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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관련된 이런 저런 이야기, 혹은 기획성 기사.

‘모든 판타지의 아버지’ JRR 톨킨을 낳은 영국 버밍엄과 옥스퍼드

 

     1930년 무렵 여름날이었다. 옥스퍼드대 앵글로색슨어 교수 J.R.R.톨킨(1892~1973)은 옥스퍼드 북쪽 노스무어가(街) 20번지의 벽돌집 서재 창가에 앉아 있었다. 부업삼아 고교 수료 시험 답안지를 채점하던 그가 늘 즐기던 캡스턴 잎담배를 파이프에 다져 넣고 불을 붙였다. 열린 창문 사이로 바람이 불어와 담배 연기를 허공에 흩었다. 그 때, 짧은 문장 하나가 갑자기 머릿속에 떠올랐다.
      “땅 속 구멍에 호빗이 살고 있었다.”
     답안지 빈 칸에 그 문장을 옮겨 적으며 톨킨은 생각했다.
      ‘그런데, 도대체 호빗이 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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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빗 빌보(가운데)와 드워프들.  /워너브러더스 제공

 

     톨킨은 침대 머리맡에서 아이들에게 이야기로 만들어 들려주며 이 문장에 살을 붙여 나갔다. 1937년 9월 17일 런던의 한 출판사가 ‘호빗’ 초판을 펴냈다. 먹성좋고 유쾌한 종족 호빗과 회색 수염을 휘날리는 거인 마법사 간달프가 용에게 뺏긴 고향을 되찾으려는 드워프들과 함께 떠나는 모험 이야기는 단숨에 독자들을 사로잡았다.

   1954년엔 ‘반지의 제왕’이 출간됐다. 신과 악마, 엘프와 인간이 얽혀드는 ‘중간계(Middle Earth)’ 수만년 역사가 태어났다. 영국 언론들은 호빗이 약 1억부, 반지의 제왕이 약 1억5000만부 팔린 것으로 추정한다. 20세기에 가장 많이 읽힌 책이라는 데 이견이 없다. 톨킨의 책은 열등한 대중소설로 홀대받던 환상문학을 주류의 지위로 끌어올렸다. 그의 책은 극장 매출 총 18억 달러를 넘긴 영화 ‘반지의 제왕’과 ‘호빗’ 3부작으로 만들어졌다.

   이후 영화, 게임, 드라마들이 마법사, 요정, 괴수, 데미갓(半神)들로 넘쳐나기 시작했다.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흥행 공식이 송두리째 바뀐 것이다. TV시리즈 ‘왕좌의 게임’의 원작 소설가 조지 R 마틴은 “톨킨의 책은 의심할 바 없이 모든 현대 판타지의 아버지”라고 했다. 톨킨이 불을 당긴 대중 문화의 ‘퀀텀 점프’는 어디서 어떻게 시작된 것일까.

◇두 개의 탑과 샤이어의 원형, 버밍엄

   영국 제2의 도시 버밍엄의 한적한 교외 주택가에는 콜(Cole) 강의 물길이 잠시 쉬어가는 커다란 연못이 있었다. 늦봄 잉글랜드의 하늘은 푸르고, 250년 된 셰어홀 방앗간의 붉은 벽돌로 된 굴뚝은 백조가 노니는 연못에 잔잔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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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강이 모인 연못에 비친 증기방앗간 셰어홀 밀의 모습.(위) 내부에는 톨킨이 어린 시절을 보낼 무렵의 옛 방앗간 모습이 잘 보존돼 있다.  /버밍엄=이태훈 기자

 

     “어린 톨킨은 이 동네에서 가장 행복한 시절을 보냈어요. 방앗간 마당에 들어가 장난을 치다 주인집 아들에게 혼쭐이 나 도망치곤 했는데, 그 아들이 늘 하얀 밀가루를 뒤집어쓰고 있었다네요. 톨킨과 남동생은 그를 ‘하얀 오크’라고 불렀죠.” 지금은 지역 박물관이 된 이 곳의 아이린 드보 큐레이터 부장은 “밀가루 뒤집어 쓴 성질 고약한 방앗간 집 아들이 톨킨의 판타지에서 악의 세력의 주력군 오크 종족이 하얀 피부색을 갖게 된 이유”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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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톨킨의 놀이터였던 모즐리 습지(Moseley Bog). 버밍엄을 찾는 톨킨 순례객들의 교과서와도 같은 책 ‘톨킨 중간계의 뿌리'(Roots of Tolkien’s Middle Earth)의 저자인 로버트 블랙햄은 무엇이 톨킨을 모든 판타지의 아버지로 만들었는지 묻자 “모든 것을 한꺼번에 설명할 수 있는 성배(聖杯)는 없다”고 했다. /버밍엄=이태훈 기자

 

     여기서 걸어서 15분쯤 걸리는 모즐리 습지 보호구역은 톨킨이 어린 시절을 보낸 놀이터였다. 반지 원정대를 도와 오크 군대를 향해 바위를 집어 던지던 중간계 고대 종족 ‘엔트’를 닮은 고목(古木)들이 하늘을 향해 팔을 벌리고 서 있었다. 과거엔 맑은 물로 가득한 저수지여서 ‘콜드 배스(Cold Bath)’라 불리는 냇물가에 ‘블루 벨’ 꽃 무더기가 희고 푸른 빛으로 환했다. 톨킨 판타지 세계의 근원에 관한 책을 여러 권 쓴 로버트 블랙햄(67)은 이 곳에서 “중간계 풍경의 근본은 뉴질랜드가 아니라 미들랜드(브리튼 섬 중부 지방)의 자연이며, 톨킨이 이상향으로 여긴 호빗 마을 샤이어의 모델 역시 그가 뛰놀며 자란 버밍엄 교외”라고 설명했다. 블랙햄은 버밍엄에 오는 톨킨 순례객들의 교과서 격인 ‘톨킨 중간계의 뿌리’(Roots of Tolkien’s Middle Earth)의 저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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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톨킨의 시야를 지배했던 버밍엄의 건축물들은 그가 만들어낸 판타지 세계 ‘중간계’의 건축물들에 영감을 줬다. 왼쪽 두 탑은 버밍엄 에지버스턴의 패럿츠 폴리, 에지버스턴 워터웍스 탑. 가운데는 사우론에게 사로잡힌 백색의 마법사 사루만의 본거지 아이센가드의 오르상크 탑. 왼쪽에서 네번째는 버밍엄대 시계 탑 ‘올드 조'(정식 명칭은 조지프 체임벌린 기념 시계탑). 마지막은 사우론의 본거지 모르도르의 바랏두르 탑. 탑 위에 거대한 눈동자처럼 빛나는 발광체는 사우론의 눈 혹은 사우론 그 자체로 여겨진다. /버밍엄=이태훈 기자

