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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생각보다 훈훈한 곳이다.

shallow depth of field

세상은 생각보다 훈훈한 곳이다.

옛날에는 카메라의 초점을 수동으로 맞춰야 했지만 요즘은 모두 자동으로 되어 있어서 특별한 목적이 아니라면 굳이 그런 수고를 할 필요가 없어졌다.

자동초점에서도 카메라의 조리개를 많이 열어주면 초점지점의 전/후는 초점에서 벗어 난다. 그걸 사진용어로 Shallow depth of field 라고 한다.

살아 가면서 세상을 보는 눈 역시 그와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세상에는 선과 악이 있으며 사랑과 증오, 화합과 갈등이 있다. 그 중 어디에 렌즈의 초점을 두느냐에 따라 세상에 대한 인식이 달라질 수도 있다.

그게 심하게 편의(偏倚:bias)되면 이분법의 잣대로 세상을 재단해 버린다. 사람은 지속적인 자극에 대하여 무뎌지는 경우도 있고 반대로 점점 더 예민해지는 경우도 있다.

그 중 스트레스는 점점 더 예민해지는 케이스에 해당된다. 아파트의 층간 소음으로 일어난 살인사건처럼 소음이 거슬려서 나중에는 그 소음이 굉음(轟音)이 되어 도저히 참을 수 없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엔 훈훈한 사연들도 많고 붙들고 같이 울고 싶은 사연들도 있다. 마음 씀씀이가 너무 고마워서다. 평생 정신장애를 앓던 70대 노인이 모은 돈 3,800만원을 사회에 환원해달라는 유언을 하고 별세를 하였다고 한다.

사회가 자신을 평생 돌봐줬다는 이유에서이다. 처지와 형편을 초월하여 감사할 수 있는 그 마음의 여유, 그게 어쩌면 득도(得道)의 경지가 아닐까 생각된다.

‘천지창조는 내가 태어나던 날 이루어졌다.’꽤 오래 전에 어느 책에서 읽었던 내용이다. 내 시야에 들어 오는 주위환경, 내가 들을 수 있는 자연의 소리, 내가 느끼는 기온, 내가 숨쉬는 공기, 내가 만나는 주위 사람들, 등등이 내 우주에 속한 것들일 것이다.

그런 우주에서 틀린 그림을 찾아 내듯이 사사건건 세상을 비난하는 글들을 인터넷에 연속적으로 올리는 사람도 있다. 자신이 선구자(先驅者)라고 착각을 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만한 공해도 없다. 주위 사람들을 피곤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지금이 심훈의 상록수 시대도 아니고 요즘 아이들 열살 만 되면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안다.

세상이 힘들고 지칠 땐 눈 들어 다른 곳을 보면 다소 안정이 된다. 20대 청년 소월의 시처럼 ‘예전엔 미처 몰랐던 것’들에서 답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봄 가을 없이 밤마다 돋는 달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이렇게 사무치게 그리울 줄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달이 암만 밝아도 쳐다볼 줄은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이제금 저 달이 설움인 줄은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Anything Thats Part of You

한여름의 편지.

갯벌2

한여름의 편지.

春 ◦ 夏 ◦ 秋 ◦ 冬, 여름은 젊은이들의 계절이다. 작열(灼熱)하는 태양이 그들의 열정과 닮았기 때문일 것이다. 방학이나 휴가시즌이 되기 때문에 젊은 날의 추억의 대부분은 여름과 연관이 있다.

그러나 노년에는 기온에 대한 적응력이 떨어지는 탓에 우선은 그 더위를 감내하기에는 체력이 달린다. 물리(物理)의 법칙은 물질에만 적용되는 게 아니라 인간의 마음에도 작용하는 것 같다. 여름에는 늘어지고 겨울에는 움츠러드니 말이다.

그럴지라도 물이 있는 계곡이나 파도가 넘실대는 바닷가에서 지난 날을 추억하는 것도 피서의 한 방법이 될 것이다. 계곡에서는 어렸을 때 천렵(川獵)을 하던 생각이 날 수도 있겠고, 해변에서는 멀리 수평선 넘어 에는 아련한 그리움이 있다.

아련한 그리움, 거기엔 뚜렷한 대상이 없다. 젊은 날의 꿈일 수도 있고, 또 지난 날들에 대한 아쉬움 등등 모든 게 섞여 있다. 미 동부의 해변은 대서양이기에 그 끝이 유럽의 어디쯤이 될 것이다. 유럽에서 살아 본적도 없으면서 그곳에 대한 그리움이 일어나니 그것도 묘하다.

