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펌 업계의 사관학교’로 널이 알려진 김&장 법률 사무소의 이재후(李載厚, 69) 대표 변호사가 법조 외길인생으로 살아온 지 46년 만에 법조 외 조직의 이사장을 맡았다. 그것도 처음 생긴 재단의 초대 이사장으로. 그동안 법과 직, 간접적으로 관련된 조직은 몇 차례 맡았으나 이번엔 법과 다소 동떨어진, 산과관련된 재단이다. 그 조직이 바로 지난해 출범한 ‘엄홍길 휴먼재단’이다. 산악인 엄홍길 대장이 산에서 입은 은혜를 사회에 보답하고자 만든 재단 법인이다.
엄홍길 대장이 수차례 이 변호사를 찾아와 재단을 맡아달라고 간청했다. 취지도 좋고, 산도 좋아해서 쉽게 수락을 했다. 이재후 변호사도 “좋은 취지로 만든 재단에서 나를 필요로 하니, 내가 무슨 도움을 줄 수 있을까 나름대로 고민했다”고 말했다. 출범하는 재단이니 법률적인 문제가 걸림돌이 될 수 있어 자문을 하자는 의미에서 맡았다고 했다.
엄 대장은 애초부터 재단법인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재단을 운영하려면 기본적으로 돈이 있어야 한다. 엄 대장은 지금 사회 각계 인사에게 자신의 취지를 설명하며 백방으로 뛰며 출범시켰다. 창립 발기 때 100명이나 이름을 올렸다. 이들 모두 후원회와 임원진들이다.
이재후 변호사가 황영조, 소설가 박범신씨 등과 등산하고 산에서 기념촬영했다.
엄 대장이 재단 상임 상무를 맡아 직적 사업을 추진한다. 벌써 네팔을 지원하기 위한 프로젝트는 시작됐다. 엄 대장이 세계 최초로 히말라야 16좌를 등정하는 동안 입은 셰르파와 그 가족, 친지들을 위한 교육시설을 짓기 위한 설계도가 나왔다. 엄 대장이 20여 년 전 첫 에베레스트 원정 때 희생된 셰르파를 잊지 못해, 그 셰르파의 가족들이 살고 있는 지역을 먼저 지원키로 했다. 이미 초등학교 설립 공사에 들어갔다. 한 달 전쯤 이재후 이사장과 엄 대장 등 일행이 네팔 현지에 가서 착공현장을 지켜봤다.
이재후 변호사는 79년부터 김&장 대표 변호사를 맡아 자타가 공인하는 국내 최대의 대표적인 로펌으로 키웠다. 물론 그가 혼자 키운 건 아니다. “우리 사무실 모든 사람이 맡은 바 열심히 노력한 결과물입니다. 내 혼자만 열심히 한다고 해서 이렇게 성장한 건 결코 아니예요.” 겸손이 물씬 풍겨 오는 그의 말이다. 산이 주는 교훈 같다. 그의 표정에서도 그대로 엿보였다. 얼굴에 있는 세월의 깊이는 어쩔 수 없지만, 그 세월의 무게를 넘어 자세히 보면 가식 없는 표정을 그대로 읽을 수 있다.
그는 한때 한국에서 제일 공부 잘하는 사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시절이 있었다. 58년 서울대 법대를 수석 입학해서니 말이다. “시험이란 건 그때그때 운에 따르는 경향이 많은 거지. 나보다 실력 있는 사람이 많았지만 그땐 내가 운이 좋았던 거지.”
이 변호사는 고교 시절엔 생물에 관심 많았다. 특활 활동을 생물반에서 했다. 산과 자연을 돌아다니며 채집 활동하는 일에 남다른 재미가 있었다. 그 때는 소질에 대해서 별 의식 없이 넘어갔다. 그의 형 두 분은 모두 이과를 택해 지금 의사와 건축사가 돼 있다. 그러나 이 변호사는 문과를 택했다. 워낙 공부를 잘 했다. 당시 한국 교육 체계나 사회 분위기로 볼 때 공부 잘하면 서울대 법대 가는 건 당연한 코스였다. 수석 입학했다. 이 정도면 전국 1등이다. 말이 전국 1등이지, 이건 운으로 되는 건 아니다. 아마 그가 이과를 갔다면 세계적인 생물학자나 물리학자가 됐을지 모를 일이다.