 

     버밍엄 중심가에는 중간계 ‘두 개의 탑’의 모델이 된 ‘페럿츠 폴리’와 ‘에지배스턴 타워’가 아직도 서 있었다. 시계탑 용도로는 세계에서 가장 키가 큰 110 높이의 버밍엄대 조지프 체임벌린 기념 시계탑에는 캄캄한 밤에도 하얗게 빛나는 지름 5.25짜리 원형 시계가 설치돼 있었다. 블랙햄은 “저녁마다 이 시계탑을 보며 자란 톨킨은 훗날 바랏두르 탑 위의 어둠 속에 붉게 타오르는 사우론(반지의 제왕 속 악의 군주)의 거대한 눈에 관해 쓸 때 이 시계탑을 떠올렸을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버밍엄의 자연과 건물이야 말로 톨킨의 판타지를 창조해낸 산파역인 걸까. “모든 걸 한꺼번에 설명할 성배(聖杯)는 없어요. 이 모두가 톨킨이 창조한 세계의 일부일 뿐이죠.”

◇‘모든 판타지들의 아버지’를 낳은 옥스퍼드의 작은 펍

     톨킨이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곳은 그가 평생 대학교수로 재직한 옥스퍼드였다. 옥스퍼드대를 나온 영국 총리 26명 중에13명이 졸업한 크라이스트처치 칼리지, 루이스 캐럴의 책에 삽화로 실제 등장하는 가게 ‘앨리스 숍’ 등이 있어 늘 관광객으로 북적이는 세인트 알데이츠 거리에서 5분만 북쪽으로 걸으면, 옥스퍼드에서 가장 유명한 펍 ‘이글 앤 차일드’의 고풍스러운 나무 간판을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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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펍 중 하나일 옥스퍼드 세인트 자일스 거리의 ‘이글 앤 차일드'(왼쪽 아래). 아이들을 데리고 온 부모들은 펍 안 곳곳에 걸린 JRR 톨킨과 CS 루이스, 낭독모임 잉클링스의 문인들의 흔적을 설명한다. (왼쪽 위) 이 곳에서 만난 아르헨티나인 영문학도 이사벨라 판시타(오른쪽)는 톨킨의 흔적을 좇아 혼자 옥스퍼드까지온 순례객이었다. /옥스퍼드=이태훈 기자

 

     1930~40년대 톨킨은 이 펍에서 평생 친구 C.S.루이스(1898~1963)와 동료 작가·학자들과 함께 매주 화요일 낭독 모임 ‘잉클링스(Inklings)’를 가졌다. 루이스는 환상문학의 걸작 ‘나니아 연대기’의 작가이자 20세기 가장 중요한 기독교 변증가로 첫 손에 꼽힌다. 두 사람의 우정은 신화적이다. 루이스는 근엄한 동료 학자들이 ‘애들 책이나 쓴다’고 힐난할 게 두려워 ‘반지의 제왕’ 출판을 주저하던 톨킨을 독려했고, 독실한 가톨릭 신자 톨킨은 무신론자였던 루이스가 크리스찬으로 회심해 ‘순전한 기독교’ 등 명저를 쓰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이들은 이 펍에서 맥주잔을 부딪히며 작품 초고를 읽었고, 서로의 평가에 귀 기울이며 책을 써 나갔다. 이 작은 펍은 ‘모든 판타지들의 아버지’가 태어난 분만실이요, 세계 톨킨 팬들의 성지(聖地)다. 아르헨티나 여대생 이사벨라 판시타(24)도 이 펍을 찾아온 이방인 순례객이었다. 영문학도인 그녀는 “요크대에서 어학연수 중인데 이글 앤 차일드를 보기 위해 혼자 옥스퍼드에 왔다”고 했다. “12살 때 처음 영어로 읽은 책이 ‘호빗’이었어요. ‘반지의 제왕’, ‘실마릴리온’…. 뭐에 홀린 듯 톨킨의 모든 책을 찾아 읽었죠. 지금도 그의 책은 제 상상력의 원천이고, 그는 제 인생의 영웅이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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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덜린 칼리지 뉴 빌딩 뒷편의 사슴 공원(Deer Park). 톨킨은 이 건물에 있던 CS루이스의 연구실에 함께 앉아 차를 마시며 창 밖의 자연을 내다보는 걸 좋아했다. /옥스퍼드=이태훈 기자

 

     옥스퍼드대 모덜린칼리지의 뉴 빌딩 뒷편에는 사슴 수십마리가 사는 ‘사슴공원’이 있다. 톨킨은 뉴 빌딩에 있던 루이스의 연구실에 함께 앉아 애프터눈 티를 마시며 사슴공원을 내려다 보는 걸 좋아했다. 두 사람은 처웰 강을 따라 사철 꽃이 피는 산책로 에디슨 워크를 걸으며 인생과 문학, 사랑과 신앙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도 즐겼다. 인근 옥스퍼드 대학 식물원에 서 있던 200살 넘은 남미 소나무는 톨킨이 기대 앉아 책 읽기를 즐겼다고 해서 ‘톨킨 나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나무는 작년 가을 제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쓰러졌지만, 여전히 옥스퍼드 대학과 도시 곳곳에는 톨킨의 다른 흔적들이 남아 순례객들을 부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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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스퍼드대 식물원에 있었던 ‘톨킨 나무’.(왼쪽) 생전의 톨킨은 이 나무에 기대어 앉아 책을 읽거나 사색하기를 즐겼다.(오른쪽 위) 남미산 소나무의 일종인 이 나무는 수령 200년을 넘기며 제 무게를 견디지 못해 지난해 9월 부러지고 말았고, 식물원은 안전상의 이유로 이 나무를 해체했다.(오른쪽 아래)

 

     지금은 옥스팜 가게로 바뀐 세인트 자일스 거리 톨킨의 옛 집에서 옥스퍼드 중심가를 가로지르는 밴버리 로드를 따라 13㎞쯤 북쪽으로 차를 달리면 울버코트 공동묘지가 나온다. 톨킨과 부인이 함께 묻힌 무덤엔 팬들이 다양한 언어로 써서 놓고 간 편지들이 돌 아래 놓여 있었다. 그 위로 작달막한 장미나무 한 그루가 자랐고, 그 가지가 바람에 흔들릴 때 마다 순례객들이 가는 실로 묶어 둔 절대반지 여러 개가 함께 흔들렸다. 변덕스러운 잉글랜드의 하늘은 이 곳에도 간간이 비를 내렸다. 빗물로 잉크가 번진 여러 편지 중 하나는 캐나다에서 온 ‘저스틴’이 써둔 것이었다. “톨킨, 모든 게 다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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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스퍼드 북쪽 울버코트 공동묘지, 톨킨과 아내 이디스가 함께 묻힌 무덤 위엔 장미나무가 자라고 있었고, 그 가지엔 순례객들이 걸어놓고 간 절대 반지들이 바람에 흔들렸다. 묘비의 톨킨 아내 이름(이디스 메리) 밑 ‘루시엔’과 톨킨 이름(존 로널드 루엘) 밑의 ‘베렌’은 그의 책 실마릴리온 속 사랑 이야기의 주인공인 엘프왕녀와 인간 전사의 이름이다. 오른쪽 사진은 그 묘비석 아래 전세계의 팬들이 각자 나라의 언어로 써서 두고 간 편지들. /옥스퍼드=이태훈 기자

