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글 목록: 산골짜기의 편지

녹음방초 승화시(綠陰芳草 勝花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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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음방초 승화시(綠陰芳草 勝花時)

꽃들은 지고 산야(山野)는 온통 초록으로 변하니 봄 꽃에 환호(歡呼)하던 마음이 이제는 신록(新綠)을 찬탄(讚歎)하게 된다. 봄의 꽃들처럼 화려하지는 않을지라도 그 모습이 가을까지 지속되는 것도 마음에 든다.

옛사람들도 녹음방초 승화시(綠陰芳草 勝花時)라 했다. 푸른 나무들의 그늘과 향기로운 풀들이 꽃 필 때 보다 더 좋다는 말이다. 화려한 것은 오래 가지 못하는 세상의 이치가 자연에서도 적용되는 듯 하다.

연예인들이 마약을 하는 것은 그 결과가 어떨지를 몰라서가 아니라 추락하는 자신의 인기를 보면서 그 소외감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소외감은 마음뿐만이 아니라 건강까지도 앗아 간다. 화려한 직업의 사람들은 그 화려함에 걸맞게 더 큰 상처를 받게 되니 세상사 모두 평(平)이라는 말이 맞는 것 같다.

池閣絶句 (연못 가의 정자에서 지은 절구)

茶山 丁若鏞

 

種花人只解看花(종화인지해간화)

不解花衰葉更奢(불해화쇠엽갱사)

頗愛一番霖雨後(파애일번림우후)

弱枝齊吐嫩黃芽(약지제토눈황아)

 

꽃을 심은 사람은 꽃만 볼 줄 알지만

꽃이 진 후에 나오는 잎이 더 좋은 줄을 모르네

연일 비가 내린 뒤에 한번 살펴보시게

작은 가지에서 일제히 돋아난 연 노란 색깔의 싹을.

 

다산은 이 시에서 인생의 sequence를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화려한 것만 인생이 아니라 그에 연속되는 인생의 여정, 그걸 발견하는 사람만이 행복이 무엇인지를 체험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산의 고목나무들을 자르고 보니 그 그루터기에 어느 것은 수 많은 새 가지를 내고 어느 것은 그렇지가 않다. 새 가지를 낸 나무는 아직 고목은 아닌데 억울하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살다 보면 다음단계에 연결이 잘 안 될 때도 있다. 그걸 인생의 공백기라고 한다. 그럴 때는 그 공백에 그냥 주저 앉을 게 아니라 그것을 메울 수 있는 그 무엇을 찾아 내는 게 인생의 지혜가 될 것이다. 특히 노년에는 설령 그것이 고상한 취미가 아닐지라도 자신의 내면을 충족 시킬 수만 있다면 그게 보약이다.

이 신록의 계절에 자연은 이토록 늘 인간에게 적절한 메시지를 주고 있으니 조물주에게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4/30/16 cane0913@hanmail.net

가는 세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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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 세월.

이산 저 산 꽃이 피니
분명코 봄이로구나

봄이 찾아 왔건마는 세상사 쓸쓸 허드라
나도 어제 청춘일러니 오날 백발 한심허구나

내 청춘도 날 버리고 속절없이 가 버렸으니
왔다 갈 줄 아는 봄을 반겨헌들 쓸데 있나.

내 청춘도 날 버리고 속절없이 가 버렸으니
왔다 갈 줄 아는 봄을 반겨 헌들 쓸데 있나

판소리 본 창을 하기 전에 부르는 단가 중의 하나인 사철가의 시작 대목이다. 인생 팔십을 산다 해도 병든 날, 잠든 날, 근심걱정을 한 날들을 제하면 사십도 채 못산다는 내용으로 세월의 무상함을 노래한 것이다.

흰 머리가 생기고 얼굴이 주름이 생기는 것만 늙는 게 아니라 마음도 같이 늙는다. 유행가 가사가 자신의 이야기 같을 때부터 늙기 시작한다고 생각하면 거의 틀림이 없을 것이다. 젊어서는 유행가 가사를 그렇게 음미하게 되지는 않는다. 좀 더 늙으면 판소리 가사가 귀에 들어 온다.

젊었을 때는 판소리를 들으면 이태리 말로 부르는 오페라처럼 무슨 말인지 알아 들을 수가 없었으나 늙어서는 그걸 알아 들으니 그것도 묘하다. 사설(辭說)에 철학이 들어 있기 때문에 그렇다고 생각한다.

일본 사람들은 가부끼를 서양의 오페라와 동격으로 놓고 감상을 하지만 한국에서 판소리는 영화 서편제에서나 등장하는 정도이니 그것도 아쉬운 점이다. 나는 스트레스가 있을 땐 민요를 크게 틀어 놓고 따라 부르면 좀 개운해 진다. 음치이지만 궁상각치우의 오음계에서는 별 탈이 없다.

위 사진은 영국 여왕의 젊었을 때와 현재의 모습이다. 꽃다운 시절은 여왕뿐만이 아니라 누구에나 다 있었다. 젊음은 이미 다 누려 봤기에 그게 동경의 대상이 될 수는 없다. 뒤를 돌아보면 오늘이 가장 늙은 날이 되겠지만 남은 날들에 대해서는 오늘이 분명 젊은 날이기 때문이다.

