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다리 책방골목, 아벨 서점 가는 길

P1120076-1.jpg

덜컹덜컹 국철 1호선 동인천역에 내립니다. 비스듬히 골목을 나서 악기점들이 늘어선큰 길을 따라 계속 걷다 보면 굴다리가 나오고, 대각선 건너편에 배다리 헌책방 골목이 있습니다. 크고 작은 책방들이 옹기종기 붙어 앉은 골목으로 들어서면, 그 중 눈에 띄는 간판이 보입니다. 아벨서점(032-766-9523), 최초의 의인의 이름을 붙인 30년 묵은 헌 책방입니다. 한 때 수십곳이던 헌 책방들이어느새 하나둘 문을 닫았지만, 아벨서점 주인 아주머니는 "책방은 죽지 않습니다. 책방 주인이 죽을 뿐이죠"(한겨레, 2006.2.6)라고 말씀하십니다.

  • 아벨 서점

우리 나이로 올해 쉰여섯이시라니, 아벨 서점 사장님은 제겐 막내 이모 연배쯤 되실 듯 합니다.’아벨 전시관’이라는 헌책 전시공간도 만들어두셨다고 들었는데, 볼 수 없었습니다. 오리아나 팔라치의 ‘태어나지 못한 아이에게 보내는 편지'(우리나라 책 제목은 ‘태아에게 주는 편지’, 동천사, 1992) 같은 절판된 책들을 전시해 두셨다던데… 사장님께 "전시관을 서점 옆으로 옮기신다더니 어떻게 되셨느냐" 여쭤 보니 "아직 정리를 못 했다"고 하십니다. "이런 적이 없었는데, 자꾸 집안에 일이 생겨서요. 몇 달째 정리할 엄두를 못내고 있네요." 아쉽지만 다음에 전화로 한 번 여쭤 보고 다시 찾아오기로 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헌책방의 좋은 점 중 하나가, 서가와 서가 사이가 좁다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책으로 된 세상 속에 쏙 빠져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잖아요. 아벨서점의 서가들도 천장까지 빼곡히 책이 그득그득하고, 그도 모자라 바닥에도 무릎높이까지 책들이 쌓여 있습니다. 행여 책 무더기를 무너뜨릴까, 조심조심서가 사이를 누비며 책 제목들을 읽어 봅니다. 참 그리운 이름들이 많습니다. 옛날 군대가기 전 친구에게 ‘제대하면 돌려받기로 하고’ 줬다가끝내돌아오지 못한 책도 있고, 대학 도서관에서 서너번 빌리고도 끝까지 못 읽은 책도 있습니다. 10여년 전대형서점 서가 앞에서 몇 번이나 꺼냈다 꽂았다를 반복하다 끝내 주머니 사정 탓하며 사지 못했던 책도 있습니다. 지금이야 마음 먹으면 살 수 있겠지만, 관심 분야도 달라졌고 맘 턱 놓고 읽을 시간도 부족하다, 는 것이 제 핑계입니다.

8990364426_t1[1].jpg

ⓒwww.aladdin.co.kr

  • 다음엔 꼭… ^^;;;

을유문화사에서 나온 제임스 프레이저의 ‘황금가지’ 1, 2권과, 책세상에서 나왔던 니체 전집 중 ‘이 사람을 보라’, ‘바그너의 경우’ 같은 책들에 자꾸만 손이 갑니다. 이런이런… 그런데 이번에도 또 꺼냈다 꽂았다만 반복하다 끝내 사지 못했습니다. "내가 가져 가면 또 책장 한 구석에서 먼지만 뒤집어쓸테니, 누군가 소중하게 꼼꼼히 읽을 사람이 가져가도록 그냥 두자"는 생각으로… 음… 변명일 뿐이겠지만요. 결국 저는 스페인어 강독 책 한 권으로 만족하기로 했습니다.

