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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_construct()
를 사용해주세요. in /webstore/pub/reportblog/htdocs/wp-includes/functions.php on line 3620 한반도 운명이 때론 한반도 밖에서 결정된다 - China Inside
한반도 운명이 때론 한반도 밖에서 결정된다

중국 출장을 간 사이, 他紙에 매우 의미있는 인터뷰 기사가 하나 실린 것을발견하고 옮겨놓는다.

이정식 펜실베니아대 명예교수 인터뷰다.이 교수에 따르면,2차 대전 종전 전후 한반도의 운명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사람은 스탈린이다. 미국에 대한 스탈린의 분노는 2차대전 종전 이후 한반도에 대한 적극적 개입으로 나타났고, 그것이 남북한 2개 정권 수립과 6.25전쟁으로까지 이어졌다는 것이 이 교수의 연구 결과다.

이 교수의 연구결과는 한국전쟁을 ‘내전’이라고 규정한 브루스커밍스의 수정주의 역사관을 정면 반박하는 것이다.

그의 연구결과는 또한한반도의 운명이우리 자신에 의해서가아니라 주변강대국들의 힘겨루기 과정에서결정되었다는 역사적 사실을일깨워주고 있다. 이런 냉혹한 현실이 어찌 과거뿐이랴. 지금도, 그리고 미래에도 변형된 방식으로 우리들의 운명을 짓누를 것이 뻔하다.오늘 내가, 우리 가족이 배불리 먹고 산다고 정신줄을 놓을 수 없는 이유다./지해범

<아래에 이정식교수 인터뷰, 이교수 소개글, 스칼라피노 부음기사등을 차례로 옮겨싣는다>

이정식교수.jpg

<이정식교수>

<기사1>/중앙일보 2011.11.9

"한국엔 잘못된 신앙 있다. 스탈린의 북 단독정권 지령 자료 있는데도 인정 안 해"

“런던 외무장관회담(1945년 9월 12일)→스탈린이 북한에 내린 비밀지령(45년 9월 20일:‘북한에 민주주의 정부를 수립하라’)→소련군정과 미군정 사이 소련 측 연락장교 일방 철수(45년 10월)로 이어지며 한반도의 분단은 이미 기정사실화됐습니다. 45년 12월 모스크바3상회의에서 내려진 신탁통치안에 대해 우리 민족이 찬탁과 반탁으로 갈려 대립한 것과 무관하게 이미 그 전에 소련의 한반도 분단 결정은 내려져 있었습니다. 그 출발이 런던 외무장관회담인데 지금껏 한국 학계는 그 회담을 전혀 모르고 있어요. 중국의 공산군과 국민당군이 만주에서 벌인 내전이 한국 분단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도 한국에선 잘 모릅니다. 해방 정국의 북한과 중국에서 초특급 주역은 스탈린입니다. 그는 황제였어요. 아무도 도전할 수 없던 포악한 황제….”

 한국현대사 전문가 이정식(80·사진) 미 펜실베이니아대 명예교수 겸 경희대 평화복지대학원 석좌교수가 작심하고 말문을 열었다. 50년 넘게 축적해 온 현대사 연구를 토대로 특별 강연을 하기에 앞서 중앙일보와의 단독 인터뷰를 통해서다. 9일부터 매주 한 차례씩 4회에 걸친 ‘한국 현대사 특강’을 경희대에서 열 예정이다.

 이 교수는 지난 2일 타계한 세계적 석학 로버트 스칼라피노 교수의 첫 한국인 제자다. 73년 그의 필생의 역작이 된 『한국공산주의운동사』를 스칼라피노와 공저로 펴내며 그 역시 스승과 함께 세계적 명성을 얻었다.

 이번 특별 강연의 주제로 ‘한국 분단의 원인’을 택한 이유는 그가 가장 잘 아는 전공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분단의 원인에 대한 기초적인 사실조차 한국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는 안타까움 때문이다. 예컨대 런던 외무장관회담 자료의 경우 영국 외무부 문서파일을 찾으면 나오는데 한국 문제 전문가들이 그런 자료를 참고하지 않는다고 노학자는 개탄한다.