한 필우님의 글에,
봄 꽃들을 보면서 ‘저 꽃들을 몇 번이나 더 볼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그 글을 읽으며 가슴이 아려왔다. ‘술이 반 병이나 남았다’와 ‘술이 반 병 밖에 안 남았다’는 말에서 발상의 전환이 이루어 진다는데 어느 것을 선택해야 할지는 누구나 다 안다.

봄아 왔다가 가려거든 가거라
니가 가도 여름이 되면 녹음방초 승화시라

사철가에 이런 일침도 있으니 그런 게 판소리의 매력이 아닐까 생각한다. 인생은 100년 이상 잘 숙성된 아주 비싼 술인데, 어느 경우든 그 반 병에서 열 잔이 나올지 스무 잔이 나올지 그건 아무도 모른다.

이 화창한 봄날에 그 반병이나 남은 술을 꺼내 놓고 좋은 안주도 한사라 준비하여 지긋이 서로 눈을 맞추며 인생을 찬미하심이 어떨는지? 4/27/16 cane0913@hanmail.net

꽃이 지는 아침은 울고 싶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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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훈 시인의 낙화(落花)가 생각난다. ‘꽃이 지기로소니 바람을 탓하랴’ 에서의 ‘바람’이라는 말 때문이었다. 시속 25마일의 강풍이 불어 대더니 도그우드(dogwood)의 꽃잎이 거의 다 사라졌다. 시인은 바람을 탓하지 말라고 했으나 기왕에 핀 꽃인데 몇 일만 더 참아 주었으면 하는 바램에서 투정이 생겼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는 말처럼 화려한 것도 때가 되면 사라지는 게 정한 이치이련만 서운한 마음은 어쩔 수가 없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딱따구리가 와서 집을 짓는 소리가 들린다. 불자라면 목탁소리처럼 들릴 테지만 내 귀엔 목수가 망치질하는 소리 같다. 이 적막강산에 무슨 소리가 나니 그것도 정겹다.

자연은 그렇게 나름대로의 own business 를 하는 셈인데 인간들은 거기에 이런저런 의미를 부여한다. 알면서도 나 또한 같이 휘둘리고 있는 내 심사도 묘하다.

소나무 묘목 50여 그루를 심었는데 세 그루만 실패하고 나머지는 다 뿌리를 내렸다. 이젠 좀 요령이 생겨서 일도 빨라졌다. 앞으로도 계속 심어 갈 생각이지만 날이 더워지면 성공률이 떨어지지나 않을까 그게 걱정이다.

어렸을 때 시골에서 종종 보던 땅벌이 뒤 뜰에 생겨 났다. 내 기억으로는 ‘옷빠시’라고 부른 것 같은데 정확하지는 않다. 하교 시에 벌집을 건드려 놓고 도망가면 뒤에 오던 학생들이 벌 때문에 혼비백산(魂飛魄散) 하는 모습을 보며 재미있어하던 개구장이 시절도 생각난다.

자칫 내가 인과응보로 그런 곤란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벌집을 없애야 하는데 방법이 마땅치가 않다. 벌이 드나드는 구멍이 여러 군데가 있는 탓이다.

건너 집이 다시 안 보일 정도로 나무의 새 잎들이 많이 피었다. 꽃 대신 새 잎들이 그 자리를 채우니 역시 봄은 채우는 계절인 것 같다. 봄이시여, 가시더라도 더디 가시라.

낙화(落花) – 조지훈

꽃이 지기로소니
바람을 탓하랴

주렴 밖에 성긴 별이 하나 둘 스러지고
귀촉도 울음 뒤에 머언 산이 다가서다.

촛불을 꺼야하리 꽃이 지는데
꽃 지는 그림자 뜰에 어리어

하이얀 미닫이가 우련 붉어라
묻혀서 사는 이의 고운 마음을

아는 이 있을까 저허하노니
꽃이 지는 아침은 울고 싶어라.

인생은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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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 isn’t tied with a bow, but it’s still a gift.
인생은 나비넥타이를 매고 있지 않았을지라도 여전히 선물이다.

The Plain DealerThe Cleveland Jewish News의 칼럼니스트인 레지나 브렛(Regina Brett) 이 그녀의 칼럼에서 한 말이다. 금년 5월에 60세가 되는 사람인데 10년 전인 나이 50에 쓴 글이라 한다.

선물이란 어떤 기대치가 아니라 누구로부터 이미 받은 ‘어떤 것’을 말할 게다. 젊었을 때 아련하던 먼 훗날이 노인의 모습으로 지금 거울 앞에 서있다. 턱시도(tuxedo)에 나비넥타이를 맨 사람도 있겠고 또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자식들이 성장하여 제 앞가림들을 하고 있다면 일단은 남는 장사를 한 셈이다. 행복이란 지극히 주관적인 것이기에 같은 형편, 같은 환경에서도 행복을 느끼는 사람도 있고, 반대로 불행하다고 단정하는 사람도 있다.

살아온 연륜이 얼마인데 회한(悔恨)인들 왜 없겠나. 그러나 그 회한이 자신을 지배한다면 이미 받은 선물의 가치를 옳게 인지하기가 어렵다.

사람이 마음을 열면 우주를 다 품을 수 있으나 마음을 닫으면 바늘구멍만한 틈도 없다고 한다. 성화 중에 손잡이가 없는 문 밖에서 예수님이 노크하는 그림이 있다. 안에서 누군가가 문을 열어줘야만 한다. 그 누군가가 다름아닌 나 자신이라는 의미가 있다.

