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시대 가장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지역은?

삼국시대 고구려와 신라가 가장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던 장소는 어디일까? 지리적으로 볼 때 소백산과 월악산을 국경으로 두고 치열한 전투를 벌였을 가능성이 높다. 소백산과 월악산으로 이어지는 드넓은 능선 너머로 서로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며 넘나들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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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국사지터에 팔과 머리가 잘린 채 있는 석불입상.

그러면 그들이 군사를 이끌고 넘나들었던 길은 어느 길이었을까? 당시 역사상 있었던 길은 월악산 자락의 계립령 하늘재와 소백산의 죽령, 두 길이다. 계립령 하늘재는 신라 아달라이사금 3년(서기 156년)에 길을 개척했다고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나온다. 기록상 최고의 옛길이다. 죽령은 이보다 2년 뒤인 아달라이사금 5년(서기 158년)에 죽죽(竹竹) 장군을 시켜 길을 열었다. 계립령 하늘재와 죽령, 두 길 중 계립령 하늘재는 충주 방향이고, 죽령은 단양 쪽으로 북으로 향한다. 두 길의 직선거리는 40㎞도 채 안 되지만 신라는 북으로, 고구려는 남으로 진출하기 위한 교두보가 된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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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국사지터에 대한 안내설명.

이 두 길 중 지형적으로 볼 때 죽령에서 신라와 고구려가 치열한 전투를 전개했을 가능성이 높다. 계립령 하늘재는 송계계곡 바로 옆으로 험준한 절벽에 가까운 지형으로 군사를 이끌고 가다간 매복한 상대 군사에 의해 몰살당할 위험이 큰 지형이다. 신라와 고구려 양쪽 다 그런 위험부담을 안았을 것이기 때문에 이곳을 통해 군사가 넘나들었을 가능성은 낮다. 뿐만 아니라 죽령 이남의 영주 지역엔 순흥의 고구려 벽화 등 유적이 많이 발굴되고, 죽령 이북 단양 지역엔 보국사지 등 신라 유적이 발굴되는 점을 볼 때 계립령 하늘재 보다는 죽령을 더 많이 이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본다면 삼국시대부터 가장 활발한 길은 죽령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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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령 가는 길에 죽령산신당이 있다.

죽령은 삼국시대엔 군사 요충지 역할을 했고, 고려시대엔 불교문화, 조선시대엔 유교문화의 전래지 역할을 했다. 이는 주변 문화유적을 살펴보면 쉽게 파악할 수 있다.

고구려는 470년쯤 장수왕 말년까지 죽령 지역을 차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신라 진흥왕 12년 서기 551년에 진흥왕이 거칠부 장군에게 백제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죽령 이북으로 패퇴시켰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나온다. 고구려는 590년쯤 온달장군이 출정하면서 ‘계립령과 죽령 이북은 원래 고구려 땅이니 되찾기 전에는 돌아오지 않겠다’고 각오를 밝혔다. 온달장군이 장렬히 전사한 마지막 전투다. 따라서 6세기 이후엔 완전히 신라영토로 귀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까지 양국의 최전방 요충지 역할을 했던 단양에 신라유적이, 죽령 남쪽 영주에 고구려 유적이 많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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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령산신당에 대한 설명.

6세기 중반부터 신라 영토로 귀속된 소백산은 유달리 불교색채를 강하게 드러내고 봉우리 이름도 불교용어를 많이 쓰고 있다. 우선 최정상봉인 비로봉이 그렇고, 연화봉, 도솔봉, 국망봉 등 웬만한 봉우리는 전부 불교식이다. 또 많은 절이 눈에 띈다. 부석사, 비로사, 희방사, 초암사 등 전부 신라시대 때 창건한 절들이다. 고구려로부터 불교문화가 들어온 주요 전승로가 죽령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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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령옛길과 죽령휴게소로 가는 이정표.

