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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부 이태훈 기자입니다. 문화부에서 종교와 미술을 담당하다 1년간 영국 연수를 다녀왔고 현재 영화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이 나이 먹도록 여전히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 가슴뛰는게 감사하고 눈 앞의 엄중한 일상 그 너머를 바라보고 싶어 공상에 빠지는 일이 잦지만 다음날 아침 신문에서 읽었을 때 부끄럽지 않은 글을 쓰려 노력하고 있고 그럼에도 여전히 늘 부끄럽고 부족합니다.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 26년 만에 만난 전설의 그 영화

 

26년 만에 개봉한 그 때 그 영화.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 ^^
26년 만에 개봉한 그 영화.

IMDB 영화 정보 링크

영화를 본 뒤 깨달은 것.

1. 푹 자고 나올 줄 알았는데 졸 틈을 주지 않는다. 상영시간 237분. 중간 휴식 있는 영화는 진짜 오랜만.ㄷㄷㄷ

2. 봤는지 못 봤는지 헛갈렸는데 못 봤던게 확실. 키노 같은 데서 너무 읽어서 본 걸로 착각했던 모양.

3. 이 장첸(살인 소년)이 그 장첸(와호장룡 2046 자객 섭은낭)이라는 잊혀졌던 기억이 되살아남.

4. 뒤로 갈수록 ‘헉!’ 하고 놀라게 되는 시퀀스 대행진. 카메라워크, 가 무슨 뜻인지 알게 됨. 카메라가 진짜 발 달고 돌아다니는듯.

5. 애들이 칼 들고 벌이는 태풍의 밤 개싸움을 이렇게 처절히 아름다운 빛과 리듬감으로 그릴 수 있다니.

6. 이 영화에선 사물과 풍경도 배우가 된다. 나뭇잎, 농구공, 촛불, 일본식 가옥의 복도가 꿈틀대며 연기를 함. 이토 준지 만화도 아닌데. ㄷㄷㄷ

7. 팜므 파탈, 팜므 파탈 하지만, 이 영화의 소녀 ‘밍’ 만큼 강력한 팜므 파탈 캐릭터는 드물듯. 


8. 마지막 살인 장면의 (이 영화에선 상대적으로 짧은 편인) 롱테이크는 정말 ㄷㄷㄷ

9. 대만의 역사, 억압적 정치 상황, 전염되는 폭력, 일제의 유산, 사회의 공기, 서민의 살림살이, 가족의 의미, 소년기의 불안과 공황, 파리대왕, 실패와 좌절, 반항과 무기력, 애정과 집착, 권위주의, 희생과 용서…. 셀 수 없이 다양한 색과 결이 있는 중층적 텍스트라니.

10. 뭔가 인생 숙제 하나 끝낸 것처럼 술 땡김. ㅋ 극장의 어둠에 스스로 가둬놓고 봐야 더 깊이 느껴질 영화.

그리고, 정성일 선생이 키노에 쓴 짧은 리뷰 링크.
https://seojae.com/web/kino/kino9912-13.htm

 

[우리는 같은 꿈을 꾼다] 껴안으려면, 먼저 허물어야 한다

헝가리 일디코 엔예디 감독의 올해 베를린영화제 황금곰상 수상작 '우리는 같은 꿈을 꾼다'(On Body And Soul).
헝가리 일디코 엔예디 감독의 올해 베를린영화제 황금곰상 수상작 ‘우리는 같은 꿈을 꾼다'(On Body And Soul).

 

  30일 개봉한 영화 ‘우리는 같은 꿈을 꾼다'(On Body and Soul)은 헝가리 일디코 엔예디(61) 감독의 올해 베를린영화제 황금곰상(최고상) 수상작이다. 꿈을 현실에 덧대고, 잔혹함과 아름다움을 엮어 짠다. 소통을 위한 기술이 진짜 소통을 가로막는 테크놀로지 과잉의 시대, 사람의 마음은 어떻게 서로 이어지고 이해할 수 있는 것인지 묻는다. 신비로운 동화, 이미지로 쓴 환상시편 같다.

  시작이 예사롭지 않다. 흰 눈 덮힌 침엽수림. 둥근 연못가, 사슴 한 쌍이 있는 몽환적 풍경이다. 카메라는 이내 도축장으로 옮겨간다. 소가 피흘리며 고기로 해체되는 과정을 훑는다. 주인공 남녀는 이 도축장에 있다. 고기 등급 매기는 검사원 여자와, 도축장 운영하는 재무이사 남자. 여자는 모든 것이 낯설어 조심스럽고, 남자는 세상 권태 홀로 짊어진 듯 무미건조하다. 영 안 어울릴 것 같은 두 사람, 우연한 사건을 계기로 밤마다 같은 꿈을 꾼다는 걸 알게 된다. 사슴이 되어 만나는 꿈이다.

헝가리 일디코 엔예디(61) 감독의 올해 베를린영화제 황금곰상(최고상) 수상작. 꿈을 현실에 덧대고, 잔혹함과 아름다움을 엮어 짠다. 소통을 위한 기술이 진짜 소통을 가로막는 테크놀로지 과잉의 시대, 사람의 마음은 어떻게 서로 이어지고 이해할 수 있는 것인지 묻는다. 신비로운 동화, 이미지로 쓴 환상시편 같다.
헝가리 일디코 엔예디(61) 감독의 올해 베를린영화제 황금곰상(최고상) 수상작. 꿈을 현실에 덧대고, 잔혹함과 아름다움을 엮어 짠다. 소통을 위한 기술이 진짜 소통을 가로막는 테크놀로지 과잉의 시대, 사람의 마음은 어떻게 서로 이어지고 이해할 수 있는 것인지 묻는다. 신비로운 동화, 이미지로 쓴 환상시편 같다.

 

곧 그 꿈이 현실을 흔든다. 남녀는 상대의 영혼을 들여다 보길 원하고, 몸을 느끼고 싶어진다. 하지만 자신을 가둔 감옥은 타인을 향한 칼이 된다. 그 칼은 영혼 뿐 아니라 몸도 벤다. 껴안으려면, 먼저 스스로 경계를 허물 용기를 내야 한다.

  느리고 고요한 이야기지만 순진한 유머 덕에 지루하지 않다. 감정 표현이 서툰 여자, 회사 식당에서 남자에게 대뜸 “나는 당신이 아름답다고 생각해요라고 말해, 순간 모두 얼어붙는 식이다. 감독은 빛이 부드럽게 흩어지며 화면을 감싸도록 능숙하게 다룬다. 마음까지 따뜻해진다. 올해 전주영화제 개막작. 상영시간 116, 청소년 관람불가. ★★★☆

이태훈 기자

이번주 개봉영화 딱 10자평(11월 마지막주)

헝가리 일디코 엔예디(61) 감독의 올해 베를린영화제 황금곰상(최고상) 수상작. 꿈을 현실에 덧대고, 잔혹함과 아름다움을 엮어 짠다. 소통을 위한 기술이 진짜 소통을 가로막는 테크놀로지 과잉의 시대, 사람의 마음은 어떻게 서로 이어지고 이해할 수 있는 것인지 묻는다. 신비로운 동화, 이미지로 쓴 환상시편 같다.
헝가리 일디코 엔예디(61) 감독의 올해 베를린영화제 황금곰상(최고상) 수상작 ‘우리는 같은 꿈을 꾼다'(On Body And Soul)의 도입부 꿈 속 장면. 꿈을 현실에 덧대고, 잔혹함과 아름다움을 엮어 짠다. 소통을 위한 기술이 진짜 소통을 가로막는 테크놀로지 과잉의 시대, 사람의 마음은 어떻게 서로 이어지고 이해할 수 있는 것인지 묻는다. 신비로운 동화, 이미지로 쓴 환상시편 같다.

 

우리는 같은 꿈을 꾼다      느리고 고요하되 선명한   ★★★☆

  헝가리 일디코 엔예디(61) 감독의 올해 베를린영화제 황금곰상(최고상) 수상작. 꿈을 현실에 덧대고, 잔혹함과 아름다움을 엮어 짠다. 소통을 위한 기술이 진짜 소통을 가로막는 테크놀로지 과잉의 시대, 사람의 마음은 어떻게 서로 이어지고 이해할 수 있는 것인지 묻는다. 신비로운 동화, 이미지로 쓴 환상시편 같다.

오리엔트 특급 살인            셰익스피어 닮은 포와로   ★★★☆

  셰익스피어 연극과 영화로 명성을 쌓아온 저력의 배우 케네스 브래너가 감독·주연을 맡아 애거서 크리스티의 추리소설 ‘오리엔트 특급열차 살인 사건’을 영화화했다. 나온지 80년쯤 된 소설이지만, 조니 뎁, 주디 덴치, 미셸 파이퍼, 라일리 데이지…. 한 연기하는 배우들의 힘으로 전혀 새로운 영화같다. 우아하고 고전적이며 기품있는 클래식 탐정 영화 시리즈의 탄생.

