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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이 슌지 감독 인터뷰] “기억하는 한, 존재도 사라지지 않는 것”

 

“죽은 사람에 관한 기억을 얘기한 영화 ‘러브레터’를 만들었지만 실은 ‘내가 정말 죽음을 몰랐던 건 아닐까’ 생각했어요. 생존자들은 죽은 사람들을 여전히 기억 속에 존재하는, 어딘가 있을 수도 있는 사람으로 여기는 것 같았습니다. 기억이 지속된다면 죽어도 진짜 죽은 게 아닐 수 있겠다 싶었지요. 나에 대한 기억이 사라진다면 존재 의미도 사라지는 것 아닐까, 단순히 살아 있음보다 기억이 더 소중한 것 아닐까….”

 

お元気ですか?

   이와이 슌지(岩井俊二·52) 감독을 만나면오겡키데스카(お元気ですか·잘 지내세요)?”라고 먼저 묻고 싶었다. 설산을 향해 메아리치던 한 여인의 간절한 외침으로 기억되는 영화러브레터가 만들어진지 올해로 20년이다. 오는 4일까지 서울 CGV청담씨네시티에서 열리고 있는 마리끌레르 영화제 참석차 내한한 이와이 감독을 지난 28일 만났다. 영화제는 이와이 슌지 특별전을 통해뱀파이어’(2011), ‘하나와 앨리스’(2004), ‘릴리 슈슈의 모든 것’(2001)을 상영하고 있다. 그는 질문을 받으면, 그렇군요…한 뒤 한참 입을 꾹 다물고 생각에 잠겼다. 두꺼운 뿔테 안경 속의 두 눈을 몇 번 깜빡인 뒤엔 길게 정성을 다해 답했다.

-‘러브레터를 본 많은 사람들이 종종 당신을 멜로에 특화된 감독이라 생각한다.

  “실은 나는 러브스토리나 멜로물을 만든다고 생각하고 영화를 만든 적이 없다. 러브레터도 사실 시간과 기억에 관한 독백이라 할 수 있는 이야기다. 나는 영화를 만들 때 세계를 다채롭게 드러낼 수 있는, 화려하지 않은 골목길이라 하더라도 가슴에 남는 순간을 포착하겠다고 생각한다. 그런 순간은 어릴 때 많지만 자라면서 점점 사라진다. 단순한 추억보다 좀 더 기억이 가지고 있는 아련함을 표현하려 했던 영화다. 내 영화 중 어떤 것은 젊은 층, 어떤 것은 어른들을 위한 것처럼 보이겠지만, 나는 늘 똑같은 안경을 쓰고 영화를 찾고 만들어 왔다.”

-러브레터에서 나카야마 미호의오겡키데스카를 아직 많은 한국 팬들이 기억한다. 죽은 사람과 이어지고 싶어하는 간절함이 느껴진 장면이다. 어떤 느낌을 담으려 했다.

  “일단 러브레터를 만들던 시절 나는 너무나 젊었다. 그 때는 정말 무작정 닥치는대로 생각하고 무작정 열심히 찍었다는 기억 밖에 없다. 이 대사가 왜 이것이어야 했는지 왜 그랬는지는 기억하지 못 한다. 고민하며 찍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나온 대사와 장면이었다. 실은 러브레터에서 중요한 것은오겡끼데스까를 외치는 것 자체 보다 외치기 전까지의 과정이었다. 그 전까지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줘야 먼 산을 보고 눈밭에서 간절히 외치는 것이 설득력을 가질 수 있을까, 그것을 고민했다. 어떤 과정이 있었기에 여자 혼자 그 산에까지 가게 되는 것일까. 영화 속에서 막 넘어지고 그런 것도 실제 그림 콘티를 많이 그려서 시뮬레이션을 해 가며 나온 장면들이다. 근데 막상 현장에서 촬영하려고 보니 시간도 모자라고 생각처럼 꼭 찍어지는 건 아니었다. 어쨌든 정말 열심히 고민해서 만든 영화이고 그런 장면이 나오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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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장련성 객원기자

-‘피크닉의 담 위로 걷기나스왈로우테일 버터플라이의 문신처럼 당신은 영화에 풍부한 상징을 사용한다. 이번 영화제에서 한국 관객을 만나는뱀파이어는 소품이나 도구로서가 아니라 영화 전체가 상징이 된 것 같은 느낌이다. 영화에 대한 당신의 생각이 변한 것일까.

  “영화를 찍기 전에 늘 글을 먼저 쓰고, 쓸 때 굉장히 많은 번뇌를 한다. 그런데 대부분의 영화는 내가 생각한대로 되지는 않는다. 글도 마찬가지다. 작품이 짧으면 내가 원하는 이미지를 살리기가 쉽고. 작품이 길고 커지면 원하는 이미지가 결과적으로 많이 변해버리는 경우가 있다. 글을 쓸 때 마다 생각과 느낌이 많이 달라지고 글과 영화 자체도 많이 달라진다. 오늘도 어제도 다음 작품의 시나리오를 쓰고 있는데 오늘은 이 영화에 맞지 않다고 생각한 무언가가 하루 자고 일어나면, 괜찮지 않아? 이런 건 어때?’ 생각하게 된다. 그러다 보니 매번 작품을 쓸 때 마다 달라지는 것 같다.”

이와이 감독의 영화 ‘피크닉’ OST – ‘Close To You’

-감독이 일본 3·11대지진 피해 지역인 센다이 출신이고, 대지진 이후 다큐멘터리 ‘3·11: 이와이 슌지와 친구들을 만들었다. 영화와 인생에 적지 않은 변화를 겪었을 것 같다.

  “대지진 이후에 무척 큰 충격을 받았다. 주위에 돌아가신 분들이 많다. 나는 실제로 죽은 사람에 대한 기억에 관한 이야기 러브레터라는 영화도 만들었다. 하지만 몇 번 현지를 가면서 얻은 가장 큰 깨달음은내가 죽음을 진정으로 몰랐을 수도 있겠다는 것이었다. 후쿠시마 쪽에 가면 3·11 재해로 가족과 친구를 많이 잃은 사람들이 남아 있다. 그 사람들에겐 돌아가신 분들이 그냥 죽은 사람이 아니라 우리 주위에 있었던 사람, 지금 못 만나지만 어딘가 있을 수도 있는 사람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왜냐하면 그 사람들의 기억 속에는 이게 너무 순간적으로 일어난 큰 일이고 많은 사람들이 죽었기 때문에. 그들이 여전히 기억 속에 존재하고 있으며, 죽었다기보다 살아있기 바라는 착각과 바램을 갖고 있다는 걸 너무나 크게 느꼈다. 죽음이란 어쩌면 우리가 기억한다면 진짜 죽은게 아닐 수도 있겠다 생각했다. 우리가 지금 개인으로 한명씩 혼자 살아가는 것 같지만 나에 대해 사람들이 기억해주지 않는다면 나라는 존재는 없다고 생각한다. 다 잊어버린다면 존재는 의미가 사라진다. 살아있음보다 기억이 더 소중하다고 생각하게 됐다. 큰 변화이고 깨달음이었다. 러브레터에서도 기억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지만. 그는 죽었지만 기억하기 때문에 여전히 존재한다고도 생각할 수 있다. 기억이라는 것이 얼마나 크고 중요한 일인지 깨닫게 됐다.”

일본에서 개봉한 이와이 감독의 애니메이션 ‘하나와 앨리스 살인사건’ 트레일러. 아오이 유우를 스타로 만든 영화 ‘하나와 앨리스’의 프리퀄로, 실제 ‘하나와 앨리스’의 배우들이 목소리 연기를 맡았다.