 

     왜 사람들은 세계 곳곳에서 톨킨을 찾아 여기까지 오는 것일까. 왜 죽은지 50년이 넘은 그의 무덤에 “고맙다”는 편지를 남기는 것일까.

◇창조는 또 다른 창조를 낳고

     환상문학의 계보에 관한 책 ‘판타지’를 쓴 이화여대 인문과학원 송태현 교수는 톨킨의 판타지가 지금처럼 거대한 문화적 물결이 된 것을 “시대적 요구가 반영된 현상”이라고 해석했다. “이성과 과학기술을 숭배한 모더니즘의 시대가 세계대전과 핵무기라는 사생아를 낳은 뒤, 세계는 미신이라 폄하했던 종교, 신화, 초자연의 세계를 다시 돌아보게 됐다. 톨킨의 판타지가 여러 미디어로 변환돼 대중을 사로잡은 배경엔 모더니즘에 의해 탈주술·탈종교화됐던 세계를 재주술·재종교화하고자 하는 포스트모더니즘 시대 대중의 욕망이 있다.”

 

톨킨의 무덤 위 장미나무 가지에 걸려 있는 절대반지(왼쪽), 울버코트 공동묘지 곳곳에 설치돼 있는 톨킨 순례객들을 표지판(가운데), 노스무어가 20번지 톨킨이 살던 집에 붙어 있는 푸른 명판. /옥스퍼드=이태훈 기자
톨킨의 무덤 위 장미나무 가지에 걸려 있는 절대반지(왼쪽), 울버코트 공동묘지 곳곳에 설치돼 있는 톨킨 순례객들을 표지판(가운데), 노스무어가 20번지 톨킨이 살던 집에 붙어 있는 푸른 명판. /옥스퍼드=이태훈 기자

 

     1969년 설립된 가장 오래된 톨킨 팬클럽 중 하나인 ‘톨킨 협회(Tolkien Society)’는 올해 봄 총회를 잉글랜드 남부 소도시 아런델의 노포크암스 호텔에서 열었다. 남녀노소 다양한 계층의 회원 200여명이 모인 행사는 마치 대가족의 명절 잔치처럼 시끌벅적하고 유쾌했고, 이들은 하루 종일 함께 웃고 놀고 떠들었다. 현 회장인 숀 거너(29)는 “톨킨은 우리 협회의 영원한 명예회장”이라고 말했다. “설립자 베라 채프먼이 톨킨 사망 1년 전인 1972년 런던에서 직접 그를 만나 ‘회장이 돼달라’고 부탁해 동의를 받았어요. 협회가 존재하는 한 톨킨은 영원히 우리의 명예회장입니다.”

 

가을 호빗 빌보와 프로도의 생일에 즈음해 열리는 톨킨 협회의 최대 행사는 '옥손무트'라 불린다. 옥스퍼드대의 칼리지 기숙사를 빌려 가장행렬(맨 위), 식사와 학술 세미나(가운데) 등이 이어지는 대규모 행사. 맨 아래는 런던 코믹콘 행사에 실마릴리온 속 인물들로 코스튬을 만들어 입고 참여해 입상한 톨킨 협회 회원들 모습. /톨킨 협회 홈페이지
가을 호빗 빌보와 프로도의 생일에 즈음해 열리는 톨킨 협회의 최대 행사는 ‘옥손무트’라 불린다. 옥스퍼드대의 칼리지 기숙사를 빌려 가장행렬(맨 위), 식사와 학술 세미나(가운데) 등이 이어지는 대규모 행사. 맨 아래는 런던 코믹콘 행사에 실마릴리온 속 인물들로 코스튬을 만들어 입고 참여해 입상한 톨킨 협회 회원들 모습. /톨킨 협회 홈페이지

 

     매년 톨킨 협회는 호빗 빌보와 프로도의 생일이 있는 9월 옥스퍼드에서도 대규모 총회 ‘옥손무트’를 연다. 700여명 정도가 모여 학술대회, 가장행렬, 파티를 사나흘간 이어가는 대규모 행사다. 모금을 통해 저개발국가에 톨킨의 책을 보내는 ‘톨킨을 세계로’ 프로그램도 운영하고 있다. 모두 각자 직업을 갖고 일하면서 오직 톨킨을 사랑한다는 공통점만으로 이런 일에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것이다. 톨킨이 죽은지 50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여전히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정기적으로 한 자리에 모이게 하는 힘이 무엇인지 묻자, 협회 아카이브 담당관인 팻 레이놀즈 박사는 “톨킨이 창조해낸 세계는 읽는 사람에게도 무언가 새로운 것을 창조하고 싶은 소망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라고 했다. “누군가는 새로운 판타지 소설을 쓰고, 누군가는 중간계에 관한 노래를 만들죠. 제 본업은 박물관 큐레이터이지만, 여가 시간엔 톨킨 소설의 등장인물들 가운데 평범한 인간 캐릭터의 옷을 만드는 걸 좋아해요. 피터 잭슨은 영화감독이기 때문에 톨킨의 책을 영화로 만들었던 것처럼요. 그의 세계 속으로 들어선 사람들의 창조성을 자극해 또다른 무언가를 만들게 하는 것, 그게 톨킨을 톨킨이도록 하는 것 아닐까요?”

버밍엄·옥스퍼드·아런델(영국)=이태훈 기자

톨킨협회의 연차총회 겸 스프링무트 행사가 열린 아런델의 상징 건축물, 아런델 캐슬. /아런델=이태훈 기자
톨킨협회의 연차총회 겸 스프링무트 행사가 열린 아런델의 상징 건축물, 아런델 캐슬. /아런델=이태훈 기자

 

5일 만에 340만 관객 돌파 ‘암살’, 7월말 개봉 택한 이유

     개봉 3일째 100만, 개봉 4일째 200만, 개봉 5일째 300만. ‘암살’의 흥행 속도는 최동훈 감독의 전작 ‘도둑들’뿐 아니라, ‘괴물’ ‘설국열차’보다 하루 빠르다. 이 영화는 왜 7월 22일 수요일에 개봉했을까.