기억의 밤               전반부 지나면 혼돈의 밤   ★★☆

  신경쇠약 3수생 청년(강하늘). 늘 존경했던 형(김무열), 인자하고 자애로운 부모와 함께 새 집으로 이사왔는데, 이 집, 왠지 낯익다. 전 집주인 부탁이라며 문을 걸어잠근 방에선 자꾸만 이상한 소리가 나고, 설상가상 비오는 밤 함께 산책나갔던 형이 납치당한다. 이 집에 무슨 비밀이 있는 걸까. 아니, 내가 믿는 진실은 정말 진실인 걸까. IMF 구제금융 사태 이후 20년, 아직도 그 고통에 묶여 자유롭지 못한 사회를 되돌아본다.  

반드시 잡는다                      성동일 밀고, 백윤식 끌고  ★★☆

  웹툰 ‘아리동 라스트 카우보이’(작가 제피가루)를 영화화했다. 가난하지만 평온한 아리동에 30년 전 미제 사건과 동일한 수법의 연쇄 살인이 다시 벌어진다. 사고나 자살로 위장해 힘없는 노인을, 그 다음엔 혼자 사는 긴 생머리의 여성을 잔혹하게 살해하는 수법이 옛날 그대로. 돈 밖에 모른다고 욕 먹는 밉상 터줏대감 ‘심덕수’(백윤식)와 30년 전 눈앞에서 살인마를 놓쳤던 은퇴 형사 ‘박평달’(성동일)이 함께 범인의 뒤를 쫓는다. 고질병인 반전 강박, 가끔 요령없이 뒤숭숭해지는 전개는 아쉽지만, 두 배우의 호연 덕에 ‘액션 노인’ 캐릭터가 생생하고 매력적이다. 몇몇 인기 배우로 ‘영화 돌려막기’가 만연한 풍토에서, 두 노장 배우의 활약은 반가운 일. 게다가 비평과 흥행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았던 영화 ‘끝까지 간다’ 제작사 ‘AD406’의 스타일이 선명한 것도 장점. 실버판 ‘끝까지 간다’라 해도 좋을 만큼 꽤 흥미진진한 범죄 스릴러가 됐다. 열심히 살아도 피지 않는 서민 살림, 고독사와 노인 혐오 같은 문제도 건드리지만 부담스럽지 않다.

 

‘모든 판타지의 아버지’ JRR 톨킨을 낳은 영국 버밍엄과 옥스퍼드

 

     1930년 무렵 여름날이었다. 옥스퍼드대 앵글로색슨어 교수 J.R.R.톨킨(1892~1973)은 옥스퍼드 북쪽 노스무어가(街) 20번지의 벽돌집 서재 창가에 앉아 있었다. 부업삼아 고교 수료 시험 답안지를 채점하던 그가 늘 즐기던 캡스턴 잎담배를 파이프에 다져 넣고 불을 붙였다. 열린 창문 사이로 바람이 불어와 담배 연기를 허공에 흩었다. 그 때, 짧은 문장 하나가 갑자기 머릿속에 떠올랐다.
      “땅 속 구멍에 호빗이 살고 있었다.”
     답안지 빈 칸에 그 문장을 옮겨 적으며 톨킨은 생각했다.
      ‘그런데, 도대체 호빗이 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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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빗 빌보(가운데)와 드워프들.  /워너브러더스 제공

 

     톨킨은 침대 머리맡에서 아이들에게 이야기로 만들어 들려주며 이 문장에 살을 붙여 나갔다. 1937년 9월 17일 런던의 한 출판사가 ‘호빗’ 초판을 펴냈다. 먹성좋고 유쾌한 종족 호빗과 회색 수염을 휘날리는 거인 마법사 간달프가 용에게 뺏긴 고향을 되찾으려는 드워프들과 함께 떠나는 모험 이야기는 단숨에 독자들을 사로잡았다.

   1954년엔 ‘반지의 제왕’이 출간됐다. 신과 악마, 엘프와 인간이 얽혀드는 ‘중간계(Middle Earth)’ 수만년 역사가 태어났다. 영국 언론들은 호빗이 약 1억부, 반지의 제왕이 약 1억5000만부 팔린 것으로 추정한다. 20세기에 가장 많이 읽힌 책이라는 데 이견이 없다. 톨킨의 책은 열등한 대중소설로 홀대받던 환상문학을 주류의 지위로 끌어올렸다. 그의 책은 극장 매출 총 18억 달러를 넘긴 영화 ‘반지의 제왕’과 ‘호빗’ 3부작으로 만들어졌다.

   이후 영화, 게임, 드라마들이 마법사, 요정, 괴수, 데미갓(半神)들로 넘쳐나기 시작했다.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흥행 공식이 송두리째 바뀐 것이다. TV시리즈 ‘왕좌의 게임’의 원작 소설가 조지 R 마틴은 “톨킨의 책은 의심할 바 없이 모든 현대 판타지의 아버지”라고 했다. 톨킨이 불을 당긴 대중 문화의 ‘퀀텀 점프’는 어디서 어떻게 시작된 것일까.

◇두 개의 탑과 샤이어의 원형, 버밍엄

   영국 제2의 도시 버밍엄의 한적한 교외 주택가에는 콜(Cole) 강의 물길이 잠시 쉬어가는 커다란 연못이 있었다. 늦봄 잉글랜드의 하늘은 푸르고, 250년 된 셰어홀 방앗간의 붉은 벽돌로 된 굴뚝은 백조가 노니는 연못에 잔잔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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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강이 모인 연못에 비친 증기방앗간 셰어홀 밀의 모습.(위) 내부에는 톨킨이 어린 시절을 보낼 무렵의 옛 방앗간 모습이 잘 보존돼 있다.  /버밍엄=이태훈 기자

 

     “어린 톨킨은 이 동네에서 가장 행복한 시절을 보냈어요. 방앗간 마당에 들어가 장난을 치다 주인집 아들에게 혼쭐이 나 도망치곤 했는데, 그 아들이 늘 하얀 밀가루를 뒤집어쓰고 있었다네요. 톨킨과 남동생은 그를 ‘하얀 오크’라고 불렀죠.” 지금은 지역 박물관이 된 이 곳의 아이린 드보 큐레이터 부장은 “밀가루 뒤집어 쓴 성질 고약한 방앗간 집 아들이 톨킨의 판타지에서 악의 세력의 주력군 오크 종족이 하얀 피부색을 갖게 된 이유”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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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톨킨의 놀이터였던 모즐리 습지(Moseley Bog). 버밍엄을 찾는 톨킨 순례객들의 교과서와도 같은 책 ‘톨킨 중간계의 뿌리'(Roots of Tolkien’s Middle Earth)의 저자인 로버트 블랙햄은 무엇이 톨킨을 모든 판타지의 아버지로 만들었는지 묻자 “모든 것을 한꺼번에 설명할 수 있는 성배(聖杯)는 없다”고 했다. /버밍엄=이태훈 기자

 

     여기서 걸어서 15분쯤 걸리는 모즐리 습지 보호구역은 톨킨이 어린 시절을 보낸 놀이터였다. 반지 원정대를 도와 오크 군대를 향해 바위를 집어 던지던 중간계 고대 종족 ‘엔트’를 닮은 고목(古木)들이 하늘을 향해 팔을 벌리고 서 있었다. 과거엔 맑은 물로 가득한 저수지여서 ‘콜드 배스(Cold Bath)’라 불리는 냇물가에 ‘블루 벨’ 꽃 무더기가 희고 푸른 빛으로 환했다. 톨킨 판타지 세계의 근원에 관한 책을 여러 권 쓴 로버트 블랙햄(67)은 이 곳에서 “중간계 풍경의 근본은 뉴질랜드가 아니라 미들랜드(브리튼 섬 중부 지방)의 자연이며, 톨킨이 이상향으로 여긴 호빗 마을 샤이어의 모델 역시 그가 뛰놀며 자란 버밍엄 교외”라고 설명했다. 블랙햄은 버밍엄에 오는 톨킨 순례객들의 교과서 격인 ‘톨킨 중간계의 뿌리’(Roots of Tolkien’s Middle Earth)의 저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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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톨킨의 시야를 지배했던 버밍엄의 건축물들은 그가 만들어낸 판타지 세계 ‘중간계’의 건축물들에 영감을 줬다. 왼쪽 두 탑은 버밍엄 에지버스턴의 패럿츠 폴리, 에지버스턴 워터웍스 탑. 가운데는 사우론에게 사로잡힌 백색의 마법사 사루만의 본거지 아이센가드의 오르상크 탑. 왼쪽에서 네번째는 버밍엄대 시계 탑 ‘올드 조'(정식 명칭은 조지프 체임벌린 기념 시계탑). 마지막은 사우론의 본거지 모르도르의 바랏두르 탑. 탑 위에 거대한 눈동자처럼 빛나는 발광체는 사우론의 눈 혹은 사우론 그 자체로 여겨진다. /버밍엄=이태훈 기자

 

     버밍엄 중심가에는 중간계 ‘두 개의 탑’의 모델이 된 ‘페럿츠 폴리’와 ‘에지배스턴 타워’가 아직도 서 있었다. 시계탑 용도로는 세계에서 가장 키가 큰 110 높이의 버밍엄대 조지프 체임벌린 기념 시계탑에는 캄캄한 밤에도 하얗게 빛나는 지름 5.25짜리 원형 시계가 설치돼 있었다. 블랙햄은 “저녁마다 이 시계탑을 보며 자란 톨킨은 훗날 바랏두르 탑 위의 어둠 속에 붉게 타오르는 사우론(반지의 제왕 속 악의 군주)의 거대한 눈에 관해 쓸 때 이 시계탑을 떠올렸을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버밍엄의 자연과 건물이야 말로 톨킨의 판타지를 창조해낸 산파역인 걸까. “모든 걸 한꺼번에 설명할 성배(聖杯)는 없어요. 이 모두가 톨킨이 창조한 세계의 일부일 뿐이죠.”