보리밥 풋나물을 알맞추 먹은 후에
바위 끝 물가에 실컷 노니노라
그 밖의 일이야 부러울 줄이 있으랴.

윤선도의 시조이다. 당대엔 양반들이나 누릴 수 있는 피서방법이다. 종들은 땡볕에 나가서 구술 땀을 흘리며 일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달리 생각을 해 보면 이제는 모두 양반이 된 셈이다. 마음만 있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피서요령이 되니 말이다.

전에 한국에 갔을 때 친구가 우이동의 계곡에 있는 어느 식당에 안내를 했다. 물 가가 아니라 바윗돌로 징검다릴 놓고 실개천 가운데에 테이블이 마련되어 있었다. 음식이나 술 맛이 일품이었던 것은 당연하다. 풍류를 즐길 줄 아는 민족이기에 발상 역시 획기적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이곳 애틀란타 지역은 3개월째 가뭄이란다. 농작물에 피해가 심각하다는 뉴스를 보면서 이 정도의 더위는 감내해야 할 것 같다. 연일 섭씨 32도를 오르내리고 있다. 7/13/16

뜨거운 여름 날의 Daydream (白日夢).

curiosity

뜨거운 여름 날의 Daydream (白日夢).

낭만적인 여름이라면 우선 남태평양의 천혜의 경관이 떠오른다. 사람이 붐비지 않는 곳, 대개의 경우 그런 곳에는 여유로움이 있는 탓일 게다.

이 산중에서의 여름도 뭔가는 있을 법도 한데 아직 그걸 찾지 못하고 있다. 한 겨울엔 바람도 세차게 불더니 여름엔 너무 더운 탓인지 바람도 자취를 감추었다. 지도를 보고 가까운 호수를 찾아 갔다.

입구의 게이트(Gate)에서 거주자 외는 못 들어 간다고 한다. 7마일을 돌아 가면 호수에 들어 갈 수 있다는데 그런 수고까지 하고 싶지가 않아서 그냥 돌아 왔다.

죠지아는 디벨로퍼(Developer)들이 호숫가의 땅을 사서 주택단지를 만들고 주거안전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외부인 출입을 통제한다. 그런 이유에서 다른 곳 보다 집값이 더 비싸다. 죠지아는 지세가 험한 계곡이 많은 탓에 호수에 진입할 길은 많이 돌아가야 하는 경우가 많다.

초여름을 맹하(孟夏), 한여름을 성하(盛夏)라고 부른다. 요즘은 초여름부터 34도까지 올라 갔으니 그 구분도 애매하게 되었다. 하기야 한국의 삼한사온(三寒四溫)도 이미 옛날 이야기가 되었으니 지구 곳곳이 과거의 통계가 거의 유명무실해졌다.

그럼에도 사람이 늙어 가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 것 같다.

인터넷에 노년의 삶에 대한 좋은 글들이 많이 올라 온다. 그러나 형편과 처지가 다 다르니 그걸 따라 하기도 쉬운 일은 아니다. 어느 것은 너무 이상에 치우친 경우도 있고 또 어느 글은 신선이 되라는 주문도 있다. 나 같은 속물에게는 당치도 않은 말이다.

미국 노인들은 어떨까 하여 인터넷 서핑을 하여 보았다. 테네시에 사는 한 할머니의 글인데 ‘노년의 풍요로움은 어린아이와 같은 호기심에서 기인된다’는 내용이다. 삶에 바빠서 대충 지나쳤던 자연의 경이로움을 다시 관찰해보라는 조언이었다.

그의 공식을 대입해 보니 철마다 한가할 여유가 없다.
Keeps in busy..

한가지 원칙을 알면 그 적용 범위는 수 없이 많다. 남은 날들 중에서 오늘이 제일 젊은 날인데 다시 새로운 것으로 채울 수 있다면 그게 바로 노년의 풍요일 것이다. 6/29/16

갈증(渴症)에 대한 내 처방전.

Heineken

갈증(渴症)에 대한 내 처방전.

갈증은 체내에서 물이 필요하다는 신호이다.

다만 당뇨는 다음(多飮), 다뇨(多尿), 다식(多食)의 증상이 오기에 병의 근본적 치료가 필요 하다.