또 스탈린이 북한에 단독정부를 수립하라는 비밀지령을 내린 사실은 냉전이 끝나고 소련의 기밀문서가 발굴되며 공개되었는데 그런 자료조차 제대로 인정하지 않는 풍토도 있다며 “한국현대사에 대한 ‘잘못된 신앙’이 한국 사회에 팽배해 있다”고 안타까워했다. 북한 지역이 스탈린의 지령에 의해 45년 10월 이후 중국 공산화의 후방기지로 편입됐다는 분석은 이 교수가 이번에 처음 제시하는 것으로, 우리 현대사에 대한 기존 통념을 뒤집는 해석이다.

<이정식 교수>

이정식 교수는 1931년생이다. 만으로 80세. 이 정도 연배의 한국인은 대개 전쟁을 두 번은 겪었다. 일제강점기에 겪은 태평양전쟁(1941년)과 광복 이후의 6·25전쟁이다. 이 교수는 거기에 더해 두 번의 전쟁을 더 체험한다.

 1937년 발발한 중일전쟁, 그리고 1945년부터 48년까지 중국 만주에서 벌어진 공산당과 국민당의 내전이다. 모두 네 차례의 전쟁을 젊은 나이에 경험한 것이다. 만주에서의 국공내전 때는 그의 집 바로 앞에 지어놓았던 토치카에서 울려오는 기관총 소리를 그대로 들어야 했다고 한다. 6·25 때는 매일같이 미국 폭격기가 폭탄을 떨어뜨리는 구경을 하면서 살았다고 한다.

이 교수는 평안남도 안주 출신이다. 1933년 만주로 이주했다가 1948년 북한으로 귀국했다. 한국전쟁 1·4후퇴 때 서울로 피란해 왔다. 그야말로 파란만장한 일생이다. 한국 현대사의 격변을 국제적 수준에서 고스란히 체험했다. 이런 기구한 운명은 그가 한국현대사를 연구하는 밑거름이 됐다. 그는 6·25 전쟁 중 미군장교와 선교사의 도움으로 미국에 유학했다. UCLA 정치학과를 거쳐 UC버클리 대학원에서 로버트 스칼라피노 교수의 지도를 받으며 한국현대사 연구에 본격 착수했다. 『한국의 민족주의운동사』(1963)를 낸 데 이어, 1974년 『한국공산주의운동사』로 정치 및 국제문제 최고 저작에 수여하는 미 정치학회 우드로 윌슨 파운데이션 상을 수상했다. 현재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명예교수 겸 경희대 평화복지대학원 석좌교수로 있다.
지금도 현역처럼 강의와 저술을 병행하고 있으며 『박정희 평전』이 조만간 미국에서 출간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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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2>

1946년 스탈린 “북한, 중공군 후방기지로” 지령 … 분단, 돌이킬 수 없게 됐다

지난 2일 노환으로 타계한 한국과 동아시아 전문가 로버트 스칼라피노 전 UC버클리 교수를 평생의 은사로 기리며 못 잊는 이가 있다. 이정식(80) 미 펜실베이니아대 명예교수 겸 경희대 평화복지대학원 석좌교수가 그다. 경희대 특강을 위해 방한한 이 교수를 6일 만났을 때 그는 스칼라피노와의 공저 『한국공산주의운동사』를 출간하던 1973년을 떠올리며 감회에 젖기도 했다.

-스칼라피노는 어떤 인물이었나요.

 “UCLA 정치학과에서 학사·석사 과정을 마치고, 박사과정을 다른 대학에서 하려고 물색하고 있던 차에 스칼라피노 교수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본인이 동양의 각국 공산주의를 연구하려고 하는데 자신의 조수가 되어 달라는 것이었어요. 곧바로 UC버클리 박사과정에 등록해 그의 제자가 됐고, 그게 내가 한국현대사 연구에 입문한 계기가 됐으며, 스칼라피노와 『한국공산주의운동사』를 공저로 내는 결실도 보았습니다.”

 -카이로회담, 얄타회담, 포츠담회담 등은 들어봤는데 런던 외무장관회담은 처음 듣습니다.

