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rdman (1)

[버드맨] 날 선 블랙 코미디 당의정 속, 갸냘픈 실존에 보내는 연민

” 이 모든 걸 한꺼풀 들춰 그 속을 들여다보면, 사랑받으려 몸부림치는 존재의 가벼움, 갸냘프고 취약한 실존에 대한 연민을 만난다. 극중 리건은 레이먼드 카버의 시와 소설을 빌려 말한다. “이 세상에서 사랑받는 존재라고 느끼고 싶었다”고. “난 왜 항상 사랑을 구걸해야 하느냐”고. “


‘버드맨’ 아카데미 작품상, 감독상, 촬영상, 각본상 수상. 올 아카데미의 진정한 승자. ^^ 

‘바벨’ ’21그램’ ‘아모레스 페로스’의 알레한드로 곤살레스 이냐리투 감독, 원조 배트맨 마이클 키튼 주연의 영화 ‘버드맨’은 지금(23일 오전 11시25분 현재) 진행 중인 올해 미 아카데미 시상식의 최대 화제작 중 하나다. 이미 골든글로브 남우주연상과 각본상을 받았고, 아카데미에선 작품상·감독상·남우주연상·촬영상 등 9개 부문 후보에 올라 있다. 지난해 10월 개봉 때 미국에서 단 4개관에 제한 개봉해 42만 달러를 벌어들였다. 개봉 주말 극장당 매출 2위 기록. 이후 스크린은 900여개까지 늘었고, 평론가들도 호평 일색이다. 평단과 관객이 미리 짠 듯 한 목소리로 칭찬하는 이런 영화는 흔치 않다.

지면용으로 고쳐 쓰기 전 리뷰 원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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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이 골디 혼과 찍은 어설픈 코미디를 싫어했다고 내가 당신을 사랑하지 않은 건 아냐. 당신은 늘 그런 식이야. 존경과 사랑을 혼동하지.”

      연극 프리뷰 뒤 찾아온 옛 아내는 여전히 냉정했다. 분장실 거울 앞에 앉은 전 남편은 왕년의 수퍼스타. 30년전 블록버스터 ‘버드맨’의 주연 톱스트였으나 속편 출연을 거절한 뒤 퇴물 배우가 된 리건(마이클 키튼)이다. 그는 남은 재산을 털어 레이먼드 카버의 소설을 뉴욕 연극 무대에 올리고 있다. 결혼기념일에 바람을 피우다 들켰다고 아내에게 식칼을 집어던졌던 미친 남자의 마지막 재기 기회다.

      일이 술술 풀릴 리 없다. 현실과 환상, 의식과 무의식이 뒤섞이고, 자의식 과잉의 인기배우 마이크(에드워드 노튼)가 끼어들어 혼란을 부추긴다. 설상가상 머릿 속 ‘버드맨’이 말을 걸기 시작한다. “니가 오리지널이야. 다른 광대들의 길을 닦아줬지. 들통나기 전에 여길 뜨자. 우린 왕년에 수천억달러를 벌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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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달 5일 개봉하는 영화 ‘버드맨’은 22일 오후(한국시각 23일 오전) 미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리는 제87회 아카데미상 시상식의 기대작이다. 이미 골든글로브 남우주연상과 각본상을 받았고, 아카데미에는 작품상·감독상·남우주연상·촬영상 등 9개 부문 후보에 올랐다. ‘21그램’ ‘바벨’을 만든 알레한드로 곤살레스 이냐리투 감독 작품이다.

      이냐리투는 영화에 달콤쌉싸름한 블랙 코미디를 다크초콜렛처럼 듬뿍 발라 놓았다. 키튼이 ‘왕년의 버드맨’ 리건 역을 맡은 건 과거 ‘배트맨’이었던 자신에 대한 자학 유머다. 리건은 “맙소사, 제레미 레너에게도 망토를 입혔어?”라고 묻는다. 배우들을 모조리 수퍼영웅으로 만드는 최근의 할리우드에 대한 조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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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것만 쫓는 관객도 풍자한다. “사람들은 피와 사랑과 액션을 좋아해. 수다스럽고 우울한 철학적 이야기 따위 비평가들의 거짓부렁이지.”

      딸(엠마 스톤)도 리건에게 진절머리를 낸다. “어차피 60대 백인 부자들이 정장 입고 시간 때우러 오는 연극이야. 아빠도 이 연극도 하나도 안 중요하거든. 아빤 블로그 싫어하고 트위터 무시하고 페이스북도 없잖아. 그건 그냥 존재가 없는거야!”

      이냐리투 감독은 치밀하게 시공간을 계산한 롱테이크로 관객의 시선과 두뇌를 장악한다. 살짝 현기증마저 느끼게 하는 광각 카메라는 스테디캠에 실려 연극무대 안팎을 이동하며 관객을 스크린 속으로 빨아들인다. ‘그래비티’로 이미 한 번 오스카를 거머쥔 촬영감독 엠마누엘 루베츠키의 솜씨다.

      이 모든 걸 한꺼풀 들춰 그 속을 들여다보면, 사랑받으려 몸부림치는 존재의 가벼움, 갸냘프고 취약한 실존에 대한 연민을 만난다. 극중 리건은 레이먼드 카버의 시와 소설을 빌려 말한다. “이 세상에서 사랑받는 존재라고 느끼고 싶었다”고. “난 왜 항상 사랑을 구걸해야 하느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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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냐리투는 배우의 자의식을 다룬 이 영화 속에 자신의 작가적 자의식도 투영했다. 알파벳 순서로 글자가 깜빡이는 오프닝은 장 뤽 고다르의 ‘미치광이 피에로’(1965)의 오마주다. ‘배트맨’ 키튼을 버드맨으로 캐스팅한 것 역시 배우의 전작 이미지를 영화 속에 섞어 넣는 고다르의 수법이다. 영화 전체가 ‘원샷 원시퀀스’인 듯 천의무봉하게 이어지는 롱테이크 기법도 많은 작가주의 감독들에게 빚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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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히려 이 영화는 이냐리투가 겸손을 잃지 않았기에 더 빛난다. 그는 고대의 황금보물을 녹여 새로운 신상(神像)을 창조하는 장인(匠人)처럼 지식과 기법을 이물감없이 녹여 넣었고, 스릴러적 재미와 신랄한 유머로 세공해 새로운 현대의 걸작을 주조했다. 평단과 관객이 드물게 일치된 찬사를 보내는 데는 분명 이유가 있다. 경이로운 119분이다. 청소년관람불가.

/이태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