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변의 카프카>를 읽으며 책장 귀퉁이를 접어놓았던 구절들입니다. ^^
<상권>
소파에 앉아 주위를 둘러보고 있는 동안에 이 작은 방이야말로 내가 오랫동안 찾아 헤매던 장소임을 깨닫는다. 나는 바로 이런 세계의 움푹 파인 데와 같은 은밀한 장소를 찾고 있던 것이다. -p58
그러나 그와 동시에 아무리 많은 시간이 흘러도, 도중에 무슨 일이 일어나든 절대로 망각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주춧돌처럼 자기 안에 남는 것이 있는 법입니다. 결코 마모되지 않는 기억이 있습니다. -p191
모든 것은 상상력의 문제다. 우리의 책임은 상상력 가운데에서 시작된다. 그 말을 예이츠는 이렇게 쓰고 있다. In dreams begin the responsibilities. 그 말대로다. 거꾸로 말하면, 상상력이 업는 곳에 책임은 발생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 아이히만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p256
"그것은 잘 알고 있네. 자네는 사람을 죽인 적도 없고, 죽이려고 생각해 본 적도없지. 자네는 그런 일에 별로 어울리지 않네. 그러나 나카타 상, 세상에는 그런 논리가 잘 통하지 않는 곳도 있는 걸세. 어울리느냐, 어울리지 않느냐에 대해서는 아무도관심을 갖지 않는 상황도있는 거라네." -p276
"다만 내가 그것보다 더 짜증이 나는 것은, 상상력이 결여된 인간들 때문이야. T.S. 엘리엇이 말하는, ‘공허한 인간들’이지. 그리고 그 무감각함을, 공허한 말을 늘어놓으면서, 타인에게 억지로 강요하려는 인간들이지.
(…)
상상력이 결여된 부분을, 공허한 부분을, 무감각한 지푸라기로 메운 주제에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바깥을 돌아다니는 인간이지. 그리고 그 무감각함을, 공허한 말을 늘어놓으면서, 타인에게 억지로 강요하려는 인간들이지.(…)"
그는 한숨을 쉬고 손가락으로 긴 연필을 돌린다.
"게이든, 레즈비언이든, 정상인이든, 페미니스트든, 파시스트의 돼지든, 공산주의자든, 힌두교 신자든, 그런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어. 어떤 깃발을 내걸든 나는 전혀 상관하지 않아. 내가 견딜 수 없는 것은 그런 공허한 사람들이야."
-p351
<하권>
"나도 열다섯 살 무렵에는 어딘가 다른 세계에 가고 싶어했지"하고 사에키 상은 미소 지으며 말한다. "어느 누구의 손도 미치지 않는 곳으로, 시간의 흐름이 없는 곳으로."
"하지만 이 세계에 그런 장소는 없습니다."
"그래, 맞아. 그래서 나는 이렇게 살고 있는 거야. 사물이 계속 훼손돼고, 마음이 계속 변하고, 시간이 쉬지 않고 흘러가는 세계에서." 그녀는 시간의 흐름을 암시하듯 한참 입을 다문다.
-p43
"사에키 상" 하고 나는 다시 한 번 부른다. 나는 몹시 절박한 무엇인가에 떠밀려 가고 있다.
소녀는 턱을 괴고 있던 손을 내려놓고, 오른손을 입으로 가져간다. ‘아무 말도 하지 마’ 하고 말하듯이. 하지만 그것이 정말 그녀가 하려는 말일까? 그 눈동자를 바로 옆에서 똑바로 들여다볼 수 있었으면, 하고 나는 생각한다. 그녀가 지금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느끼는지 읽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녀가 그 일련의 동작으로 나한테 무엇을 전달하려고 하는지, 무엇을 암시하려 하는지. 이해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모든 의미는 새벽 세 시 전의 무거운 어둠에 꽁꽁 묶여버린 것 같다.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져 나는 눈을 감는다. 가슴속에 단단한 공기 덩어리 같은 것이 있다. 마치 비구름을 그대로 삼켜버린 것처럼. 몇 초 뒤에 눈을 떴을 때, 소녀의 모습은 이미 사라지고 없다. 소녀가 떠난 자리에는 아무도 없는 의자가 남겨져 있을 뿐이다. 구름의 그림자가 숨을 죽이고 책상 위를 가로질러 간다.
나는 침대에서 나와 창가로 가서 밤하늘을 올려다본다. 그리고 돌이킬 수 없는 시간에 대해 생각한다. 강에 대해 생각하고, 조수에 대해 생각한다. 숲에 대해 생각하고, 용솟음치는 물에 대해 생각한다. 비에 대해 생각하고, 벼락에 대해 생각한다. 바위에 대해 생각하고 그림자에 대해 생각한다. 그것들은 모두 내 안에 있다.