 “런던 외무장관회담은 2차 대전 승전국인 미국·영국·소련의 외무장관이 모여 전리품을 어떻게 나눌지 논의하는 자리였습니다. 코리아가 언급되지 않았다고 해 한국 전문가들은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았어요. 교과서에도 물론 실려 있지 않고요. 대개 45년 12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3상회의가 한반도에 관한 모든 것을 결정한 것으로 알고 있지요. 그런데 그보다 3개월 전인 45년 9월 12일부터 10월 2일까지 런던에서 먼저 3상회의가 열렸고, 이 자리가 한반도의 장래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어떤 점에서 결정적입니까.

 “미국과 소련의 관계가 급격히 냉각되었기 때문입니다. 런던 외무장관회담 이전까지만 해도 미국과 소련은 2차 대전 때 연합군으로 함께한 협력관계가 있었기 때문에 아직 미온(微溫) 상태였는데, 런던 외무장관회담이 열리며 냉동 상태로 급변한 것입니다. 사실상 미소 냉전의 시작이라 할 수 있어요.”

 -런던 외무장관회담의 쟁점은 무엇이었나요.

 “소련은 전후 일본의 통치에 참여하길 원했으나 미국이 거절합니다. 일본 홋카이도(北海道)의 북반부를 원했던 소련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소련을 자극한 것은 아프리카대륙 북단 리비아의 트리폴리 지역에 관한 것입니다. 소련이 트리폴리 지역을 할양해줄 것을 요구하지만 이 또한 영국과 미국에 의해 거절당합니다. 런던 외무장관회담 기록을 보면 당시 소련 외무장관 몰로토프가 ‘러시아는 지중해에 상선(商船)들을 위한 항구를 가지길 원한다는 발언을 한 후 이틀 동안 이 점을 강하게 역설했다’는 대목이 나옵니다. ‘졸랐다’고 해야 더 옳은 표현일 겁니다. 소련은 입구가 좁은 흑해에서 벗어나 지중해에 해군기지를 갖기 원했습니다. 상선을 위한 항구라고 했지만 뻔한 얘기지요. 소련 해군이 전 세계로 세력을 뻗치는 기지를 얻으려고 했는데 영국과 미국이 이를 거부한 것입니다 .”

 -그것이 소련의 한국정책과 어떤 연관이 있나요.

 “런던 외무장관회담에서 소련의 몰로토프 장관이 미국·영국의 장관과 부동항(不凍港)을 얻기 위해 싸웠던 게 45년 9월 15~16일이었어요. 미국과 영국의 반대에 부딪힌 후 소련의 한반도 정책과 중국 정책이 완전히 180도 바뀌게 됩니다. 9월 20일 스탈린이 “북한에 민주주의 정부를 수립하라”는 비밀지령을 내린 게 바로 그 직후이지요. 미국과의 보조를 맞추려는 정책을 포기한 겁니다. 스탈린의 중국정책도 완전히 바뀝니다.”

 -스탈린의 중국정책이 어떻게 바뀌었다는 뜻인지.

 “나는 당시 중국의 만주, 즉 동북3성 지역에서 살고 있었기 때문에 그때 기억이 지금도 납니다. 45년부터 48년까지 만주에서는 우리가 팔로군이라고 불렀던 공산당과 장제스(蔣介石·장개석)의 국민당이 치열한 전투를 벌였어요. 중국 내전이지요. 그런데 45년 8월 무렵만 해도 스탈린은 장제스의 국민당과 연합하려고 했어요. 45년 8월 9일 소련군은 일본에 선전포고를 한 후 만주로 진군을 했는데, 스탈린은 당시 공산군이 국민당군을 이길 능력이 없다고 판단하고 내전 포기를 공산당에 지령합니다. 그러나 런던 외무장관회담에서 미국과의 협조관계가 대결관계로 바뀌게 된 45년 10월 스탈린의 중국정책이 완전히 바뀝니다. 스탈린은 팔로군 30만 명의 만주 진출을 명령했던 것입니다. 이후 만주에서는 소련의 지원을 받는 팔로군과 미국의 지원을 받는 국민당군의 전투가 치열하게 전개되었어요. 처음에는 국민당군이 열세였어요. 그러다가 국민당군이 새로운 병력을 투입해 팔로군을 밀어버렸습니다. 불리한 형세에 놓인 중국 공산군은 46년 5월 북한 지역으로 퇴각합니다.