◇‘모든 판타지들의 아버지’를 낳은 옥스퍼드의 작은 펍

     톨킨이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곳은 그가 평생 대학교수로 재직한 옥스퍼드였다. 옥스퍼드대를 나온 영국 총리 26명 중에13명이 졸업한 크라이스트처치 칼리지, 루이스 캐럴의 책에 삽화로 실제 등장하는 가게 ‘앨리스 숍’ 등이 있어 늘 관광객으로 북적이는 세인트 알데이츠 거리에서 5분만 북쪽으로 걸으면, 옥스퍼드에서 가장 유명한 펍 ‘이글 앤 차일드’의 고풍스러운 나무 간판을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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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펍 중 하나일 옥스퍼드 세인트 자일스 거리의 ‘이글 앤 차일드'(왼쪽 아래). 아이들을 데리고 온 부모들은 펍 안 곳곳에 걸린 JRR 톨킨과 CS 루이스, 낭독모임 잉클링스의 문인들의 흔적을 설명한다. (왼쪽 위) 이 곳에서 만난 아르헨티나인 영문학도 이사벨라 판시타(오른쪽)는 톨킨의 흔적을 좇아 혼자 옥스퍼드까지온 순례객이었다. /옥스퍼드=이태훈 기자

 

     1930~40년대 톨킨은 이 펍에서 평생 친구 C.S.루이스(1898~1963)와 동료 작가·학자들과 함께 매주 화요일 낭독 모임 ‘잉클링스(Inklings)’를 가졌다. 루이스는 환상문학의 걸작 ‘나니아 연대기’의 작가이자 20세기 가장 중요한 기독교 변증가로 첫 손에 꼽힌다. 두 사람의 우정은 신화적이다. 루이스는 근엄한 동료 학자들이 ‘애들 책이나 쓴다’고 힐난할 게 두려워 ‘반지의 제왕’ 출판을 주저하던 톨킨을 독려했고, 독실한 가톨릭 신자 톨킨은 무신론자였던 루이스가 크리스찬으로 회심해 ‘순전한 기독교’ 등 명저를 쓰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이들은 이 펍에서 맥주잔을 부딪히며 작품 초고를 읽었고, 서로의 평가에 귀 기울이며 책을 써 나갔다. 이 작은 펍은 ‘모든 판타지들의 아버지’가 태어난 분만실이요, 세계 톨킨 팬들의 성지(聖地)다. 아르헨티나 여대생 이사벨라 판시타(24)도 이 펍을 찾아온 이방인 순례객이었다. 영문학도인 그녀는 “요크대에서 어학연수 중인데 이글 앤 차일드를 보기 위해 혼자 옥스퍼드에 왔다”고 했다. “12살 때 처음 영어로 읽은 책이 ‘호빗’이었어요. ‘반지의 제왕’, ‘실마릴리온’…. 뭐에 홀린 듯 톨킨의 모든 책을 찾아 읽었죠. 지금도 그의 책은 제 상상력의 원천이고, 그는 제 인생의 영웅이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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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덜린 칼리지 뉴 빌딩 뒷편의 사슴 공원(Deer Park). 톨킨은 이 건물에 있던 CS루이스의 연구실에 함께 앉아 차를 마시며 창 밖의 자연을 내다보는 걸 좋아했다. /옥스퍼드=이태훈 기자

 

     옥스퍼드대 모덜린칼리지의 뉴 빌딩 뒷편에는 사슴 수십마리가 사는 ‘사슴공원’이 있다. 톨킨은 뉴 빌딩에 있던 루이스의 연구실에 함께 앉아 애프터눈 티를 마시며 사슴공원을 내려다 보는 걸 좋아했다. 두 사람은 처웰 강을 따라 사철 꽃이 피는 산책로 에디슨 워크를 걸으며 인생과 문학, 사랑과 신앙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도 즐겼다. 인근 옥스퍼드 대학 식물원에 서 있던 200살 넘은 남미 소나무는 톨킨이 기대 앉아 책 읽기를 즐겼다고 해서 ‘톨킨 나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나무는 작년 가을 제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쓰러졌지만, 여전히 옥스퍼드 대학과 도시 곳곳에는 톨킨의 다른 흔적들이 남아 순례객들을 부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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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스퍼드대 식물원에 있었던 ‘톨킨 나무’.(왼쪽) 생전의 톨킨은 이 나무에 기대어 앉아 책을 읽거나 사색하기를 즐겼다.(오른쪽 위) 남미산 소나무의 일종인 이 나무는 수령 200년을 넘기며 제 무게를 견디지 못해 지난해 9월 부러지고 말았고, 식물원은 안전상의 이유로 이 나무를 해체했다.(오른쪽 아래)

 

     지금은 옥스팜 가게로 바뀐 세인트 자일스 거리 톨킨의 옛 집에서 옥스퍼드 중심가를 가로지르는 밴버리 로드를 따라 13㎞쯤 북쪽으로 차를 달리면 울버코트 공동묘지가 나온다. 톨킨과 부인이 함께 묻힌 무덤엔 팬들이 다양한 언어로 써서 놓고 간 편지들이 돌 아래 놓여 있었다. 그 위로 작달막한 장미나무 한 그루가 자랐고, 그 가지가 바람에 흔들릴 때 마다 순례객들이 가는 실로 묶어 둔 절대반지 여러 개가 함께 흔들렸다. 변덕스러운 잉글랜드의 하늘은 이 곳에도 간간이 비를 내렸다. 빗물로 잉크가 번진 여러 편지 중 하나는 캐나다에서 온 ‘저스틴’이 써둔 것이었다. “톨킨, 모든 게 다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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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스퍼드 북쪽 울버코트 공동묘지, 톨킨과 아내 이디스가 함께 묻힌 무덤 위엔 장미나무가 자라고 있었고, 그 가지엔 순례객들이 걸어놓고 간 절대 반지들이 바람에 흔들렸다. 묘비의 톨킨 아내 이름(이디스 메리) 밑 ‘루시엔’과 톨킨 이름(존 로널드 루엘) 밑의 ‘베렌’은 그의 책 실마릴리온 속 사랑 이야기의 주인공인 엘프왕녀와 인간 전사의 이름이다. 오른쪽 사진은 그 묘비석 아래 전세계의 팬들이 각자 나라의 언어로 써서 두고 간 편지들. /옥스퍼드=이태훈 기자

 

     왜 사람들은 세계 곳곳에서 톨킨을 찾아 여기까지 오는 것일까. 왜 죽은지 50년이 넘은 그의 무덤에 “고맙다”는 편지를 남기는 것일까.

◇창조는 또 다른 창조를 낳고

     환상문학의 계보에 관한 책 ‘판타지’를 쓴 이화여대 인문과학원 송태현 교수는 톨킨의 판타지가 지금처럼 거대한 문화적 물결이 된 것을 “시대적 요구가 반영된 현상”이라고 해석했다. “이성과 과학기술을 숭배한 모더니즘의 시대가 세계대전과 핵무기라는 사생아를 낳은 뒤, 세계는 미신이라 폄하했던 종교, 신화, 초자연의 세계를 다시 돌아보게 됐다. 톨킨의 판타지가 여러 미디어로 변환돼 대중을 사로잡은 배경엔 모더니즘에 의해 탈주술·탈종교화됐던 세계를 재주술·재종교화하고자 하는 포스트모더니즘 시대 대중의 욕망이 있다.”

 

톨킨의 무덤 위 장미나무 가지에 걸려 있는 절대반지(왼쪽), 울버코트 공동묘지 곳곳에 설치돼 있는 톨킨 순례객들을 표지판(가운데), 노스무어가 20번지 톨킨이 살던 집에 붙어 있는 푸른 명판. /옥스퍼드=이태훈 기자
톨킨의 무덤 위 장미나무 가지에 걸려 있는 절대반지(왼쪽), 울버코트 공동묘지 곳곳에 설치돼 있는 톨킨 순례객들을 표지판(가운데), 노스무어가 20번지 톨킨이 살던 집에 붙어 있는 푸른 명판. /옥스퍼드=이태훈 기자

 

     1969년 설립된 가장 오래된 톨킨 팬클럽 중 하나인 ‘톨킨 협회(Tolkien Society)’는 올해 봄 총회를 잉글랜드 남부 소도시 아런델의 노포크암스 호텔에서 열었다. 남녀노소 다양한 계층의 회원 200여명이 모인 행사는 마치 대가족의 명절 잔치처럼 시끌벅적하고 유쾌했고, 이들은 하루 종일 함께 웃고 놀고 떠들었다. 현 회장인 숀 거너(29)는 “톨킨은 우리 협회의 영원한 명예회장”이라고 말했다. “설립자 베라 채프먼이 톨킨 사망 1년 전인 1972년 런던에서 직접 그를 만나 ‘회장이 돼달라’고 부탁해 동의를 받았어요. 협회가 존재하는 한 톨킨은 영원히 우리의 명예회장입니다.”