조선시대 들어서는 유교의 본산이라 할 정도로 유교서원이 번성했던 곳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소수서원이 그 대표적이다. 우리나라에 유교를 전파시킨 안흥 선사의 영정을 모셔두고 있기도 하다. 죽령이 유교문화를 확산시킨 통로였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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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령산신당 맞은 편에 조성하고 있는 생태공원.

이런 역사적 배경을 간직한 죽령의 소백산은 조선시대 중기이후 혼란한 상황에서 몸을 숨길만한 명당으로 꼽히는 전국의 십승지 중에서 최고로 알려졌다.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소백산은 신(神)이 알려 준 복된 땅’이라고 예찬했을 정도다. 조선시대 예언서 <정감록>에서도 소백산과 태백산 일대가 십승지 중에서 일곱 군데나 꼽혔다. 특히 영주시 풍기 금계마을은 십승지 중에서도 으뜸으로 평가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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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령고개마을에 대한 안내판도 붙어 있다.

<정감록>에서 말하는 최고의 명당 소백산을 끼고 있는 죽령은 문경의 문경새재, 영동의 추풍령과 함께 영남 사람들이 한양 나들이 한 3대 관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많은 사연을 안고 넘나들었을 길이다. 선비들은 과거를 보러갔고, 보부상들은 봇짐과 행상을 지고, 관리들은 공무로 그 길에 사연을 남겼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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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고와 충청북도의 경계가 되는 죽령. 영남의 관문이라 적혀 있다.

길도 험해 예로부터 아흔아홉 굽이에 내리막 30리, 오르막 30리라고 했다. 험한 길일수록 사람들은 쉴 공간이 필요하다. 죽령역과 희방사역(지금은 소백산역) 주변엔 이용객들이 묵을 원(院, 고려와 조선시대 일종의 여관)과 주막이 번성했다. 옛날 사람들이 원과 주막에서 각종 사연과 삶의 애환을 나누며 내일 떠날 길에 대한 정보도 나누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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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령고개 바로 옆에 영주시에서 조성한 죽령주막과 정자.

1934년 5번국도, 1941년 중앙선 철도, 2001년 중앙고속도로가 차례로 건설됨에 따라 죽령옛길은 잘라지고 사라지는 수모를 당했다. 그 길이 간직한 사연과 역사도 함께 묻혀버렸다. 특히 단양 방향의 죽령옛길이 더욱 심했다. 영주문화연구회 황재혁 국장은 단양 방향의 죽령옛길을 찾기 위해 영주시를 통해 단양시와 국립공원관리공단 소백산사무소에 협조공문을 보낸 상태라고 말했다. 영주방향 죽령옛길은 길과 그 길이 가진 사연 및 역사가 거의 정리됐다고 했다. 영주문화연구회는 1990년 창립 이후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으며, 1999년 옛길을 복원하기 위해 죽령옛길을 처음 답사한 이래 죽령과 관련한 자료를 꾸준히 모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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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령주막 옆에 다양한 표정의 장승이 객들을 맞이한다.

황 국장에게 죽령옛길의 안내를 부탁했다. 기꺼이 동행에 응했다. 단양방향 5번국도 중앙고속도로 관리사무소에서 출발했다. 그 이상 북쪽으로는 죽령옛길이 단절돼 사실상 찾기 힘들고 의미도 없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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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단양에서 경북 영주로 넘어가는 죽령 내리막길 초입이다.

중앙고속도로 관리사무소를 지나 주차장 겸한 조그만 공간이 나왔다. 국립공원관리공단 소백산사무소에서 붙여놓은 커다란 등산로 안내판이 보였다. 소백산으로 올라가는 길이고, 동시에 영주로 넘어가는 길이다. 지도상으로는 단양방향 2㎞정도 지점에 죽령역이 표시돼 있다. 죽령역을 뒤로 하고 영주방향 죽령옛길로 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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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시에서 세운 죽령에 대한 안내비석.

My name is Garden Park. First name Garden means.......

1 Comment

  1. 허태정

    12.16,2009 at 8:04 오전

    보국사지터? 보국사지/보국사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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