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季節)도 소리를 낸다.

Four seasons2

아이들을 키우다 보면 때로는 엉뚱한 질문에 답변하기가 어려운 때가 있다. 아이 수준에 맞는 설명이 어려운 경우도 있지만 어느 질문엔 정말 답을 모르는 때도 있다.

화창한 봄날 산을 걷다가 문득 계절에 대한 생각으로 자문자답(自問自答)을 해 봤다. 왜 지구는 23.5도 기울어서 자전(自轉)을 하게 만들었는지가 궁금했다. 바비큐를 할 때 고기 뒤집듯이 북반구가 여름이면 남반구는 겨울이고, 반대로 북반구가 겨울이면 남반구는 여름이니 골고루 데우고 식히고를 반복하니 그것도 묘하다.

만약 지구가 30도쯤 기울어서 자전을 한다면 현재 내가 살고 있는 위치가 겨울엔 더 추웠을 테고 여름엔 더 더웠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세상엔 감사할 일들이 많다.

환절기에는 인체의 내분비 계통도 새로운 기후에 적응하려고 애를 쓴다. 그러다가 힘이 부치면 감기나 몸살을 앓게 되는 것이다. 계절의 변화에서 새삼스럽게 세월을 실감하기도 하는데 그 계절이 소리를 낸다고 한다.

以鳥鳴春  새로 봄이 소리 내고
以雷鳴夏 우뢰로 여름이 소리 내며
以蟲鳴秋 벌레로 가을이 소리 내고
以風鳴冬 바람으로 겨울이 소리 낸다.

새가 노래한다는 사람도 있고, 운다는 사람도 있지만 어찌 되었든 봄에는 새들이 더 요란하다. 짝짓기를 위해서 필사적이다. 위 글대로 하면 봄이 내는 소리이다.

르네상스 시대엔 기타나 만돌린을 들고 여자의 집 창 아래에서
♪ 창문을 열어 다오, 내 그리운 마리아♪
하면서 Maria, Mari Capua를 부르는 게 유행이었다고 한다.
물론 마리아 대신 상대 여성의 이름으로 바꿔서 불렀을 것이다.
그 때는 사람도 봄철의 새와 별반 다르지 않았던 셈이다.

‘앵두나무 우물가에 동네처녀 바람났네’나 ‘열무김치 담글 때엔 님 생각이 절로 난다’는 유행가 가사도 있었으니 봄엔 싱숭생숭한 마음이 되는 것 같다.
그러나 ‘로미오와 줄리엣’의 줄리엣이 열 세 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스칼렛이 열여섯 살이었으니 지금 이 나이에 싱숭생숭 하기엔 너무 늦었다. ㅎㅎ

Luciano Pavarotti_Maria Mari Capua.

늙기도 서럽거늘,

노인학대

이고 진 저 늙은이 짐 풀어 나를 주오
나는 젊었거늘 돌이라도 무거울까
늙기도 서럽거늘 짐조차 어이 지실까.

조선 선조 때 송강(松江) 정철(鄭澈)이 강원도 관찰사로 있으면서 백성들을 위해 지었다는 훈민가(訓民歌) 중의 하나다. 옛날에도 늙는 것을 서럽다고 표현한 것 같다.

늙는 것은 자연의 이치이니 그걸 서러워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근력이 떨어지고 육신이 아파오고 또 세월이 민망하여 뒷방 늙은이 취급을 받는 게 서러운 것이다.

그러나 그런 서러움도 생각할 나름이다. 현재의 노인들 대부분은 6,70년대에 빈손으로 자수성가(自手成家)한 사람들이다. 그 때는 어떤 치욕일지라도 가족들의 생계를 위하여 참고 견뎌냈을 것이다. 이제는 자신이 가족들의 짐만 되지 않으면 되고 또 생의 경륜에서 터득한 지혜도 있다. 그걸 recall해서 마음을 달래보면 훨씬 수월해질 것이다.

누가 무시를 했다고 속상해 하지 말고 이쪽에서도 상대를 무시해 버리면 된다. 그걸 미국 사람들은 make even이라고 한다. 그게 훨씬 공평하다. 세상의 이치가 묘해서 어떤 멸시는 다른 계층으로부터 오는 게 아니라 비슷한 형편의 같은 계층으로부터 온다.

