산이 있는 형국이다. 보통 ‘천산돈’으로 읽는다. 만약 괘를 뽑아서 이 천산돈 괘가 나오면 세상에 나오지 말고 숨어야 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은둔(隱遁)해야 하는 셈이다.

야산(也山) 이달(李達,1889-1958)은 1945년 해방이 되자 괘를 뽑아 보았다. 천산돈 괘가 나왔다. 숨어야 한다. 그렇게 고대하던 해방이 되었으면 세상에 나가서 활동을 해야지 어떻게 산으로 숨는 괘가 나왔단 말인가? 야산은 대둔산으로 숨어 들어왔고, 대둔산에서도 하필이면 석천암으로 들어왔다. 계백장군이나, 임진왜란, 동학, 6.25때는 칼과 총을 든 무인들이 대둔산으로 들어왔지만, 야산은 학자였고, 도인이었고, 주역의 대가였다. 문사가 숨으러 들어온 것이다.

야산의 주역 해석은 독특하였다. 미래에 대한 예측과 지명(地名)을 연관시키는 해석법이 그것이다. 예를 들면 8.15 해방을 3일 앞두고 야산은 제자들을 이끌고 경북 문경(聞慶)으로 갔다. 문경군 문경읍 문경리 였다고 전해진다. 해방 하루 전날에는 멍석을 깔아 놓고 제자들과 같이 막걸리를 마시면서 닭춤을 추었다. “꼬기오! 꼬끼오!” 다음날 해방이 되었다는 뉴스가 나왔다. 경사스러운 일을 듣기 위해서 문경(聞慶)으로 갔던 셈이다. 문경은 ‘경사를 듣는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해방이 되고 좌우익이 첨예하게 충돌하는 과정에서 야산은 천산돈 괘를 뽑았고, 대둔산의 ‘둔’자가 바로 천산돈의 돈(둔)과 발음이 같다. 괘의 명칭과 산의 이름이 같았던 것이다. 그래서 대둔산으로 왔다. 대둔산은 동쪽에 태고사(太古寺)라는 유명한 고찰이 있다. 호서와 호남에서 ‘1태고(太古), 2월명(月明), 3운문(雲門)’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태고사는 영험한 도량이었다. 산의 8부 능선쯤에 위치해서 전망이 시원하게 나온다. 태고사 마당에 올라서서 앞을 바라보면 첩첩산중의 산풍경이 펼쳐져 보여서, 태고의 풍광을 보여준다. 뒤에는 바위절벽이 병풍처럼 둘러쳐 있다. 최근까지 100살이 넘는 장수를 누리다가 돌아가신 도천(道川) 노장이 주석하던 절이다.

대둔산 남쪽에는 안심사(安心寺)가 있다. 국세가 커서 작은 암자급은 아니고 큰 절에 해당한다. 야산은 이처럼 큰 절을 택하지 않고 아주 험한 절벽 끝에 있는 작은 암자인 석천암을 택하였다. 인적이 드물고 숨어서 공부하기에 더 좋다고 여긴 것 같다. 야산은 석천암에 들어와 제자를 양성하였다. 석천암에서 수십 명의 제자를 받고(일설에는 108명의 제자), 유교경전과 주역을 공부시켰다. 제자들에게 함부로 세상에 나가지 말고 산속 암자에서 공부나 할 도수(度數.운수)라고 강조하였다. 인생의 결정적인 고비에서 이쪽이냐 저쪽이냐를 판단하는 일은 아주 중요하다. 이럴 때는 혼자서 판단 못한다. 고수의 지도가 필요하다. 지도를 매일 받을 필요는 없지만, 인생의 갈림길에서는 반드시 선생의 지도를 받는 것이 복이다. 한번 판단 잘못해서 길 잘못 들어가면 빼도 박도 못하는 경우를 우리는 여러 번 목격하지 않았던가. 역사학자 이이화(李離和) 선생은 야산의 아들인데, 10대 시절에 아버지를 따라 이 석천암에서 한문공부를 했다고 회고한다. 이이화의 이(離)는 주역팔괘의 하나인 ‘이’(離)괘를 따서 지은 이름이다. 해방이후에 좌익이다 우익이다 해서 얼마나 혼란스러웠는가. 이 혼란기에 야산은 따르는 추종자들을 데리고 석천암에 들어와 주역공부를 했으니, 시간이 지나고 보니까 얼마나 지혜 있는 행동이었는가. 그야말로 명철보신(明哲保身)의 전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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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헌씨가 석천암 주지 천산 스님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석천암은 이름 그대로 물맛도 일품이다. 달짝지근한 맛이 난다. 물이 좋아야 피가 맑아지고 머리도 상쾌해진다. 명당의 조건 가운데 하나가 물맛이 좋아야 한다는 점이다. 물이 안 좋으면 장수 못한다. 암벽 사이로 흐르는 석천(石泉) 양 옆의 암벽에는 희미하게 한자가 새겨져 있다. 침석(枕石)과 수천(漱泉)이라는 글씨이다. 전해지기로는 우암 송시열이 새겼다고 한다. 우암은 대둔산 태고사 입구의 바위에도 글씨를 남겼고, 태고사에서 공부하다가 다시 석천암으로 와서 공부를 하였는데, 이때 남긴 글씨라고 한다. 침석이 새겨진 위치는 공부하다가 잠깐 서서 뒤로 등을 대면 머리 부분이 침석 글씨 부위에 맞닿게 되어 있다. ‘수천’은 매일 ‘양치질 하는 샘물’이라는 뜻이다. ‘침석’과 ‘수천’의 한 글자씩을 붙이면 ‘석천’이 된다. 고사성어에 ‘침석수류’(枕石漱流)라는 말이 있다. ‘돌베개를 베고 흐르는 물에 양치질 한다’는 뜻이다. 이름이 ‘석천암’이니까 ‘침석수천’(枕石漱泉)으로 뒤에 한 글자를 바꾼 셈이다.

대둔산은 주역의 33번째 괘인 ‘천산돈’(天山遯) 괘와 인연이 깊은 산이다. 돈(遯)은 은둔(隱遁)이기도 하다. 숨어서 공부를 하고 몸을 보존하다가 때가 되면 다시 세상에 나온다. 세상에 나올 싹을 기르고 보양하는 곳이기도 하다. 그러면 새싹이 돋는다는 ‘둔’(芚)이 된다. 둔(芚), 둔(屯), 돈(遯)이 일맥상통한다. 주역의 대가 야산 이달 선생이 해방 이후에 좌우익의 혼란과 충돌을 관망하면서 내공을 쌓던 유서 깊은 영지(靈地)가 바로 석천암이다.

월간산에 연재하고 있는 칼럼을 전재한 것이다.

My name is Garden Park. First name Garden mea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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