-기억의 문제는 감독의 영화세계를 관통하는 테마다. 감독에겐 기억이라 주제가 마치 수도승의 깨달음처럼 간절해 보인다. 왜일까.

  “영화 감독은 사실 무언가를 생각해내고 기억해내면서 영화를 만들어가는 직업이다. 기억을 지금까지 나는 나의 작업을 위해 사용했다. 그런데 대지진 이후 나를 위해 사용하는 기억이 아닌 다른 사람들의 입장과 기억을 생각하게 됐다. 이들에게 기억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본래 배려란 남의 입장에서 생각해 행동하는 것이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그 배려라는 것이 일종의 매너로서 존재한다. 곤란한 사람을 돕자라는 것도 진정한 마음이 아니라 매너로 하는 사회다. 기억과 상상력을 남을 위해 쓰자고 생각했다. 그것은 남의 행동과 남의 입장을 내가 상상해보는 데서 시작하고, 그것이 배려의 시작인 것 같다. 요즘은 필요한 것 있으면 돈만 내면 편의점에서 살 수 있는 세상이다. 지금 마시고 있는 커피도 앉아서 돈만 내면 갖다 준다. 그러나 누군가는 이 커피를 내리기 위해 노력했을 것이다. 편의점에서 파는 물건도 고안한 사람, 만든 사람 등 많은 사람의 노력이 필요했을 것이다. 요즘은 그런 부분까지 생각하고 살아야겠다, 나 이외의 많은 사람들 고생 있었기에 내가 이렇게 살 수 있다는 생각 많이 한다. 요즘 사회는 기본적으로 돈이 기준이 돼 있고 돈 있으면 대부분의 것을 손에 넣을 수 있지만 돈 없이 가질 수 있는 것들이 있다. 그것들은 결국, 우리가 상상력으로 남을 이해해야 얻을 수 있는 부분이라 생각한다. 단순히 모든 것이 물건을 교환하는 수준에서 끝나는 사회는 좋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남을 생각하기 위해서는 남이 하는 일 남의 행동을 잘 관찰해야 하고 그것이 내 일과도 연결된다고 생각한다. 고마워하는 마음 배려심이 좀 더 필요하다는 생각을 요즘 들어 이 나이 먹고 생각하게 됐다.”

-대지진 다큐도 그런 맥락에서 만든 것인가.

  “그렇다. 다큐는 좀 더 많은 젊은 감독들이 참여해 2편도 만들었고 일본의 TV를 통해 방영됐다.”

-감독의 관심이 점점 사회적인 주제, 무거운 쪽으로 옮겨 가는 것 같다. 감독은 기본적으로 이야기를 하는 직업이고 다큐는 듣는 작업이다. 대지진 이야기도 다큐가 아니라 극영화라면 어땠을까.

  “지금 만들고 있는 영화가 어떤 의미에서는 3·11이후와 관련된 극영화다. 내가 앞으로 만들게 될 영화 중에도 3·11 이전부터 기획하고 글 썼던 작품도 있고. 그 뒤에 책을 써서 만들게 된 것도 있는데, 마침 지금 작업하고 있는 것이 그 뒤에 쓴 책이다. 다음달부터 촬영에 들어간다. 3·11 이후 내가 이걸 만들었을까, 사람들은 의문 가질 수도 있다. 나는 사실 이 영화에 3·11대지진에 대한 나름의 답을 넣었다고 생각한다. 이 영화에는 방사능이나 후쿠시마 이야기가 나오지 않지만, 대지진에서 내가 생각한 것과 깨달은 것을 넣으려 하다 보니 웬지 모르게 이 영화가 만들어졌다. 극영화를 만든다는 것은 강한 메시지를 넣는 것보다 무언가가 숙성돼서 깊은 맛을 내게 하는 식이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한국에도 자료를 가방에 싸 와서 계속 써나가고 있다. 아직 제목은 정해지지 않았다.”

이와이 감독의 영화 ‘뱀파이어'(2011) 예고편

-영화제 등을 통해 상영된뱀파이어는 자살하려는 여자들의 피를 마시는 남자 이야기다. 제목은 뱀파이어지만 흡혈 행위는 집착이나 욕망의 은유처럼 읽힌다.

  “사실 뱀파이어는 소설이 먼저 있었다. 소설에선 주인공의 내면을 굉장히 정밀하게 표현했고, 생명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주인공이 자문자답을 반복하며 답이 펼쳐져가는 식으로 글을 썼다. 하지만 영화는 소설처럼 만들 수는 없다. 계속 그 자문자답을 보여줄 수는 없다. 영화만 두고 보자면 혈액에 굉장히 집착하는 한 남자의 이야기가 됐다. 그리고 피를 통해서 생명을 접하고 느끼게 되는 그런 남자의 모습을 많이 보여줄 수 밖에 없었다. 혈액에 집착하지 않았다면 평생 알지 못했을지 모르나, 혈액에 집착했기 때문에 인간 생명과 가장 깊이 관계할 수 있었던 사람의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말씀하신 것처럼 내 작품 중에 가장 무거운 작품이고, 철학적 주제를 담아냈다고 생각한다.”

-뱀파이어 사내가 탐하는혈액이 감독님에겐기억이라는 테마인 것 같다. 마치 대구(對句)처럼.

  “그렇다. 일리있는 이야기다.”

-실은이와이 월드를 말할 때, 현실 속에 있지만 현실 속에 있지 않을 것 같은 예쁘장한 공간과 사람이라는 의미로 써왔다. 어쩌면 그런 말 싫었을 수도 있겠다.

  “아니 전혀 그렇지는 않다. 그런 귀엽고 예쁜 이미지를 내가 열심히 만들어낸 부분도 분명히 있다. 기본적으로 귀엽고 예쁜 아이들 캐스팅해서 영화 찍는 것을 좋아한다. 왜냐하면 아이들을 캐스팅해 영화를 찍으면 물론 힘든 부분도 많이 있지만 무언가를 했을 때 연기를 했을 때 매우 사랑스러운 모험으로 표현된다. 근데 같은 행동을 어른이 하면 웃을 수도 견딜 수도 없는 일이 돼 버린다. 아이를 주인공으로 만들면 귀엽고 예뻐지고. 어른을 주인공으로 하면 어둡고 심각해지는 것 같다.”

-그렇다면 다음 영화의 주인공은 어린이인가 어른인가.

  “일본에서 지난주에 개봉한하나와 앨리스 살인사건아이들 이야기이고, 지금 준비하는 실사영화는 어른들 이야기다. 어른이 엄청난 고생을 하면서 살아가는 이야기다. 하하.”

Love Letter OST ‘Sweet Memories’

-계속 기억에 관해 이야기 했다. 실은 체르노빌과 후쿠시마 이후에도 원전을 놓지 못하는 인류도, 세계 대전을 겪고도 계속 재무장을 시도하는 일본도 거대한 기억상실에 걸린 건 아닐까.

  “맞는 말이다. 요즘 인터넷에선 사람들 대화 잘하고 친하게 지내지만 정작 옆 집 사는 사람과는 말 안 한다. 같은 전철을 타도 대화 없고, 엘리베이터를 타도 인사 않는다. 사람들이 직접 사람 대 사람을 접하는 데 있어서 문제가 많고 대화를 안 하게 됐다고 생각한다. 주위가 시끄러우면시끄럽네이런 내뱉는 말은 할 지 몰라도, 대화를 하지 않는 이상한 사회가 돼 버렸다. 중요한 것은 내가 만들어버린 나만의 경계가 뭔가 생각해야 한다. 우리는 일상을 살아가며 계속해서 주위에 선을 긋고 있다. 그 선이 이기적인 선이 되면 나와 이웃의 관계가 그렇게 될 것이고, 결국 국가적으로 다른 나라와의 관계에도 반영될 것이다. 개인이 살아가는데 있어서도 타인과 이웃을 생각한다면, 다른 국가의 국민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우리가 무언가를 함으로써 영향을 받게 될 사람들에 대해서도 상상력 발휘하고 산다면 말씀하신 그런 세상의 기억상실도 조금은 달라지지 않을까. 우리가 타인의 관계에서 상상력을 발휘하며 산다면 존 레논이이메진에서 노래했던 세계가 좀 더 빨리 가까이 다가올 수 있지 않을까. 영화 만드는 사람으로서 할 내가 수 있는 일은 계속 영화를 통해 이런 얘기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감독님의 러브레터를 통해 일본영화를 처음 접한 한국 사람이 많고, 아직도 팬들이 많다. 한국의 팬들에게.