이날 ‘땡 잡은’ 사람은 제가 아니라 저희 집 마님이었습니다. 이와사키 치히로가 그린 그림책 ‘자연의 아이들’ 4권 전질과 독일어 동화책 몇 권을 건졌거든요. 치히로는 ‘창가의 토토’로 유명한 분입니다. 윗 그림만 보셔도 아하, 하실 겁니다. ‘자연의 아이들’은 ‘봄 아이’, ‘여름 아이’, ‘가을 아이’, ‘겨울 아이’ 이렇게 4권 한 질입니다. 사장님이 4권 한꺼번에 시집보내야겠다고 하셔서 좀 깎아서 샀습니다. ^^ 저희 집 마님은 도쿄에 갔을 때 치히로 박물관에 들렀을 정도로 이 분의 책과 그림을 좋아합니다. 저야 이름만 아는 정도지만요.

8990364426_f[1].jpg

ⓒwww.aladdin.co.kr

  • 헌 책방의 기억

초등학교, 중학교땐 학년이 올라가면 한 짐씩 늘어나는 전과며 참고서를 동네 헌 책방에서 샀더랬습니다. 새 책 못잖게 깨끗할 뿐 아니라(ㅎㅎㅎ), 가격도 반값입니다. 운 좋으면 학생용엔 없는 설명과 문제가있는 교사용 참고서도 얻을 수 있습니다. 게다가 저 살던 동네 헌책방에서는 주문하면 새 책도 10%쯤 깎아줬습니다. 지금은 인터넷서점에서새 책도 대부분 5~10%씩 깎아주지만(저는 여기에 거품이 들어있다고 생각합니다) 당시로는 파격가였죠.

고등학교 땐 쉽게 구하기 힘든 참고서를 사기 위해 헌책방에 들렀습니다. 야간 자율학습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의 헌 책방사장님들이 제가 가면 반가워했더랬습니다. ^^얼마 전 다시 가 보니 헌책방은 간 곳 없고 학원 뿐이더군요. ‘잘 가르친다’고 소문났던 국영수 선생님 몇 분은 아예 학원을 차려 나오셨구요. 만화가게에서 빌리기 힘든 무협지도 헌 책방에서 많이 읽었습니다.

대학교 앞엔 ‘책상은 책상이다’라는 헌 책방이 있었습니다. 독일 작가 페터 빅셀의 단편집 제목을 그대로 따 붙인이름이었죠. 전공서적 몇 권 사고 나면 주머니엔 먼지만 풀풀, 소주 1병 마실래도 선배들을 뜯어먹어야만 했던 시절이라, 헌 책방은 도서관과 함께 끝없는 책 욕심을 채워주는 통로였습니다.(끝까지 읽지도 못 할 책을 ‘수집’하는 버릇은 이 때 부터 생긴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 특히 이 서점엔 너무 낡거나 오래되서 팔 수 없는 책을 누구든 집어 갈 수 있도록 문 앞에 내놓곤 했습니다. ‘공산주의에서의 좌익 소아병’같은 레닌의 소책자부터, 선우휘 선생의 ‘불꽃’ 같은 한자 그득그득한 깨알 글씨의 문고판까지 누렇게 빛바랜 채 함께 놓여 있었습니다.

P1120080-1.jpg

다음에 다시 아벨서점에 들릴 기회가 생기면, 꼭 사고 싶은 책을 모두 사고야 말겠다고 다짐해 봅니다. 하지만 또 서가 앞에 서면 고민에 빠지고, 빼냈다 꽂았다를 반복하게 되겠지요. 이 책 저 책조금씩 읽으며 몇 시간이고 흘려 보내게 되겠지요. 자꾸 책장을 넘겨 보고, 여백에 쓰여진 메모를 읽어 보고, 뒷편에 쓰여진 "생일 축하해" "강철처럼 강한 사람이 되라" 같은 누군가의 개인적 사연들을 발견하고 혼자 큭큭 웃게 되겠지요. 헌책방은 그래서 좋습니다.

=25일 새벽에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