행복이라는 것도 그와 마찬가지가 아닐까 생각한다. 행복을 느끼는 것은 제1인칭인 내가 되기에 그 문은 다른 사람이 열어 줄 수가 없다. 어쩔 수 없이 가 아니라 당연히 내가 열어야 한다. 노년에 정신건강에 영향을 주는 몇 가지를 정리해 본다.

1) 불공평한 세상에 대하여 환멸을 느낀다.
이런 감정이 깊이 지속되면 자칫 염세주의(厭世主義)에 빠질 수 있다. 아주 먼 옛날에도 악인이 형통하고 의인이 재앙을 당하는 것에 대하여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사필귀정(事必歸正)이나 인과응보(因果應報)라는 말로 달래는 수 밖에 없었다.

볼지어다 이들은 악인이라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 하도다. 내가 내 마음을 정히 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 나는 종일 재앙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책을 보았도다. (시편 73:12~14)

이론상으로는 공산주의만큼 멋진 것도 없다. 그러나 그것을 실현한 나라는 세계 어디에도 없다. 인간의 본성을 떼어 놓고 이론만을 나열한 탓이다. 세상은 현재뿐만이 아니라 과거에도 또 미래에도 그 불공평한 것은 지속 될 것이다. 그 짐을 내려 놓으시라.

2) 자신의 삶을 다른 사람들의 삶과 비교하지 마시라. 다른 사람들의 삶이 실제로 어떠한지를 결코 알 수 없기 때문이다.

3) 먼저 자신을 용서 하시라. 거기엔 과거도 있겠고 현재도 있다. 그래야 남을 용서할 수 있다. 연극에서 1막, 2막이 있듯이 인생 역시 단원을 매기면 새로운 시도가 훨씬 용이하다.

4) 모든 논쟁에서 반드시 이겨야 하는 것은 아니다.
5) 행복해지는 것은 언제라도 결코 늦지 않다. 그러나 그것은 오직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6) 인생에서 가장 좋은 순간은 아직 오지 않았다고 주술처럼 외우시라. 그걸 다른 말로는 희망이라 한다.

7) 인생을 분석하지 마시라. 인생은 학문처럼 단순 명료한 것이 아니다. 현실을 받아 드리고 형편에 따른 대응이 최선이다.

8) 자신의 감정을 토로할 수 있는 믿을만한 친구 한 명은 꼭 필요하다. 그 친구가 의사보다 더 많은 치료를 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이 걱정하는 것 중 95%가 실제 일어나지 않는 것들이라고 한다. 노인들 대부분은 신체의 병보다 치매에 대하여 지나친 걱정을 하는 것 같다. 치매는 전체 노인들 중에서 20%가 걸리게 된다고 한다. 다른 병에 비하여 비율이 높은 것은 아니다.

한국에서는 치매도 이쁜 치매, 미운 치매로 분류를 하는 것 같다. 위의 몇 가지만 해결을 해도 최소한 미운치매는 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정신건강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뛰어나게 똑똑한 자와 어리석고 못난 자는 변화시킬 수 없다. (唯上知與 下愚不移)
논어 양화(陽貨)편에 있는 말이다. 자신이 아주 똑똑하거나 아주 미련하다고 생각되지 않는 사람은 세상사뿐만이 아니라 건강에도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부모님으로부터 아주 귀한 선물을 이미 받았기 때문이다. 그게 인생이다.
4/15/16 cane0913@hanmail.net

죠지아 주에서의 상춘(賞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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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화(松花)는 다식(茶食)이 연상되었는데 소나무가 많은 죠지아에 와서 살다 보니 송화가 봄인듯하다. 호수나 차들이 온통 송화 가루로 노란색이 되어 버리고, 어떤 땐 산불이 나서 연기가 피어 오르는 것처럼 바람에 송화가루가 날린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송화가루는 꽃가루 알러지를 유발하지는 않는다고 한다. 남성 호르몬에 좋다 하여 Pine Pollen Powder를 1온스에 45불씩 주고 사서 먹는 사람들도 있다. 근력이 딸리면 그걸 돈 주고 살 필요 없이 산에 가서 송화가루를 털어다가 먹어 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진시황이 그것을 알았었다면 솔밭에서 고생하는 사람들도 많았을 것이다.

50 feet 정도의 큰 나무들을 타고 올라 간 등나무 넝쿨이 퍼플(Purple)색 꽃들을 길게 늘어트리며 피워서 그만한 장관도 없다. 보기에는 아름다우나 넝쿨식물은 타고 올라간 나무를 죽이기 때문에 우리 산에서는 보는 즉시 처리를 해서 그런 게 없다.

넝쿨식물은 땅에서는 꽃을 피울 수가 없다. 그래서 옆의 나무를 타고 올라가야 하는데 그게 여의치 못하면 지들끼리 줄기 몇 개가 어울려서 새끼 꼬듯이 올라가면서 기둥을 만든다. 그곳에서 꽃을 피우는 것이다. 흔히 말하는 갈등(葛藤)의 의미와는 다른 양상이다.

우리가 봄을 찬미(讚美)할 때 식물들은 치열한 생존경쟁을 새로 시작하는 것이다.

햇볕을 더 많이 받으려는 지상에서의 경쟁, 양분을 더 많이 흡수하려는 뿌리들의 경쟁, 습한 땅을 좋아하는 식물도 있고 건조한 땅을 좋아하는 식물도 있다. 비옥한 땅에서 자라는 식물도 있고 박토에서만 자라는 식물도 있다.

