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여인, 정말 방글라데시의 재앙일까

어릴적 방글라데시는 가난한 나라의 대명사였습니다.초등학교 때 방글라데시와 에티오피아 가운데 어느 나라가 더 가난한가를 놓고 친구들과 얘기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거의브로켄 남작과 아수라 백작 중 누가 더 나쁜 놈이냐 수준의 논쟁이었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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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글라데시 지도 <CIA World Fact Book>

  • 다시 두 여자의 싸움 속으로

신문쟁이 입장에서바라보는 방글라데시는 또 느낌이 다릅니다. 북한보다 조금 큰 면적(14만4000㎢)에 1억4700만명이 모여 사는 가난한 나라. 이 나라가 정치사회적 불안정과 경제적 낙후성을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에 대한 ‘갑갑한’ 소식을 또 접했습니다. 방글라데시에서는 지난 15년간 나라를 쥐락펴락한 두 여성 정치인이 내년 1월 총선에서 또 맞붙게 되면서 또 다시 사회적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는 소식입니다.10월 이후 선거운동 과정에서 양측 지지자간 충돌로벌써 34명이 숨졌습니다. 얼마나 더 죽어나갈지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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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글라데시의 지난 10월까지 총리는 민족당(BNP) 의장베굼(Begum·귀부인) 칼레다 지아(Zia·61) 여사였습니다.(방글라데시는 총선 전 3개월 동안 선거관리용 과도 정부가 들어섭니다.)라이벌인 셰이크(Sheikh·현자) 하시나(Hasina·59) 총재는 야당 아와미연맹(AL)을 이끌고 있습니다. 이름 앞에 붙은 ‘경칭’이 두 사람의 사회적 입지를 설명해 줍니다. 둘은 방글라데시가 군부 독재를 벗어난 1991년부터 지아하시나지아 순으로 5년씩 총리 임기를 주고 받았습니다. 선거만 치르면 바로 전 집권당·총리가 권좌로 돌아오는 회전문 정부(revolving door premiership)’입니.

  • 불구대천의 원수

문제는 두 사람이 사상·정책 차이에 따른 건설적인 라이벌이 아니라 증오로 똘똘 뭉친 앙숙 관계라는 데 있습니다. 군부독재시절 학생운동가로 명성을얻은 하시나 총재는 1975년 쿠데타로 피살된 무지브르 라만 초대 대통령의 딸입니다. 그의 가족도 이 때 몰살당했지요. 이후 하시나 여사는 BNP의 지도자가 됐습니다.

반면 지아 전 총리는하시나 총재 가족이 몰살당했던 바로 그유혈 쿠데타로 권력을 잡았다가, 1981년 암살된 지아우르 라만 대통령의 부인입니다. 남편 사후 AL의 지도자가 됐지요. 당연히 두 여성은 서로 아버지와 남편의 암살 배후에 상대방이 개입했다고 의심합니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불구대천의 원수인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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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일 방글라데시 다카에 있는 셰이크 하시나의 집 밖에서 그가 나타나길

기다리고 있는 지지자들. 아와미 연맹은 내년 1월22일 총선 보이코트

입장을 접고 선거에 나서기로 했습니다. ⓒ로이터

기반이 취약하니권력을 잡은 쪽은 지지 세력에게 공직과 이권을 나눠주느라 바쁘고, 반대 쪽은 5년간 파업과 시위로 국정을 뒤흔들기 위해 최선을 다하게 됩니다. 한 번 파업이 벌어지면 외화 수입의 75%를 차지하는 의류 공장까지 전부 문을 닫습니다. 정치·경제가 안정될 틈이 없는 거지요. 사업가 오바이둘 카데르(42)씨는 외국에선 두 여성 때문에 방글라데시를 온건 이슬람국가로 보지만, 둘 사이의 증오는 절대 온건하지 않다고 했다.

  • 문맹과 가난을 넘어

방글라데시 상황을 보면 막걸리 선거, 고무신 선거가 일상사였다는 우리나라의 역사가 생각납니다. 우리가 폐허를 딛고 지금의 경제발전과 국민교육을 이루지 못했다면, 외국의 누군가가 우리의 상황을 보며 똑같은 ‘갑갑함’을 느끼고 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방글라데시의 비생산적 정치구조는 이른 시일 내에 개선될 가능성이 거의 없어 보입니다. 소수의 중산층은 양대 정당 중 한 쪽에 줄을 대야 살 수 있는 상황이고, 가난하고 문맹인 빈곤층은 정치적 책략에 휘말려 새 인물을 뽑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수도 다카에서 상점을 운영하는 아불 이슬람(51)씨는 매년 홍수, 태풍으로 수많은 사람이 죽는 방글라데시지만, 지아와 하시나 두 여성이야말로 최악의 재앙이라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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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절인 25일 다카의 람나 대성당에서 기도를 드리고 있는 방글라데시 여성.

싸움판 정치와낙후된 경제에 시달리는 이 나라 사람들에게도 내년은 좋은 소

식이 가득한 한 해이길 바랍니다. ⓒAP

얼마 전 한국에 온 노벨평화상 수상자 유누스 박사를 만났을 때 내년 1월 총선을 대비해 ‘깨끗한 후보 뽑기 운동’을 준비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부패와 줄서기에 찌들지 않은 새 얼굴을 뽑아야, 깨끗한 의회, 깨끗한 내각을 만들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방글라데시 정치인들은 유누스 박사의 이미지를 이용하기 위해 그에게 선거준비 과도정부의 대통령직을 제안했습니다만, 유누스 박사는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의 노력이 내년 총선에서 일정한 성과를 거두길 바랍니다.

어떤 나라에서나 가난과 문맹은 민주주의의 가장 큰 적입니다. 이 두 가지 장애를 넘지 못하는 한, 방글라데시 사람들이 권력자들의 손아귀를 벗어나 진정한 민주주의를 쟁취하는 일은 멀고, 또 멀어 보입니다.

=25일 저녁에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