  “한국 많은 팬들이 내 작품을 봐주시는 것 정말 감사하게 생각한다. 늘 크게 감동 하고 있다. 일본인 중에 나 같은 경험을 한 사람은 많이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정말 팬들에게 감사한다. 한국과의 교류 통해 굉장히 많은 것 깨달아왔다. 아마 한국 팬들이 없었으면 저는 한국이나 서울에 올 일 없이 살았을 수도, 또 한국 친구들 못 만났을 수도 있다. 일본엔 아직 한국이라는 나라를 접하지 못한 사람이 많다. 특히 요즘 젊은이들은 해외에 대한 관심이나 해외로 나가보고 싶다는 생각 자체가 줄었다. 그만큼 삶의 상상력이 줄어든 것이다. 한국 팬들과 앞으로도 영화를 통해 좋은 관계 이어갔으면 좋겠고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

이태훈 기자

[개봉영화 딱 10자평: 2015.2.26] 제네시스: 세상의 소금, 나이트 크롤러,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 기생수 파트1, 파리 폴리, 조류인간, 백 투 더 비기닝, 포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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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옷장 깊숙이 집어 넣었던 두꺼운 한겨울 외투를 다시 꺼내 입었네요. 영화기자가 전부 다 보고 다이제스트로 소개해드리는 ‘개봉 영화 딱 10자평’, 2월 마지막주 개봉작입니다. 

。제네시스: 세상의 소금  The Salt of the Earth
     지구에 바치는 러브레터 ★★★★

  ‘베를린 천사의 시’, ‘파리, 텍사스’ 같은 걸작을 만들었던 빔 벤더스 감독의 다큐멘터리 작업, 아티스트 3부작의 마지막 작품입니다.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음악), ‘피나'(현대무용)에 이어 브라질 출신의 사진가 세바스치앙 살가두 이야기. 영화 전반부는 분쟁, 기아, 빈곤, 이민, 노동 등을 다룬 사진들은 욕망이 사람을 어떻게 속박하고 변화시키는지, 사람이 사람에게 얼마나 잔인할 수 있는지 비릿한 피냄새와 함께 드러냅니다. 불편하고 힘겹지요. 하지만 “인간이란 종족에게 구원은 불가능하다”고 절규하던 살가두가 그 자리에 주저 앉았다면 이 영화는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아름다운 어머니 지구의 온전한 속살을 다시 카메라에 담고, 숲을 남벌해 황무지가 돼 버린 고향 땅에 250만 그루의 나무를 심어 새로운 열대우림을 만들어냅니다. 이 영화는 노(老) 사진가가 절망의 끝에서 길어올린 희망의 노래, “지구에 보내는 러브레터”입니다. 사진에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감탄 감탄하며 볼 수 있는 영화. 지난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 후보작.

 리뷰 링크 [제네시스: 세상의 소금] 그는 희망을 찍고, 영화는 그의 희망을 찍다  
。나이트 크롤러

   주변에 이런 사람 꼭 있다 ★★★☆

     ‘브로크백 마운틴’에서 금지된 사랑의 아픔으로 애처롭게 깜빡였던 제이크 질런홀의 커다란 눈동자를 기억한다면, 이 영화에서 그가 얼마나 좋은 배우인지 다시 한 번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더 잔혹한 뉴스영상을 찾아 밤거리를 누비는 영상 취재 프리랜서 ‘나이트 크롤러’가 된 질런홀의 눈에선 깜빡임이 사라졌습니다. 생명에 대한 존중도, 어떤 도덕적 거리낌도 없는 소시오패스. 눈동자가 마치 야행성 동물의 그것처럼, 허공에 뜬 혼불처럼 번들거리며 사악한 빛을 내지요.  지난 아카데미 각본상 후보작.

리뷰 링크 [나이트 크롤러] 잔혹할수록 대담해진다…광기 가득한 심야의 앵글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
쾌락은 기대하지 마시길 ★★☆
유구무언. 아이고… 의미없다….

。기생수 파트1
싸울 것인가 먹힐 것인가 ★★★
만화나 애니메이션을 영화로 옮기는 일본의 CG기술은 나날이 발전하네요. 만화와는 좀 다른 스토리이지만, 기생수 ‘오른손이’는 깜찍해요. 원작 만화 팬이라면 대만족일 듯.  ^^

。파리 폴리
소중한 건 늘 곁에 있는 법 ★★★
믿고 보는 여배우 이자벨 위페르, 중년의 위기를 경쾌하게 터치하는 프랑스 소품. 평탄했던 시골 생활, 무뚝뚝한 남편, 아직도 소녀같은 아내… 매력적 연하남의 등장, 갑자기 떠난 파리 여행.  

。조류인간
이 몸이 새라면 날아가리 ★★★
‘러시안 소설’, ‘배우는 배우다’ 등을 만든 신연식 감독의 신작. 15년전 실종된 아내를 뒤쫓는 과정에서 비슷하게 가족의 실종을 겪은 사람들을 만나고, 조금씩 그 비밀에 접근해가는 사회부적응자 소설가의 이야기. 한 편의 소설을 읽는 듯 문학적 상상력으로 가득한 독특한 작품. 그러나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할 듯. ^^;

。백 투 더 비기닝
발랄한 척하지만 진부한 ★★☆
어느날 지하실에서 발견된 아버지의 유품이 실은 타임머신. 낙제를 면하고 로또에 당첨되기 위해 시작한 시간여행, 모든 것이 뒤틀리기 시작합니다. 참신한 스토리나 설정보다는 요즘 10대 취향의 감각적인 시간여행물로 만들려 집중한 느낌. 카메라를 왜 이리 흔들어대는지….

。포커스
잘난 사기꾼 예쁜 도둑女 ★★
잘난 척 사기꾼男과 예쁜 척 도둑女, 속고 속이는 이야기. 윌 스미스는 새로운 ‘스팅’의 주인공이 되고 싶었던 것 같지만, 결과는 그리 신통치 않아요.  ‘어바웃 타임’ 등에 나왔던 여주인공 마고 로비는 그냥 가만 있어도 예쁜데, 왜 이리 예쁜 척을 하는지. 왜 자꾸 몸을 무기로 사용하는지. 윌 스미스는 무척 재능있는 배우라 생각했는데, 과잉 자의식이 배우의 앞길을 가로막는 것 같은 느낌이네요.

[사심 가득 시네토크 (11) 버드맨] 퇴물은 그만 꺼지라고? 아직 안 죽었거든!

버드맨
수퍼영웅 ‘버드맨’의 톱스타였으나 퇴물 배우가 된 리건 톰슨(마이클 키튼)은 뉴욕 연극무대에 도전해 재기를 노린다. 하지만 조연배우(에드워드 노튼)의 통제불가 행동, 냉소적인 매니저 딸(엠마 스톤) 등이 리건의 인생과 연극을 혼란에 빠뜨리고, 설상가상 옛 영화 속 버드맨이 그의 머릿속에서 말을 걸어온다.

