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의 숨결이 느껴지는 추사기념관

추사기념관을둘러보며

어떤분야의大家가되기위해서는엄청난노력이필요하다는것을

새삼인식하게되었다.

거기에고난과역경이밑거름이되어더욱심혈을기울여매진했을것이다.

詩,書,畵에서뛰어난기량을보인추사의일생을더듬다보면

고난이유익이라는역설적인말이떠오르는것도그때문이다.

추사의작품들이전시되어있는기념관에선

시공을뛰어넘는조선시대선비의숨결을느낄수가있었다.

8세때아버지께쓴글이명필이어서매우놀라웠다.

비범한인물의탄생은동서양을막론하고신화적발상이그배경에깔리게된다.

사실을확인할수없다보니모형으로만들어놓은추사의일대기에서

두가지이야기는그런이유에서비롯된것은아닐까추측해보게도된다.

기념관입구추사의동상

고택의모형

고택의사계를사진으로담다

추사의여러가지글씨체와작품

추사가사용한낙관들

묵향 그윽한 추사 고택의 봄

추사고택

조선후기의대표적서예가이었던추사김정희(秋史金正喜)선생의유적지로

추사고택과화순옹주묘(영조의2년)및정려문이있으며

추사고택과추사선생의묘와천연기념물제106호인[예산의백송]

그리고추사께서수도하던화암사가인근에있다.

고택은추사의증조부인월성위김한신께서건립한18세기중엽의

건축물로써당시의전형적인상류주택으로후손이세거(世居)해오다가

1968년타인에게매도된것을

충청남도에서1976년1월9일지방문화재제43호로지정하고동년4월25일매수(賣收)하였다.

그후故박정희대통령의특별한배려로유적정화사업을1976년9월4일착공하여

1977년6월27일준공을보았으며1977년9월22일부터

충청남도추사고택관리사무소를설치하여관리하여오다가

1980년1월1일부터예산군추사고택관리사무소로설치하여현재에이르고있다.

김정희선생은1786년6월3일충남예산군신암면용궁리에서

영조의부마이신월성위김한신의증손이며,병조참판인김로경의아들로태어나

백부김로영에게입양되었다.

선생은조선왕조후기의실학자이며대표적인서예가로서

벼슬은병조판서와성균관대사성에이르렀으며

당시의당쟁에휩쓸려제주도와함경도북청에서10여년간유배생활을보내고

말년에생부魯敬의묘소가있는

경기도과천에서71세를일기로1856년10월10일작고하였다.

격식과권위를나타내는전통적대문인솟을대문

사랑채앞에는부귀와영화를상징하는모란이몽우리를올리고있다

복사꽃은어느새이울고

사랑채앞화단에’石年’추사의글씨체,해시계를올려놓은돌

제주도대정에서8년여의유배생활을하고있을무렵,

자신의심의를그대로형상화시킨격조높은작품

사랑채에서솟을대문밖을보다

안채측면

안채내부전경

봄바람처럼고운마음은만물의모든것을용납하고

가장훌륭한모임은부부,아들딸,손자의모임이다.

추사고택에서눈에띄는주련(柱聯)들.

서예대가의집답게수많은주련들이대문옆,현관앞,기둥,바람벽등에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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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갈한부엌,실제로여기선식사준비는하지않았다고한다.

안채에서바라본정원,자목련이아직곱다

추사영실로가는안채후원

사랑채와안채후원이영실로이어지고

추사영실,가신님을기리는마음

영실에서내려다본후원

고택옆추사의묘

추사고택주위전경

어쩐일인지,

복사꽃이먼저이울고뜰에매화한그루가꽃을매단채나를반겨주었다.

수령이200년이넘은백송이며추사가중국에사신으로갔다가돌아올때가져온것이다.

천연기념물제106호

추사김정희선생은

단순한예술가에그치지않고

시대사조의구문화체제로부터신지식의기수로서새로운학문과사상을받아들여

노쇄한조선왕조의구문화체제를탈피하여신문화전개를가능케한

실학자인동시에선각자이기도하다.

선생은북학파의거벽으로청조의고증학풍을도입하여

학문으로는경학(經學),불교학,금석학(金石學),문자학,사학(史學),지리학,천문학에이르기까지

박통하여북한산기슭의비석이신라진흥왕의순수비임을고증하기도하였다.

저서로는완당집(阮堂集)금석과안록(金石過眼錄),실사구시설(實事求是說),완당척독(阮堂尺牘),

담연제집(潭연濟集)등이있다.

이와같이광범위하고철저한학문과천부의재질을바탕으로한추사의예술은

시,서,화,전각(篆刻)등에도뛰어났으며書道는추사체라는독자일문을열어

서예사상至高의경지를이룩하였다.

작품으로는「묵란도(墨蘭圖),묵죽도(墨竹圖)」와

국보로지정된「세한도(歲寒圖)」등이있다

추사김정희고택

위치:충청남도예산군신암면용궁리79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