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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의 불편한 진실 : Ce n’est pas pinot noir.

와인의 불편한 진실 : "Ce n’est pas pinot noi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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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not를 왜 그렇게 좋아하죠?”


“글쎄요… pinot는 기르기 힘들고, 껍질도 얇고, 온도에 민감하고, 빨리 익고… 아무데서나 돌봐주지 않아도 잘 자라는 cabernet같은 억척 ‘생존자’가 아녜요. pinot는 항상 돌봐주고 관심을 기울여야 해요. 최고의 인내력으로 길러낼 수 있는 그런 사람만이 pinot의 잠재력을 이해하고 그 표현을 최대로 구슬려 이끌어낼 수 있어요. 그러면 그 풍미는, 지구상에서 가장 잊을 수 없는(haunting), 찬란한(brilliant), 황홀한(thrilling), 미묘한(subtle), 옛 근원에 근접한(ancient) 것이 되죠.”

영화 ‘사이드웨이(Sideways.2004)’를 본 사람은 누구나 ‘피노 누아(pinot noir)’라는 포도 품종에 홀리게 된다. 실제로 이 영화가 개봉한 뒤 미국에서는 피노 누아 품종의 와인 매출이 55% 급상승해 영화 관계자들조차 놀라워했다고 한다. 피노 누아는 로마네 콩티로 대표되는 부르고뉴 산(産)을 최고로 친다.로마네 콩티는돈이 있어도 인연이 없으면 못 마신다고들 할 만큼, 애호가들에겐 꿈의 와인이라고 한다.

브루고뉴 만큼은 안되지만, 랑그독 지역도 상대적으로 저렴한 피노 누아를 한 해 500만 L 정도 생산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세계 최대 와이너리 중 하나인 미국 캘리포니아의 ‘E&J 갤로’는 사이드웨이의 히트에 때맞춰 ‘레드 비시클레트(빨간 자전거)’라는 낭만적으로 들리는상표를 붙인 레드 와인을 시장에 내놨다. 와인 생산지를 중시하는 유럽 소비자들과 달리, 브랜드 중심으로 구매하는 미국 소비자들의 취향을 겨냥한 것이다. 메를로나 시라 등으로 만든 와인도 있었지만, 아무래도 제일 인기를 끈 것은 영화 사이드웨이의 인기에 올라탄 피노 누아였다.

■ 생산량에 비해 너무 많이 수출된 랑그독 피노 누아

“Ce n’est pas pinot noir.”(그건 피노 누아가 아니에요)
17일 영국 일간지 가디언은 미국으로 수출된 프랑스산가짜 ‘피노 누아’ 사건을 전하며 이런 제목을 달았다. 프랑스 남부 카르카손 법원이 와인 1800만병(1353만L) 분량의 가짜 피노 누아 와인을 미국에 수출한 프랑스 와인 생산자와 도매업자들에 무더기로 유죄를 선고한 사건이다. 이들은 2006년 1월부터 2008년 3월까지 값싼 제네릭 와인을 피노 누아로 속여 팔아 700만유로(약 109억원)를 챙겼다. 가디언은 “세계 최고라는 와인 전문 기업과 1800만병을 마신 소비자들이 2년 넘게 감쪽같이 속았다. 우습고도 서글픈 코미디”라고 탄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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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 비시클레트 피노 누아 2005 와인 리포트.

디캔터 닷컴 같은 와인 전문지 사이트에는 “이번 사건에는 ‘미국인들은 아무거나 마시라고 던져줘도 절대 모를 것’이라는 프랑스인들의 미국 폄하 의식이 바탕에 깔려 있다”는 분노의 댓글들이 이어졌다. E&J 갤로는 외신들을 통해 “잘못 부착된 상표로 우리에게 제시된(자신들은 몰랐으니 책임이 없다는 뜻으로 들린다) 문제의 와인 중 본사가 사들인 것은 전체의 20% 정도에 불과하며, 대부분 2006년과 이전 빈티지로 현재는 판매하고 있지 않다”고 밝혔다. 한 병당 보통 12달러 정도하는 저가 와인이지만, 그렇다고 “가짜인 줄 몰랐다”고 발뺌하는 듯 보이는 모습은 그리 아름다워 보이지 않는다. E&J 갈로는 레드 비시클레테 피노 누아에 대해 “짙은 과일 아로마와 함께 블랙 체리와 잘 익은 자두의 풍미를 느낄 수 있다”고 선전해 왔다.