 

가을 호빗 빌보와 프로도의 생일에 즈음해 열리는 톨킨 협회의 최대 행사는 '옥손무트'라 불린다. 옥스퍼드대의 칼리지 기숙사를 빌려 가장행렬(맨 위), 식사와 학술 세미나(가운데) 등이 이어지는 대규모 행사. 맨 아래는 런던 코믹콘 행사에 실마릴리온 속 인물들로 코스튬을 만들어 입고 참여해 입상한 톨킨 협회 회원들 모습. /톨킨 협회 홈페이지
가을 호빗 빌보와 프로도의 생일에 즈음해 열리는 톨킨 협회의 최대 행사는 ‘옥손무트’라 불린다. 옥스퍼드대의 칼리지 기숙사를 빌려 가장행렬(맨 위), 식사와 학술 세미나(가운데) 등이 이어지는 대규모 행사. 맨 아래는 런던 코믹콘 행사에 실마릴리온 속 인물들로 코스튬을 만들어 입고 참여해 입상한 톨킨 협회 회원들 모습. /톨킨 협회 홈페이지

 

     매년 톨킨 협회는 호빗 빌보와 프로도의 생일이 있는 9월 옥스퍼드에서도 대규모 총회 ‘옥손무트’를 연다. 700여명 정도가 모여 학술대회, 가장행렬, 파티를 사나흘간 이어가는 대규모 행사다. 모금을 통해 저개발국가에 톨킨의 책을 보내는 ‘톨킨을 세계로’ 프로그램도 운영하고 있다. 모두 각자 직업을 갖고 일하면서 오직 톨킨을 사랑한다는 공통점만으로 이런 일에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것이다. 톨킨이 죽은지 50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여전히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정기적으로 한 자리에 모이게 하는 힘이 무엇인지 묻자, 협회 아카이브 담당관인 팻 레이놀즈 박사는 “톨킨이 창조해낸 세계는 읽는 사람에게도 무언가 새로운 것을 창조하고 싶은 소망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라고 했다. “누군가는 새로운 판타지 소설을 쓰고, 누군가는 중간계에 관한 노래를 만들죠. 제 본업은 박물관 큐레이터이지만, 여가 시간엔 톨킨 소설의 등장인물들 가운데 평범한 인간 캐릭터의 옷을 만드는 걸 좋아해요. 피터 잭슨은 영화감독이기 때문에 톨킨의 책을 영화로 만들었던 것처럼요. 그의 세계 속으로 들어선 사람들의 창조성을 자극해 또다른 무언가를 만들게 하는 것, 그게 톨킨을 톨킨이도록 하는 것 아닐까요?”

버밍엄·옥스퍼드·아런델(영국)=이태훈 기자

톨킨협회의 연차총회 겸 스프링무트 행사가 열린 아런델의 상징 건축물, 아런델 캐슬. /아런델=이태훈 기자
톨킨협회의 연차총회 겸 스프링무트 행사가 열린 아런델의 상징 건축물, 아런델 캐슬. /아런델=이태훈 기자

 

5일 만에 340만 관객 돌파 ‘암살’, 7월말 개봉 택한 이유

     개봉 3일째 100만, 개봉 4일째 200만, 개봉 5일째 300만. ‘암살’의 흥행 속도는 최동훈 감독의 전작 ‘도둑들’뿐 아니라, ‘괴물’ ‘설국열차’보다 하루 빠르다. 이 영화는 왜 7월 22일 수요일에 개봉했을까.

   심심풀이로 보는 영화 개봉 타이밍의 비밀. 지난 3월에 썼던 기사, 지면용으로 줄이기 전의 원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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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국제시장’에서 덕수(황정민) 친구 달구(오달수)는 말한다. “인생은 타이밍이다. 다 때가 있다는 말이지.”

      실은, 영화도 타이밍이다. 규모와 성격에 따라 개봉하는 때가 따로 있다.<그래픽> 경쟁작 눈치도 살펴 최적의 시점을 고른다. 대작은 1년, 중규모 영화는 반년, 상대적으로 작은 영화도 서너달 전에는 날짜가 잡힌다. 날을 잘 잡아 잘 된 영화도 있고, 잘 못 잡아 망한 영화도 있다. 5일 현재 국내 박스오피스 1위를 질주 중인 외화 ‘킹스맨’은 매출 2538만달러(한화 약 278억원)를 올렸다. 영화 제작국인 영국도 추월해 미국 다음 세계 흥행 2위다. 영화도 물론 재밌지만 설 연휴 경쟁작 ‘조선명탐정’과 ‘쎄시봉’이 기대에 못 미쳐 ‘어부지리(漁父之利) 승자’가 된 측면도 크다. 타이밍이 좋았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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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내 한 메이저 배급사 관계자는 “사실 개봉 날짜를 정하는 절차는 따로 없다. 배급사들과 극장들이 제작 일정과 라인업을 정기적으로 공유하고 협의하면서 ‘눈치 작전’을 펼쳐 서로 영화가 가장 잘 될 날을 자연스럽게 골라가는 것”이라고 했다.

      기본적인 원칙은 있다. 그 해 가장 많은 돈을 들인 최고 기대작들이 연중 박스오피스 규모가 가장 큰 7월 마지막주로 간다. 자영업자들도 모두 휴가를 가고 관객이 극장으로 쏟아져들어오는 때다.올해 7월 마지막주는 ‘도둑들’로 1000만 감독이 된 최동훈의 ‘암살’과 외화 ‘미션 임파서블’ 속편이 1년 전부터 이미 ‘찜’했다. 작년엔 ‘군도’, ‘명량’, ‘해적’이 7월말부터 8월초까지 1주씩 시차를 두고 개봉했다. ‘설국열차’나 ‘미스터 고’같은 작품도 7월말 아니면 8월초였다.

   “그 해 가장 많은 돈을 들인 최고 기대작들이 연중 박스오피스 규모가 가장 큰 7월 마지막주로 간다. 자영업자들도 모두 휴가를 가고 관객이 극장으로 쏟아져들어오는 때다.올해 7월 마지막주는 ‘도둑들’로 1000만 감독이 된 최동훈의 ‘암살’과 외화 ‘미션 임파서블’ 속편이 1년 전부터 이미 ‘찜’했다.”

      설과 추석도 연휴 기간에 따라 다르지만 제법 큰 시장이다. 전통적으로 가족영화가 대세였다. 주로 조폭 코미디들이 이 시즌을 노리다 관객들이 싫증을 내자, 최근엔 사극 코드를 가미하는 경우가 늘었다. 올해 설 연휴의 ‘조선명탐정’이 전형적인 설 시즌용 영화였다.      그 다음 큰 시장은 크리스마스 시즌. 보통 가족영화나 휴먼드라마가 대세고, 연인들을 위한 로맨스물이 뒤를 받친다. 작년엔 크리스마스 시즌보다 두 주 먼저 개봉한 ‘국제시장’이 경쟁작 ‘기술자들’, ‘상의원’이 생각보다 힘을 쓰지 못하면서 성탄·연말 시즌을 순항해 1000만 관객으로 치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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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봉 시점에 따라 울고 웃는 영화들도 나온다. CJ의 경우 2012년 재난공포물 ‘연가시’를 ‘스파이더맨’이 개봉하는 6월 마지막주에 올리는 모험을 걸었다. 스파이더맨은 기본 500만 관객 영화라 다들 피했지만, ‘한국영화가 별로 없고 쇼킹한 소재라 여름에 먹힐 것’이라는 역발상으로 밀어붙였다. 결과는 대성공. 150만 예상했던 영화가 450만까지 갔다. 쇼박스는 지난해 5월 마지막주에 ‘끝까지 간다’를 올려 재미를 봤다. 6월초 연휴에 ‘우는 남자’ ‘하이힐’ 등 대작들이 있었지만 모두 기대에 못 미쳤고, 입소문을 타며 흥행에 성공한 것이다. 경쟁작이 외화냐 한국영화냐, 관객의 서로 다른 취향을 만족시켜줄 수 있느냐 여부가 흥행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애니메이션 최초의 1000만 영화인 디즈니 ‘겨울왕국’도 개봉 타이밍이 결정적이었다. 외국에선 12월에 개봉했지만 한국에선 실사 대작들이 몰리는 연말을 피하고 만화영화 경쟁작도 적은 1월로 개봉을 늦춰 엄청난 흥행 성적을 올렸다. 디즈니는 올해 ‘빅 히어로’에도 같은 전략을 썼다.