 

버드보이후드
   할리우드 메이저 스튜디오들이 미국 밖에서 새로운 재능을 발굴하려고 엄청 노력했잖아. 이냐리투는 20세기폭스가 멕시코에서 캐낸 보석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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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레한드로 이냐리투, 알폰소 쿠아론, 기예르모 델 토로, 요 멕시코 삼인방을 미국에선 ‘스리 아미고스(Three Amigos·세 친구들)’라고 부르더라. 셋 다 모국 멕시코에서 잘 나갔고, 할리우드에선 서로 밀고 끌며 함께 컸으니까. 상상력은 넓어지고 이야기는 마술같고 비주얼은 신비로워. 그 모든 걸 대중적인 작품에 잘 녹이는 감독들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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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술적 사실주의’란 말, 중남미 소설이나 영화 보면 설명이 필요없어. 막 몸으로 이해가 가. 사실 중남미에서 마술적 사실주의는 심한 빈부격차와 끝나지 않는 독재에 시달린 사람들에게 일종의 탈출구 성격도 강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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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 강한 개성을 세계 관객이 보는 대중문화 콘텐츠로 녹여내다니. 장인(匠人) 반열에 올랐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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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 영리해. 배우의 전작 캐릭터를 뒤섞어서 판타지를 다큐처럼 만들어버려. 키튼 뿐 아니라 에드워드 노튼, 나오미 왓츠, 엠마 스톤도 조금씩 현실의 자신과 겹치지.ㅋㅋㅋ 게다가 키튼은 빌 머레이의 페이소스와 토미 리 존스의 사악한 위엄을 동시에 가진 유일한 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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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극 무대를 배경으로 연극적 연출까지 더하니 배우들 연기가 최대치! 연출, 촬영, 음악까지 빠지는 구석이 없네.

버드보이후드
   이 영화는 새로운 클래식으로 남을 거야. 당의정처럼 자학 개그와 블랙 코미디를 잔뜩 입혀 놓고, 그걸 완벽에 가까운 기술적 성취인 천의무봉의 롱테이크로 표현하지. 배우들이 정말 필생의 연기로 몸을 던진데다, 그 안에 수준높은 철학적 주제의식까지 녹여넣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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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그램이나 아모레스 페로스 같은 이냐리투의 전작도 주제의식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형식적 치열함이 돋보여. 그렇게 허투루 낭비하는 게 없으니 영화가 긴장과 재미로 팽팽해. 그리고 음악은 왜 이리 좋은건지. 이냐리투 영화는 보기도 전에 OST부터 산 적도 있다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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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트 크롤러] 잔혹할수록 대담해진다… 광기 가득한 심야의 앵글


26일 개봉하는 영화 ‘나이트 크롤러’는 자극적 사건사고 현장을 촬영해 방송국에 파는 영상취재 프리랜서 루 블룸(제이크 질렌할)의 뒤를 쫓는다. 범죄 현장에 경찰보다 빨리 달려가는 블룸의 빨간색 닷지 챌린저 스포츠카처럼 반전없이 급가속하는 스릴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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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 블룸(제이크 질렌할)은 낡은 도요타 픽업트럭을 몰고 로스앤젤레스의 밤거리에서 맨홀이나 철제 펜스를 훔쳐 파는 하류 인생. 고물상 주인에게 채용을 구걸하다 “도둑놈은 안 쓴다”며 면박당한 밤, 교통사고 현장을 찍어 즉석에서 돈을 흥정해 방송국에 넘기는 ‘나이트크롤러(Nightcrawler)’들을 만난다. 영상이 잔혹할수록 더 큰 돈이 되는 매력적 비즈니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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캠코더와 경찰 무전기를 마련해 밤거리로 나선 블룸에게 지역 방송국 보도 책임자 니나(르네 루소)가 조언한다. “가난한 유색인종 악당에게 짓밟힌 부유한 백인 희생자를 찍어. 소심한 시청자들을 불안에 떨게 할 그림을 가져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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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량탈취범의 총탄에 쓰러진 남자, 음주 차량에 치인 바이커, 무장강도, 살인, 자살…. 블룸은 공포와 고통에 질린 피해자들의 얼굴에 카메라를 바짝 들이댄다. 양심의 꺼리낌도 없고 주저하지도 않는다. 블룸이 대담하게 사고와 범죄 현장을 조작할수록 특종 영상의 값어치와 뉴스 시청률도 치솟는다. 재계약 때문에 시청률 경쟁에 목 매고 있는 니나 역시 블룸의 잔혹 영상에 중독돼 가고, 이야기는 참극을 향해 촘촘한 긴장감의 액셀러레이터를 밟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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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브로크백 마운틴’에서 애처롭게 깜빡였던 질렌할의 큰 눈은 순수와 광기의 양 극단을 손바닥 뒤집듯 옮겨다니는 기묘한 능력을 지녔다. ‘조디악’에선 연쇄살인마를 쫓다 자기 인생을 망가뜨리는 암호광의 집념, ‘엔드 오브 왓치’에선 마약조직과 싸우는 경찰의 냉혈함으로 번뜩였다. 이번 영화에선 그 큰 눈에 깜빡임이 사라졌다. 불빛없는 한 밤 중에도 그의 두 눈동자는 허공에 뜬 혼불처럼 광기로 번들거린다. 동료의 생명도 하찮게 여기며 죄책감도 느끼지 못하는 소시오패스의 광기다. 형사가 거짓말을 추궁할 때 블룸은 말한다. “그게 내가 하는 일이거든. 당신도 인생 최악의 날에 나를 만나게 될 거요.” 경찰서 폐쇄회로 카메라에 비친 블룸의 싸늘한 미소에 식은땀이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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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일 정오 현재 국내 한 포털 사이트의 많이 본 뉴스 1·3·5위는 총기 난사사건, 2위는 연쇄성폭행범 이야기였다. 정말 이것들이 그날의 가장 중요한 뉴스였을까. 실은 모두가 수많은 블룸들이 부풀린 핏빛 뉴스에 중독돼 가고 있는 건 아닐까. 미국선 작년 10월 핼러윈 주말에 개봉해 박스오피스 2위였다. 올해 아카데미 각본상 후보작. 스릴러 팬에겐 만족스런 118분이 될 것이다. 청소년관람불가.

이태훈 기자

“인간의 노력엔 한계가 없다”… 진짜 호킹도 울린 ‘영화 속 호킹’ 에디 레드메인

에디 레드메인이 호킹을 연기한 과정을 설명하는 공식 영상. 아랫쪽 바 오른쪽 subtitles/cc 버튼을 클릭하면 불완전하지만 영어 자막이 나와요. ^^

호킹(에디 레드메인) “난 우주학자(cosmologist)예요.”
제인(펠리시티 존스) “그게 뭐죠?”
호킹 “시간과 공간의 결혼을 연구한다는 뜻이죠.”
제인 “완벽한 커플이네요.”

에디 레드메인
“스티븐 호킹이 젊었을 땐 완벽하게 건강했단 걸 예전엔 전혀 몰랐어요. 난 그런 걸 엄청 잘 파고들거든요. 스티븐의 사진들을 구해서 루 게릭 병이 진행 정도에 따라 그의 신체 각 부분에 어떻게 드러날 지를 분석했죠. 그리고 그걸 내 몸의 각 부분에 추적해 덧입히듯 연습했어요.”

제임스 마시 감독
“에디는 개략적으로 이 병의 4가지 다른 단계를 이해하고 내면화해야 했어요. 몸이 멀쩡할 때, 지팡이 하나를 짚을 때, 지팡이 두 개를 짚을 때, 그리고 휠체어를 탈 때죠. 그리곤 곧 목소리를 잃어요.”

