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의 지진 그리고 분노

2048x1536-fit_un-homme-constate-les-degats-du-seisme-qui-s-est-produit-en-italie-le-23-08-16-filippo-monteforte지난 수요일에 이탈리아에서 일어난 지진으로 거의  250명의 인명이 사라졌고 365명의 부상자가 생겼다고 한다. 이 지진은 이탈리아의 여러 마을을 초토화 시켰다고 그래서 이태리 사람들의 분노가 폭증하고 있다고 했다.  분노? 누구에 대한 분노? 기자는 그 분노의 대상이 누구인지를 말하지 않았다. 목적어를 잃어버린건지 누구를 분노의 대상으로 삼아야 하는지도 모르고 치미르는 분노를 말한건지… 이런 경우에 분노를 느끼는 것이 가능한 일인지 모르겠다. 수요일에 갑작스럽게 일어난 지진은 목요일인 어제에도 강도 3에서 3.8까지 흔들렸었다고 한다. 그렇게 첨단 과학을 자랑하는 현대에 와서도 그 지진을 미리 감지할 수는 없었던 것인가보다. 하지만 자연의 이러한 행패 앞에서 과연 우리 나약한 인간들이 분노를 표출할 수 있는 것인지 그것은 철학적으로 생각해 볼 일이다. 어제 찌는 더위 앞에서 가만히만  있어도 힘이 빠지고 정신이 희미해지는 경험을 하며  무너진 콘크리트 더미에서 일하고 있을 사람들은 어떻게 이더위를 견디고 있을지 생각해 보았었다. 잠깐  뉴스를  같이 시청한  프랑스인들이  두려움이 가득한 눈으로 왜? 자꾸 이런 재앙이 터지는지 의문을 담은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정말 아포칼립스가 오는 것은 아닌지… 왜? 저를 그런 눈으로 보세요? 제가 동양 여자이기때문인가요? 그래서 혹시라도 동양인의 지혜로 더 확실한 해답이라도 가져다 줄 수 있을 것으로 보이나요?

 

로댕 박물관2

IMG_0490로댕 박물관 건물 내부로 들어가서 2층으로 올라가면 첫번째 방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는 ‘모자 쓴 아가씨’의 조각상이다. 로댕의 작품과 까미유 끌로델의 작품을 살펴보다보면 그 섬세함에 감탄하게 된다. 소재가 돌이기때문에 조각하는 것이 어려웠을텐데도 어떤 조각 작품은 입고 있는 드레스의 레이스부분까지도 세밀하게 조각하고 있다. 맨 아래층에는 로댕이 살아 있을 당시의 비데오가 상영되고 있는데 화면이 좋지는 않지만 그의 풍채를 감상할 수 있다. 대부분의 예술가들이 그렇지만 로댕도 무언지 모르지만 무척 불행했던 남자같은 인상이다.  그 불행은 스스로가 만들어낸 것인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어쩌면 인생은 불행해야 예술이 되고 흥미로워지는 것은 아닐까? 하는 뚱딴지 같은 생각을 해본다.

IMG_0491IMG_0494

 

IMG_0495IMG_0500

 

IMG_0502

이 조각상은 마치 살아 있는 사람이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는 인상을 주었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얼굴은 자세히 볼 수 있지만 자기 자신의 얼굴은 자세히 볼 수가  없다. 거울을 통해서 보는 자신의 얼굴이 얼마나 객관적이고 정확할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살아 있을때 이렇게 자기 자신의 조각상을 만들어서 자신을 한번 객관적으로 들여다 보아도 좋을 것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나가면서 얼핏 본 조각상이지만 너무나 살아 있는 느낌이 들어서 혹시 조각을 만들고 난 이후에 그의 영혼이 저 조각상 속으로 숨어 들은 것은 아닐까? 하는 뜬금없는 생각도 해보았다.

 

IMG_0503IMG_0504

 

위의 두 조각상도 얼굴표정의 섬세함을 너무나 잘 표현해 놓았다. 참 대단한 작품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혔었다.

IMG_0507IMG_0508

위의 조각상들은 발자크의 얼굴표정과 서 있는 자태이다.

IMG_0519

 

왼쪽의 조각품은 ‘ IRIS’라는 타이틀로 ‘신의 메시지’를 뜻한다고 하는데

여자의 음부를 조각해 놓아서 당시 상당한 스캔달을 일으켰었고 또한 사람들의 관심을 그만큼 끌어 모으기도 했던 작품이라고 한다. 이 작품을 보면

꾸르베의 ‘origine du monde’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로댕 박물관1

IMG_04718월 중순, 본격적인 여름날씨가 시작될거라는 일기예보 진행자의 말대로 토요일 오후는 쨍쨍한 햇살 아래 무더위가 시작될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로댕박물관으로 들어선다. 평상시같으면 많은 수의 관광객들이 몰리겠지만 최근에 일어난 테러사태로 인해 박물관 안은 한산했다. 여름의 뜨거운 햇빛만이 정원 쨍쨍하게 내리비치고 있었다.