   “필름으로 틀던 시절엔 기대작이 망하는 걸 보면서도 다른 영화의 상영용 필름을 새로 제작해 보내올 때까지 울며 겨자먹기로 틀 수 밖에 없었지만, 지금은 디지털 배급시대라 흥행 순환 속도가 빠르다. 될 영화는 쭉 가고, 안 될 영화는 빨리 내려오는 시대가 된 것이다.”

      하지만 배급사 관계자들은 “날짜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영화의 품질”이라고 입을 모은다. 필름으로 틀던 시절엔 기대작이 망하는 걸 보면서도 다른 영화의 필름을 찍어낼 때까지 울며 겨자먹기로 틀 수 밖에 없었지만, 지금은 디지털 배급시대라 흥행 순환 속도가 빠르다. 될 영화는 쭉 가고, 안 될 영화는 빨리 내려오는 시대가 된 것이다. 한 배급 담당자는 “최악 비수기인 11월에 개봉해 1000만 영화가 된 ‘인터스텔라’ 사례에서 보듯, 요즘 극장가에선 재밌고 될 만한 영화는 어느 시즌이라도 된다는 생각이 대세”라고 했다.

이태훈 기자

 

[이와이 슌지 감독 인터뷰] “기억하는 한, 존재도 사라지지 않는 것”

 

“죽은 사람에 관한 기억을 얘기한 영화 ‘러브레터’를 만들었지만 실은 ‘내가 정말 죽음을 몰랐던 건 아닐까’ 생각했어요. 생존자들은 죽은 사람들을 여전히 기억 속에 존재하는, 어딘가 있을 수도 있는 사람으로 여기는 것 같았습니다. 기억이 지속된다면 죽어도 진짜 죽은 게 아닐 수 있겠다 싶었지요. 나에 대한 기억이 사라진다면 존재 의미도 사라지는 것 아닐까, 단순히 살아 있음보다 기억이 더 소중한 것 아닐까….”

 

お元気ですか?

   이와이 슌지(岩井俊二·52) 감독을 만나면오겡키데스카(お元気ですか·잘 지내세요)?”라고 먼저 묻고 싶었다. 설산을 향해 메아리치던 한 여인의 간절한 외침으로 기억되는 영화러브레터가 만들어진지 올해로 20년이다. 오는 4일까지 서울 CGV청담씨네시티에서 열리고 있는 마리끌레르 영화제 참석차 내한한 이와이 감독을 지난 28일 만났다. 영화제는 이와이 슌지 특별전을 통해뱀파이어’(2011), ‘하나와 앨리스’(2004), ‘릴리 슈슈의 모든 것’(2001)을 상영하고 있다. 그는 질문을 받으면, 그렇군요…한 뒤 한참 입을 꾹 다물고 생각에 잠겼다. 두꺼운 뿔테 안경 속의 두 눈을 몇 번 깜빡인 뒤엔 길게 정성을 다해 답했다.

-‘러브레터를 본 많은 사람들이 종종 당신을 멜로에 특화된 감독이라 생각한다.

  “실은 나는 러브스토리나 멜로물을 만든다고 생각하고 영화를 만든 적이 없다. 러브레터도 사실 시간과 기억에 관한 독백이라 할 수 있는 이야기다. 나는 영화를 만들 때 세계를 다채롭게 드러낼 수 있는, 화려하지 않은 골목길이라 하더라도 가슴에 남는 순간을 포착하겠다고 생각한다. 그런 순간은 어릴 때 많지만 자라면서 점점 사라진다. 단순한 추억보다 좀 더 기억이 가지고 있는 아련함을 표현하려 했던 영화다. 내 영화 중 어떤 것은 젊은 층, 어떤 것은 어른들을 위한 것처럼 보이겠지만, 나는 늘 똑같은 안경을 쓰고 영화를 찾고 만들어 왔다.”

-러브레터에서 나카야마 미호의오겡키데스카를 아직 많은 한국 팬들이 기억한다. 죽은 사람과 이어지고 싶어하는 간절함이 느껴진 장면이다. 어떤 느낌을 담으려 했다.

  “일단 러브레터를 만들던 시절 나는 너무나 젊었다. 그 때는 정말 무작정 닥치는대로 생각하고 무작정 열심히 찍었다는 기억 밖에 없다. 이 대사가 왜 이것이어야 했는지 왜 그랬는지는 기억하지 못 한다. 고민하며 찍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나온 대사와 장면이었다. 실은 러브레터에서 중요한 것은오겡끼데스까를 외치는 것 자체 보다 외치기 전까지의 과정이었다. 그 전까지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줘야 먼 산을 보고 눈밭에서 간절히 외치는 것이 설득력을 가질 수 있을까, 그것을 고민했다. 어떤 과정이 있었기에 여자 혼자 그 산에까지 가게 되는 것일까. 영화 속에서 막 넘어지고 그런 것도 실제 그림 콘티를 많이 그려서 시뮬레이션을 해 가며 나온 장면들이다. 근데 막상 현장에서 촬영하려고 보니 시간도 모자라고 생각처럼 꼭 찍어지는 건 아니었다. 어쨌든 정말 열심히 고민해서 만든 영화이고 그런 장면이 나오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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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장련성 객원기자

-‘피크닉의 담 위로 걷기나스왈로우테일 버터플라이의 문신처럼 당신은 영화에 풍부한 상징을 사용한다. 이번 영화제에서 한국 관객을 만나는뱀파이어는 소품이나 도구로서가 아니라 영화 전체가 상징이 된 것 같은 느낌이다. 영화에 대한 당신의 생각이 변한 것일까.

  “영화를 찍기 전에 늘 글을 먼저 쓰고, 쓸 때 굉장히 많은 번뇌를 한다. 그런데 대부분의 영화는 내가 생각한대로 되지는 않는다. 글도 마찬가지다. 작품이 짧으면 내가 원하는 이미지를 살리기가 쉽고. 작품이 길고 커지면 원하는 이미지가 결과적으로 많이 변해버리는 경우가 있다. 글을 쓸 때 마다 생각과 느낌이 많이 달라지고 글과 영화 자체도 많이 달라진다. 오늘도 어제도 다음 작품의 시나리오를 쓰고 있는데 오늘은 이 영화에 맞지 않다고 생각한 무언가가 하루 자고 일어나면, 괜찮지 않아? 이런 건 어때?’ 생각하게 된다. 그러다 보니 매번 작품을 쓸 때 마다 달라지는 것 같다.”

이와이 감독의 영화 ‘피크닉’ OST – ‘Close To You’

-감독이 일본 3·11대지진 피해 지역인 센다이 출신이고, 대지진 이후 다큐멘터리 ‘3·11: 이와이 슌지와 친구들을 만들었다. 영화와 인생에 적지 않은 변화를 겪었을 것 같다.

  “대지진 이후에 무척 큰 충격을 받았다. 주위에 돌아가신 분들이 많다. 나는 실제로 죽은 사람에 대한 기억에 관한 이야기 러브레터라는 영화도 만들었다. 하지만 몇 번 현지를 가면서 얻은 가장 큰 깨달음은내가 죽음을 진정으로 몰랐을 수도 있겠다는 것이었다. 후쿠시마 쪽에 가면 3·11 재해로 가족과 친구를 많이 잃은 사람들이 남아 있다. 그 사람들에겐 돌아가신 분들이 그냥 죽은 사람이 아니라 우리 주위에 있었던 사람, 지금 못 만나지만 어딘가 있을 수도 있는 사람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왜냐하면 그 사람들의 기억 속에는 이게 너무 순간적으로 일어난 큰 일이고 많은 사람들이 죽었기 때문에. 그들이 여전히 기억 속에 존재하고 있으며, 죽었다기보다 살아있기 바라는 착각과 바램을 갖고 있다는 걸 너무나 크게 느꼈다. 죽음이란 어쩌면 우리가 기억한다면 진짜 죽은게 아닐 수도 있겠다 생각했다. 우리가 지금 개인으로 한명씩 혼자 살아가는 것 같지만 나에 대해 사람들이 기억해주지 않는다면 나라는 존재는 없다고 생각한다. 다 잊어버린다면 존재는 의미가 사라진다. 살아있음보다 기억이 더 소중하다고 생각하게 됐다. 큰 변화이고 깨달음이었다. 러브레터에서도 기억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지만. 그는 죽었지만 기억하기 때문에 여전히 존재한다고도 생각할 수 있다. 기억이라는 것이 얼마나 크고 중요한 일인지 깨닫게 됐다.”

일본에서 개봉한 이와이 감독의 애니메이션 ‘하나와 앨리스 살인사건’ 트레일러. 아오이 유우를 스타로 만든 영화 ‘하나와 앨리스’의 프리퀄로, 실제 ‘하나와 앨리스’의 배우들이 목소리 연기를 맡았다.

-기억의 문제는 감독의 영화세계를 관통하는 테마다. 감독에겐 기억이라 주제가 마치 수도승의 깨달음처럼 간절해 보인다. 왜일까.