에디 레드메인
“촬영은 시간 순으로 진행되지 않았어요. 단 하룻동안 여러가지 신체 상태를 표현해야 할 때도 많았죠. 첫날엔 캠브리지 배경을 찍고, 아침엔 건강한 호킹이 돼서 제인의 손을 잡고 잔디밭에서 빙빙 돌며 춤을 췄고, 점심 땐 지팡이 두 개를 짚은 호킹을 표현한 뒤, 오후엔 휠체어를 탔어요.”

펠리시티 존스
“에디의 연기의 디테일은 정말 대단했어요. 그는 불가능에 가까우리만큼 꼼꼼하고 세심했고, 열정적이었고, 호킹이라는 인물 속으로 완벽히 녹아 들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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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 호킹(에디 레드메인)과 제인(펠리시티 존스)의 결혼식 장면과 실제 호킹과 제인의 결혼식 사진.

 

‘사랑에 대한 모든 것(The Theory of Everything)’ 영화 리뷰
호킹이 풀어낸 첫 사랑의 수식(數式)

 

호킹의 첫 사랑 아내 제인 역의 펠리시티 존스, 스티븐 호킹, 호킹 역의 에디 레드메인.
호킹의 첫 사랑 아내 제인 역의 펠리시티 존스, 스티븐 호킹, 호킹 역의 에디 레드메인.

“축하해! 잘 해냈어, 친구. 자네가 자랑스럽네!”

22일(현지시각) 열린 올해 미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에디 레드메인(33)이 남우주연상을 탔을 때, 천체물리학자 스티븐 호킹은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가장 먼저 축하인사를 보낸 이들 중 한 명이었다. 레드메인은 영화 ‘사랑에 대한 모든 것’(감독 제임스 마시)에서 루 게릭병으로 고통받는 젊은 호킹을 연기해 오스카의 영광을 안았다. 캠브리지대에서 예술사를 전공한 그는 역시 캠브리지 출신인 호킹의 후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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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킹은 영화 개봉 전 영국 런던의 워킹타이틀 사무실에서 먼저 영화를 본 뒤 눈물을 흘렸다. 영국 개봉 뒤인 11월엔 “영화를 보며 때때로 나는 그가 나였던 것처럼 느껴졌다”며 레드메인의 연기에 극찬을 보냈다. 자신이 아내 제인을 만나 사랑에 빠졌던 캠브리지대의 5월 무도회 장면을 촬영할 때는 직접 현장을 방문해 레드메인을 만나기도 했다. 레드메인도 수상 소감에서 “이 상은 루게릭병과 싸우고 있는 세상 모든 사람들의 것”이라고 했고 호킹과 가족에게 특별한 감사 인사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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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대한 모든 것’은 호킹의 케임브리지대 물리학과 시절부터 그의 학문, 사랑, 투병 과정을 담담히 따라가는 영화다. 첫 아내였던 제인(펠리시티 존스)을 만나고, 학문적 성취와 꿈같은 사랑이 모두 손안에 들어온 것 같던 때 병마가 그를 덮친다. 레드메인은 육체의 한계를 뛰어넘을 듯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 몸으로 연기한다. 루 게릭병 전문의·환자·가족들과 만나 조사했고, 병의 진행 정도에 따른 말하기와 운동 능력을 차트로 만들어 놓고 장면마다 다르게 표현했다. 개봉 때부터 해외 평단은 그에게서 ‘나의 왼발’(1989)로 오스카를 거머쥐었던 대니얼 데이 루이스를 발견하며 열광했다. 그는 첫번째 주연작인 이 영화로 골든글로브와 영·미 아카데미상 등 수많은 남우주연상을 휩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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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메인은 런던의 부촌인 첼시에서 자랐다. 아버지는 은행가, 어머니도 사업가. 5살 때부터 연기에 소질을 보였지만 이튼 칼리지를 거쳐 캠브리지대에 진학해 예술사를 공부했다. 정식 연기 교육을 받지 않고도 20대 초반부터 연극과 뮤지컬 배우, 모델로 활동했다. 그의 어머니는 한 인터뷰에서 “에디의 21살 생일날 친구 중 한 명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에디를 보고 싶다’고 했던 말이 기억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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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이 영화는 작년 12월 10일 개봉해 관객 약 27만6000명이 들었다. 현재는 부산 영화의전당이나 일부 CGV극장에서 ‘아카데미 특별전’ 등 행사를 통해 상영되고 있다.

이태훈 기자

[버드맨] 날 선 블랙 코미디 당의정 속, 갸냘픈 실존에 보내는 연민

” 이 모든 걸 한꺼풀 들춰 그 속을 들여다보면, 사랑받으려 몸부림치는 존재의 가벼움, 갸냘프고 취약한 실존에 대한 연민을 만난다. 극중 리건은 레이먼드 카버의 시와 소설을 빌려 말한다. “이 세상에서 사랑받는 존재라고 느끼고 싶었다”고. “난 왜 항상 사랑을 구걸해야 하느냐”고. “


‘버드맨’ 아카데미 작품상, 감독상, 촬영상, 각본상 수상. 올 아카데미의 진정한 승자. ^^ 

‘바벨’ ’21그램’ ‘아모레스 페로스’의 알레한드로 곤살레스 이냐리투 감독, 원조 배트맨 마이클 키튼 주연의 영화 ‘버드맨’은 지금(23일 오전 11시25분 현재) 진행 중인 올해 미 아카데미 시상식의 최대 화제작 중 하나다. 이미 골든글로브 남우주연상과 각본상을 받았고, 아카데미에선 작품상·감독상·남우주연상·촬영상 등 9개 부문 후보에 올라 있다. 지난해 10월 개봉 때 미국에서 단 4개관에 제한 개봉해 42만 달러를 벌어들였다. 개봉 주말 극장당 매출 2위 기록. 이후 스크린은 900여개까지 늘었고, 평론가들도 호평 일색이다. 평단과 관객이 미리 짠 듯 한 목소리로 칭찬하는 이런 영화는 흔치 않다.

지면용으로 고쳐 쓰기 전 리뷰 원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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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이 골디 혼과 찍은 어설픈 코미디를 싫어했다고 내가 당신을 사랑하지 않은 건 아냐. 당신은 늘 그런 식이야. 존경과 사랑을 혼동하지.”

      연극 프리뷰 뒤 찾아온 옛 아내는 여전히 냉정했다. 분장실 거울 앞에 앉은 전 남편은 왕년의 수퍼스타. 30년전 블록버스터 ‘버드맨’의 주연 톱스트였으나 속편 출연을 거절한 뒤 퇴물 배우가 된 리건(마이클 키튼)이다. 그는 남은 재산을 털어 레이먼드 카버의 소설을 뉴욕 연극 무대에 올리고 있다. 결혼기념일에 바람을 피우다 들켰다고 아내에게 식칼을 집어던졌던 미친 남자의 마지막 재기 기회다.

      일이 술술 풀릴 리 없다. 현실과 환상, 의식과 무의식이 뒤섞이고, 자의식 과잉의 인기배우 마이크(에드워드 노튼)가 끼어들어 혼란을 부추긴다. 설상가상 머릿 속 ‘버드맨’이 말을 걸기 시작한다. “니가 오리지널이야. 다른 광대들의 길을 닦아줬지. 들통나기 전에 여길 뜨자. 우린 왕년에 수천억달러를 벌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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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달 5일 개봉하는 영화 ‘버드맨’은 22일 오후(한국시각 23일 오전) 미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리는 제87회 아카데미상 시상식의 기대작이다. 이미 골든글로브 남우주연상과 각본상을 받았고, 아카데미에는 작품상·감독상·남우주연상·촬영상 등 9개 부문 후보에 올랐다. ‘21그램’ ‘바벨’을 만든 알레한드로 곤살레스 이냐리투 감독 작품이다.

