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난리 얘기… 한번 더

내가결혼했을때시집은노고산동(신촌)이었다.

그집에서첫번째물난리를만났는데,지대가높았던터라

다행이구경만하는물난리였다.

그때신촌굴다리에서지금서강대교자리까지는복개가되지않아서

와우산쪽으로갈려면징검다리를건너서갔다.

그굴다리까지물이차올랐었다.

물빠지고난후의그참상이란…

그리고그해는와우아파트도무너젔다.

장독대에올라가불럭담넘어로보던처참한모습이라니…

맥없이쏟아저버린시멘트벽과

휘어저엿가락처럼늘어진철근들…그리고거기에누추하게걸려있던세간살이들…

조영남이신고산이…..를와우아파트가우르르르…..라고불러서물의를일으키기도했던

시아버님는그집을팔아

그집보다3배가넓은…값은반에반값에상수동(서강)에다집을사셨다.

그신촌집주위로모텔이들어서고캬바레,술집이들어서서…가

집을팔게된공식적이유였지만사실은잘못보증서준것때문에할수없이였다.

시어머님은깨끗하고아담한양옥에서이쁜홈드레스입고고상하게살아보는게

소원이셔서(사실은나도…ㅎ)서교동연남동쪽으로집을보러다니셨다.

시아버님이식구들과의논도없이서강집을사놓고어머님과큰아들(울남편)을처음데리고갔던날

시어머님은앞마당에서실신하여쓰러지셨다.

그리고그이튿날은도끼한자루들고가셔서마루바닥을찍어대셨다.

너무분하셔서얼굴은하얗고입술은검고부들부들떠시더라고…

집은아주오래된기와집인데한쪽으로10도쯤기울어저있었다.

대문양옆으로행랑채가있고안채는’ㄱ’자로되어있는…

밖에서’이리오너라~’그러면머슴이째빨리뛰어나가문을열어주는

사극에나오는그런집을상상하면된다.

안뜰가운데곷밭이있어과수가3나무가있었고우물까지있는…후

들어가살면서요기조기수리해가며살자니분잡하기한이없었다.

그리고우리시아버님은그일로인하여

지금도마나님께쥐어사신다.

누군가는고풍스럽다던가,옛향취가풍기는…하시겠지만

아궁이에무쇠솟이걸려있고퍼세식이었다는것을감안해보시라…

그런거다시고치느라고맨날일군들점심해먹여야했던내노고도생각하여보시라…ㅎ

3년쯤살고나니그집이왜쌋는지이유가들어났다.

물난리다.

그동네서우리집에제일먼저물이들어오더란말이다.

물난리상황은이미글로올렸으니그만하고

물난리나면대게높은지대에있는학교로대피하는데제일먼저지급받는게담요와라면이다.

그리고인근군부대에서군인들이와서밥을쪄낸다.

밥얻어다라면에밥말아먹는거질리도록…

그리고여기저기서구호품이들어오는데탐낼만한것들은거의없다.

그러나기이한구호품이있었다.

북쪽에서보낸옷감과쌀이다.김일성동지(ㅎ)가보낸…

먼저옷감을말하자면사진과같다.

옥양목에프린트한것같다.

전쟁끝난뒤뭐넉넉한게없던시절엄마가벼르고별러사주셨던원피스의

질감과무늬가거의비슷했다.

그때가50년대초반이었는데,1984년이북에서보낸옷감이딱그랬다.

더구나좁은폭에다1.5m쯤이니아무짝에도쓸모가없는크기다.

몇년을장농속에썩혀두었다가다리미요를만들었다.

그래서아마나와같이살며끝맺음도같이할것이다.

이웃한분도기념으로지금도간직하고계신단다.

그리고쌀은군용으로비축했던것을보낸게아닌가의심이갈만큼묵은쌀이었다.

쌀알이좀굵고노르끼리했고벌레도생긴거다.

다른집들은도저히못먹겠다고가래떡을뽑던지개밥으로주던지했는데

우리집은쌀한알도헤실하지않고몽땅밥해먹었다.

시부모님고향이연안이라고향쌀이라고

어쩌면연백평야의쌀일지도모르신다며매끼마다감화감동하며잡수셨다.

걱정하며찾아온지인들에게쌀을보여주며눈이붉어지기도하셨다.

그쌀로인하여실향민들은큰위안을받았으리라는생각도드는일이었다.

그때그랬었다.

남북이대치하고있으며원수처럼여기던북에서쌀을보낸거나

사실그런구호품안받아도부족함없었던남에서북의호의에조건없이받아드린것…

준김일성보다받은전두환이훨씬대단하쟎냐는말을했었다.

어쨋던그일을계기로남북적십자회담이시작되고

마음의응어리가조금은풀어지고우리시부모님은고향을가볼수있을거라는

작은소망을키웠을것이며…

주는것도받는것도용기일것이다.

그래서하는말인데김정일은소인배란말이다

아비만도못하고비굴하단말이다.

나같으면냉큼받아다굶어죽어가는백성배불리먹이겠단말이다.

(나클났다.말함부로해서…마타하리가암약한다던데…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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