농경(農耕)이란 사실 이런 식물의 생존경쟁에 인간이 개입하여 인위적으로 그 작물에 방해가 되는 것을 제거해 주는 것이다. 그것을 탈피하기 위한 것이 Permaculture 운동이다.

“Permanent,” “Agriculture,”“Culture.”의 합성어로 1970년 호주의 Bill Mollison이 제창한 자연농법이다. 화학비료를 전혀 쓰지 않고 지형과 토질에 맞게 재배식물을 정하여 잡초 속에서 작물을 재배하는 것이다.

예를 든다면 꿀벌을 키워서 식물의 수분(受粉)을 돕고, 대기중의 질소를 흡수하여 뿌리에 저장하는 식물을 심어서 그것을 필요로 하는 옆에 있는 다른 식물에 도움을 주게 하는 식이다.

생존경쟁에서 스스로 자란 과일이나 곡식, 채소는 훨씬 더 병충해에 강하고 다양한 영양분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자급자족의 목적이 아니라면 소출이 적어서 사업적으로는 아직 매력을 얻지 못하고 있다.

상춘(賞春)을 이야기하다가 글이 딴 곳으로 흘렀지만 봄은 새로운 시작을 의미한다. 천문학에서도 춘분의 태양각을 황도 ‘0’도로 하니 봄은 상징적인 시작뿐만이 아니라 그 실제가 시작이다.

賞春.
素石 김진우.

따사한 봄볕은 꽃을 피우고
송화 가루는 봄맞이 단장으로
호수를 노랗게 물들이는데

북풍한설(北風寒雪)이
언제였던가 기억 속에서 저무네

새로움은 늘 그러하듯이
잠자던 꿈을 다시 일으켜 세우니
이 봄 또한 그러하다.

꿈은 삶의 원동력이다. 새로 시작된 이 절기에 아름다운 꿈을 설계하셔서 금년엔 모두 소원성취 하시기를 빌어 본다. 4/3/16  cane0913@hanmail.net

“무슨 사연이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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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가을의 좀 쌀쌀한 날, 미 동북부에 있는 케이프 캇 해변의 언덕에 한 중년여인이 꽤 오랜 시간을 바위에 부숴지는 파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뭔가 심상치 않다고 생각했는지 한 노신사가 다가가서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그녀는 바위에 부숴지는 파도가 꼭 자기 자신과 같다고 했다. 세파에 밀려서 부딪치고 깨지는 것은 늘 자기자신인데 바위는 언제나 멀쩡하다는 말이었다. ‘죽는 파도’ 그걸 카운트하고 있었다고 한다.

노신사는 우리의 손이나 발을 그 사람이라 아니하듯이 파도 역시 바다의 일부분이니 당신은 파도가 아니라 바다라고 했다. 바다는 절대로 죽지 않는다면서 아래 해변에 펼쳐진 조약돌들이 바위에서 얻은 바다의 전리품(戰利品)이라 했다.

위 내용은 우울증환자의 투병기에서 발췌한 것이다. 그 환자는 노신사와의 짧은 대화에서 얻은 발상의 전환으로 병을 털을 수 있었다. 무엇이든 수용할 자세가 되어 있을 땐 사소한 말에서도 힘을 얻게 된다.

위에 등장한 노신사, 적절한 비유로서 남을 위로할 줄도 알고 어떤 해법을 제시할 수 있는 지혜도 있다. 그건 어느 책에서 얻은 지식이 아니라 인생의 경륜에서 쌓여진 것이다. 다시 말하면 늙는 과정에서 얻은 소득이다. 옛날 군인들이 길을 잃었을 땐 늙은 말을 풀어 놓았다고 한다. 그 말을 따라가면 집에 도착할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에 고령인구가 늘다 보니 노인문제가 이슈화 되고 있다. 그러나 그게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다. 옛날에도 고려장 이야기가 있었으며 불효자는 공자시대에도 있었다. 그러기에 공자가 효(孝)에 대하여 반복적으로 주장을 하였을 테니 말이다.

한국정부의 노인정책은 미국의 노인정책보다 우월하다. 문제는 실버산업으로 돈을 버는 사람들이 전혀 전문적이 아닌 게 문제이다. 지식이 없다면 측은지심(惻隱之心)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그도 아니다.

요양병원에서 환자가 넘어지면 뼈가 부러진다고 환자를 묶어 놓는다고 한다. 넘어져서 뼈가 부러질 확률이 50%라면 묶어 놔서 생기는 근육손실은 100%이다.

죽은 것처럼 곤히 자는 사람도 수십 번을 뒤척이며 잠을 잔다. 몸의 혈행(血行)을 위한 인체의 반응이다. 한 환자의 아들이 쓴 글에 요양병원에서 모친을 묶어 놔서 수저도 못 들던 모친이 요양원으로 옮긴 후 수저도 들 수 있고 부축하여 산책도 한다고 했다.

사람을 묶어 놓는 건 물리적인 것 이상으로 정신적인 상처가 된다. 아무리 정신 줄을 놓았다 해도 자신이 묶여 있는 것은 안다. 단순히 병원이 편하자고 환자를 묶어 놓는 것이다.