법대에 입학했으니, 법조인이 되는 건 또 하나의 당연한 과제였다. 그에게 그 과제도 별 어려움이 없었다. 재학 중 ‘운동’으로 조금 불미스런 일이 있었으나 그래도 졸업하기 전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군 법무관으로 병역을 마친 뒤 대전지법에서 판사 생활을 시작했다. 그게 1965년도 일이다. 서울지법, 서울 형사지법 판사를 거쳤다. 이어 서울고법 판사와 대법원 재판연구관을 지냈다. 지법, 고법, 대법원 등에서 두루 생활을 했다. 그 와중에 판사하면서 미국소송법을 연구하기 위해 미국 조지타운 법대로 1년 유학을 떠났다. 선진 법률 제도를 마음껏 체험했다. 많은 걸 보고 배웠다.
사무실에서 인터뷰를 마치고 세종문화회관 뒷편에서 잠시 포즈를 잡았다.
“당시 우리나라에선 변호사 인원도 얼마 안 되고 하는 일도 뻔했지만 미국에선 그 숫자와 하는 일이 우리와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많고 다양했다. 아, 변호사 일이 이렇게 다양하구나 라는 걸 느꼈다.”
79년 대법원 재판연구관을 끝으로 판사직 사표를 냈다. 판사 입문한지 햇수로 15년 만이다. 김&장 법률 사무소 대표 변호사로 자리를 옮긴 것이다. 당시까지만 해도 김&장 법률 사무소도 별로 알려지지 않았었다. 김&장 법률 사무소는 대학 동기인 김영무 변호사와 장수길 변호사가 73년 국내 처음으로 개업한 로펌이다. 고등고시 사법과 최연소 합격 기록을 가지고 있는 장수길 변호사는 71년 박정희 전 대통령의 3선 개헌과 유신 체제에 반대해 벌어진 ‘신민당사 농성사건’에 연루된 10여명의 대학생 전원에게 무죄를 선고하는 판결을 내렸다. 이 사건으로 정권에 미운 털이 박힌 장 판사는 72년 법관 재임용에서 탈락하는 대가를 치른다. 장 변호사는 이를 계기로 하버드 법대에 유학해서 선진국 로펌과 기업 변호사 생활을 체험한 후 김영무 변호사와 함께 김&장을 설립한다.
김&장 법률 사무소가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건 76년 사법시험 16회에 차석으로 합격하고, 연수원을 수석으로 졸업한 정계성 변호사가 사법연수생 출신으로는 처음 합류하면서부터였다. 그 뒤 75년 서울대 전체 수석 졸업하고, 77년 사법연수원을 수석 졸업한 신희택 변호사가 김&장을 선택하면서 큰 주목을 끌었다. 이어 79년엔 이재후 대표 변호사가 대표 변호사로 합류했다. 이후에도 서울대 법대 수석 졸업생과 사법고시 수석, 사법연수원 수석 등 화려한 경력자들이 줄줄이 모여들어 법조계 파워집단으로 성장했다.
김&장을 현재의 위치까지 끌어올린 대표 변호사는 이재후 변호사를 비롯해 설립자인 장수길, 김영무 변호사 등이다. 물론 이 변호사 표현대로 한 조직이 크기 위해선 한 사람만의 노력으로 되는 일이 아니다. 하지만 대표의 역량에 따라 조직이 크기도 하고, 줄어들기도 하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이들의 역량과 노력으로 설립한 지 만 35년 만에 한국에서 뿐만 아니라 아시아에서 최고의 로펌으로 성장한 그 중심에 이재후 변호사가 있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지인들과 히말라야 트레킹 가서 설산을 배경으로.