   심심풀이로 보는 영화 개봉 타이밍의 비밀. 지난 3월에 썼던 기사, 지면용으로 줄이기 전의 원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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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국제시장’에서 덕수(황정민) 친구 달구(오달수)는 말한다. “인생은 타이밍이다. 다 때가 있다는 말이지.”

      실은, 영화도 타이밍이다. 규모와 성격에 따라 개봉하는 때가 따로 있다.<그래픽> 경쟁작 눈치도 살펴 최적의 시점을 고른다. 대작은 1년, 중규모 영화는 반년, 상대적으로 작은 영화도 서너달 전에는 날짜가 잡힌다. 날을 잘 잡아 잘 된 영화도 있고, 잘 못 잡아 망한 영화도 있다. 5일 현재 국내 박스오피스 1위를 질주 중인 외화 ‘킹스맨’은 매출 2538만달러(한화 약 278억원)를 올렸다. 영화 제작국인 영국도 추월해 미국 다음 세계 흥행 2위다. 영화도 물론 재밌지만 설 연휴 경쟁작 ‘조선명탐정’과 ‘쎄시봉’이 기대에 못 미쳐 ‘어부지리(漁父之利) 승자’가 된 측면도 크다. 타이밍이 좋았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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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내 한 메이저 배급사 관계자는 “사실 개봉 날짜를 정하는 절차는 따로 없다. 배급사들과 극장들이 제작 일정과 라인업을 정기적으로 공유하고 협의하면서 ‘눈치 작전’을 펼쳐 서로 영화가 가장 잘 될 날을 자연스럽게 골라가는 것”이라고 했다.

      기본적인 원칙은 있다. 그 해 가장 많은 돈을 들인 최고 기대작들이 연중 박스오피스 규모가 가장 큰 7월 마지막주로 간다. 자영업자들도 모두 휴가를 가고 관객이 극장으로 쏟아져들어오는 때다.올해 7월 마지막주는 ‘도둑들’로 1000만 감독이 된 최동훈의 ‘암살’과 외화 ‘미션 임파서블’ 속편이 1년 전부터 이미 ‘찜’했다. 작년엔 ‘군도’, ‘명량’, ‘해적’이 7월말부터 8월초까지 1주씩 시차를 두고 개봉했다. ‘설국열차’나 ‘미스터 고’같은 작품도 7월말 아니면 8월초였다.

   “그 해 가장 많은 돈을 들인 최고 기대작들이 연중 박스오피스 규모가 가장 큰 7월 마지막주로 간다. 자영업자들도 모두 휴가를 가고 관객이 극장으로 쏟아져들어오는 때다.올해 7월 마지막주는 ‘도둑들’로 1000만 감독이 된 최동훈의 ‘암살’과 외화 ‘미션 임파서블’ 속편이 1년 전부터 이미 ‘찜’했다.”

      설과 추석도 연휴 기간에 따라 다르지만 제법 큰 시장이다. 전통적으로 가족영화가 대세였다. 주로 조폭 코미디들이 이 시즌을 노리다 관객들이 싫증을 내자, 최근엔 사극 코드를 가미하는 경우가 늘었다. 올해 설 연휴의 ‘조선명탐정’이 전형적인 설 시즌용 영화였다.      그 다음 큰 시장은 크리스마스 시즌. 보통 가족영화나 휴먼드라마가 대세고, 연인들을 위한 로맨스물이 뒤를 받친다. 작년엔 크리스마스 시즌보다 두 주 먼저 개봉한 ‘국제시장’이 경쟁작 ‘기술자들’, ‘상의원’이 생각보다 힘을 쓰지 못하면서 성탄·연말 시즌을 순항해 1000만 관객으로 치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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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봉 시점에 따라 울고 웃는 영화들도 나온다. CJ의 경우 2012년 재난공포물 ‘연가시’를 ‘스파이더맨’이 개봉하는 6월 마지막주에 올리는 모험을 걸었다. 스파이더맨은 기본 500만 관객 영화라 다들 피했지만, ‘한국영화가 별로 없고 쇼킹한 소재라 여름에 먹힐 것’이라는 역발상으로 밀어붙였다. 결과는 대성공. 150만 예상했던 영화가 450만까지 갔다. 쇼박스는 지난해 5월 마지막주에 ‘끝까지 간다’를 올려 재미를 봤다. 6월초 연휴에 ‘우는 남자’ ‘하이힐’ 등 대작들이 있었지만 모두 기대에 못 미쳤고, 입소문을 타며 흥행에 성공한 것이다. 경쟁작이 외화냐 한국영화냐, 관객의 서로 다른 취향을 만족시켜줄 수 있느냐 여부가 흥행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애니메이션 최초의 1000만 영화인 디즈니 ‘겨울왕국’도 개봉 타이밍이 결정적이었다. 외국에선 12월에 개봉했지만 한국에선 실사 대작들이 몰리는 연말을 피하고 만화영화 경쟁작도 적은 1월로 개봉을 늦춰 엄청난 흥행 성적을 올렸다. 디즈니는 올해 ‘빅 히어로’에도 같은 전략을 썼다.

   “필름으로 틀던 시절엔 기대작이 망하는 걸 보면서도 다른 영화의 상영용 필름을 새로 제작해 보내올 때까지 울며 겨자먹기로 틀 수 밖에 없었지만, 지금은 디지털 배급시대라 흥행 순환 속도가 빠르다. 될 영화는 쭉 가고, 안 될 영화는 빨리 내려오는 시대가 된 것이다.”

      하지만 배급사 관계자들은 “날짜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영화의 품질”이라고 입을 모은다. 필름으로 틀던 시절엔 기대작이 망하는 걸 보면서도 다른 영화의 필름을 찍어낼 때까지 울며 겨자먹기로 틀 수 밖에 없었지만, 지금은 디지털 배급시대라 흥행 순환 속도가 빠르다. 될 영화는 쭉 가고, 안 될 영화는 빨리 내려오는 시대가 된 것이다. 한 배급 담당자는 “최악 비수기인 11월에 개봉해 1000만 영화가 된 ‘인터스텔라’ 사례에서 보듯, 요즘 극장가에선 재밌고 될 만한 영화는 어느 시즌이라도 된다는 생각이 대세”라고 했다.