행여 요양병원에 입원을 해야 할 경우, 넘어져서 뼈가 부러지는 것에 대한 책임을 묻지 않을 테니 묶어 놓지 말라고 계약서에 쓰시라.

박완서의 ‘황혼’은 1979년, 저자의 나이 40대에 발표한 소설이다. 지금으로부터 37년 전에 시어머니가 주인공으로 나온다. 며느리가 친구와 전화로 이야기 하면서 ‘늙은 여자’라고 해서 스스로 그냥 늙은 여자로 화자(話者)가 되어 나온다. 그 늙은 여자는 며느리를 ‘젊은 여자’로 자리매김을 했다.

“그러나 늙은 여자는 지금 정말 불쌍한 건 혼자 사는 여자가 아니라 자기 뜻대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여자임을 깨닫는다.” 이 대목이 그 소설의 핵심이고 결론일 것이다.

시집살이가 고초당초보다 더 맵다고 하던 시절에도 그 소설 속의 ‘늙은 여자’는 명치 밑이 아팠었다. 노년의 소외감 탓이다. 소외감이라는 건 지극히 주관적인 감정이기에 그걸 요리할 줄 아는 게 노인의 지혜일 것이다.

인터넷에 곱게 늙기 위한 좋은 글들이 많다. 그러나 처지와 형편이 각기 다르고 또 늙어서 갑자기 신선이 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젊은 시절의 고독이 문학적이라면 노년의 고독은 현실이다. 노년에는 굳이 논리적이거나 이상적인 화두가 필요한 건 아니다. 함께 자리하여 이야기를 들어 주는 것 만으로도 족한 경우가 많다.

우선은 자신의 마음을 편하게 하는 요령을 터득하면 훨씬 편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가끔 미국에서 한인들이 인종차별을 받았다고 분해하는 사람들을 본다. 그러나 살펴보면 그 상대는 유색인종에게뿐 만이 아니라 백인들에게도 똑같이 무례한 행동을 한다. 그럴 때 조언해 주는 말이 “Don’t take it personally” 이다. ‘그 사람이 (옳지는 않지만) 당신한테만 그러는 게 아니다’라는 말이다.

뭔가 불편한 기분이 들 때는 ‘무슨 사연이 있겠지, 무슨 까닭이 있겠지’로 치환을 하다 보면 저 사람이 뭔가 나 아닌 다른 원인에서 기분이 상했구나 정도가 될 수 있다. 즉 3자적인 입장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인생엔 정답이 없다는데 나 역시 탁상공론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때로는 내가 써먹는 요령이다.

어느 날 문득 노래의 가사가 가슴에 와 닿을 때가 있다. 마찬가지로 마음이 갈급할 때 성구 한 구절이 심령을 흔들어서 기독교인이 되는 사람도 있고, 법화경(法華經)의 한 소절에서 답을 얻어 불자(佛子)가 되는 사람도 있다. 그래서 종교는 논리가 아니라 체험이라고 한다.

오늘 이곳엔 비가 내린다. 그 우중에서도 꽃들은 여전히 미소를 보내고 있으니 그것도 배울만하지 않은가?  4/1/16  cane0913@hanmail.net

Lincolns Lament-Michael Hoppe.

계절(季節)도 소리를 낸다.

Four seasons2

아이들을 키우다 보면 때로는 엉뚱한 질문에 답변하기가 어려운 때가 있다. 아이 수준에 맞는 설명이 어려운 경우도 있지만 어느 질문엔 정말 답을 모르는 때도 있다.

화창한 봄날 산을 걷다가 문득 계절에 대한 생각으로 자문자답(自問自答)을 해 봤다. 왜 지구는 23.5도 기울어서 자전(自轉)을 하게 만들었는지가 궁금했다. 바비큐를 할 때 고기 뒤집듯이 북반구가 여름이면 남반구는 겨울이고, 반대로 북반구가 겨울이면 남반구는 여름이니 골고루 데우고 식히고를 반복하니 그것도 묘하다.

만약 지구가 30도쯤 기울어서 자전을 한다면 현재 내가 살고 있는 위치가 겨울엔 더 추웠을 테고 여름엔 더 더웠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세상엔 감사할 일들이 많다.

환절기에는 인체의 내분비 계통도 새로운 기후에 적응하려고 애를 쓴다. 그러다가 힘이 부치면 감기나 몸살을 앓게 되는 것이다. 계절의 변화에서 새삼스럽게 세월을 실감하기도 하는데 그 계절이 소리를 낸다고 한다.

以鳥鳴春  새로 봄이 소리 내고
以雷鳴夏 우뢰로 여름이 소리 내며
以蟲鳴秋 벌레로 가을이 소리 내고
以風鳴冬 바람으로 겨울이 소리 낸다.

새가 노래한다는 사람도 있고, 운다는 사람도 있지만 어찌 되었든 봄에는 새들이 더 요란하다. 짝짓기를 위해서 필사적이다. 위 글대로 하면 봄이 내는 소리이다.

르네상스 시대엔 기타나 만돌린을 들고 여자의 집 창 아래에서
♪ 창문을 열어 다오, 내 그리운 마리아♪
하면서 Maria, Mari Capua를 부르는 게 유행이었다고 한다.
물론 마리아 대신 상대 여성의 이름으로 바꿔서 불렀을 것이다.
그 때는 사람도 봄철의 새와 별반 다르지 않았던 셈이다.