특별한 질환이 없음에도 갈증이 심하여 물배를 채우다가 소화장애를 겪는 사람들도 있다.

물을 하루에 2 리터 이상을 마시라는 주문도 있으나 물의 필요량은 그렇게 획일적인 것이 아니라 체질에 따라 다르다. 갈증을 느낄 때 필요량의 물을 마시는 게 본인의 세포에게 충실한 것이다. 물을 너무 많이 마시면 수독증(水毒症)이 생기는 경우도 있다.

문제는 물을 마셔도 갈증이 멎지 않는 경우가 있다. 주로 여름철에 그런 현상이 오게 되는데 내 경우는 맥주가 그 처방이다. 홀랜드 맥주인 하이네켄(Heineken)이 나에겐 맞는다. 알코올이 5.6%인데 쌉쌀한 맛이 다른 맥주보다 더한 것 같다.

물론 갈증이 멎는 이유를 과학적으로 설명을 할 수는 없다.

불치병환자들에게 어떤 처방을 내면 그게 과학적으로 증명 되었느냐는 질문을 하는 경우가 있다. 불치병이라는 말은 현대의학으로는 치료가 안 된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과학을 들이 댄다.

과학이란 우선 논리가 성립되어야 하고 그 과정을 증명해야 하며 어느 누구든 그 방법대로 실험을 하였을 경우 결과가 항상 같아야 한다. 미국 FDA에서 약품허가 조건이 67%의 효과가 있고 다른 부작용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면 허가 조건이 충족된다. 결국은 나머지 33%는 치료효과가 없다는 말이다.

민간요법을 무조건 배제하는 사람들이 있으나 불치병에서는 시도해 볼 필요가 충분히 있다. 우선은 경제적인 부담이 적고, 제약의 그 뿌리는 민간요법에서 시작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약학대학에서 약초학은 필수 과목이다.

약초에 관한 한은 인도가 세계에서 제일 권위가 있다. 그래서 탕제(湯劑)을 넘어선 아로마 요법까지 개발하였던 것이다.

병은 자신이 주치의가 되어야 하고 그 병에 대하여 스스로 practical한 자세로 세심한 관찰을 하여야 한다. 자신의 몸의 변화를 관찰해야 한다는 말이다. 어느 병이든 3주 이내에 몸의 변화가 없다면 그 치료법은 자신과는 안 맞는 치료법이다. (3주 이내에 완치가 되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더운 날씨에 건강에 유의 하시기를 바랍니다. 이곳은 오늘 기온이 34도입니다. 6/13/16.

반딧불이 찾아 왔네, 우리 산골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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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딧불이 찾아 왔네, 우리 산골에.

국민학교 때 유리병에 반딧불을 잡아 넣고 그 불빛으로 책을 읽어본 적이 있다. 학교에서 배운 형설지공(螢雪之功)을 흉내 내본 것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런 기질이 평생 연구원을 하게 만든 것 같다.

어제 밤에 금년 들어 처음으로 반딧불을 보았다. 옛 친구를 만난 만큼이나 반가웠으니 늙으면 애가 된다는 말이 여기에도 해당되는 듯싶다.

자연의 질서, 어찌 보면 그게 무언의 약속이라는 생각이 든다. 언제 다시 오겠다는 언질은 없었지만 매년 그 때가 되면 기다려지는 것들이 계절에 따라 있다. 어제 밤에 만난 반딧불도 그 중 하나이다.

서울 태생들은 어렸을 때의 친구들을 만나면 대부분 옛날 거리나 극장이나 백화점 위주로 이야기를 하지만 나 같은 촌놈들은 냇가에서 고기를 잡던 이야기나 저수지에서 수영하던 이야기, 한 여름 우물에 넣어 두었던 수박 먹은 이야기 등등이 전부다.

요즘은 자연환경에 대한 관심도가 높아졌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서로 공유할 수 있는 추억거리가 있다는 것 그보다 더 친밀감을 주는 것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촌놈이라는 별칭이 더 정겹다.

그럼에도 한국에 있을 땐 양식집에서는 촌놈 소리를 안 들으려고 좀더 세련된 연출을 하려 들기도 하였었다. 그러나 미국에 와서 살아 보니 다른 민족의 음식이나 풍습을 모르는 게 창피할 이유가 하나도 없다. 민족이 다르니 당연한 것이고, 물어 보면 또 친절히 알려 준다. 또 그런 걸 통달했다고 해서 더 세련된 것은 물론 아니다.