 -중국 내전이 북한으로 확산되었다는 겁니까.

 “46년 5월부터 북한은 중국 공산군의 후방기지로 변한 겁니다. 스탈린의 지령에 의한 것이지요. 북한은 중국 내전의 연장지역이 되고 말았습니다. 6·25전쟁 때 만주가 미군이 넘어갈 수 없는 지역이었던 것처럼 46년 5월부터 48년까지 북한은 장제스의 국민당군이 범할 수 없는 일종의 성소(聖所)였습니다. 북한으로 들어간 팔로군은 소련군의 훈련을 받으며 재편됐고, 이후 국민당군을 물리칠 힘을 비축했습니다. 북한은 46년엔 팔로군의 대피소였다가 47년부터는 국민당군에 반격을 위한 기지로 변합니다. 북한을 팔로군의 후방기지로 제공한 스탈린의 조치로 인해 한반도의 분단은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당시 미군은 이런 상황의 변화를 알았나요.

 “남한 주둔 미군정보처가 팔로군의 북한 이동 상황을 포착하고 있었어요. 북한에서 남하한 피란민들의 이야기를 통해, 그리고 정보원들을 통해 북한 각지에 나타난 팔로군들, 그들이 받은 훈련 상황, 그리고 기차를 통한 팔로군들의 이동 상황 등이 미군 정보보고서에 기록돼 있습니다.”

 -45~48년 만주와 북한 은 스탈린의 독무대였군요.

 “그렇습니다. 스탈린은 공산진영의 황제였어요. 공산진영의 이익을 위해 필요에 따라 자기가 통치권을 가지고 있던 북한을 중공군의 승리를 위해 제공 내지는 사용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지요. 이상한 일이 있다면 우리가 아직까지 당시 만주에서의 사태가 북한에 미쳤던 영향을 바로 보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지요.”

 -우리 교과서에는 이승만의 ‘정읍 발언’(46년 6월 3일)을 분단의 원인으로 지목하고, 그에 대비해 김구의 통일협상을 위한 북한행(48년 4월)을 높게 평가하는 경향을 보이는데요.

 “국제사적 시야에서 한국현대사를 재조명해야 합니다. 해방정국은 우리 교과서에는 잘 보이지 않는 손이 뒤흔들었습니다. 지금까지 잘 몰랐던 진실이 운명을 결정했습니다. 한반도 분단의 수수께끼는 소련의 세계정책의 변화를 통해 풀어낼 수 있습니다. 그 키를 쥔 인물이 스탈린입니다. 해방 직후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아 열린 런던 외무장관회담과 스탈린의 대북한 비밀지령, 그리고 북한의 중국 팔로군 후방기지화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을 이해해야 비로소 수수께끼가 풀립니다. 북한이 중국 공산화의 후방지역, 내지는 연장지역으로 변한 상황에서 한반도의 남과 북이 합해 통일을 이룬다는 꿈은 춘몽(春夢)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렇게 될 경우 스탈린은 만주를, 그리고 나아가서 중국을 국민당과 미국에 넘겨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 후학들에게 한마디 부탁합니다.

 “남한에서 일어난 일들의 발생 이유를 남한의 테두리 속에서만 찾으려 해서는 안 됩니다. 무엇보다 강대국들 사이에서 일어난 일들의 영향을 알아야 합니다. 나라가 작으니까 한국 연구가 비례적으로 쉬울 것 같지만 그렇지 않아요. 오히려 반대입니다. 한국현대사를 제대로 연구하려면 한국 자료는 물론 중국·일본·러시아·미국 자료를 찾아봐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총체적인 그림을 그리기가 힘듭니다. 시야를 되도록 넓게 가져야 하고, 러시아·중국·미국에서 일어난 일에 관심을 두어야 하며, 특히 해방 후의 일들에 대해서는 북한에서 일어난 일에 주목해야 합니다.” /중앙일보 2011.11.9=배영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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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칼라피노 교수>