자랑을 늘어 놓는 사람은 열등감에서 오는 반응이고 스스로 천사표 행세를 하는 사람은 마음이 강팍한 사람이다. 어떤 이슈에 대하여 온갖 해법을 제시하는 사람은 현재 자신을 알아 주는 사람이 없다는 말이고, 과거 화려한 경력이나 학벌을 내 세우는 사람은 현재 형편이 안 좋다는 말이다. 속담에 ‘말이 많은 집은 된장 맛도 쓰다’고 했으니 참고해 볼만하다.

노년에는 섭생이 아주 중요하다. 몸에 좋다는 무슨 약이나 보약을 들지 마시고 그 돈으로 유년기에 먹던 음식을 드시라. 그 때 몸의 세포가 그 영양분으로 조성되기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노년에 옛날 음식을 찾는 이유가 몸에서 그걸 요구하기 때문이다.

늙은이가 잘못하면 노망(老妄)으로 치고 젊은이가 잘못하면 철없다 한다. 그런 탓에 행색이 초라하면 정당한 요구도 노망이라 매도를 당하기도 한다.

노망도 잘 살펴보면 합리적인 사고는 아닐지라도 전혀 대책이 없는 건 아니다. 그런걸 다룬 것이 노인정신의학이다. 미국 양로원(Nursing Home)에 근무하는 의사, 간호사, 간호 보조원(Nurses Aid) 모두 이 과정을 이수해야만 한다. 그럼에도 전체 양로원의 30%가 언어폭력, 성폭력, 육체적 폭력으로 징계를 받고 있는 실정이다.

미국엔 양로원이 많아서 그 중30%라면 대단한 숫자이다. 그래서 전문적으로 그런 케이스만 맡는 Nursing Home Abuse Lawyer(양로원 학대 변호사)들이 성업을 이루고 있다.

양로원에 입원하는 환자들은 정상인들이 평범하게 할 수 있는 일상의 일들, 즉 식사하고, 화장실 가고, 샤워하는 것 등을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치매환자나 인지능력부조화로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환자들도 많다. 때문에 고약한 양로원에 들어 가는 것은 지옥을 미리 체험하게 되는 셈이다.

시카고의 어느 양로원에서는 환자의 딸이 부친의 얼굴에 멍이 든 것을 발견하고 몰래 카메라를 설치해서 폭력 간호사를 잡았다. 그 간호사는 8년 징역을 선고 받았고 양로원은 120만 불을 배상해야만 했다.

한국의 실정은 어떨까? 사실 그게 궁금하여 인터넷 색인을 해 보았다.

굳이 동방예의지국(東方禮儀之國)이라는 거창한 말을 끌어 댈 필요없이 요즘 백화점이나 상점에서 노인을 ‘어르신’ 혹은 ‘아버님/어머님’이라고 부르는 나라인데 미국보다는 나을 줄 알았다.

그러나 미국법을 적용하면 폐업수준이거나 해당자는 모두 감옥에서 수 년을 있어야 할 중범들이다. 넘어지면 다친다고 침대에 묶어 놓고, 움직이지 못하게 억제제를 주사하고, 밥 투정한다고 꼬집고, 잠 안 잔다고 때리고… 참 기가 막힌다.

한국에는 요양병원, 요양원(장기요양등급 1~3등급/월 50~70만원), 양로원(거동이 가능해서 등급을 못 받은 노인/월 90만원~100만원 이상으로 보증금을 받는 곳도 있음) 등이 있다. 요양병원에는 의사 간호사가 상주하지만 요양원에는 상주 의료진이 없다.

아래는 ‘요양원 학대’에 관한 색인 결과이다. 또 ‘요양원 비리’에도 상당량의 사건들이 있다. 눈먼 돈이 있는 나라가 한국이니 비리가 어찌 없겠는가?

http://dkd5056.tistory.com/73
http://www.segye.com/content/html/2015/02/04/20150204004543.html

분당에서 분식집을 운영하고 있는 장모(53)씨는 어머니 A(81)씨를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아프다. A씨는 당뇨와 치매로 거동이 불편하고 말을 하지 못해 수년째 요양시설에서 지내고 있다. 장씨는 몇 개월 전 면회 갔다가 어머니의 양쪽 손목 부근에 멍이 들어있는 것을 발견했다. 시설에서는 벽에 부딪힌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그 뒤에도 A씨의 허벅지나 팔 안쪽에서 희미한 멍자국이 종종 발견됐다. 장씨는 폐쇄회로(CC)TV 공개를 요구하며 요양보호사를 추궁한 끝에 밤마다 어머니의 손발을 침대에 묶어놓았다는 것을 알았다. 몸의 멍자국은 요양보호사가 A씨가 밥투정을 하는 등 말을 듣지 않는다며 꼬집은 흔적이었다.