  “영화 감독은 사실 무언가를 생각해내고 기억해내면서 영화를 만들어가는 직업이다. 기억을 지금까지 나는 나의 작업을 위해 사용했다. 그런데 대지진 이후 나를 위해 사용하는 기억이 아닌 다른 사람들의 입장과 기억을 생각하게 됐다. 이들에게 기억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본래 배려란 남의 입장에서 생각해 행동하는 것이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그 배려라는 것이 일종의 매너로서 존재한다. 곤란한 사람을 돕자라는 것도 진정한 마음이 아니라 매너로 하는 사회다. 기억과 상상력을 남을 위해 쓰자고 생각했다. 그것은 남의 행동과 남의 입장을 내가 상상해보는 데서 시작하고, 그것이 배려의 시작인 것 같다. 요즘은 필요한 것 있으면 돈만 내면 편의점에서 살 수 있는 세상이다. 지금 마시고 있는 커피도 앉아서 돈만 내면 갖다 준다. 그러나 누군가는 이 커피를 내리기 위해 노력했을 것이다. 편의점에서 파는 물건도 고안한 사람, 만든 사람 등 많은 사람의 노력이 필요했을 것이다. 요즘은 그런 부분까지 생각하고 살아야겠다, 나 이외의 많은 사람들 고생 있었기에 내가 이렇게 살 수 있다는 생각 많이 한다. 요즘 사회는 기본적으로 돈이 기준이 돼 있고 돈 있으면 대부분의 것을 손에 넣을 수 있지만 돈 없이 가질 수 있는 것들이 있다. 그것들은 결국, 우리가 상상력으로 남을 이해해야 얻을 수 있는 부분이라 생각한다. 단순히 모든 것이 물건을 교환하는 수준에서 끝나는 사회는 좋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남을 생각하기 위해서는 남이 하는 일 남의 행동을 잘 관찰해야 하고 그것이 내 일과도 연결된다고 생각한다. 고마워하는 마음 배려심이 좀 더 필요하다는 생각을 요즘 들어 이 나이 먹고 생각하게 됐다.”

-대지진 다큐도 그런 맥락에서 만든 것인가.

  “그렇다. 다큐는 좀 더 많은 젊은 감독들이 참여해 2편도 만들었고 일본의 TV를 통해 방영됐다.”

-감독의 관심이 점점 사회적인 주제, 무거운 쪽으로 옮겨 가는 것 같다. 감독은 기본적으로 이야기를 하는 직업이고 다큐는 듣는 작업이다. 대지진 이야기도 다큐가 아니라 극영화라면 어땠을까.

  “지금 만들고 있는 영화가 어떤 의미에서는 3·11이후와 관련된 극영화다. 내가 앞으로 만들게 될 영화 중에도 3·11 이전부터 기획하고 글 썼던 작품도 있고. 그 뒤에 책을 써서 만들게 된 것도 있는데, 마침 지금 작업하고 있는 것이 그 뒤에 쓴 책이다. 다음달부터 촬영에 들어간다. 3·11 이후 내가 이걸 만들었을까, 사람들은 의문 가질 수도 있다. 나는 사실 이 영화에 3·11대지진에 대한 나름의 답을 넣었다고 생각한다. 이 영화에는 방사능이나 후쿠시마 이야기가 나오지 않지만, 대지진에서 내가 생각한 것과 깨달은 것을 넣으려 하다 보니 웬지 모르게 이 영화가 만들어졌다. 극영화를 만든다는 것은 강한 메시지를 넣는 것보다 무언가가 숙성돼서 깊은 맛을 내게 하는 식이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한국에도 자료를 가방에 싸 와서 계속 써나가고 있다. 아직 제목은 정해지지 않았다.”

이와이 감독의 영화 ‘뱀파이어'(2011) 예고편

-영화제 등을 통해 상영된뱀파이어는 자살하려는 여자들의 피를 마시는 남자 이야기다. 제목은 뱀파이어지만 흡혈 행위는 집착이나 욕망의 은유처럼 읽힌다.

  “사실 뱀파이어는 소설이 먼저 있었다. 소설에선 주인공의 내면을 굉장히 정밀하게 표현했고, 생명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주인공이 자문자답을 반복하며 답이 펼쳐져가는 식으로 글을 썼다. 하지만 영화는 소설처럼 만들 수는 없다. 계속 그 자문자답을 보여줄 수는 없다. 영화만 두고 보자면 혈액에 굉장히 집착하는 한 남자의 이야기가 됐다. 그리고 피를 통해서 생명을 접하고 느끼게 되는 그런 남자의 모습을 많이 보여줄 수 밖에 없었다. 혈액에 집착하지 않았다면 평생 알지 못했을지 모르나, 혈액에 집착했기 때문에 인간 생명과 가장 깊이 관계할 수 있었던 사람의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말씀하신 것처럼 내 작품 중에 가장 무거운 작품이고, 철학적 주제를 담아냈다고 생각한다.”

-뱀파이어 사내가 탐하는혈액이 감독님에겐기억이라는 테마인 것 같다. 마치 대구(對句)처럼.

  “그렇다. 일리있는 이야기다.”

-실은이와이 월드를 말할 때, 현실 속에 있지만 현실 속에 있지 않을 것 같은 예쁘장한 공간과 사람이라는 의미로 써왔다. 어쩌면 그런 말 싫었을 수도 있겠다.

  “아니 전혀 그렇지는 않다. 그런 귀엽고 예쁜 이미지를 내가 열심히 만들어낸 부분도 분명히 있다. 기본적으로 귀엽고 예쁜 아이들 캐스팅해서 영화 찍는 것을 좋아한다. 왜냐하면 아이들을 캐스팅해 영화를 찍으면 물론 힘든 부분도 많이 있지만 무언가를 했을 때 연기를 했을 때 매우 사랑스러운 모험으로 표현된다. 근데 같은 행동을 어른이 하면 웃을 수도 견딜 수도 없는 일이 돼 버린다. 아이를 주인공으로 만들면 귀엽고 예뻐지고. 어른을 주인공으로 하면 어둡고 심각해지는 것 같다.”

-그렇다면 다음 영화의 주인공은 어린이인가 어른인가.

  “일본에서 지난주에 개봉한하나와 앨리스 살인사건아이들 이야기이고, 지금 준비하는 실사영화는 어른들 이야기다. 어른이 엄청난 고생을 하면서 살아가는 이야기다. 하하.”

Love Letter OST ‘Sweet Memories’

-계속 기억에 관해 이야기 했다. 실은 체르노빌과 후쿠시마 이후에도 원전을 놓지 못하는 인류도, 세계 대전을 겪고도 계속 재무장을 시도하는 일본도 거대한 기억상실에 걸린 건 아닐까.

  “맞는 말이다. 요즘 인터넷에선 사람들 대화 잘하고 친하게 지내지만 정작 옆 집 사는 사람과는 말 안 한다. 같은 전철을 타도 대화 없고, 엘리베이터를 타도 인사 않는다. 사람들이 직접 사람 대 사람을 접하는 데 있어서 문제가 많고 대화를 안 하게 됐다고 생각한다. 주위가 시끄러우면시끄럽네이런 내뱉는 말은 할 지 몰라도, 대화를 하지 않는 이상한 사회가 돼 버렸다. 중요한 것은 내가 만들어버린 나만의 경계가 뭔가 생각해야 한다. 우리는 일상을 살아가며 계속해서 주위에 선을 긋고 있다. 그 선이 이기적인 선이 되면 나와 이웃의 관계가 그렇게 될 것이고, 결국 국가적으로 다른 나라와의 관계에도 반영될 것이다. 개인이 살아가는데 있어서도 타인과 이웃을 생각한다면, 다른 국가의 국민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우리가 무언가를 함으로써 영향을 받게 될 사람들에 대해서도 상상력 발휘하고 산다면 말씀하신 그런 세상의 기억상실도 조금은 달라지지 않을까. 우리가 타인의 관계에서 상상력을 발휘하며 산다면 존 레논이이메진에서 노래했던 세계가 좀 더 빨리 가까이 다가올 수 있지 않을까. 영화 만드는 사람으로서 할 내가 수 있는 일은 계속 영화를 통해 이런 얘기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감독님의 러브레터를 통해 일본영화를 처음 접한 한국 사람이 많고, 아직도 팬들이 많다. 한국의 팬들에게.

  “한국 많은 팬들이 내 작품을 봐주시는 것 정말 감사하게 생각한다. 늘 크게 감동 하고 있다. 일본인 중에 나 같은 경험을 한 사람은 많이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정말 팬들에게 감사한다. 한국과의 교류 통해 굉장히 많은 것 깨달아왔다. 아마 한국 팬들이 없었으면 저는 한국이나 서울에 올 일 없이 살았을 수도, 또 한국 친구들 못 만났을 수도 있다. 일본엔 아직 한국이라는 나라를 접하지 못한 사람이 많다. 특히 요즘 젊은이들은 해외에 대한 관심이나 해외로 나가보고 싶다는 생각 자체가 줄었다. 그만큼 삶의 상상력이 줄어든 것이다. 한국 팬들과 앞으로도 영화를 통해 좋은 관계 이어갔으면 좋겠고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

이태훈 기자

[개봉영화 딱 10자평: 2015.2.26] 제네시스: 세상의 소금, 나이트 크롤러,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 기생수 파트1, 파리 폴리, 조류인간, 백 투 더 비기닝, 포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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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옷장 깊숙이 집어 넣었던 두꺼운 한겨울 외투를 다시 꺼내 입었네요. 영화기자가 전부 다 보고 다이제스트로 소개해드리는 ‘개봉 영화 딱 10자평’, 2월 마지막주 개봉작입니다. 