중고등 학교 시절, 미술시간에 숱하게 들어온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 그리고 24살이나 연상인 로댕을 사랑했던 까미유 끌로델… 그와 그녀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는 로댕박물관 안으로 들어선다. 아래 사진들은 로댕 박물관 정원에서 찍은 사진들이다. 내부의 사진들은 다음 편에…

 

IMG_0472IMG_0474

 

IMG_0480IMG_0475

IMG_0485

일본의 국왕, 아키토의 고민

7784367457_l-empereur-akihito-le-1er-aout-2016-a-tokyo-japon

오늘 아침 프랑스 방송에선 일본 국왕, 아키토가 사임을 시사하는 말을 했다고 시끄럽게 떠들고 있었다. 아키토 국왕은 자신이 맡은바 임무를 다 하지 못할것이 두렵다고 공표했다. 이말은 왕위를 자손에게 물려 준다는 것을 의미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프랑스 방송인들은 일본인 국왕의 이같은 발표를 미래에 여성이 왕위를 물려받을 것인지까지 비약해서 이야깃거리를 만들고 있다. 아베 총리는 국왕의 이같은 심사를 신중하게 고려해보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일본 국왕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 본 기억이 없어서 잘은 모르겠지만 이같은 발표를 통해서 아키토 일본왕은 참으로 양심적인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양심적인 사람들이 사는 사회, 이것은 참으로 중요한 일이다. 양심적인 어른들이 있어야 아이들이 올바르게 자란다는 것이 내 소신이다. 한국을 식민지 통치했다는 사실때문에 일본에 대한 선입견이 좋지 않았지만 해외에 나와서 일본인들을 상대해 본 경험으로 볼때 그들은 내동포인 한국인들보다 훨씬 양심적이었다. 그래서 나는 사실 일본인들을 좋아한다. 뿐만아니라 일본인들때문에 유럽에서 아시아인의 위상이 높아졌다고 생각하기때문에 나는 그들을 고맙게 생각하고 존경한다. 한국 신문을 들여다보다가 형편없는 막말을 내뱉는 정치인들이나 사람들을 볼때도 한국 사회는 언제쯤 일본을 따라잡을까 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때도 있다. 좋은 것은 좋은 것이다. 아마 일제시대때 친일파가 되었던 사람들도 어쩌면 일본인들의 정직성과 예의바름에 반했던 사람들인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면 어디나 더 나은 사람을 모방하고 선망하고 교류하고 싶어하는게 인지상정이라고 생각한다. 너무 단순하게 친일파라고 단죄하지말고 그들이 처했던 환경과 상황을 고려해서 넓고 깊게 판단할 수 있게 되었으면 좋겠다. 참으로 양심적인 국왕이 있어서 일본은 아직도 희망이 많은 나라라는 생각이 드는 날이다.

19세기의 페미니스트 조르즈 상드( George Sand)

George_Sand_by_De_MussetGeorge Sand하면 우리는 쇼팽을 떠올린다.  하지만 조르즈 상드와 먼저 사랑에 빠졌던 남자는 프랑스의 시인, 알프레드 뮤세였다. 왼쪽 그림은 뮤세가 그린 조르즈 상드의 초상화이다. 프랑스 여자들이 선거권을 갖게 된 것이 1955년도 였다. 그만큼  자유의 나라라고 하는 프랑스에서도 여자에겐 많은 것이 금지 되어 있었다. 심지어 1950년대에는 이혼할 권리도 없었다. 그런데 조르즈 상드는 1804년에 태어났다. 그리고 페미니스트였다. 그녀는 다산 작가로 통한다. 70여개의 소설을 발표했고 가난한 사람들을 옹호하는 휴머니스트적인 작가였다고 한다. 조르즈 상드는 1833년에 알프레드 뮤세를 만나서 애인이 되었다. 뮤세는 당시 일종의 정신병을 앓고 있었는데 지금의 의학이 말하는 스키죠프렌이라는 병이었다. 뮤세의 소개로 조르즈 상드는 피아니스트인 리스트를 알게 되었었고 그 다음에 쇼팽을 알게되었다.

조르즈 상드는 어렸을때 이름이 Amantine Aurore Lucile Dupin이었다. 자유롭게 문학 활동을 하기 위해서 나중에 남자이름인 George Sand로 이름을 바꾸고 남자 옷을 입고 다니곤 했었다고 한다.

 

800px-Indiana,_George_Sand_(Calmann-Lévy)조르즈 상드의 첫번째 소설은 Indiana이다. 그녀는 문학 살롱을 통해 당시의 유명한 작가들과 교류를 했다. 발작, 플로베르. 빅톨 위고… 등 특이하게도 빅톨위고와는 오로지 편지로만 교류를 했고 한번도 직접 만난적은 없다고 한다. 나중에 유명한 프랑스 화가 유제니 들라크루와도 교류를 한다.  결혼을 하여 아이가 둘이나 있었음에도 아주 자유로운 여자였다. 역사가들은 조르주 상드가 이쁜 여자는 아니였다고 한다. 매력이 많았고 아주 여성적인 느낌을 많이 주는 여자였다고 한다. 조르즈 상드는 프랑스 문학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 여류작가로 역사가 인정하는 작가이다. 그녀는 1876년 8월 6일  Château de Nohant-vic에서 눈을 감았다. 어떻게 보면 그녀는 최초의 페미니스트 작가라고 일컬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