미국에 처음 왔을 때는 레스토랑에 가면 음식주문 하는 게 고역이었다. 메뉴를 보고 음식을 주문하면 빵은 soft를 원하느냐 hard를 원하느냐, 고기는 well-done이냐 medium이냐, 술은 어느 것을 원 하느냐, 수프는? 디저트는? 음료는? 등등 말도 짧지만 무엇이 내 입에 맞는지를 알 수 없으니 난감했었다.

그 촌놈에게 어제 반딧불이 찾아 온 것이다. 어찌 보면 서산 갯마을의 그 반딧불과도 같고, 아닌 것도 같은데 원산지가 어디였든 그게 무슨 문제랴. 반가운 마음이 더한데. ㅎㅎ 6/3/16

‘육목단’은 벌써 지고 없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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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목단’은 벌써 지고 없는데,

나는 조영남의 노래를 좋아한다. 장사익이나 조용필처럼 감정이입(感情移入)을 과장되게 연출하지 않아서 듣는데 부담스럽지 않은 이유에서 일 것이다. 그의 노래 중 ‘모란동백’을 최고로 친다.

그가 어느 콘서트에서 ‘화투를 좋아하다가 쫄딱 망했다’고 했단다. ‘조영남의 대작’이라는 가사 제목을 보고 처음에는 대작(大作)인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라 대작(代作)이라는 말이었다.

화가가 조수를 쓸 수도 있겠지만 그의 변명처럼 ‘자신의 원본을 사진 찍어서 보내며 이렇게 그려라’하였으니 내 작품이라 한다면 그건 수 많은 화가들을 모욕하는 말이다. 그림이나 서예, 조각 등등에서 위작(僞作) 논란이 일어 나는 것은 그 작품 속에 작가의 혼이 배어 있지 않기 때문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흔히 예술(藝術)을 서양의 Art에 대한 정의를 이용하여 설명을 하지만 굳이 그럴 필요는 없다. 이유는 한자를 풀면 그 속에 해석이 따라 오기 때문이다. 한자 예(藝)나 술(術)은 둘 다 재주를 의미한다.

학(學)은 이론만으로도 가능하지만 술(術)은 반드시 실존적(實存的)이라야 한다. 그래서 의학(醫學)에서 임상(臨床)이 없으면 의술(醫術)이 될 수 없고, 반대로 병을 치료 했으나 이론적 설명을 할 수 없는 경우엔 의술(醫術)일 뿐 의학(醫學)이라 말 할 수 없는 경우도 있다.

바느질이나 수 놓는 것을 ‘한 땀, 한 땀’이라는 표현을 쓴다. 그 만큼 단숨에 머리에 각인되는 표현도 없을 것이다. 그게 우리말의 위대함이다.

작가의 한 땀 한 땀이 배어 있는 작품에 의해서 사람들이 감동할 수 있는 동기부여를 하는 것이 예술이라는 게 내 해석이다.

신(神)은 한 사람에게 열 가지 재주를 주지는 않는다. 미국 벤자민 프랭크린은 발명가이며 정치가, 저술가였으나 그런 경우는 극히 드물다. 그런 탓인지는 알 수 없으나 옛날의 예술가들은 경제적으로 상당히 곤궁 하였었다. 그 재주를 돈으로 바꾸는 재주가 없었던 탓이다.

화가나 작곡가의 작품은 사후(死後)에 장사꾼들에 의하여 값이 폭등하였다. 돈 버는 재주가 그들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예를 든다면 클라식 음악의 경우 작품번호 옆에 그 음악의 분위기에 걸 맞는 ‘월광’이나 ‘운명’처럼 부제를 달아서 일반인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연애를 할 때는 누구나 다 시인이 된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실연을 당했을 때가 시인이 될 확률이 더 많다. 시궁이후공론(詩窮而後工論)이라는 말이 있다. 시인은 곤궁할 때 좋은 시가 나온다는 말이다. 시인들은 이 말을 별로 안 좋아하지만 어려운 환경에서 옥죄어 오는 고뇌는 좋은 환경 속에서의 인위적인 고뇌와는 그 차원이 다르다.

조씨의 그림을 산 사람들은 예술적인 감각이전에 유명인의 그림이니 후에 돈이 될 듯싶어서 산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런 경우라면 오히려 전화위복이 될 수도 있다. 대작을 해 준 사람을 찾아 가서 화투를 이용하여 작가가 의도하는 대로 그림을 그려 달라고 하는 것이다.