<기사3>

‘한반도ㆍ아시아문제’ 석학 스칼라피노 교수 별세

한반도를 비롯해 아시아 연구의 세계적인 석학으로 꼽히는 로버트 스칼라피노 미국 버클리 캘리포니니아 주립대 명예교수가 지난 2011년 11월 1일(이하 현지시간) 캘리포니아주 오클랜드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92세.
버클리대는 2일 교수 일동 명의로 "깊은 슬픔과 함께 스칼라피노 교수가 지난밤 별세했음을 전한다"고 밝혔다.

1919년 미국 캔자스주 리븐워스에서 태어난 스칼라피노 교수는 샌타바버라대를 졸업하고 1948년 하버드대학교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은 뒤 잠시 모교에서 강의한 것을 빼고는 다음해부터 버클리대에 재직하며 반세기 넘게 교수로 활동했다. 미국에서 본격적으로 아시아를 연구하기 시작한 1세대 학자에 속한다. 그는 한국과 중국, 일본, 인도 등 아시아의 정치ㆍ사회 변화에 큰 관심을 갖고 최근까지 활발한 연구를 계속해왔다.

특히 1978년 버클리대 동아시아 연구소를 세워 1990년 소장을 맡았으며, 그 사이에 ‘한국 공산주의운동사’, ‘김일성’ 등 한반도와 관련된 저서를 출간하는 등 한국의 현대사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북한도 6차례 방문하는 등 남북관계에도 큰 관심을 보였다. 또 ‘현재 일본정당과 정치’, ‘중국의 사회주의 혁명’ 등 아시아 문제와 관련된 39권의 저서와 수많은 논문을 펴냈다. 중국 베이징대학에서 3차례 연구교수를 지냈고, 중국이름(施伯樂)을 사용하기도 했다.

하버드 시절 미국과 유럽에 관심을 갖던 그가 아시아 쪽으로 눈을 돌린 계기는 2차 세계대전이었다. 1941년 일본의 진주만 공습 이후 그는 아시아로 연구분야를 바꿨으며, 1943년부터 3년간 해군장교로 복무하며 일본어를 익혔다. 지난해 구순을 맞아 출간한 회고록 성격의 저서 ‘신동방견문록-리븐워스에서 라싸까지’에서 "2차대전 발발 이후부터 아시아는 내 인생이었다"며 당시의 과정을 소상하게 소개했다.

스칼라피노 교수와 한국의 인연은 각별했다. 그가 한국 연구를 시작하게 된 건 대학원 제자였던 이정식(80) 미 펜실베이니아대 명예교수 겸 경희대 석좌교수의 권유였다고 직접 밝힌 적이 있다. 한국내에 많은 제자들이 있으며 한국 문제에 대한 정치적 조언도 기회있을 때마다 했다.

고려대 명예교수인 한승주 전 외무장관, 이정식 경희대 평화복지대학원 석좌교수 등이 그의 제자다. ‘신동방견문록’ 번역 역시 제자인 최규선 유아이에너지 대표가 맡았다.

1959년 그가 미국 상원에 제출한 한국 관련 보고서에서 군사 쿠데타 발생 가능성을 ‘예측’한 것은 학계에서 전설로 통한다. 그러나 그런 그도 보고서가 나온지 불과 2년만에 군사쿠데타가 일어날 것으로는 예상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정식 교수와 지은 ‘한국 공산주의운동사'(1973)는 한때 독립운동사에서 금기시됐던 김일성의 일제 강점기 항일 운동 문제를 수면위로 올렸다는 평가를 받는다.

스칼라피노 교수는 1990년 정년 퇴임한 후에도 버클리대 종신 명예교수로 활발한 활동을 계속했다. 작고하기 전까지도 버클리대 동아시아연구소에 사무실을 갖고 있었다.