이태훈 기자

 

“인간의 노력엔 한계가 없다”… 진짜 호킹도 울린 ‘영화 속 호킹’ 에디 레드메인

에디 레드메인이 호킹을 연기한 과정을 설명하는 공식 영상. 아랫쪽 바 오른쪽 subtitles/cc 버튼을 클릭하면 불완전하지만 영어 자막이 나와요. ^^

호킹(에디 레드메인) “난 우주학자(cosmologist)예요.”
제인(펠리시티 존스) “그게 뭐죠?”
호킹 “시간과 공간의 결혼을 연구한다는 뜻이죠.”
제인 “완벽한 커플이네요.”

에디 레드메인
“스티븐 호킹이 젊었을 땐 완벽하게 건강했단 걸 예전엔 전혀 몰랐어요. 난 그런 걸 엄청 잘 파고들거든요. 스티븐의 사진들을 구해서 루 게릭 병이 진행 정도에 따라 그의 신체 각 부분에 어떻게 드러날 지를 분석했죠. 그리고 그걸 내 몸의 각 부분에 추적해 덧입히듯 연습했어요.”

제임스 마시 감독
“에디는 개략적으로 이 병의 4가지 다른 단계를 이해하고 내면화해야 했어요. 몸이 멀쩡할 때, 지팡이 하나를 짚을 때, 지팡이 두 개를 짚을 때, 그리고 휠체어를 탈 때죠. 그리곤 곧 목소리를 잃어요.”

에디 레드메인
“촬영은 시간 순으로 진행되지 않았어요. 단 하룻동안 여러가지 신체 상태를 표현해야 할 때도 많았죠. 첫날엔 캠브리지 배경을 찍고, 아침엔 건강한 호킹이 돼서 제인의 손을 잡고 잔디밭에서 빙빙 돌며 춤을 췄고, 점심 땐 지팡이 두 개를 짚은 호킹을 표현한 뒤, 오후엔 휠체어를 탔어요.”

펠리시티 존스
“에디의 연기의 디테일은 정말 대단했어요. 그는 불가능에 가까우리만큼 꼼꼼하고 세심했고, 열정적이었고, 호킹이라는 인물 속으로 완벽히 녹아 들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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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 호킹(에디 레드메인)과 제인(펠리시티 존스)의 결혼식 장면과 실제 호킹과 제인의 결혼식 사진.

 

‘사랑에 대한 모든 것(The Theory of Everything)’ 영화 리뷰
호킹이 풀어낸 첫 사랑의 수식(數式)

 

호킹의 첫 사랑 아내 제인 역의 펠리시티 존스, 스티븐 호킹, 호킹 역의 에디 레드메인.
호킹의 첫 사랑 아내 제인 역의 펠리시티 존스, 스티븐 호킹, 호킹 역의 에디 레드메인.

“축하해! 잘 해냈어, 친구. 자네가 자랑스럽네!”

22일(현지시각) 열린 올해 미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에디 레드메인(33)이 남우주연상을 탔을 때, 천체물리학자 스티븐 호킹은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가장 먼저 축하인사를 보낸 이들 중 한 명이었다. 레드메인은 영화 ‘사랑에 대한 모든 것’(감독 제임스 마시)에서 루 게릭병으로 고통받는 젊은 호킹을 연기해 오스카의 영광을 안았다. 캠브리지대에서 예술사를 전공한 그는 역시 캠브리지 출신인 호킹의 후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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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킹은 영화 개봉 전 영국 런던의 워킹타이틀 사무실에서 먼저 영화를 본 뒤 눈물을 흘렸다. 영국 개봉 뒤인 11월엔 “영화를 보며 때때로 나는 그가 나였던 것처럼 느껴졌다”며 레드메인의 연기에 극찬을 보냈다. 자신이 아내 제인을 만나 사랑에 빠졌던 캠브리지대의 5월 무도회 장면을 촬영할 때는 직접 현장을 방문해 레드메인을 만나기도 했다. 레드메인도 수상 소감에서 “이 상은 루게릭병과 싸우고 있는 세상 모든 사람들의 것”이라고 했고 호킹과 가족에게 특별한 감사 인사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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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대한 모든 것’은 호킹의 케임브리지대 물리학과 시절부터 그의 학문, 사랑, 투병 과정을 담담히 따라가는 영화다. 첫 아내였던 제인(펠리시티 존스)을 만나고, 학문적 성취와 꿈같은 사랑이 모두 손안에 들어온 것 같던 때 병마가 그를 덮친다. 레드메인은 육체의 한계를 뛰어넘을 듯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 몸으로 연기한다. 루 게릭병 전문의·환자·가족들과 만나 조사했고, 병의 진행 정도에 따른 말하기와 운동 능력을 차트로 만들어 놓고 장면마다 다르게 표현했다. 개봉 때부터 해외 평단은 그에게서 ‘나의 왼발’(1989)로 오스카를 거머쥐었던 대니얼 데이 루이스를 발견하며 열광했다. 그는 첫번째 주연작인 이 영화로 골든글로브와 영·미 아카데미상 등 수많은 남우주연상을 휩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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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메인은 런던의 부촌인 첼시에서 자랐다. 아버지는 은행가, 어머니도 사업가. 5살 때부터 연기에 소질을 보였지만 이튼 칼리지를 거쳐 캠브리지대에 진학해 예술사를 공부했다. 정식 연기 교육을 받지 않고도 20대 초반부터 연극과 뮤지컬 배우, 모델로 활동했다. 그의 어머니는 한 인터뷰에서 “에디의 21살 생일날 친구 중 한 명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에디를 보고 싶다’고 했던 말이 기억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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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이 영화는 작년 12월 10일 개봉해 관객 약 27만6000명이 들었다. 현재는 부산 영화의전당이나 일부 CGV극장에서 ‘아카데미 특별전’ 등 행사를 통해 상영되고 있다.

이태훈 기자

설 연휴, 영화 좀 보셨나요? 영화기자 ‘강추’ 부부가 함께 보는 영화 3편! ^^

 
영화 담당 기자는 보통 일주일이면 10편 넘게 영화를 봅니다. 마감에 쫓겨 시사를 못 본 날이면 딴 날 저녁 일반 시사라도 봅니다. 감독이나 배우 인터뷰라도 할라치면 빼먹은 전작들도 훑어보고요. 딴 사람들은 주말에 가족 연인과 손잡고 극장 간다지만, “영화 보러 가자”면 손사래부터 치게 됩니다.
 
하지만 몇십년 만에 왔다는 황금연휴 아닙니까. 집에 같이 사는 그 사람은 무슨 죄랍니까, 가끔은 영화도 봐야지. 이번 설에는 아내와 함께 극장에 가 볼 요량입니다. 그래서 골랐습니다. 가정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선택한, 두 번 봐도 시간 아깝지 않은 설 개봉영화 세 편!
 