그 두 그림을 나란히 걸어 놓고,
“이쪽은 조영남의 1억짜리 그림, 이 쪽은 대작화가의 4억짜리 그림”

나이 60이면 그 나름대로의 화풍이 분명히 정립되어 있을 것이다. 그가 무명화가라 하지만 돈 버는 재주가 없을 뿐이지 그림까지 못 그리는 것은 아닐 테니 말이다. 돈이 인간의 품위를 정하는 잣대가 되는 세상이라서 그게 나를 슬프게 한다. 5/30/16

그 사랑, 언제라도 결코 늦지 않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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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언제라도 결코 늦지 않으리.

미국 버지니아주의 한 양로원에서 만난 팔순의 두 노인이 결혼을 했다. 사랑하는 사람과 노년을 함께 보낸다는 의미인 해로(偕老), 이 신혼부부가 그 해로를 위하여 결혼을 하는 것이다. 자손들과 동료 환우들의 축복 속에 성대히 치러졌다고 한다.

미국의 전통적인 결혼 풍습처럼, 그러나 자동차 대신 휠체어 뒤에 깡통과 Just Married(지금 막 결혼했음)이라는 태그를 달고 새 출발을 시작했다. 젊었을 때라면 차의 속도에 따라 캉통 소리도 요란하고 지나가는 차들의 축하 Honk(크랙숀) 소리도 요란 했겠지만 지금은 조용히, 그러나 가슴 속의 그 열정은 어느 신혼부부 못지 않았을 것이다.

흑백처리를 한 사진은 그들이 비록 휠체어에 앉아 있지만 젊은 날의 신혼 분위기로 치환하는 것 같다. 어린 아이들이 동무가 필요 하듯이 노년에도 마찬가지이다.

한국에서 노인이 결혼을 한다고 하면 대부분 뜨악한 표정으로 노망(老妄)이 든 게 아닌가 걱정을 하거나, 돈이 좀 있는 집의 자식들은 유산상속에 손해를 안 보려고 갖은 궁리를 한다. 디조의 별별다방에 그런 사연이 있다.

미국에서는 백만장자가 아닌 소시민들도 노년에 재혼하는 경우도 많다. 백만장자는 손녀 뻘 되는 여자와 결혼 한다는 기사도 종종 올라 온다.

결혼에서 가장 큰 축복은 가족들의 축복이다. 한국에서 노년의 결혼은 그런 축복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조선일보의 ‘검은 머리 파뿌리’ 제하의 기사를 보니 그렇다.

미국 사람에게 한국인의 효도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 자기들은 이미 자식이 열 살이 될 때까지 효도를 다 받았다고 한다. 키우는 재미를 효도로 환산한 말이다.

요즘 경제적인 이유에서 아이를 안 낳는다고 하지만 옛날에는 ‘지 먹을 건 가지고 나온다’며 아이가 생기는 대로 낳았었다. 그 때는 자식이 있든 없든 다 어려웠었다.

한국에서는 대부분 자식 키우느라고 노후대책을 세우지 못했다고 한다. 우선 그런 개념에서는 자식이 서운하게 하면 더 괘씸한 생각이 드는 것이다. 미국 사람들처럼 열 살까지 효도를 다 받았다고 치고 현실적인 대안을 찾는 게 더 현명할 것이다.

기대수명이 늘어나다 보니 60대에 사별을 하면 근 30여 년을 혼자 살아야 한다. 효자 자식 열 보다 마누라/영감이 낫다는 말이 있다. 미국에서는 휠체어를 타고도 결혼을 하는데 아직 지팡이도 필요치 않은 분들이라면 Go for it !!! 5/26/16

A Love Until The End Of Time.

5월은 채워지는 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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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은 채워지는 달이다.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 내고
추억과 욕정을 뒤섞고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

 

엘리옷(T. S. Eliot)의 시 ‘The Waste Land’ 중의 일부이다. 이 시 덕분에 사월은 ‘잔인한 달’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이 시를 뒤집어 보면 ‘사월의 찬미(讚美)’라는 게 내 생각이다.

어찌 되었든 사월은 그렇다 치고, 나는 ‘오월은 채워지는 달’이라 부르고 싶다. 내가 아무런 수고를 하지 않아도 산과 들에는 푸른 초목으로 채워지고 그녀의 시에서 나오는 라일락뿐만이 아니라 수 많은 종류의 꽃들이 곱게 피어 나니 그만한 횡재도 없다.