。제네시스: 세상의 소금  The Salt of the Earth
     지구에 바치는 러브레터 ★★★★

  ‘베를린 천사의 시’, ‘파리, 텍사스’ 같은 걸작을 만들었던 빔 벤더스 감독의 다큐멘터리 작업, 아티스트 3부작의 마지막 작품입니다.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음악), ‘피나'(현대무용)에 이어 브라질 출신의 사진가 세바스치앙 살가두 이야기. 영화 전반부는 분쟁, 기아, 빈곤, 이민, 노동 등을 다룬 사진들은 욕망이 사람을 어떻게 속박하고 변화시키는지, 사람이 사람에게 얼마나 잔인할 수 있는지 비릿한 피냄새와 함께 드러냅니다. 불편하고 힘겹지요. 하지만 “인간이란 종족에게 구원은 불가능하다”고 절규하던 살가두가 그 자리에 주저 앉았다면 이 영화는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아름다운 어머니 지구의 온전한 속살을 다시 카메라에 담고, 숲을 남벌해 황무지가 돼 버린 고향 땅에 250만 그루의 나무를 심어 새로운 열대우림을 만들어냅니다. 이 영화는 노(老) 사진가가 절망의 끝에서 길어올린 희망의 노래, “지구에 보내는 러브레터”입니다. 사진에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감탄 감탄하며 볼 수 있는 영화. 지난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 후보작.

 리뷰 링크 [제네시스: 세상의 소금] 그는 희망을 찍고, 영화는 그의 희망을 찍다  
。나이트 크롤러

   주변에 이런 사람 꼭 있다 ★★★☆

     ‘브로크백 마운틴’에서 금지된 사랑의 아픔으로 애처롭게 깜빡였던 제이크 질런홀의 커다란 눈동자를 기억한다면, 이 영화에서 그가 얼마나 좋은 배우인지 다시 한 번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더 잔혹한 뉴스영상을 찾아 밤거리를 누비는 영상 취재 프리랜서 ‘나이트 크롤러’가 된 질런홀의 눈에선 깜빡임이 사라졌습니다. 생명에 대한 존중도, 어떤 도덕적 거리낌도 없는 소시오패스. 눈동자가 마치 야행성 동물의 그것처럼, 허공에 뜬 혼불처럼 번들거리며 사악한 빛을 내지요.  지난 아카데미 각본상 후보작.

리뷰 링크 [나이트 크롤러] 잔혹할수록 대담해진다…광기 가득한 심야의 앵글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
쾌락은 기대하지 마시길 ★★☆
유구무언. 아이고… 의미없다….

。기생수 파트1
싸울 것인가 먹힐 것인가 ★★★
만화나 애니메이션을 영화로 옮기는 일본의 CG기술은 나날이 발전하네요. 만화와는 좀 다른 스토리이지만, 기생수 ‘오른손이’는 깜찍해요. 원작 만화 팬이라면 대만족일 듯.  ^^

。파리 폴리
소중한 건 늘 곁에 있는 법 ★★★
믿고 보는 여배우 이자벨 위페르, 중년의 위기를 경쾌하게 터치하는 프랑스 소품. 평탄했던 시골 생활, 무뚝뚝한 남편, 아직도 소녀같은 아내… 매력적 연하남의 등장, 갑자기 떠난 파리 여행.  

。조류인간
이 몸이 새라면 날아가리 ★★★
‘러시안 소설’, ‘배우는 배우다’ 등을 만든 신연식 감독의 신작. 15년전 실종된 아내를 뒤쫓는 과정에서 비슷하게 가족의 실종을 겪은 사람들을 만나고, 조금씩 그 비밀에 접근해가는 사회부적응자 소설가의 이야기. 한 편의 소설을 읽는 듯 문학적 상상력으로 가득한 독특한 작품. 그러나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할 듯. ^^;

。백 투 더 비기닝
발랄한 척하지만 진부한 ★★☆
어느날 지하실에서 발견된 아버지의 유품이 실은 타임머신. 낙제를 면하고 로또에 당첨되기 위해 시작한 시간여행, 모든 것이 뒤틀리기 시작합니다. 참신한 스토리나 설정보다는 요즘 10대 취향의 감각적인 시간여행물로 만들려 집중한 느낌. 카메라를 왜 이리 흔들어대는지….

。포커스
잘난 사기꾼 예쁜 도둑女 ★★
잘난 척 사기꾼男과 예쁜 척 도둑女, 속고 속이는 이야기. 윌 스미스는 새로운 ‘스팅’의 주인공이 되고 싶었던 것 같지만, 결과는 그리 신통치 않아요.  ‘어바웃 타임’ 등에 나왔던 여주인공 마고 로비는 그냥 가만 있어도 예쁜데, 왜 이리 예쁜 척을 하는지. 왜 자꾸 몸을 무기로 사용하는지. 윌 스미스는 무척 재능있는 배우라 생각했는데, 과잉 자의식이 배우의 앞길을 가로막는 것 같은 느낌이네요.

[사심 가득 시네토크 (11) 버드맨] 퇴물은 그만 꺼지라고? 아직 안 죽었거든!

버드맨
수퍼영웅 ‘버드맨’의 톱스타였으나 퇴물 배우가 된 리건 톰슨(마이클 키튼)은 뉴욕 연극무대에 도전해 재기를 노린다. 하지만 조연배우(에드워드 노튼)의 통제불가 행동, 냉소적인 매니저 딸(엠마 스톤) 등이 리건의 인생과 연극을 혼란에 빠뜨리고, 설상가상 옛 영화 속 버드맨이 그의 머릿속에서 말을 걸어온다.

 

버드보이후드
   할리우드 메이저 스튜디오들이 미국 밖에서 새로운 재능을 발굴하려고 엄청 노력했잖아. 이냐리투는 20세기폭스가 멕시코에서 캐낸 보석이지.

와일드앨리스
   알레한드로 이냐리투, 알폰소 쿠아론, 기예르모 델 토로, 요 멕시코 삼인방을 미국에선 ‘스리 아미고스(Three Amigos·세 친구들)’라고 부르더라. 셋 다 모국 멕시코에서 잘 나갔고, 할리우드에선 서로 밀고 끌며 함께 컸으니까. 상상력은 넓어지고 이야기는 마술같고 비주얼은 신비로워. 그 모든 걸 대중적인 작품에 잘 녹이는 감독들이네.

버드보이후드
   ‘마술적 사실주의’란 말, 중남미 소설이나 영화 보면 설명이 필요없어. 막 몸으로 이해가 가. 사실 중남미에서 마술적 사실주의는 심한 빈부격차와 끝나지 않는 독재에 시달린 사람들에게 일종의 탈출구 성격도 강했는데.

와일드앨리스
 그런 강한 개성을 세계 관객이 보는 대중문화 콘텐츠로 녹여내다니. 장인(匠人) 반열에 올랐어들.

버드보이후드
   참 영리해. 배우의 전작 캐릭터를 뒤섞어서 판타지를 다큐처럼 만들어버려. 키튼 뿐 아니라 에드워드 노튼, 나오미 왓츠, 엠마 스톤도 조금씩 현실의 자신과 겹치지.ㅋㅋㅋ 게다가 키튼은 빌 머레이의 페이소스와 토미 리 존스의 사악한 위엄을 동시에 가진 유일한 배우!

와일드앨리스
   연극 무대를 배경으로 연극적 연출까지 더하니 배우들 연기가 최대치! 연출, 촬영, 음악까지 빠지는 구석이 없네.

버드보이후드
   이 영화는 새로운 클래식으로 남을 거야. 당의정처럼 자학 개그와 블랙 코미디를 잔뜩 입혀 놓고, 그걸 완벽에 가까운 기술적 성취인 천의무봉의 롱테이크로 표현하지. 배우들이 정말 필생의 연기로 몸을 던진데다, 그 안에 수준높은 철학적 주제의식까지 녹여넣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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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그램이나 아모레스 페로스 같은 이냐리투의 전작도 주제의식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형식적 치열함이 돋보여. 그렇게 허투루 낭비하는 게 없으니 영화가 긴장과 재미로 팽팽해. 그리고 음악은 왜 이리 좋은건지. 이냐리투 영화는 보기도 전에 OST부터 산 적도 있다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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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트 크롤러] 잔혹할수록 대담해진다… 광기 가득한 심야의 앵글


26일 개봉하는 영화 ‘나이트 크롤러’는 자극적 사건사고 현장을 촬영해 방송국에 파는 영상취재 프리랜서 루 블룸(제이크 질렌할)의 뒤를 쫓는다. 범죄 현장에 경찰보다 빨리 달려가는 블룸의 빨간색 닷지 챌린저 스포츠카처럼 반전없이 급가속하는 스릴러다.