      이냐리투는 영화에 달콤쌉싸름한 블랙 코미디를 다크초콜렛처럼 듬뿍 발라 놓았다. 키튼이 ‘왕년의 버드맨’ 리건 역을 맡은 건 과거 ‘배트맨’이었던 자신에 대한 자학 유머다. 리건은 “맙소사, 제레미 레너에게도 망토를 입혔어?”라고 묻는다. 배우들을 모조리 수퍼영웅으로 만드는 최근의 할리우드에 대한 조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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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것만 쫓는 관객도 풍자한다. “사람들은 피와 사랑과 액션을 좋아해. 수다스럽고 우울한 철학적 이야기 따위 비평가들의 거짓부렁이지.”

      딸(엠마 스톤)도 리건에게 진절머리를 낸다. “어차피 60대 백인 부자들이 정장 입고 시간 때우러 오는 연극이야. 아빠도 이 연극도 하나도 안 중요하거든. 아빤 블로그 싫어하고 트위터 무시하고 페이스북도 없잖아. 그건 그냥 존재가 없는거야!”

      이냐리투 감독은 치밀하게 시공간을 계산한 롱테이크로 관객의 시선과 두뇌를 장악한다. 살짝 현기증마저 느끼게 하는 광각 카메라는 스테디캠에 실려 연극무대 안팎을 이동하며 관객을 스크린 속으로 빨아들인다. ‘그래비티’로 이미 한 번 오스카를 거머쥔 촬영감독 엠마누엘 루베츠키의 솜씨다.

      이 모든 걸 한꺼풀 들춰 그 속을 들여다보면, 사랑받으려 몸부림치는 존재의 가벼움, 갸냘프고 취약한 실존에 대한 연민을 만난다. 극중 리건은 레이먼드 카버의 시와 소설을 빌려 말한다. “이 세상에서 사랑받는 존재라고 느끼고 싶었다”고. “난 왜 항상 사랑을 구걸해야 하느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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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냐리투는 배우의 자의식을 다룬 이 영화 속에 자신의 작가적 자의식도 투영했다. 알파벳 순서로 글자가 깜빡이는 오프닝은 장 뤽 고다르의 ‘미치광이 피에로’(1965)의 오마주다. ‘배트맨’ 키튼을 버드맨으로 캐스팅한 것 역시 배우의 전작 이미지를 영화 속에 섞어 넣는 고다르의 수법이다. 영화 전체가 ‘원샷 원시퀀스’인 듯 천의무봉하게 이어지는 롱테이크 기법도 많은 작가주의 감독들에게 빚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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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히려 이 영화는 이냐리투가 겸손을 잃지 않았기에 더 빛난다. 그는 고대의 황금보물을 녹여 새로운 신상(神像)을 창조하는 장인(匠人)처럼 지식과 기법을 이물감없이 녹여 넣었고, 스릴러적 재미와 신랄한 유머로 세공해 새로운 현대의 걸작을 주조했다. 평단과 관객이 드물게 일치된 찬사를 보내는 데는 분명 이유가 있다. 경이로운 119분이다. 청소년관람불가.

/이태훈 기자

[이다(Ida)] 신과 역사, 인간과 욕망에 관해 묻는 이미지의 향연

이 영화는 신과 역사, 인간과 욕망에 관해 묻는 우아한 이미지들의 향연이라 할 만하다. 덜어내도 꽉 차 있고, 절제해도 넘쳐 흐른다. 

★★★★

폴란드에서 온 이 흑백 영화는 두 개의 질문으로 압축된다.

고아원에서 자라 정식 수녀 서원을 앞둔 안나(아카타 트루제부초우스카)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피붙이 이모(아가타 쿠레샤)를 만나고 오라는 수녀원장의 명령에 처음 수녀원 밖으로 나선다. 이모는 ‘피의 완다’로 불리며 혁명의 적들에게 사형을 선고했던 스탈린 공포정치 시대의 판사. 안나는 자신이 본래 유대인이고 본명은 ‘이다’이며, 부모는 유대인 말살정책이 서슬퍼렇던 독일 점령기에 이웃에게 살해됐음을 알게 된다. “시신이 묻힌 곳이라도 수소문해 찾고 싶다”는 안나에게 이모가 묻는다. “그러다 신이 없다는 걸 발견하면 어떻게 할래?” 신과 역사에 관한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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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번째 질문은 안나 본인의 몫이다. 이모와 함께 부모의 흔적을 쫓던 중 우연히 만난 유랑악사, 집시의 피가 섞인 그와 하룻밤을 보낸 뒤 “그단스크에 공연이 있으니 함께 가자”는 남자에게 안나는 묻는다. “그 다음엔?” “해변도 산책하고.” “그 다음엔?” “강아지를 한 마리 살까? 결혼해서 아이도 낳고 다른 사람들처럼 평범하게 살자.” 안나의 입가에 알듯 모를듯 가벼운 미소가 실린다. 지금 여기가 아닌 다음을 묻는 건, 욕망과 인간에 관한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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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일 개봉하는 파벨 포리코브스키 감독의 이 아름다운 흑백영화는 유럽과 미국의 각종 영화제에서 56개 영화상을 탔다. 올해 미국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과 촬영상 후보로 올라 있다. 영화는 독일(프로이센)과 소련(러시아) 두 강대국 사이에 끼어 고통받은 폴란드의 피로 물든 역사, 1960년대의 한 때를 배경으로 한다.

하지만 영화 자체로 이뤄낸 미학적 성취만으로 그 역사와 무관한 관객의 마음까지 홀랑 사로잡는다.

잉마르 베리만을 연상시키는 꽉찬 구도의 흑백 화면, 베르메르같은 플랑드르 화가들을 떠올리게 하는 ‘빛’을 다루는 놀라운 솜씨…. 곧게 뻗은 길, 평평한 들판, 수직으로 선 나무같은 폴란드의 자연 속에서 사람은 늘 비스듬하고 위태롭다. 카메라는 인물의 표정을 잡을 때도 앙감과 부감을 부여해 사물과의 관계 속에서 심리를 드러낸다. 신과 욕망, 역사와 인간에 관한 무게있는 질문과 대답이 체스말처럼 정교하게 오가지만 윽박지르는 법 없이 정갈하다.

‘안나’ 혹은 ‘이다’의 눈동자는 잉크를 빨아들인 백지처럼 영화 막바지로 갈수록 더 크고 검어진다.

벽에 고정된 그림처럼 완고하던 화면의 구도는 ‘이다’의 마지막 발걸음에 이르러서야 그 움직임을 따라 흔들리기 시작한다. 그 흔들림에 동참할 때, 관객은 비로소 어린 견습수녀 이다의 내면에 울리는 깨달음에 연결된다. 낯설고 황홀한 경험이다.

이태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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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심 가득 시네토크 (10) 폭스캐처] ‘아버지’로 인정받고 싶었던 재벌 2세의 비뚤어진 내면

☞폭스캐처
 
 
 미국의 재벌가 상속자 존 듀폰(스티브 카렐)은 88서울올림픽 출전 예정 레슬링 선수 마크 슐츠(채닝 테이텀)를 자신의 레슬링팀 ‘폭스캐처’로 불러온다. 마크에겐 레슬링 국민영웅인 형 데이브(마크 러팔로)의 그늘을 벗어나 자립할 기회. 하지만 듀폰의 예측불가능하고 기이한 행동이 이어지고, 형 데이브가 코치로 합류하면서 관계의 균열이 시작된다. 1996년 발생한 실제 살인사건을 다뤘다. 듀폰 역 스티브 카렐의 연기가 특히 놀랍다. 이 영화는 감독 베넷 밀러에게 작년 칸영화제 감독상을 안겼고, 올해 미 아카데미 5개 부문 후보에 올라 있다.