자연은 그 땅의 주인이든, 지나가는 과객(過客)이든 간에 차별을 두지 않고 그 속살을 보여 준다. 좀 거창하게 말을 한다면 그게 박애사상(博愛思想)일지도 모른다.

점심 식사 후에는 운동 겸 낫을 들고 산속으로 들어 간다. 솔밭이 있는데 넝쿨 식물이 소나무를 타고 올라 가는 것을 잘라 내기 위해서다. 칡넝쿨은 하루에 1 미터 자란다고 한다. 산속에서 그걸 다 잘라 내는 데는 약 1시간 정도가 걸린다. 운동 시간으로는 적당하다.

처음에는 넝쿨식물 때문에 이상하게 뒤틀려서 자란 나무들을 베어 냈었다. 그러다가 한국에서는 주로 이상하게 뒤틀린 나무들을 정원에 심어 놓는 것을 보고 지금은 그런 나무들을 최대한 살리려고 하고 있다. 무엇이든 의미에 따라 해석이 다른 것을 체험한 셈이다.

‘사랑과 재채기는 감출 수 없다’는 말처럼 기쁨이 있는 사람은 세상이 다 즐겁게 보이니 표정이 밝다. 감정의 기복에 따라 세상을 다르게 인식 되듯이, 때로는 환경이 감정을 조절하기도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여행을 하거나 풍광이 좋은 곳에 가서 기분전환을 하고 온다.

한국도 이젠 생활수준이 높아져서 주로 해외여행을 선호하는 것 같다. 기왕에 나설 바에는 역사학도가 아니라면 유적지 보다는 풍광이 좋은 곳을 보는 게 에너지 충진에 훨씬 득이 있을 것이다.

그런 목적에서는 국내에도 갈 곳이 많다. 옛날에 민둥산들이 모두 산림이 우거졌고 해변가도 잘 정리 되어 있으니 가까운 친구와 다니다가 마음에 들면 더 머물고 아니면 패스하는 식이 인솔자를 따라 다닌 것 보다는 훨씬 더 좋은 추억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재수가 좋으면 만선(滿船)이 되어 돌아 온 어선을 포구에서 만날 수도 있다. 그곳에서 싱싱한 생선을 사서 매운탕 집에 가서 끓여 달래서 먹는 것도 좋은 추억거리일 것이다. 언젠가는 나도 고국에 가서 조선의 김정호가 지도를 그리듯이 서해안을 따라 남해안으로 다시 동해안을 따라서 강원도 꼭대기까지 돌아 볼 생각이다. 5/18/16

신록(新綠) / 素石 김진우.

 

작년 이 맘 때 푸르던 잎
금년에도 역시 푸르른데
익숙한 그 모습이
다시 만난 옛 친구처럼 반갑구나.

 

행여, 사람들이 그대를
新綠이라 부를지라도
서운해 하지는 마시게
그대는 언제나 내 옛 친구이니 말일세.

 

토끼소주(tokki soju).

tokki soju2

토끼소주(tokki soju).

한 미국인이 한국에서 한국의 전통소주 양조법을 배우고 왔다. 그가 배운 대로 뉴욕에서 그 소주를 직접 양조하여 2홉짜리를 온라인에서 $24.95 달러에 판매하고 있는데 애주가들의 반응이 좋다고 한다. 뉴욕 브루클린(Brooklyn)에 토끼소주 시음장도 있다.

누룩과 쌀로 빚은 술, 그 누룩은 일반 이스트와는 다르다는 게 그의 주장이고 첨가되는 천연 재료의 향이 그대로 살아 있는 데서 그가 애초에 한국의 전통 소주에 매료된 것이라 한다.

일반 시중에 유통되고 있는 희석식 소주는 다섯 번 증류하여 알코올의 순도를 높인 다음 물을 섞어서 판매를 하는 것이지만 전통소주는 한번 증류한 것이 완제품이 되는 것에 차이가 있다. 전통소주는 생산량이 저조한 연유로 가격이 비쌀 수 밖에 없다.

그 기사를 보면서 두 가지의 충격을 받았다. 우선은 그 소주의 이름이다. 술을 앉히며 그 일정을 음력에 맞춰서 잡는 것을 보면서 달의 ‘옥도끼’ 전설을 알 게 되었는데 그래서 술 이름을 ‘토끼소주’라 정하게 되었다고 한다.