‘앵두나무 우물가에 동네처녀 바람났네’나 ‘열무김치 담글 때엔 님 생각이 절로 난다’는 유행가 가사도 있었으니 봄엔 싱숭생숭한 마음이 되는 것 같다.
그러나 ‘로미오와 줄리엣’의 줄리엣이 열 세 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스칼렛이 열여섯 살이었으니 지금 이 나이에 싱숭생숭 하기엔 너무 늦었다. ㅎㅎ

Luciano Pavarotti_Maria Mari Capua.

늙기도 서럽거늘,

노인학대

이고 진 저 늙은이 짐 풀어 나를 주오
나는 젊었거늘 돌이라도 무거울까
늙기도 서럽거늘 짐조차 어이 지실까.

조선 선조 때 송강(松江) 정철(鄭澈)이 강원도 관찰사로 있으면서 백성들을 위해 지었다는 훈민가(訓民歌) 중의 하나다. 옛날에도 늙는 것을 서럽다고 표현한 것 같다.

늙는 것은 자연의 이치이니 그걸 서러워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근력이 떨어지고 육신이 아파오고 또 세월이 민망하여 뒷방 늙은이 취급을 받는 게 서러운 것이다.

그러나 그런 서러움도 생각할 나름이다. 현재의 노인들 대부분은 6,70년대에 빈손으로 자수성가(自手成家)한 사람들이다. 그 때는 어떤 치욕일지라도 가족들의 생계를 위하여 참고 견뎌냈을 것이다. 이제는 자신이 가족들의 짐만 되지 않으면 되고 또 생의 경륜에서 터득한 지혜도 있다. 그걸 recall해서 마음을 달래보면 훨씬 수월해질 것이다.

누가 무시를 했다고 속상해 하지 말고 이쪽에서도 상대를 무시해 버리면 된다. 그걸 미국 사람들은 make even이라고 한다. 그게 훨씬 공평하다. 세상의 이치가 묘해서 어떤 멸시는 다른 계층으로부터 오는 게 아니라 비슷한 형편의 같은 계층으로부터 온다.

자랑을 늘어 놓는 사람은 열등감에서 오는 반응이고 스스로 천사표 행세를 하는 사람은 마음이 강팍한 사람이다. 어떤 이슈에 대하여 온갖 해법을 제시하는 사람은 현재 자신을 알아 주는 사람이 없다는 말이고, 과거 화려한 경력이나 학벌을 내 세우는 사람은 현재 형편이 안 좋다는 말이다. 속담에 ‘말이 많은 집은 된장 맛도 쓰다’고 했으니 참고해 볼만하다.

노년에는 섭생이 아주 중요하다. 몸에 좋다는 무슨 약이나 보약을 들지 마시고 그 돈으로 유년기에 먹던 음식을 드시라. 그 때 몸의 세포가 그 영양분으로 조성되기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노년에 옛날 음식을 찾는 이유가 몸에서 그걸 요구하기 때문이다.

늙은이가 잘못하면 노망(老妄)으로 치고 젊은이가 잘못하면 철없다 한다. 그런 탓에 행색이 초라하면 정당한 요구도 노망이라 매도를 당하기도 한다.

노망도 잘 살펴보면 합리적인 사고는 아닐지라도 전혀 대책이 없는 건 아니다. 그런걸 다룬 것이 노인정신의학이다. 미국 양로원(Nursing Home)에 근무하는 의사, 간호사, 간호 보조원(Nurses Aid) 모두 이 과정을 이수해야만 한다. 그럼에도 전체 양로원의 30%가 언어폭력, 성폭력, 육체적 폭력으로 징계를 받고 있는 실정이다.

미국엔 양로원이 많아서 그 중30%라면 대단한 숫자이다. 그래서 전문적으로 그런 케이스만 맡는 Nursing Home Abuse Lawyer(양로원 학대 변호사)들이 성업을 이루고 있다.

양로원에 입원하는 환자들은 정상인들이 평범하게 할 수 있는 일상의 일들, 즉 식사하고, 화장실 가고, 샤워하는 것 등을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치매환자나 인지능력부조화로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환자들도 많다. 때문에 고약한 양로원에 들어 가는 것은 지옥을 미리 체험하게 되는 셈이다.

시카고의 어느 양로원에서는 환자의 딸이 부친의 얼굴에 멍이 든 것을 발견하고 몰래 카메라를 설치해서 폭력 간호사를 잡았다. 그 간호사는 8년 징역을 선고 받았고 양로원은 120만 불을 배상해야만 했다.

한국의 실정은 어떨까? 사실 그게 궁금하여 인터넷 색인을 해 보았다.

굳이 동방예의지국(東方禮儀之國)이라는 거창한 말을 끌어 댈 필요없이 요즘 백화점이나 상점에서 노인을 ‘어르신’ 혹은 ‘아버님/어머님’이라고 부르는 나라인데 미국보다는 나을 줄 알았다.

그러나 미국법을 적용하면 폐업수준이거나 해당자는 모두 감옥에서 수 년을 있어야 할 중범들이다. 넘어지면 다친다고 침대에 묶어 놓고, 움직이지 못하게 억제제를 주사하고, 밥 투정한다고 꼬집고, 잠 안 잔다고 때리고… 참 기가 막힌다.

한국에는 요양병원, 요양원(장기요양등급 1~3등급/월 50~70만원), 양로원(거동이 가능해서 등급을 못 받은 노인/월 90만원~100만원 이상으로 보증금을 받는 곳도 있음) 등이 있다. 요양병원에는 의사 간호사가 상주하지만 요양원에는 상주 의료진이 없다.