 

여우는 잡으셨는가
관객이 이 영화를 꼭 봐야 할 다른 이유라면 역시 스티브 카렐이겠지? 올해 오스카 남우주연상은 ‘사랑에 대한 모든 것’의 스티븐 호킹(에디 레디메인)이 아니라면 카렐일 듯.

냉탕과 열탕 사이
그럼 그럼. ^^ 미드 ‘오피스’ 사장님이나 영화 ‘앵커맨’ 때부터 연기 잘 하는 건 익히 알았지만. 찌질하지만 귀여운 구석이 있달까? ㅎㅎ

여우는 잡으셨는가
혹시 동아시아 어느 나라 그 재벌 회장님도 스타워즈 ‘요다’를 닮아 귀엽다고 생각? ㅋㅋㅋ

냉탕과 열탕 사이
마자 마자, 귀여우시지 ㅋㅋㅋ 이 영화 속 카렐이 연기한 존 듀폰도 ‘난 관계를 맺고, 인정도 받고 싶어요, 돈을 이정도 쓰면 그것도 되겠죠?’ 이런 느낌이랄까. 게다가 묘한 퀴어 코드까지 풍기면서….

여우는 잡으셨는가
분장한 매부리코를 슬쩍 쳐들고 쏵 쏘아볼 때의 그 서늘함이란…. 정말 뭐라 형용하기 어려운 연기야.

냉탕과 열탕 사이
화낸다, 기뻐한다, 이렇게 단정지을 수가 없어. 감정의 결이 정말 촘촘해서.

여우는 잡으셨는가
그 말이 다 맞는데 어떤 말로 묘사해도 그 이상이지.

냉탕과 열탕 사이
맞아ㅋㅋ 이런 게 좋은 연기인 것 같아. 100m 전력질주를 하는데 마치 표정은 산책을 하는듯 자연스럽고 편안한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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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진심은 단순한 그릇에 담길 때 더 빛난다: 다르덴 형제 감독

 

진심은 단순한 그릇에 담을 때 더욱 빛난다. 투박한 다완에 담긴 차향이 더욱 깊듯. 벨기에 출신의 리얼리즘 거장 다르덴 형제 인터뷰. 

탐심을 부르는 재화가 돼버린 일자리, 소외된 노동, 불안과 두려움 속에도 굴하지 않는 인간성에 관한 세련되고 정교한 영화 ‘내일을 위한 시간’은 올해 첫 아트버스터라 할 만하다.

칸에서 황금종려상을 두 번 받은 이 형제 감독은 “연대야말로 사람을 더욱 사람답게 하는 가치”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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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피에르(64)와 뤽 다르덴(61) 형제.

 

“타인과 손 잡을 때 우린 또 한발 나아가죠”
이태훈 기자

[새해 첫 아트버스터 ‘내일을 위한 시간’ 감독 다르덴 형제 인터뷰]

리얼리즘의 巨匠 다르덴 형제… 소규모 개봉, 벌써 3만관객 모아
“가만히 있으면 ‘연대’ 안생겨… 내가 변해야 주변도 변하죠”

황금종려상 두 번, 심사위원대상 한 번, 각본상 한 번, 주연상 두 번. 영화감독 장 뤽 다르덴(64)과 피에르 다르덴(61) 형제가 현재 세계 영화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이해하려면, 좀 남우세스러워도 이들의 영화가 칸 영화제에서 받은 상의 목록을 훑는 것이 가장 빠르다. 다르덴 형제의 영화는 비토리오 데 시카, 로베르토 로셀리니 등 리얼리즘 거장들의 전통 위에 서 있다. 불법 이민, 범죄, 빈민 문제 등 현대사회의 아프고 약한 부분을 세련되면서도 집요하게 파고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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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 초 국내 개봉한 형제 감독의 영화 ‘내일을 위한 시간’은 상영관 수가 얼마 되지 않지만, 3만명 넘는 관객을 모으며 새해 첫 ‘아트버스터’가 됐다. 영화는 직장 동료들이 보너스를 포기해줘야 복직할 수 있는 상황에 처한 여성이 투표를 앞둔 동료들을 한 명 한 명 찾아다니며 호소를 이어가는 이야기. 주연 마리옹 코티아르는 올해 미국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라 있다. ‘라비앙로즈'(2007)의 에디트 피아프로 한 차례 오스카를 거머쥔 그 여배우다. 다르덴 형제는 본지 인터뷰에서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 함께라는 것, 다른 사람과 마음을 나누고 손을 맞잡을 때 더 나은 인간이 된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고 했다. 인터뷰는 본지가 보낸 질문에 따라 부산국제영화제 이수원 프로그래머(유럽·아프리카 담당)가 프랑스어 전화 통화로 진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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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첫‘아트버스터’가 된 다르덴 형제 감독의 영화‘내일을 위한 시간’의 주연배우 마리옹 코티아르(가운데)는 이번 영화로 두 번째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노린다. 지난해 5월 칸 영화제에 참석한 장피에르 다르덴(오른쪽)과 뤽 다르덴(왼쪽) 감독이 코티아르에게 키스하는 모습. /AP뉴시스

―스타 배우 출연이 드물었는데 마리옹 코티아르를 기용했다.

“코티아르는 지극히 예민한 배우다. 그 눈을 보면 그곳에 있는 듯하면서도 사실은 그곳에 있지 않은, 미묘한 뉘앙스를 느끼게 된다. 그녀의 영화 속 역할인 산드라가 바로 그렇다. 그 눈을 들여다보다 그 속에 빠져들어 길을 잃을 수도 있다, 하하.”

―상업영화의 홍수 속에 ‘사회적 연대(連帶)’를 강조하는 당신의 영화는 낯설다. 그런 가치는 지나간 시대의 유물 아닌가?

“연대는 공짜로 주어지지 않는다. 자신 안에 매몰된 채 가만히 있으면 모두 괜찮아지리라 여기는 것은 해결책이 아니다. 사람들은 일자리를 통해 사회 속 자신의 위치를 갖는다. 요즘은 일자리가 줄어들며 모두가 탐내는 대상이 됐다. 심약한 그녀가 동료들을 찾아가 설득하는 과정은 무척 고통스럽다. 하지만 그녀가 조금씩 변하며 주변 사람들도 변화한다. 처음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연대’가 생겨나는 것이다.”

―결말은 이민자 문제와도 연결돼 있다. 유럽은 사실 저임금 이민 근로자들의 희생을 기반으로 사회를 유지하고 있지 않나?

“영화 속 인물들은 남성, 여성, 유색인종, 이민자 같은 특정 계층을 대변하지 않는다. 많은 인물이 본업 외에 부업을 한다. 공장에서 퇴근한 뒤 자동차를 수리하거나, 도로 공사판에서 일하거나, 야채를 나른다. 즉, 모두가 사회·경제적 두려움과 불안을 안고 산다. 그런 불안 속에선 누구나 내 이익을 앞세우게 된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의견을 바꾸는 이들이 생겨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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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일자리를 위해 당신의 보너스를 포기해달라’는 산드라의 호소가 결국 감독이 관객들에게 하고 싶은 말인가?

“관객도 ‘내 입장이 되어봐 달라’는 산드라의 이야기를 스스로에게 묻길 바란다. 산드라의 입장이 돼보고 산드라가 만나는 동료들도 돼보고, 자신은 연대할 것인지 생각해보길. 그리고 끝날 무렵에는 영화 속 산드라의 동료들처럼 생각을 바꾸게 되길 희망한다.”