서울남부지법은 지난 1월 서울 양천구 한 요양시설에서 잠을 자지 않는다며 얼굴 등을 때린 뒤 바닥에 앉아 있는 노인을 안아 침대에 던진 혐의(노인복지법 위반 등)로 기소된 요양보호사 B씨에 대해 징역 8개월을 선고했다.

지난해 8월에는 경기도 평택의 한 요양시설에서 뼈가 부러진 노인을 침대에 묶어 방치하는 등 학대한 원장과 요양보호사 7명이 경찰에 붙잡혔다.

요양보호사로 일했던 최모(48·여)씨는 “움직이다 다치면 곤란해진다며 억제제를 주사해서 못 움직이게 하거나 식사를 제대로 주지 않는 곳도 있다”며 “가족이 학대 사실을 알더라도 맡길 곳이 없어 그냥 넘어가기도 한다”고 폭로했다. /

글을 쓰다 보니 우울한 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배경음악인 손녀와 할아버지의 대화에서 다소라도 위로 받을 수 있기를 빌어 본다. 3/24/16

생긴대로 논다.

brush2글 제목이 욕 같지만 그런 의도는 아니다. 영어에도 A man is more or less what he looks. 라는 말이 있는 것을 보면 동서양 모두 사람의 인상(人相)이 그 행동과 연관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나이가 환갑이 지난 사람들 대부분은 그 분야의 공부를 하지 않았어도 관상을 볼 줄 안다. 인생 경험에서 얻은 학습효과일 것이다. 물론 보는 이의 주관이 작용하겠지만 보편적으로 일치되는 것들도 있다.

광대뼈가 나온 사람은 자기 주장이 강하고, 하관이 발달한 사람은 언변이 좋고, 볼이 발달한 사람은 심술이 있고… 등등. 미국 TV의 Talk Show의 호스트들은 대부분 턱이 길다.

관상이란 잘 생기고 못생긴 것을 따지는 게 아니다. 제갈공명(諸葛孔明)의 부인 황(黃)씨는 천하 박색(薄色)이었으나 지식은 공명과 거의 대등하였다고 한다. 공명의 혜안(慧眼)이 그 진주를 알아보고 부인으로 삼았을 것이다.

그림 한 장을 그리는데도 그 용도에 따라 모양이 다른 여러 종류의 붓이 필요하듯이 사람도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야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기업에서 필요한 인재를 옳게 채용하여 적재적소(適材適所)에 배치하는 것을 용인술(庸人術)이라 한다. 당연히 기업경영의 성패를 좌우한다.

그러나 그게 말처럼 쉽지는 않다. 고 이병철씨처럼 임원 채용시에 관상쟁이를 배석 시켰어도 결과가 좋지 않은 경우가 있었으니 말이다.

설사 천하에 둘도 없는 재주와 지식을 구비했다 하더라도 사람됨이 교만하고 인색하다면 그 밖의 것은 더 이상 볼 필요가 없다. (子曰, “如有周公之才之美, 使驕且吝, 其餘不足觀也已.” / 論語, 泰伯) 논어에 있는 말이다.

독심술(讀心術)을 하는 사람이나 관상쟁이가 아닐지라도 상대의 행동을 보면 어느 정도 그 사람을 짐작할 수는 있다. 그래서  ‘친구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는 말이 생겼을 것이다.

요즘은 인터넷 덕분에 굳이 친구까지 살필 필요가 없다. 입사원서를 받아 놓고 그 사람이 과거에 쓴 글들을 모조리 색인하여 미리 스크린한다.