독일군 암호를 해독해 2차 대전을 승리로 이끈 괴짜 수학 천재의 슬픈 일대기 ‘이미테이션 게임’은 여성들에게 인기 폭발인 영국 TV드라마 셜록 시리즈의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주연입니다. 얼마 전 내한 공연한 트위팝 밴드 벨 앤드 세바스찬의 스튜어트 머독이 직접 노래를 쓰고 연출한 ‘갓 헬프 더 걸’은 혈당수치를 두 배는 높일 듯 달달한 음악이 매력적인 청춘 영화입니다. 베스트셀러 일본 만화가 원작인 ‘리틀 포레스트: 여름과 가을’은 일본 토호쿠 산골 마을에 사는 아가씨가 자신만을 위해 차리는 정직한 치유의 시골 밥상 이야기이고요. 듣기만 해도 마구 힐링이 되는 것 같지 않나요?
 
직장과 육아 스트레스, 설 음식 장만과 친척 대접 스트레스를 훅~ 하고 날려주면 좋겠다는 소망도 담았습니다. 설 연휴 좋은 영화 만나시고, 오랜만에 남편·아내 손 꼭 잡고 가정의 평화도 회복하는 명절 되시기를.
 

 
◇컴버배치 매력 폭발 ‘이미테이션 게임’
  
누구 말로 요즘은 ‘꽃미남’보다 ‘공룡남’이 대세라네요. 한국에도 작년말 금고털이 영화 ‘기술자들’로 250만 관객을 모으며 티켓 파워를 증명한 공룡남 김우빈이 있습니다만, 역시 원조는 영국 TV시리즈 ‘셜록’의 베네딕트 컴버배치겠지요? 뭇 여성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영국 공룡남 컴버배치는 ‘호빗’ 시리즈에서 실제 용 호마우그의 표정과 목소리 연기도 맡았었지요.  
 
아무래도 그의 특이한 외모엔 뭔가 비범한 역할이 어울리는 모양입니다. 이번엔 절대 해독 불가능할 것으로 여겨졌던 나치 독일군의 암호 코드를 풀어내 2차대전 승전을 이끌었던 전쟁 막후의 천재 수학자 앨런 튜링(1912~1954)이 되어 찾아왔네요. 사교성 제로에다, 미움받기 딱 좋은 퉁명스러운 성격, 자기 일에만 골몰하는 외곬수까지, 전형적인 괴짜 천재입니다. “가끔은 생각지도 못한 누군가가 아무도 할 수 없을 것 같았던 일을 해낸다.” 이 대사가 서너번쯤 반복됐던 것 같습니다.
 
독일군의 ‘에니그마’는 24시간마다 1590억의 10억배 경우의 수를 생성하는 악명높은 암호기계였다는군요. 영국은 런던 북쪽에다 전국에서 뽑은 수학자, 천재 언어학자, 체스 챔피언 등을 모아 암호를 깨뜨릴 기밀 조직을 세웁니다. 산술적으로 2000만년 동안 해야 할 일을 20분 만에 해야 하는 ‘미션 임파서블’이죠. 튜링의 선택은? “기계에는 기계로 대적하자” 입니다.
 
튜링은 처칠 총리에게 직접 편지를 보내 자금 지원을 받아 갖은 곡절 끝에 인류 최초의 컴퓨터 ‘튜링 머신’을 만드는데, 이 과정을 함께 해 준 동반자가 크로스워드 퍼즐 풀기의 달인 조안 클라크(키이라 나이틀리)입니다. 또 이 과정에서 인공지성(AI)에게 프로그램이 아닌 실제 지성이 있는가를 가려내는 ‘튜링 테스트’도 고안해냅니다. SF영화 팬이라면 ‘블레이드 러너’ ‘엑스마키나’ 같은 영화들을 통해 익숙하죠?
 
영화는 후반부에 뜻밖의 결말로 치닫습니다. 배우 컴버배치는 단지 멋있고 잘생겨서 인기 있는 게 아님을 연기로 증명합니다. ‘왕좌의 게임’ 시리즈에 사자 문장을 쓰는 라니스터 가문의 당주로 나왔던 찰스 댄스의 멋들어진 영국 액센트도 덤으로 즐길 수 있습니다. 이 영화는 한국시간으로 23일 열리는 올해 미국 아카데미에서 작품상, 감독상, 남우주연상, 여우조연상, 각색상 등 8개 부문 후보에 올라 있습니다. 미리 영화 보고 어떤 상을 탈 지 예측해 봐도 재미있겠네요.
 
상영시간 114분, 15세 관람가.
 

 
◇밀크셰이크처럼 달달한 청춘 ‘갓 헬프 더 걸’
 
두번째 추천작은 ‘갓 헬프 더 걸’입니다. 오랜만에 연애 시절을 떠올리며 컴컴한 극장 안에서 슬쩍 손 한 번 잡아보시면 어떨까해서요.
 
“방 안에 갇혀 너를 떠올리네, 겨울의 너, 봄의 너, 여름의 너.” “내 방은 북쪽인데 해는 늘 남쪽을 비추네. 이렇게 멀리 있는데 나는 네게 가 닿을 수 있을까.” 살짝 소녀 취향인 이런 가사를 읽으며 상큼 발랄한 멜로디와 목소리가 자동 재생되신다면, 이 영화에 꽂히실 겁니다. ‘갓 헬프 더 걸’은 보고 나면 달콤쌉싸름해진 심장을 움켜쥐고 달려가 OST부터 사고 싶어질 음악 영화입니다. 트위팝 밴드 ‘벨 앤 세바스찬’의 프론트맨 스튜어트 머독이 노래를 만들고 감독도 맡았지요. 서구 인디씬에서 컬트적 팬덤을 갖고 있는 이 밴드의 노래를 들어봤다면 영화도 쉽게 짐작이 갈 듯 싶네요. 이 밴드는 얼마 전에 내한 공연도 했어요.
 
머독은 “달리기를 하던 중 갑자기 노래들과 거기 얽힌 이야기들이 마음 속으로 들어왔다. 벨 앤 세바스찬을 위한 노래는 아닌 것 같았고 언젠가 영화로 만들고 싶었다”고 합니다. 이야기엔 구멍이 숭숭 나 있고, 좀 예쁜 척 하는 주연 여배우 에밀리 브라우닝도 살짝 걸리지만. 뭐 어떻습니까. 청춘이란 원래 그런 것 아닌가요? 빈틈도 좀 있고, 예쁜 척도 좀 하고 싶고. 그렇지만 누구에게나 가슴 짠한 그런 기억.
 