■ 당신의 와인 병 안엔 무엇이 들어 있을까

블룸버그 통신은 최근 “억만장자 와인 수집가인 윌리엄 코흐(Koch)가 와인경매업체, 수집가, 소매상, 수입상 등 자신에게 비싼 값을 받고 가짜 와인을 판 책임자들에 대해 거액의 소송을 다수 제기할 것”이라고 보도했다. 미국 와인 산지로 유명한 캘리포니아의 한 지역 신문은 대형 ‘가짜 와인’ 사건이 터져 나온 가운데 “당신의 와인 병 안엔 진짜로 무엇이 들어있느냐”는 질문을 던졌다. “아마도 대부분 아름다운 포도밭에서 선남선녀가 휘파람을 불며 따낸 포도만으로 만들어진 진짜 와인이 들어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거품을 터뜨려 미안하지만, 이미 지난 수십년간, 와인은 더 이상 신선한 포도로 만들어진 포도주를 뜻하는 말이 아니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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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맹물, 포도농축물질, 설탕…

보도에 따르면 캘리포니아는 수년 전부터 발효를 촉진하기 위해 포도를 짜낸 원액에 물을 첨가하는 것을 허용하고 있다. 그야말로 ‘물을 포도주로 바꾸는’ 기적이다. 와이너리들은 “발효의 완성을 위해”라고 강변하지만, 사실은 같은 양의 포도로 더 많은 와인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라는 분석이 우세하다.


와인 제조 과정에서 ‘메가 퍼플(Mega Purple)’ 혹은 ‘메가 레드(Mega Red)’라고 불리는 포도 농축물질을 첨가하는 것도 더 이상 불법이 아니다. 이런 물질을 집어 넣으면 레드 와인의 색깔을 더 짙은 붉은 색으로 바꿀 수 있다. 포도 농축물질은 물론 와인 레이블에 표시된 포도 품종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뿐만 아니라 설탕이나 인공 향을 첨가하는 것도 일상화됐다고 한다. 합법적이기 때문에, 중뿔나게 이런 물질을 첨가한다고 인정하는 와이너리는 거의 없다. 인공적으로 풍미를 만들어내기 위해 오크 나무 칩이나 오크 향을 첨가하는 것도 합법이다. 한 때 와인의 영혼으로 여겨졌던, 생산지의 토양에 기원하는 포도 고유의 향 따위는 설 자리를 잃게 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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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공향 첨가한 와인이 전국대회서 상타기도

불순물 섞기, 물 타기, 첨가제 넣기, 값싼 저가 포도 섞기…로이터통신은 17일 2000년 이후의 역사적인 와인 관련 사건들을 골라내 보도했다.

2008년 이탈리아에서는 포도농장 10곳에서 2003년 빈티지의 Brunello di Montalcino 와인 수십만병이 압류됐다. 3분의 1에서 절반 정도 가격에 불과한 하급품을 미국에서 한 병에 80달러 이상에 팔리는 고급품으로 둔갑시키다 적발된 것이다.

이탈리아는 또 상대적으로 가격이 싼 남부 지역 와인을 투스카니, 피에몽, 베로나 등 북부산으로 조작하는 일이 빈발한다. 2007년에는 이를 적발하기 위해 경찰관 25명이 소믈리에 자격증을 땄다고 발표돼 화제를 모았다.

2008년 프랑스에서는 ‘보졸레의 왕’으로 불리던 와인업자 조르쥬 두보프가 비싼 와인에 저가 잡포도를 섞다 적발돼 3만 유로의 벌금을 물었다.

2004년 남아공에서는 메이저 와인생산업체 한 곳이 쇼비뇽 블랑 와인에 풀과 후추 아로마를 첨가해 팔다 적발됐다. 6만병 이상의 와인이 폐기 처분됐다. 아로마를 조작한 와인 중 한 종류는 남아공 전국 와인 전시회에 출품돼 상을 타기도 했다.

로이터는 “고대 로마의 정치인·학자 플리니우스는 최초의 백과사전으로 꼽히는 ‘박물지(Historia Naturalis)’에 ‘와인에는 진실이 있다(In wine, there is truth)’고 썼다. 하지만 잇따르는 가짜 와인 사건들을 보면 현대의 와인은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다”고 했다. 모든 것이 대량생산되는 시대,장사꾼들의 욕심 때문에 와인마저 향기를 잃어간다면 참 안타까운 일이다.

20100219, 광화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