지난해 6월 그는 마지막으로 한국을 방문했다. ‘신동방견문록’에서 그는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해 첫인상은 단순하고 전통적인 정치관을 지닌 사람이라는 것이었다고 회고하면서 박 전 대통령의 유신헌법과 독재정치는 장차 일어날 미군 철수에 대한 대비책이었다고 분석했다.또 1973년 일본에 망명 중인 김대중 전 대통령과 처음 만났으며 이후 수감된 김 전 대통령을 지지하고자 이희호 여사를 찾아간 일도 소개했다.

스칼라피노 교수는 1989년 여름 처음 북한을 방문한 뒤 받은 인상은 "외부 세계와 완벽하게 차단된 기이한 사회라는 것"이었다고 회상했다.한반도 통일 전망에 대해서는 "북한의 붕괴나 전쟁이 발발하지 않는 한 한반도 통일은 당분간 불가능해 보인다"고 내다봤다.

미국과 함께 G2(주요 2개국)로 부상한 중국에 대해서는 "현재의 추세가 계속되면 20-30년 후 경제력에서 중국이 미국을 초월해 세계 최고의 경제 대국이 될 것"이라면서 그러나 극심한 빈부갈등 등 해결해야 할 문제가 산적해 있고 공산당의 독재도 계속될 것이라고 예상했다./워싱턴=연합뉴스 이우탁 특파원

4 Comments

  1. 김진아

    2011년 11월 11일 at 7:44 오후

    기사 읽었지요. 물론 아이들에게도 읽히게 하였구요.

    좋은 것만 있으면 나쁜 것을 모르게 되고,
    지금의 부유함?에 대한 착각은 굉장히 두려운 존재의 결과로 나타날 수 있는 것을..

    모두들…지나치게 붕..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가슴이 서늘하게 느껴진다는 큰 아이 말에…동감하면서요.   

  2. 그냥

    2011년 11월 12일 at 12:36 오전

    우리의 현대사를 보는 시각에 큰 도움이 되는 글입니다.

    특히 모택동에 의해서 결국 소멸된 팔로군이 46년 한 때 북한에 들어와 재기했다는 사실은 참 새롭내요.
    중공군의 6.25 참전(항미원조전쟁)은 모택동이 부담스러워 마음대로 다루지 못했던 팔로군(북한에 큰 신세를 진)을 앞세웠고 그들의 핵심전력이 전쟁에서 소실되며 힘이 약해지고 남은 병력조직은 농큰이란 이름으로 베이따황(北大慌)개척 농업조직으로 전환되어…모택동의 인민해방군이 전권을 잡게되는…. 중국현대사와 맞물리고….

    한반도의 큰 운명을 우리 스스로가 결정한 역사를 찾아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참 다행한 것은 현대적 문명조류가 세계화과정에 들어서며, 세상의 어느 국가도 자기 혼자 자기의 운명을 결정할 수 없는 지구촌의 운명공동체로 얽혀가고 있는 현상입니다. 이런 조류 속에서는 우리처럼 살아온 사람들의 강인한 생존방식이 더욱 경쟁력을 가지겠지요. 2050년의 한반도는 러시아나 골드만 삭스가 예측하는 것 처럼 [괴력을 가진 국가]가 될 것입니다.

    좀 안타까운 것은 우리에게 이로운 이런 문명의 조류를 외면하고 [FTA반대], [‘자유민주주의’ 반대] 등등을 직업적으로 외치는 일부 세력화된 동포들 입니다.

    이정식 교수님 같은 스승이 좀 더 오래 사시면서 귀한 활동하실 수 있도록 우리사회가 도울 수 있으면…..
       

  3. 지해범

    2011년 11월 13일 at 4:19 오후

    진아님 덕분에 아이들의 독서의 폭이 점점 더 넓어지는군요.
    진아님 아이들이 이런 폭넓은 독서를 통해 일부 편협한 교사들의 독단적 주장을 잘 걸러내리라 생각합니다.
       

  4. 지해범

    2011년 11월 13일 at 4:21 오후

    그냥님, 반갑습니다.
    러시아 언론이 ‘괴력을 가진 국가’라고 표현한 것은 통일후 한국에 대한 주변국들의 불안감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런 불안감 때문에 남북통일에 선뜻 찬성하기 어려우리라 여겨집니다.
    그래서 더욱 우리의 지혜가 필요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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