-p69
"새 한 마리가 가느다란 나뭇가지에 앉아 있다고 가정해 봐요"하고 사에키 상이 말한다. "그 가지가 바람에 크게 흔들리면, 그 가지의 흔들림에 따라서 새의 시야도 크게 흔들리게 되지, 그렇지?"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럴 때 새는 어떤 방법으로 눈을 안정시켜 잘 볼 수 있게 하는지 알아?"
나는 고개를 흔든다. "모르겠는데요."
"가지의 흔들림에 맞춰서, 머리를 아래위로 피뜩피뜩 가볍게 올렸다 내렸다 하는 거야. 굉장히 고달플 것 같지 않아? 자기가 앉아 있는 자리가 흔들리는 데 맞춰서 일일이 고개를 흔들며 살아가는 인생이란."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새는 그것에 익숙해져 있어. 그러니까 생각하는 것만큼 고달프지는 않은 거야. 하지만 나는 인간이니까, 경우에 따라서는 몹시 피곤해져."
-p79
"하지만 기분 최고였어."
"얼마나?"
"과거도 미래도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순수한 현재라는 건 미래를 먹어가는, 과거의 붙잡기 어려운 진행이다. 사실은, 모든 지각은 이미 기억이다.’"
청년은 얼굴을 들고 입을 반쯤 벌린 채 여자 얼굴을 보았다. "그게 무슨 말이지?"
"앙리 베르그송이 한 말이야"하고 그녀는 귀두에 입술을 대고 남은 정액을 핥으면서 말했다. "무지과 기어."
"뭐라고? 잘 안들리는데."
"<물질과 기억>이라는 책 읽은 적 없어?"
-p87
"어쨌든 다무라 군은, 다무라 군의 가설은 꽤 먼 곳에 떨어져 있는 과녁을 향해서 돌을 던지고 있어. 그것은 알고 있겠지?"
나는 고개를 끄떡인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메타포를 통하면 그 거리는 훨씬 짧아집니다."
"그렇지만 나도 다무라 군도 메타포는 아니잖아?"
"물론이죠" 하고 나는 말한다. "그러나 메타포를 통해 저와 사에키 상 사이에 있는 것을 꽤 많이 생략해 갈 수 있습니다."
그녀는 내 얼굴을 올려다본 채, 다시 살짝 미소 짓는다. "그건 내가 이제까지 들어본 중에서 가장 이색적인 구애의 말이네."
-p127
"저, 오시마 상. 혼자 있을 때 상대를 생각하며 서글픈 마음이 된 적이 있어요?"
"물론."하고 그는 말한다. "이따금 있지. 특히 달이 창백하게 보이는 계절에는. 특히 새들이 남쪽으로 건너가는 계절에는. 특히…"
"어째서 물론이죠?하고 나는 묻는다.
"누구나 사랑함으로써 자기 자신의 결여된 일부를 찾고 있기 때문이지. 그렇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면, 다소의 차이는 있을망정 언제나 애절한 마음이 되는 거야. 아주 먼 옛날에 잃어버린 그리운 방에 발을 들여놓은 것 같은 기분이 되는 거지. 당연한 일이야. 그런 기분은 네가 발명한 게 아니야. 그러니까 특허 신청같은 것은 하지 않는게 좋을거야."
나는 포크를 내려놓고 얼굴을 든다.
"멀리 있는 낡고 그리운 방?"
"맞았어"하고 오시마 상은 말한다. 그리고 포크를 공중에 세운다. "물론 메타포지만."
-p133
"그렇다면 한 가지 묻겠는데, 음악에는 사람을 변하게 하는 힘이 있다고 생각합니까? 말하자면 어떤 때, 어떤 음악을 듣고, 그 때문에 자기 내부에 있는 무엇인가가 크게 확 변해 버리는, 그런 일 말입니다."
오시마 상은 고개를 끄덕이며 "물론이죠"하고 대답했다. "그런 일은 있습니다. 무언가를 경험하고, 그것에 의해 우리 내부에서 무언가가 일어납니다. 화학작용 같은 것이지요. (…) 연애와 마찬가지입니다."
(…)
"그런 일이 전혀 없다면, 우리 인생은 아마도 무미건조한 것이 되겠지요. 베를리오즈는 말했습니다. ‘만일 당신이 <햄릿>을 읽지 않은 채 인생을 마친다면, 당신은 탄광의 깊숙한 막장 속에서 일생을 보낸 것과 같다’라고 말입니다."
"탄광 속에서……?"
"하긴 19세기적인 극단론입니다만."
-p2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