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고졸업선물로내친구창호가톨스토이의’인생독본’이란책을선물로주었다.
엄밀히말하자면그때는그책이선물인줄몰랐다.
왜냐면그가’야~이책읽어봐!’그러면서건네주었기때문에…
빌려준것으로알았다.
톨스토이의인생독본은
1년365일매일읽을수있도록
소크라테스,공자,칸트,탈무드,경전들그리고
톨스토이의작품들,전쟁과평화,안네카레리나,부활같은소설또는단편들중에서
묵상하고사색하고깨달음을줄수있는명구들을골라역어놓은명상록같은것이다.
즉톨스토이의인생관과사상을집약시킨
보통사람들이삶의지침서로사용할수있도록의도한책이다.
그가’전쟁과평화’를세상에내놓았을때의외의커다란반응을보고
‘글쓰는것은사기다.’라고하며절필한뒤오랜시간뒤그의마지막작품이라고도한다.
솔직히말하자면
어떤내용이쓰여있었는지기억되는것은한문구도없다.
나는지금도그렇지만
책을빌렸으면꼭돌려주고
빌려줬으면꼭돌려받고싶다.
‘책은빌려보고돌려주는건바보.’란말도있지만난절대로그렇지않다.
그래서몇달전지인에게빌려준책이있는데아직도돌려받지못해서
그사람을보면마음이뒤틀린다.
그렇다고책을왜안돌려주느냐고따질수도없고…
난창호가빌려준인생독본을1주일에다읽어버렸다.
빌린책빨리돌려줘야된다는마음도있었지만
나는책을단숨에읽어버리는스타일이다.
그래서책읽으며밤을새우는일도종종있었다.
지금은절대로그렇게못하지만…
그러니까그다음토요일날책을돌려주기위해창호를만났다.
내친구순자랑같이…
책을돌려주니창호가받지도않고어이없다는듯날오래쳐다봤다.
나는받으라고재촉하고…
창호가비웃듯이날쳐다보며’이걸다읽었어?’
‘그래!’
‘너가져!’
창호는받지않았다.
나란사람!
그러면그책그냥가져왔으면좋았으련만…내친구순자에게
‘나다읽었으니까,너읽어!’하며주어버렸다.
순자가그책을읽었는지나는알수가없다.
톨스토이의의도대로날짜에맞춰꼬박꼬박읽으며감명을받았는지알수가없다.
다만순자네집에가면마루에있는앉은뱅이책상위
작은책꽂이가운데에늘인생독본이꽂혀있는것을볼수있었다.
나중에깨달았다.
일년내내책꽂이에꽂아놓고날자대로읽고묵상하고자기생각해달라는것이었던것을…
나는그렇게직접설명해주지않으면눈치채지못하는멍텅구리다.
유난히남녀관계즉이성간의감정전달이늦고미숙했다.
다른여자애들은그때쯤남자애들만나면이름에씨(氏)자를붙혀부르던데
나는그냥’창호야~,야~김창호~’그렇게불렀다.
순자네집은동인천역근처에있어서우리들에게정거장이나마찬가지였다.
수시로드나들었다.
순자가아버지가안계셨기때문에어려워하지도않았다.
‘김치밖에없는데그래도밥주랴?’
순자어머니는김치밖에없다면서도두세가지반찬더얹어서밥도잘주셨다.
‘인생독본’은여전히앉은뱅이책상위에움직이지도않고있다.
나는그책을볼때마다마음이아렸다.
세월은흐르고…
나는빼도박도못하는시집살이늪에빠지고
순자는서독을거쳐미국에서산다는소식만들렸다.
창호도결혼하고…
지난월요일날전화가왔다.
‘나모르겠어?’
익숙한목소리는딱누구란확신이안섰다.
몇명의친구이름을댔지만저쪽에선’목소리는그대로구나!’한다.
순자였다.
‘살아있었어?’
미국시민인아들이삼성에파견근무하느라수원에와있는데파견기간이끝나도록
와보지도않는다고해서왔단다.
‘난평촌에있어!둘째네…’
순자오빠도평촌에산단다.꿈마을에…
아들네아파트아랫동네고이웃님데레사님의옆동네다…세상넓고도좁네!
순자는여늬서양여자들처럼앞가슴이풍만한몸매로현관문을들어섰다.
‘너그게뭐야?’
‘뭐가?’
‘니앞가슴!’
‘하하하체중이느니까이게이렇게커지더라,너도만만찮은데…’
‘정확히12키로가늘었어.’
40년만에만나서몸매이야기라니…
순자는정말뼈만앙상했는데나보다더쪘더란말이지…ㅎ
순자는내손녀딸을안아주며
‘눈이네눈하고똑같해…
너눈만있었잖아…
그눈어디갔니?’
‘세월이채가버렸지,ㅎㅎㅎ’
해윤이눈이내눈하고똑같다는데왜그리기분이좋은지…
‘나도조렇게예뻣었구나!!!’
이런저런얘기끝에
‘창호는어떻게살아?’
‘누구?’
‘창호말야.김창호,너좋아하던…’
‘아~그창호!나도모르지,인천에그냥산다는말만들었어.’
그러면서’톨스토이의인생독본’생각난거다.
나에겐좀아쉬운추억이다.
살아온지난날들뒤돌아보면그런아쉬운기억들이많다.
그런것들이삶의방향을바꿔놓았던것을
많은세월이지난뒤에깨달아지는게인간의비애란생각을하게된다.
나는순자에게
‘그창호가준책은어쨋어?’라고물어보고싶은걸꾹참는다.
순자에게는아무의미도없는책인걸,
그책의일로창호와의교제가끊어진건아니었다.
그는내게친구였으니까.
다방가고,극장가고,탁구치고…
처음으로맥주를마신것도창호였으니까.
그리고끝날것같지않던길고긴시집살이의늪에빠졌을때
만일창호를택했다면?
미련한생각도했었다.
내잘못은일년에걸쳐양식처럼읽어야했을’인생독본’을
일주일에다읽어버린것인지도모른다.
그책을순자에게주어버린것인지도모른다.
창호가말하지않았기때문이라고핑게할수도없다.
남들은눈빛만봐도알고,옷깃이스치기만해도안다는데말이지…ㅎ
이가을에왜이리생각이많아질까?
순자는다시갔다.
다시올일이없댄다.
그러니까다시는볼수없다는거다.
순자야!
창호야!
어디서살던건강하게이렇게좋은세상!
행복하게좀더살아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