 

[인터뷰] ‘국제시장 막순이’ 스텔라 최 “진짜 입양아냐고요? No, 덕수같은 아버지 있어요”

영화 국제시장의 클라이맥스 이산가족 상봉 장면에서 천만 관객을 울린 막순이, 재미교포 2세 배우 스텔라 최를 인터뷰하다. 다들 제일 궁금해했지만 아무도 인터뷰 못했던 이. ^^
제작사도 컨택을 잃어버려서, 혼자 수소문해 찾아내느라 힘들었다. ㅋ

외조부모가 평양 출신에, 베트남에 돈 벌러 갔다가 사이공에서 만나 결혼한 부모… 전화로 인터뷰하면서 깜짝 깜짝 놀랐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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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입양아냐고요? NO, ‘덕수’ 같은 아버지 계세요”

[영화 ‘국제시장’ 막순이役, 스텔라 최 인터뷰]

돈 벌러간 월남서 만난 부모,평양 출신인 외조부모 등… 가족사, 영화 내용과 비슷

UCLA 졸업 후 댄서로 활동 “영화 출연, 엄마 환호하셨죠”

 

“그런 얘기 많이 들었어요. 근데 우리 부모님 멀쩡히 살아계시다니까요, 하하하.”

영화 ‘국제시장’에서 미국에 입양됐다 이산가족 프로그램을 통해 오빠 덕수와 상봉하는 막순이를 연기했던 재미교포 2세 스텔라 최(41)는 “영화를 본 많은 사람들이 당신이 진짜 입양아 출신이냐고 묻는다”고 하자 수화기 너머에서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덕수와 막순이의 상봉 장면은 누구나 인정하는 영화 국제시장의 클라이맥스. 이 장면에 마치 다큐멘터리같은 감동을 불어넣은 것이 최씨의 눈물 연기였다. 15일 새벽(현지시각 14일 오전 9시)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집에서 전화를 받은 최씨는 “한국 영화에 참여할 드문 기회를 얻게 되고, 출연한 영화가 이렇게 큰 히트작이 되고. 마치 동화 속 이야기같다. 지금도 믿어지질 않는다”고 했다. 로스앤젤레스에서 나고 자란 최씨는 한국말을 못 한다. 최씨가 국내 언론과 인터뷰한 것도 처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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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 초 미국 LA 한 극장에서 영화‘국제시장’을 본 스텔라 최. 최씨는“우리 가족도 1980년대 초 이산가족 찾기 TV 프로그램을 LA에서 보며 눈물지었던 기억이 있다”고 했다. 이 영화의 영어 제목은‘Ode to My Father(아버지를 위한 송가)’. /스텔라 최 제공

 

“UCLA에서 커뮤니케이션을 전공했지만 대학 졸업 뒤 오래 꿈꿨던 댄서 일을 시작했어요. 폴 메카트니 투어의 댄스팀으로 2년쯤 함께 하기도 했죠. 광고모델로 월마트, 웰스파고 등의 CF에 출연했고, 치어리더 영화에 단역으로 출연한 적도 있고. 하지만 정극 연기를 한 지는 오래됐어요.” 스텔라는 지난해 친구들과 재미로 찍은 ‘당신 무슨 아시안이야?’라는 제목의 동영상을 유튜브에 올렸다. 아시아계에 대한 미국 내 편견을 코믹하게 조롱하는 내용. 꽤 인기를 끌었던 이 동영상을 국제시장의 제작사인 JK필름이 보고 작년 3월 막순이 역을 뽑기 위한 미국 오디션에 최씨를 불러냈다. “입양된 여동생이 오빠를 TV로 만나는 연기만 했기 때문에 이렇게 큰 영화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어요. 알았다면 엄청 긴장했을텐데요.” 세번쯤 서로 다른 톤으로 눈물 연기를 해 보인 뒤 잊고 지냈는데 다섯달쯤 뒤 JK필름이 ‘배역을 맡아달라’고 전화를 걸어왔다. “진짜 엄청나게 흥분했죠. 어머니께 ‘한국 영화에 출연하러 한국에 간다’고 했더니 평생 내게 일어난 어떤 일보다 더 기뻐하셨어요.”


막순이를 뽑는 오디션에는 200여명의 미국 교포 배우들이 참여했다. ‘왜 당신이 캐스팅된 것 같으냐’는 질문에 최씨는 “영화 내용이 우리 가족사와 겹치는 부분이 많아 몰입할 수 있었고, 그런 내 순수한 감정 표현을 잘 봐주신 것 같다”고 했다. “외조부모가 평양 출신이신데 1941년 중국으로 건너가 일하던 중 어머니를 낳았다고 들었어요. 해방 뒤엔 외할아버지가 서울에서 영화 제작을 했는데 잘 안됐던 모양이예요. 베트남전이 일어났을 때 어머니가 베트남 주재 한국대사관에서 일하셨데요. 군인들이나 상사 주재원들처럼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베트남으로 가신 거죠. 그리고 사이공에서 지금의 아버지를 만나 결혼해 60년대말 미국으로 이민오신 것으로 알아요.” 최씨는 “주변에 미국에 입양된 친구들이 꽤 있어서 상황을 더 쉽게 이해하고 감정이입할 수 있었다”고도 했다. “입양 뒤 겪은 일들은 서로 다르지만, 대부분 낳아준 한국 부모를 찾고 싶어해요. 자신이 태어난 나라를 늘 궁금해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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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시장’에서 미국에 입양된 막순이가 TV 화면으로 오빠 덕수를 만나는 장면. /CJ엔터테인먼트 제공

 

국제시장 속 덕수의 삶, 자식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 부모 세대의 모습은 미국 교포들에게도 마찬가지다. 그녀의 아버지(81)는 영어도 잘 못 하는 상황에서 자식들을 키우기 위해 할 수 잇는 모든 일을 했다. “주유소에서 아침 8시부터 저녁 7시까지 주 6일 일했다. 일요일 하루 쉬는 날도 출근하기 일쑤였다. 그렇게 억척스럽게 돈을 모아 주유소를 마련했고 딸 셋을 키우셨어요. 지금도 어렸을 땐 아빠 얼굴 본 기억이 별로 없어요.”


최씨는 이달 초 미국 극장에서 국제시장이 개봉된 뒤 LA코리아타운의 극장으로 어머니와 두 언니와 함께 영화를 보러 갔다. “극장이 눈물바다였어요. 영화를 보고 나오는데 다들 하도 울어서 눈이 빨갛게 된 거예요. 포스터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는데, 관객들이 저를 알아 보고 몰려와서 같이 사진을 찍자고 해서 막 난리가 났었죠.” 최씨는 “한 할머니는 ‘내가 바로 흥남철수 때 메러디스 빅토리 호를 탔던 피란민’이라며 제 손을 잡고 한참을 우셨다”고도 했다.

최씨는 “한국에서 이 영화를 1000만명이 봤다는 뉴스를 듣고 깜짝 놀랐다”고도 했다. “우리는 지금 모든게 풍부한 시대를 살잖아요. 한국은 지금 세계 무대에서 힘있는 나라가 됐고. 그런 작은 나라가 여기까지 오려면 어떤 일을 겪었을까. 어떤 역사가 있었을까. 그런 부분에 대해 나이 든 세대는 자기들 이야기를 보고 싶고, 젊은 세대는 이전 세대의 경험을 더 깊이 이해하고 싶었던 것 아닐까요. 젊은 세대에게 이 영화를 본다는 것은 깊은 감사의 표현이기도 할 거예요.”
최씨는 “영화를 본 뒤 어머니가 내게 굳이 하지 않았던 이야기, 내가 물으려 하지 않았던 이야기들을 많이 나누게 돼 가장 기쁘다”고 했다. “아버지가 몸이 좀 불편해서 극장에 못 가세요. DVD가 나오면 꼭 가족이 다 모여서 한 번 더 영화를 볼거예요. 그러면 부모님과 더 많은 얘기를 나눌 수 있게 될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