Night-crawler
루 블룸(제이크 질렌할)은 낡은 도요타 픽업트럭을 몰고 로스앤젤레스의 밤거리에서 맨홀이나 철제 펜스를 훔쳐 파는 하류 인생. 고물상 주인에게 채용을 구걸하다 “도둑놈은 안 쓴다”며 면박당한 밤, 교통사고 현장을 찍어 즉석에서 돈을 흥정해 방송국에 넘기는 ‘나이트크롤러(Nightcrawler)’들을 만난다. 영상이 잔혹할수록 더 큰 돈이 되는 매력적 비즈니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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캠코더와 경찰 무전기를 마련해 밤거리로 나선 블룸에게 지역 방송국 보도 책임자 니나(르네 루소)가 조언한다. “가난한 유색인종 악당에게 짓밟힌 부유한 백인 희생자를 찍어. 소심한 시청자들을 불안에 떨게 할 그림을 가져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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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량탈취범의 총탄에 쓰러진 남자, 음주 차량에 치인 바이커, 무장강도, 살인, 자살…. 블룸은 공포와 고통에 질린 피해자들의 얼굴에 카메라를 바짝 들이댄다. 양심의 꺼리낌도 없고 주저하지도 않는다. 블룸이 대담하게 사고와 범죄 현장을 조작할수록 특종 영상의 값어치와 뉴스 시청률도 치솟는다. 재계약 때문에 시청률 경쟁에 목 매고 있는 니나 역시 블룸의 잔혹 영상에 중독돼 가고, 이야기는 참극을 향해 촘촘한 긴장감의 액셀러레이터를 밟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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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브로크백 마운틴’에서 애처롭게 깜빡였던 질렌할의 큰 눈은 순수와 광기의 양 극단을 손바닥 뒤집듯 옮겨다니는 기묘한 능력을 지녔다. ‘조디악’에선 연쇄살인마를 쫓다 자기 인생을 망가뜨리는 암호광의 집념, ‘엔드 오브 왓치’에선 마약조직과 싸우는 경찰의 냉혈함으로 번뜩였다. 이번 영화에선 그 큰 눈에 깜빡임이 사라졌다. 불빛없는 한 밤 중에도 그의 두 눈동자는 허공에 뜬 혼불처럼 광기로 번들거린다. 동료의 생명도 하찮게 여기며 죄책감도 느끼지 못하는 소시오패스의 광기다. 형사가 거짓말을 추궁할 때 블룸은 말한다. “그게 내가 하는 일이거든. 당신도 인생 최악의 날에 나를 만나게 될 거요.” 경찰서 폐쇄회로 카메라에 비친 블룸의 싸늘한 미소에 식은땀이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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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일 정오 현재 국내 한 포털 사이트의 많이 본 뉴스 1·3·5위는 총기 난사사건, 2위는 연쇄성폭행범 이야기였다. 정말 이것들이 그날의 가장 중요한 뉴스였을까. 실은 모두가 수많은 블룸들이 부풀린 핏빛 뉴스에 중독돼 가고 있는 건 아닐까. 미국선 작년 10월 핼러윈 주말에 개봉해 박스오피스 2위였다. 올해 아카데미 각본상 후보작. 스릴러 팬에겐 만족스런 118분이 될 것이다. 청소년관람불가.

이태훈 기자

“인간의 노력엔 한계가 없다”… 진짜 호킹도 울린 ‘영화 속 호킹’ 에디 레드메인

에디 레드메인이 호킹을 연기한 과정을 설명하는 공식 영상. 아랫쪽 바 오른쪽 subtitles/cc 버튼을 클릭하면 불완전하지만 영어 자막이 나와요. ^^

호킹(에디 레드메인) “난 우주학자(cosmologist)예요.”
제인(펠리시티 존스) “그게 뭐죠?”
호킹 “시간과 공간의 결혼을 연구한다는 뜻이죠.”
제인 “완벽한 커플이네요.”

에디 레드메인
“스티븐 호킹이 젊었을 땐 완벽하게 건강했단 걸 예전엔 전혀 몰랐어요. 난 그런 걸 엄청 잘 파고들거든요. 스티븐의 사진들을 구해서 루 게릭 병이 진행 정도에 따라 그의 신체 각 부분에 어떻게 드러날 지를 분석했죠. 그리고 그걸 내 몸의 각 부분에 추적해 덧입히듯 연습했어요.”

제임스 마시 감독
“에디는 개략적으로 이 병의 4가지 다른 단계를 이해하고 내면화해야 했어요. 몸이 멀쩡할 때, 지팡이 하나를 짚을 때, 지팡이 두 개를 짚을 때, 그리고 휠체어를 탈 때죠. 그리곤 곧 목소리를 잃어요.”

에디 레드메인
“촬영은 시간 순으로 진행되지 않았어요. 단 하룻동안 여러가지 신체 상태를 표현해야 할 때도 많았죠. 첫날엔 캠브리지 배경을 찍고, 아침엔 건강한 호킹이 돼서 제인의 손을 잡고 잔디밭에서 빙빙 돌며 춤을 췄고, 점심 땐 지팡이 두 개를 짚은 호킹을 표현한 뒤, 오후엔 휠체어를 탔어요.”

펠리시티 존스
“에디의 연기의 디테일은 정말 대단했어요. 그는 불가능에 가까우리만큼 꼼꼼하고 세심했고, 열정적이었고, 호킹이라는 인물 속으로 완벽히 녹아 들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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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 호킹(에디 레드메인)과 제인(펠리시티 존스)의 결혼식 장면과 실제 호킹과 제인의 결혼식 사진.

 

‘사랑에 대한 모든 것(The Theory of Everything)’ 영화 리뷰
호킹이 풀어낸 첫 사랑의 수식(數式)

 

호킹의 첫 사랑 아내 제인 역의 펠리시티 존스, 스티븐 호킹, 호킹 역의 에디 레드메인.
호킹의 첫 사랑 아내 제인 역의 펠리시티 존스, 스티븐 호킹, 호킹 역의 에디 레드메인.

“축하해! 잘 해냈어, 친구. 자네가 자랑스럽네!”

22일(현지시각) 열린 올해 미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에디 레드메인(33)이 남우주연상을 탔을 때, 천체물리학자 스티븐 호킹은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가장 먼저 축하인사를 보낸 이들 중 한 명이었다. 레드메인은 영화 ‘사랑에 대한 모든 것’(감독 제임스 마시)에서 루 게릭병으로 고통받는 젊은 호킹을 연기해 오스카의 영광을 안았다. 캠브리지대에서 예술사를 전공한 그는 역시 캠브리지 출신인 호킹의 후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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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킹은 영화 개봉 전 영국 런던의 워킹타이틀 사무실에서 먼저 영화를 본 뒤 눈물을 흘렸다. 영국 개봉 뒤인 11월엔 “영화를 보며 때때로 나는 그가 나였던 것처럼 느껴졌다”며 레드메인의 연기에 극찬을 보냈다. 자신이 아내 제인을 만나 사랑에 빠졌던 캠브리지대의 5월 무도회 장면을 촬영할 때는 직접 현장을 방문해 레드메인을 만나기도 했다. 레드메인도 수상 소감에서 “이 상은 루게릭병과 싸우고 있는 세상 모든 사람들의 것”이라고 했고 호킹과 가족에게 특별한 감사 인사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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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대한 모든 것’은 호킹의 케임브리지대 물리학과 시절부터 그의 학문, 사랑, 투병 과정을 담담히 따라가는 영화다. 첫 아내였던 제인(펠리시티 존스)을 만나고, 학문적 성취와 꿈같은 사랑이 모두 손안에 들어온 것 같던 때 병마가 그를 덮친다. 레드메인은 육체의 한계를 뛰어넘을 듯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 몸으로 연기한다. 루 게릭병 전문의·환자·가족들과 만나 조사했고, 병의 진행 정도에 따른 말하기와 운동 능력을 차트로 만들어 놓고 장면마다 다르게 표현했다. 개봉 때부터 해외 평단은 그에게서 ‘나의 왼발’(1989)로 오스카를 거머쥐었던 대니얼 데이 루이스를 발견하며 열광했다. 그는 첫번째 주연작인 이 영화로 골든글로브와 영·미 아카데미상 등 수많은 남우주연상을 휩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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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메인은 런던의 부촌인 첼시에서 자랐다. 아버지는 은행가, 어머니도 사업가. 5살 때부터 연기에 소질을 보였지만 이튼 칼리지를 거쳐 캠브리지대에 진학해 예술사를 공부했다. 정식 연기 교육을 받지 않고도 20대 초반부터 연극과 뮤지컬 배우, 모델로 활동했다. 그의 어머니는 한 인터뷰에서 “에디의 21살 생일날 친구 중 한 명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에디를 보고 싶다’고 했던 말이 기억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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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이 영화는 작년 12월 10일 개봉해 관객 약 27만6000명이 들었다. 현재는 부산 영화의전당이나 일부 CGV극장에서 ‘아카데미 특별전’ 등 행사를 통해 상영되고 있다.

이태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