한국에서는 상호이름을 외래어 내지는 외래어를 조합한 합성어라서 설명이 없으면 그 의미를 알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상호뿐만이 아니라 아파트의 이름 역시 마찬가지다. 왜정시대엔 일제가 우리 말을 말살 시키려 했었지만 이제는 국민들이 자발적으로 우리 말을 지우고 있는 셈이다.

그럼에도 오히려 외국인은 한국어를 이용하여 그 상품에 대한 이미지를 조명하고 있는 것이다.

두 번째의 충격은 우리 고유의 것에 대한 가치관(value)이 내국인과 외국인 간에 상당한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흔히 온고지신(溫故知新)을 말 하지만 애초에 우리 것은 다 고리타분한 것이라고 제쳐 놓고 새로운 것만을 찾아 나서니 그게 문제이다.

남의 것을 카피하면 그 결점까지 따라온다. 원 개발자는 그 결점을 해결 할 수 있으나 모방을 한 자는 그런 원천 기술이 없기에 결국은 망할 수 밖에 없다.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 거북선, 그러나 그 후속이 없다. 한국에서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가 대 히트를 쳤다. 3억 인구의 미국에서 20만부 팔린 책이 4천만 인구의 한국에서는 6개월 만에 백만 부가 팔렸다. 저자가 두 번이나 한국에 가서 공개강좌를 하였다.

정약용은 200여 년 전에 목민심서에서 마이클 보다 더 디테일하게 예를 들면서 그 ‘정의(正義)를 정의(正意)’ 하였다. 백만 부의 책을 팔아 준 사람들 중에 과연 몇이나 목민심서를 읽었을 지가 궁금하다.

달아 달아 밝은 달아
이태백이 노던 달아
저기 저기 저 달 속에
계수나무 박혔으니

옥도끼로 찍어내어
금도끼로 다듬어서
초가삼간 집을 짓고

양친 부모 모셔다가
천년만년 살고 지고.

 

노벨상 수상자들 중 대부분은 늘 곁에 고전을 두고 읽었다고 한다. 한국의 달 속에 있던 토끼가 뉴욕으로 달아 났으니 금년 추석에는 꼭 확인을 해 보시라. 5/11/16 cane0913@hanmail.net

“여보, 아직도 내가 예뻐요?”

송철호, 김옥경

“여보, 아직도 내가 예뻐요?”

위 사진은 경상도 문경에서 사는 송철호, 김옥경 부부의 모습이다. 기자가 시골에 사는 노부부들의 모습들을 취재하면서 그들의 대화내용을 사진설명으로 올려 놓은 것을 글 제목으로 차용했다. 여러 커플들이 있었으나 이 부부의 모습이 제일 마음에 들었다.

부인의 질문에 빙그레 웃는 송철호씨의 옆모습이 순박하기 그지없다. 산골에서 사는 노부부, 부부가 화목하니 표정도 밝을 수 밖에 없다. 세상에서 최고의 화장품은 ‘사랑’이라는 말이 생각나서 해 본 소리이다. 자식들은 다 외지에서 살고 두 내외만 그곳에서 산다고 한다.

허리는 굽었으나 그 할머니에게 꽃 같은 시절이 왜 없었겠나? 할머니의 ‘아직도’라는 그 말에는 흘러간 세월이 배어있다. 세월은 갔으나 표정이나 말 투에 애교가 있으니 늘 젊게 사는 부부라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그 할머니는 늘 확인해 보고 싶었든 말을 기자를 증인 삼아 다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노년에는 사랑이라는 말이 좀 가볍다는 생각이 든다. 세상에서 제일 흔한 게 사랑이고 또 쉽게 변질 되는 게 사랑이라는 말이니 그렇다.

노년에는 서로 존경 하는 게 그게 바로 사랑일 것이다. 존경이란 위대한 사람이나 손 위 사람에게만 생기는 감정이 아니라 동등한 위치에서나 혹은 손 아래일지라도 나보다 더 좋은 점이 있다면 당연히 존경심이 생기게 된다.

존경하는 마음에서는 이심전심(以心傳心)이 된다. 유한(有限)한 인생, 그럼에도 이심전심이 되는 누군가가 있는 한은 외로움이나 슬픈 것들을 이겨낼 수 있으니 그게 세상에 온 보람이 아니겠나? 또 그게 행복일 것이다. 5/9/16 cane0913@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