아래는 ‘요양원 학대’에 관한 색인 결과이다. 또 ‘요양원 비리’에도 상당량의 사건들이 있다. 눈먼 돈이 있는 나라가 한국이니 비리가 어찌 없겠는가?

http://dkd5056.tistory.com/73
http://www.segye.com/content/html/2015/02/04/20150204004543.html

분당에서 분식집을 운영하고 있는 장모(53)씨는 어머니 A(81)씨를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아프다. A씨는 당뇨와 치매로 거동이 불편하고 말을 하지 못해 수년째 요양시설에서 지내고 있다. 장씨는 몇 개월 전 면회 갔다가 어머니의 양쪽 손목 부근에 멍이 들어있는 것을 발견했다. 시설에서는 벽에 부딪힌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그 뒤에도 A씨의 허벅지나 팔 안쪽에서 희미한 멍자국이 종종 발견됐다. 장씨는 폐쇄회로(CC)TV 공개를 요구하며 요양보호사를 추궁한 끝에 밤마다 어머니의 손발을 침대에 묶어놓았다는 것을 알았다. 몸의 멍자국은 요양보호사가 A씨가 밥투정을 하는 등 말을 듣지 않는다며 꼬집은 흔적이었다.

서울남부지법은 지난 1월 서울 양천구 한 요양시설에서 잠을 자지 않는다며 얼굴 등을 때린 뒤 바닥에 앉아 있는 노인을 안아 침대에 던진 혐의(노인복지법 위반 등)로 기소된 요양보호사 B씨에 대해 징역 8개월을 선고했다.

지난해 8월에는 경기도 평택의 한 요양시설에서 뼈가 부러진 노인을 침대에 묶어 방치하는 등 학대한 원장과 요양보호사 7명이 경찰에 붙잡혔다.

요양보호사로 일했던 최모(48·여)씨는 “움직이다 다치면 곤란해진다며 억제제를 주사해서 못 움직이게 하거나 식사를 제대로 주지 않는 곳도 있다”며 “가족이 학대 사실을 알더라도 맡길 곳이 없어 그냥 넘어가기도 한다”고 폭로했다. /

글을 쓰다 보니 우울한 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배경음악인 손녀와 할아버지의 대화에서 다소라도 위로 받을 수 있기를 빌어 본다. 3/24/16

생긴대로 논다.

brush2글 제목이 욕 같지만 그런 의도는 아니다. 영어에도 A man is more or less what he looks. 라는 말이 있는 것을 보면 동서양 모두 사람의 인상(人相)이 그 행동과 연관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나이가 환갑이 지난 사람들 대부분은 그 분야의 공부를 하지 않았어도 관상을 볼 줄 안다. 인생 경험에서 얻은 학습효과일 것이다. 물론 보는 이의 주관이 작용하겠지만 보편적으로 일치되는 것들도 있다.

광대뼈가 나온 사람은 자기 주장이 강하고, 하관이 발달한 사람은 언변이 좋고, 볼이 발달한 사람은 심술이 있고… 등등. 미국 TV의 Talk Show의 호스트들은 대부분 턱이 길다.

관상이란 잘 생기고 못생긴 것을 따지는 게 아니다. 제갈공명(諸葛孔明)의 부인 황(黃)씨는 천하 박색(薄色)이었으나 지식은 공명과 거의 대등하였다고 한다. 공명의 혜안(慧眼)이 그 진주를 알아보고 부인으로 삼았을 것이다.

그림 한 장을 그리는데도 그 용도에 따라 모양이 다른 여러 종류의 붓이 필요하듯이 사람도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야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기업에서 필요한 인재를 옳게 채용하여 적재적소(適材適所)에 배치하는 것을 용인술(庸人術)이라 한다. 당연히 기업경영의 성패를 좌우한다.

그러나 그게 말처럼 쉽지는 않다. 고 이병철씨처럼 임원 채용시에 관상쟁이를 배석 시켰어도 결과가 좋지 않은 경우가 있었으니 말이다.

설사 천하에 둘도 없는 재주와 지식을 구비했다 하더라도 사람됨이 교만하고 인색하다면 그 밖의 것은 더 이상 볼 필요가 없다. (子曰, “如有周公之才之美, 使驕且吝, 其餘不足觀也已.” / 論語, 泰伯) 논어에 있는 말이다.

독심술(讀心術)을 하는 사람이나 관상쟁이가 아닐지라도 상대의 행동을 보면 어느 정도 그 사람을 짐작할 수는 있다. 그래서  ‘친구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는 말이 생겼을 것이다.

요즘은 인터넷 덕분에 굳이 친구까지 살필 필요가 없다. 입사원서를 받아 놓고 그 사람이 과거에 쓴 글들을 모조리 색인하여 미리 스크린한다.

노년에 친구를 만드는 것은 기업에서 유능한 직원을 채용하는 것보다 더 어렵다. 친구간에는 유/무능을 따지는 게 아니라 나와 일치되는 걸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도둑질도 손발이 맞아야 한다’는 말처럼 친구간에도 그렇다.

우선은 일상에 대한 소회(所懷)가 나와 비슷하다면 대부분의 화두(話頭)가 일치하니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좋은 봄날에 배경음악처럼 친구와 함께 꽃을 꺾으러 산에 가는 것도 좋지 않을는지? 3/23/16

Joan Baez-The Wild Mountain Thyme.