‘어른’이 되어가는 청춘들에게는 늘 잊지 못할 한 시절이 통과의례처럼 다가오지요. 마음의 병을 앓는 여자, 멜로디를 숭배하는 남자, 엉뚱 발랄 부잣집 딸 등 세 청춘 남녀는 음악을 사랑하는 공통점으로 만나 꿈처럼 아름다운 계절을 보냅니다. ‘갓 헬프 더 걸’은 세 사람이 만든 밴드 이름이고요. 사랑과 우정이 엇갈리고, 꿈과 이상이 서로 이어졌다 끊어집니다. 어렴풋이 기억날 것 같은 뻐근한 성장통(痛)이지요. 첫 맛은 달콤한데 끝 맛은 톡톡 쏘는 슈팅스타 아이스크림같은 노래들이 빅토리안 테마파크를 닮은 스코틀랜드 글래스고 풍경에 실려 날아와 장미가시처럼 콕콕 가슴에 꽂힙니다.
 
영화 수입사는 “‘원스’보다 산뜻하고 ‘비긴 어게인’보다 담백하다”고 선전합니다. 같은 음악영화로 놓고 볼 때, ‘원스’가 조금 어두웠고 ‘비긴 어게인’이 살짝 질척이는 느낌이었다면 이 영화에 대한 평가로 그리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습니다. 머리가 묵직해지는 독한 위스키같은 영화도 좋아합니다만, 너무 달아서 그만 마시고 싶은데 웬지 멈출 수 없는 밀크쉐이크 같은 이런 영화도 괜찮을 것 같네요. 아내와 함께니까요.
 
상영시간 111분, 15세 관람가.
 

 
◇산골마을 힐링 먹방 ‘리틀 포레스트: 여름과 가을’
 
아내와 함께 보는 설 영화, 마지막 추천작은 ‘리틀 포레스트: 여름과 가을’ 입니다. 잡채 볶고 전 부치느라 고생 많으셨죠? 이 영화는 기름냄새 쏙 빼고 과일, 나물, 야채, 집에서 만든 가정식 소스 향으로만 가득한 시골 밥상같습니다. 영화 예고편의 자막을 한 번 옮겨볼게요. “토호쿠 지방의 작은 마을 코모리, 우리 집은 계곡과 숲, 논으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도시 생활을 접고 코모리 시골 마을에 왔습니다. 오늘부터 나를 위해 소중한 세 끼를 대접하기로 했습니다. 천천히 정직하게 자연같은 삶을 누리고 싶습니다. 지친 당신을 위해 따뜻한 밥상을 선물합니다.” 자, 내용이 짐작가시나요? ‘카모메 식당’, ‘하와이언 레시피’ 같은 일본 영화들이 떠오르는데, 이 영화는 그보다 훨씬 자연, 아니 시골 친화적입니다.
 
일본 동북지역 산 속 깊숙이 시골 마을, 엄마는 5년 전 갑자기 사라졌습니다. 혼자 고향집에 사는 이치코(하시모토 아이)는 오리를 풀어 논농사를 짓고, 야채를 심어 기르고, 산나물과 호두, 감을 따다 이리저리 요리해보며 삼시 세끼 혼자만을 위한 밥상을 준비합니다. 뚝방에서 주워온 호두로 지은 호두밥은 단단함 속에 고소함을 품고 있고, 조금만 신경 써 저장하면 사철 먹을 수 있는 토마토는 말랑말랑한 식감과 달리 실은 어디서든 뿌리를 내리는 강한 열매입니다. 어떤 재료를 넣느냐에 따라 특색있는 맛이 나는 ‘밤조림’ 열풍이 시골 마을에 부는 모습엔 절로 웃음도 나고, 하룻밤 묵혀두면 시원하게 익는 식혜의 모습도 눈이 즐겁습니다.
 
이 영화는 보고만 있어도 저절로 힐링이 되는 것 같은 기분이고, 당장 올 봄에는 텃밭이라도 가꾸고 싶어질 겁니다. 따로 책 살 필요없이 영화 자체가 한 권의 슬로푸드 요리책이라 할 만큼 꼼꼼하게 레시피를 소개합니다, 추르릅. 만화책도 담백한 재미가 있지만, 만화 속 흑백 요리를 귀로 듣고 눈으로 보는 영화는 더 재미있습니다. 사철 땡볕에서 밀짚모자 하나 쓰고 일하는 처자 피부가 어찌 저리 하얀 건지 좀 의아하긴 합니다만. 올해 말엔 ‘겨울과 봄’ 편도 개봉한다니 기대가 크네요.
 
상영시간 111분, 12세 관람가.
 
 
 
 

‘올해의 영화’, 맨날 요청만 하다 요청받고 꼽아보니

문화계간지 ‘쿨투라’에서 지난해의 영화 관련 설문 요청을 받았다. ‘올해의 한국영화’ 세 편, 외국영화 세 편, 독립영화 두 편을 정하고 각각 선정이유를 밝혀달라는 건데…

맨날 요청만 하다가 요청을 당하니 이것도 꽤 만만찮은 일인 걸 알겠다. ^^

한국영화는 꼽을 영화가 그리 많지 않아 고르기가 힘들었고,
외국영화는 ‘단 세 편’ 안에 꼽을 수 없어 아쉬운 영화들이 꽤 있었다.

 

잠깐s

 

■ 올해의 한국영화 (Best movie of the year·Korean)

 

º 수상한 그녀(Miss Granny·감독 황동혁)
  멜로, 신파, 코미디, 음악의 적절하고 영리한 균형

º 빅매치 (Big Match·감독 최호)
  살짝 저평가된, 한국 웰메이드 액션영화의 신선한 얼굴

º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My Love, Don’t Cross That River·감독 진모영)
  첫사랑보다 깊은 끝사랑, 한국 관객의 변태적 위대성을 증명하다

■ 올해의 외국영화 (Best movie of the year·Foreign)

º 5일의 마중 (Coming Home·감독 장예모)
  사람은, 사랑은, 역사 앞에 무릎 꿇지 않는다고 꾹꾹 눌러 말하는 영화. 우리는  모두, 이미 와 있는 누군가(무언가)를 기다리는 삶이지 않은가.

º 보이후드 (Boyhood·감독 리처드 링클레이터)
평범한 삶의 비범한 본질을 드러내는, 가장 포스트모던한 방식의 가장 모던한 영화적 성취

º 인터스텔라 (Interstellar·감독 크리스토퍼 놀런)
과학과 상상력의 그물로 길어올린 무결점 SF 에픽

■ 올해의 독립영화 (Korean Independent Films of the Year)

º 현기증 (Entangled·감독 이돈구)
감독의 천재성이 관객의 호흡을 압도하는 매력적 혼종 장르 영화. 다음 작품선 조금 숨 쉴 틈을 주시길.

º 목숨 (The Hospice·감독 이창재)
죽을 수 밖에 없는 인간을 향해 보내는 진지하고 선한 충고. 다음 작품선 음악을 조금 절제했으면.