이 변호사는 법조 외길 46년을 걸어왔다. 정치엔 아예 관심도 없었다. 학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은 가끔 들 때도 있었다. 그러나 실무 쪽으로 이미 방향을 잡은 상태라 돌리기도 쉽지 않았다. 이런 성향은 아버지 이항녕 박사에 받은 영향이 커다. 이항녕 박사는 경성제대 졸업 전에 일본 고등문관시험 행정과에 합격한 관료였다. 그러나 해방 후 교육자로 변신했다. 인재를 키우기 위해선 관료보다 교육이 우선이었기 때문이다. 고려대 법대 학장, 문교부 차관, 홍익대 총장 등을 지내 교육계에 큰 족적을 남긴 분이다.
그의 아버지는 또한 등산을 그렇게 좋아하셨다. 수시로 산에 오르는 분이셨다. 학창시절의 이재후에겐 아버지 이항녕의 곧은 교육자적 기질과 한번씩 가는 산행 모습이 아름답게 비쳐졌다. 그대로 받아들였다.
이재후 변호사는 한국에서 가보지 않은 산이 없을 정도다. 아버지의 산행 다니는 모습이 무의식중엔 뇌리에 있었던 어린 이재후는 대학 때부터 산을 찾았다. 시간 날 때마다 찾았다. 혼자 가기도 했고, 여럿이 같이 가도 그 나름대로 의미가 있어 좋았다. 산과 자연을 보고 느꼈다. 육체가 시원해 질뿐 아니라 마음까지 시원해졌다.
산이 몸속으로 스며들었다. 국내의 산들을 오르내리다 보니 조금 더 높은 산에 가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점점 더 높은 산을 찾았다. 급기야 히말라야 트레킹까지 다녀왔다. 에베레스트 정상이 바라다 보이는 뷰 호텔에서 1박하고 돌아왔다. 포근한 자연을 닮고, 정신적 육체적 에너지를 충전할 기회를 가졌다. 바로 자연이 인간에게 주는 충만함이라는 사실을 체험으로 느꼈다.
이재후 변호사의 지금 취미는 걷기다. 등산도 누구 못지않게 많이 했다. 집은 북한산이 뒤로 놓여있는 정릉이다. 퇴근길에 정릉 집까지 10㎞가까이 되는 길을 걸어서 가기도 한다. 인왕산 스카이 산책길 따라서 간다. 사무실에서 식사하러 갈 때도 항상 걸어 다닌다. 점심 먹고 어디든지 걸어서 갔다가 걸어서 온다. 외견상 젊어 보이는 이유도 다 등산과 걷기를 통해 얻은 결과다.
그의 연세에 앞으로 목표와 계획에 대해서 묻는 건 무의미 했다. 하지만 알아서 대답이 돌아왔다.
“40세가 될 때인 79년 변호사 생활을 한 뒤, 대부분 일이 순조롭게 잘 풀려 왔다. 앞으로도 변호사로서 할 수 있을 때까지 최선을 다하고, 사회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 일이라면 봉사하는 차원에서라도 마다하지 않겠다.”
한 말씀 덧붙였다. “법조인 46년 동안 특별히 내세울 것도 없으면서 그렇다고 실수도 없었다. 이게 보통 법조인으로 46년을 보낸 이재후의 모습이다. 나의 장점이자, 단점일 것이다. 개인적으로 시간과 여력이 된다면 어디론가 여행을 떠나고 싶다.”
산과 자연은 항상 그의 곁에 있었다. 북한산을 뒷마당으로 수십 년 동안 살아온 그다. 산과 자연의 또 다른 새로운 모습을 찾아 그는 또 어디론가 가고 싶어 한다. 무한한 자연 앞에 있는 인간의 유한성이다. 그 유한성을 알고 느끼고 싶어 하는 게 인간이다. 산이 주는 무한한 교훈이다. 그를 통해서 느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