목련꽃 그늘 아래서 편지를 쓰노라.

Dogwood-300박목월 시인은 그의 시 ‘사월의 노래’에서 “목련 꽃 그늘 아래서 베르테르의 편지 읽노라 / 목련 꽃 그늘 아래서 긴 사연의 편질 쓰노라” 라고 했다.

이곳에 목련은 없지만 도그우드(dogwood)가 지금 한창이다. 나는 그 꽃들을 바라 보면서 이 글을 쓴다.

하얀색, 핑크색, 빨간색, 베이지색 등등 종류가 다양한데 25 feet까지 자란다. 봄의 festival처럼 산에도 동네에도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다.

‘사월의 노래’ 덕분에 봄이 되면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The Sorrows of Young Werther)’이 생각난다. 24세의 청년 궤테(Goethe)가 실연(失戀)을 당하고 1776년 1월에서 3월 사이 6주 만에 쓴 자서전적 소설(autobiographical novel)이다.

체험이 없이는 한 줄의 글도 쓸 수 없다던 궤테, 그는 자신의 실연경험과 주변인물들의 사건을 취합하여 그 소설을 썼다. 그는 자신이 열애하던 샤를로테(Charlotte)에게 베르테르(Werther)를 화자(話者)로 하여 자신의 내면의 세계를 표현 하였다.

이 소설은 단번에 베스트 셀러가 되었고 당시 유럽의 상류층 청년들이 관례처럼 하던 Grand Tour에 소설의 태생지인 작은 마을 바이마르(Weimar)가 포함 되었다. 요즘의 문화여행 같은 것이다.

옷 차림도 베르테르처럼 입었고 소설을 모방하여 자살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유명인의 자살 후에 생기는 모방자살을 베르테르 효과 혹은 베르테르 신드럼이라고 한다.

무엇이 사람들을 이처럼 열광하게 했을까? 당시 사회적인 통념에 대하여 엄연히 존재하는 인간 본연의 감정을 피력하였기 때문이라는 게 중론이다.

송(宋)나라의 구양수(歐陽脩)는 ‘매성유시집서(梅聖兪詩集序)’에서 “명시(名詩)는 대개 궁했던 사람들에게서 나온다. 시(詩)가 사람을 궁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궁해진 뒤에야 좋은 작품이 나온다”라고 했다. 마찬가지로 궤테 역시 실연의 아픔이 이 명작을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녀를 나에게서 멀리하게 해주시옵소서.’라고 나는 기도할 수 없네. 그녀가 나의 애인같이 느껴지기 때문이네. 또 ‘그녀를 나에게 보내주시옵소서.’라고도 기도할 수 없네. 그녀는 다른 사람의 여자이기에…” 소설 속에 나오는 편지의 한 구절이다.

이 소설의 줄거리는 이렇다. 감성적인 젊은 베르테르는Wahlheim 마을에서 아름다운 소녀 샤를로테를 만났다. 그녀는 모친의 별세 후, 동생들을 돌보고 있었는데 이미 11살 위인 Albert와 약혼한 사이였다. 약혼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베르테르는 그녀에 대한 사랑에 빠졌다.

수 개월간 친구로 지내다가 그녀를 잊어보려고 그 마을 떠났었다. 다시 마을에 돌아 왔을 땐 그녀는 결혼한 상태이었고 그녀의 남편에 대한 존재를 인정하면서도 고통은 전보다 더했다. 그녀는 베르테르의 사랑을 느끼면서 남편에 충실하기 위하여 베르테르와의 거리를 두게 된다.

삼각관계에서 그 해결은 셋 중 하나가 죽어야 한다는 결론에서 남이 아니라 자신이 죽기를 결심하고 그 녀의 남편에게 먼 여행을 떠나려고 한다며 권총 두 자루를 빌려 달라는 편지를 보냈다. 베르테르의 계획을 알지 못한 그녀는 권총을 베르테르에게 보냈다.

그 총으로 베르테르가 자살을 한 것이다. 그가 편지에서 자주 언급하던 보리수 나무 아래에 매장 되었는데 장례식엔 어떤 성직자도, 샤를로테나 그의 남편도 참석하지 않았다.

소설의 마지막에 샤를로테가 낙담하여 죽었을 것이라는 암시가 있다. “나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을 것이다. 샤르로테의 비탄이나 그녀의 삶이 절망적이었다는 것에 대하여 (I shall say nothing of… Charlotte’s grief…. Charlotte’s life was despaired of,” ) 3/18/16

사월의 노래 / 박목월

목련 꽃 그늘 아래서 베르테르의 편지 읽노라
구름 꽃 피는 언덕에서 피리를 부노라
아- 멀리 떠나와 이름 없는 항구에서 배를 타노라
돌아온 사월은 생명의 등불을 밝혀 든다
빛나는 꿈의 계절아 눈물 어린 무지개 계절아

목련 꽃 그늘 아래서 긴 사연의 편질 쓰노라
클러버 피는 언덕에서 휘파람 부노라
아- 멀리 떠나와 깊은 산골 나무 아래서 별을 보노라
돌아온 사월은 생명의 등불을 밝혀 든다
빛나는 꿈의 계절아 눈물 어린 무지개 계절아

4월의 노래 / 바리톤 김한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