 

후기.

올해의 외국영화에
스파이크 존즈의 ‘그녀(Her)’
다르덴 형제의 ‘내일을 위한 시간(Two Days One Night)’
꼽을 수 없어 못내 아쉬웠다.
외국영화 중엔 이외에도
코엔 형제의 기괴한 음악 영화 ‘인사이드 르윈(Inside Llewyn Davis)’
더그 라이만의 저평가된 SF ‘엣지 오브 투모로우(Edge of Tomorrow)’,
‘바시르와 왈츠를’ 아리 폴만의 세기말 우화 ‘더 콩그레스(The Congress)’,
조나단 글레이저의 서늘하고 명상적인 SF ‘언더 더 스킨(Under the Skin)’ 등이
각각 올해의 영화로 꼽힐 만한 나름의 미덕을 갖췄다고 봤다.
독립영화 중에서도
이학준 감독의 K팝 욕망보고서 ‘나인뮤지스: 그녀들의 서바이벌(Nine Muses)’,
임유철 감독의 진심을 담은 소년축구 다큐 ‘누구에게나 찬란한(Glory for Everyone)’
이 두 편을 꼽지 못해 아쉬웠다.

 

 

[미스터 터너] 마이크 리의 명불허전 마스터피스

 

별 기대없이 봤는데, 마이크 리(Mike Leigh)의 ‘미스터 터너(Mr Turner)’는 명불허전 마스터피스다.
기대를 한껏 키웠던 작년 칸에서 마이크 리 감독의 두번째 황금종려상 수상작이 되진 못했으나 , 주연 티모시 스폴은 남우주연상을 안는 영광을 누렸다.

실은, 런던 내셔널 갤러리의 터너 그림 앞에 섰을 때에야 breath-taking 이라는 표현이 본래 뜻하는 바를 알게 됐다. 영화는 테메레르호의 출항, 노예선, 칼레의 파도 같은 터너의 명화들을 장인의 세공품처럼 고스란히 벼려내 스크린 위에 재현한다. 터너의 눈을 통해 보는 시선, 혹은 풍경을 바라보는 터너를 관찰하는 시선으로 보는 잉글랜드와 유럽 곳곳 풍경에 가슴이 뛴다. 영화 좀 본다 자부하는 이들에겐 도전의지를 불러일으킬 영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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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회 본 것 같은데… 영화라네요
이태훈 기자

[名匠·명배우가 만든 미술영화, ‘미스터 터너’ ‘빅 아이즈’]

마이크 리 ‘미스터 터너’ – 화폭 옮긴듯 아름다운 장면
팀 버튼 ‘빅 아이즈’ – 눈 큰 아이 그림 400장 재현

미술과 영화를 함께 사랑하는 관객들에게 행복한 고민거리가 생겼다. 명장(名匠)과 명배우가 뭉쳐 만든, 취향도 성격도 다른 미술영화 두 편이 극장에 걸리는 것. ‘미스터 터너'(22일 개봉)는 영국의 ‘국민 화가’ JMW 터너(1775~1851) 말년의 삶, 예술, 사랑 이야기. ‘빅 아이즈'(28일 개봉)는 1950년대 커다란 눈의 아이들을 그린 미국 화가 마거릿 킨이 사기꾼 남편에게 뺏겼던 원작자로서의 권리를 되찾는 실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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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과 배우도 화려하다. ‘미스터 터너’는 ‘비밀과 거짓말'(1996)로 칸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은 마이크 리 감독 작품. 작년 칸에서 기대를 모았던 두 번째 황금종려상을 받지는 못했지만, 대신 안면 미세 근육까지 움직이는 듯 명연을 펼친 터너 역의 배우 티모시 스폴이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빅 아이즈’는 한국에도 팬층이 두꺼운 팀 버튼 감독 작품. 주연 여배우 에이미 애덤스는 이 영화로 작년에 이어 2년 연속 골든글러브 여우주연상(코미디·뮤지컬 부문)을 받았다.

BIG EYES

◇미스터 터너 : 스크린에 옮긴 터너의 황금빛 풍경

 이 영화는 아름답다. ‘전함 테메레르의 마지막 항해’ 등 터너의 유명한 그림들을 그대로 옮겨 놓은 장면들은 그 자체로 예술 작품이라 할 만하다. 작달막한 풀꽃들을 머리에 인 하얀 해안절벽, 파란색과 보라색이 층을 이룬 저녁놀 무렵의 하늘, 바위들이 흩어진 바닷가로 열을 지어 몰려오는 파도…. 멀리 바다에는 주황색 돛을 편 배들이 떠 있고, 생선 장수들은 나무 도마 위에서 물고기를 손질한다. 감독은 화면의 색온도를 살짝 높여 터너 그림의 인장과도 같은 노란색 안료 황연(黃鉛) 빛깔을 충실히 재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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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크 리 감독 영화 ‘미스터 터너’ 속 장면(위)과 실제 터너의 그림 ‘테레메르 호의 출항’.

 

귀족의 살롱 음악회나 서민들의 시장통 풍경 등 19세기 영국 일상을 골고루 비출 뿐 아니라, 예술 애호가 빅토리아 여왕과 앨버트 공의 환심을 사려는 왕립미술원 화가들의 경쟁과 질시 등 당시 예술판 풍경도 세심히 담았다. “그리스 조각 아프로디테를 닮았다”며 과부가 된 단골 여인숙 여주인에게 연심을 고백하는 터너의 모습이나, 현학과 허세로 예술을 논하는 귀족들 곁에서 하품하는 하녀 모습 등 소소한 재미를 주는 에피소드들이 이어져 150분 상영시간도 지루하지 않다. 청소년 관람 불가.

◇빅 아이즈 : ‘세상 가장 유명한 눈’을 둘러싼 진실게임

이 영화는 재미있다. 큰 눈의 멜랑콜리한 아이들을 그린 마거릿 킨(87)의 그림들은 1950년대 미국에서 포스터와 엽서로 불티나게 팔리며 일반 대중을 상대로 한 미술품 시장의 잠재력을 증명한 첫 번째 사례로 꼽힌다.하지만 남편 월터(크리스토프 왈츠)는 숫기 없는 아내 대신 그림을 팔기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세상에 자신을 화가로 알리고, 아내를 골방에 가둬 그림을 생산하게 한다. 이 희대의 사기극은 남편의 폭력을 피해 하와이로 도피한 아내 마거릿이 소송을 걸면서 들통난다. 팀 버튼 감독의 미술팀은 400여장의 눈 큰 아이들 그림을 재현해 화가 마거릿 킨의 작업실과 갤러리를 방문하는 듯 충실한 볼거리를 선사한다. 상영시간 105분, 12세 관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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