노년에 친구를 만드는 것은 기업에서 유능한 직원을 채용하는 것보다 더 어렵다. 친구간에는 유/무능을 따지는 게 아니라 나와 일치되는 걸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도둑질도 손발이 맞아야 한다’는 말처럼 친구간에도 그렇다.

우선은 일상에 대한 소회(所懷)가 나와 비슷하다면 대부분의 화두(話頭)가 일치하니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좋은 봄날에 배경음악처럼 친구와 함께 꽃을 꺾으러 산에 가는 것도 좋지 않을는지? 3/23/16

Joan Baez-The Wild Mountain Thyme.

목련꽃 그늘 아래서 편지를 쓰노라.

Dogwood-300박목월 시인은 그의 시 ‘사월의 노래’에서 “목련 꽃 그늘 아래서 베르테르의 편지 읽노라 / 목련 꽃 그늘 아래서 긴 사연의 편질 쓰노라” 라고 했다.

이곳에 목련은 없지만 도그우드(dogwood)가 지금 한창이다. 나는 그 꽃들을 바라 보면서 이 글을 쓴다.

하얀색, 핑크색, 빨간색, 베이지색 등등 종류가 다양한데 25 feet까지 자란다. 봄의 festival처럼 산에도 동네에도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다.

‘사월의 노래’ 덕분에 봄이 되면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The Sorrows of Young Werther)’이 생각난다. 24세의 청년 궤테(Goethe)가 실연(失戀)을 당하고 1776년 1월에서 3월 사이 6주 만에 쓴 자서전적 소설(autobiographical novel)이다.

체험이 없이는 한 줄의 글도 쓸 수 없다던 궤테, 그는 자신의 실연경험과 주변인물들의 사건을 취합하여 그 소설을 썼다. 그는 자신이 열애하던 샤를로테(Charlotte)에게 베르테르(Werther)를 화자(話者)로 하여 자신의 내면의 세계를 표현 하였다.

이 소설은 단번에 베스트 셀러가 되었고 당시 유럽의 상류층 청년들이 관례처럼 하던 Grand Tour에 소설의 태생지인 작은 마을 바이마르(Weimar)가 포함 되었다. 요즘의 문화여행 같은 것이다.

옷 차림도 베르테르처럼 입었고 소설을 모방하여 자살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유명인의 자살 후에 생기는 모방자살을 베르테르 효과 혹은 베르테르 신드럼이라고 한다.

무엇이 사람들을 이처럼 열광하게 했을까? 당시 사회적인 통념에 대하여 엄연히 존재하는 인간 본연의 감정을 피력하였기 때문이라는 게 중론이다.

송(宋)나라의 구양수(歐陽脩)는 ‘매성유시집서(梅聖兪詩集序)’에서 “명시(名詩)는 대개 궁했던 사람들에게서 나온다. 시(詩)가 사람을 궁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궁해진 뒤에야 좋은 작품이 나온다”라고 했다. 마찬가지로 궤테 역시 실연의 아픔이 이 명작을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녀를 나에게서 멀리하게 해주시옵소서.’라고 나는 기도할 수 없네. 그녀가 나의 애인같이 느껴지기 때문이네. 또 ‘그녀를 나에게 보내주시옵소서.’라고도 기도할 수 없네. 그녀는 다른 사람의 여자이기에…” 소설 속에 나오는 편지의 한 구절이다.

이 소설의 줄거리는 이렇다. 감성적인 젊은 베르테르는Wahlheim 마을에서 아름다운 소녀 샤를로테를 만났다. 그녀는 모친의 별세 후, 동생들을 돌보고 있었는데 이미 11살 위인 Albert와 약혼한 사이였다. 약혼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베르테르는 그녀에 대한 사랑에 빠졌다.

수 개월간 친구로 지내다가 그녀를 잊어보려고 그 마을 떠났었다. 다시 마을에 돌아 왔을 땐 그녀는 결혼한 상태이었고 그녀의 남편에 대한 존재를 인정하면서도 고통은 전보다 더했다. 그녀는 베르테르의 사랑을 느끼면서 남편에 충실하기 위하여 베르테르와의 거리를 두게 된다.

삼각관계에서 그 해결은 셋 중 하나가 죽어야 한다는 결론에서 남이 아니라 자신이 죽기를 결심하고 그 녀의 남편에게 먼 여행을 떠나려고 한다며 권총 두 자루를 빌려 달라는 편지를 보냈다. 베르테르의 계획을 알지 못한 그녀는 권총을 베르테르에게 보냈다.

그 총으로 베르테르가 자살을 한 것이다. 그가 편지에서 자주 언급하던 보리수 나무 아래에 매장 되었는데 장례식엔 어떤 성직자도, 샤를로테나 그의 남편도 참석하지 않았다.

소설의 마지막에 샤를로테가 낙담하여 죽었을 것이라는 암시가 있다. “나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을 것이다. 샤르로테의 비탄이나 그녀의 삶이 절망적이었다는 것에 대하여 (I shall say nothing of… Charlotte’s grief…. Charlotte’s life was despaired of,” ) 3/18/16

사월의 노래 / 박목월

목련 꽃 그늘 아래서 베르테르의 편지 읽노라
구름 꽃 피는 언덕에서 피리를 부노라
아- 멀리 떠나와 이름 없는 항구에서 배를 타노라
돌아온 사월은 생명의 등불을 밝혀 든다
빛나는 꿈의 계절아 눈물 어린 무지개 계절아

목련 꽃 그늘 아래서 긴 사연의 편질 쓰노라
클러버 피는 언덕에서 휘파람 부노라
아- 멀리 떠나와 깊은 산골 나무 아래서 별을 보노라
돌아온 사월은 생명의 등불을 밝혀 든다
빛나는 꿈의 계절아 눈물 어린 무지개 계절아

4월의 노래 / 바리톤 김한결

사랑의 테마(The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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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 영화 ◦ 시 ◦ 노래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게 사랑이라는 말일 게다.

사랑에 대한 묘사는 그리스 신화에서부터 시작된다. 이집트신화에 비하여 그리스신화는 훨씬 더 인간적인 감정의 표현들이 많다.

아이러니한 것은 신화에서의 사랑은 시작과 끝이 모두 비극이다. 불후의 명작 ‘로미오와 줄리엣’이 바빌로니아 설화 ‘Pyramus and Thisbe’의 플롯을 차용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럼에도 불에 달려드는 불나방처럼 인간은 모두 사랑을 갈망한다. 베스트 셀러나 명화는 대부분 못다 이룬 사랑이거나 불륜인 것을 보면 그렇다. 그렇다고 해서 김수현작가처럼 인륜에 거슬리는 구도적 이야기까지는 아니다. 스토리에 감정이입(感情移入) 이전에 우선 거부반응이 오기 때문이다.

소설이나 영화의 스토리에서 감정이입이 되면 은연중에 본인이 그 주인공이 된다. 왕자가 나오는 스토리에서는 남자라면 자신이 왕자가 되고 여자라면 공주가 되는 그런 현상 말이다. 때문에 옆집 아무개의 불륜과는 다른 기준설정이 되는 것이다.

사랑을 할 때는 통상 부르던 노래가 다 내 주제가(主題歌) 같다는 생각도 들고, 무심히 바라보던 꽃들도 더 아름답게 보인다. 그래서 여성의 최고의 화장품이 사랑이라는 말이 의학적으로도 일리가 있다. 인체의 모든 감각기관들이 긍정적인 상태로 변한다고 한다.

70년대까지만 해도 동갑끼리의 연애는 결혼에 성공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남자는 군대를 가야 하고 제대 후 취직이 될지는 그때 가봐야 아는 실정이었다. 그렇다 보니 여자의 부모들은 딸 자식 처녀귀신을 안 만들려고 결혼을 재촉할 수 밖에 없었다. 지금이야 만혼(晩婚)이 대세라서 그 때와는 환경이 다를 것이다.

경국지색(傾國之色)이라는 말도 있으니 옛날에도 사랑의 위력은 대단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 사랑을 잃었을 때의 충격은 그와 비례하여 그만큼 크다.

옛날에 유행하던 팝송 중에 Skeeter Davis 가 부른 The end of the world가 있다. 당신의 사랑을 잃었을 때 세상은 끝이 났는데 어째서 태양은 아직도 빛을 내며 조수(潮水)는 어째서 밀려 오는지 그게 알 수 없다는 내용이다. 어디 그뿐이겠는가, 살고 싶은 마음까지도 없어지는 게 사랑의 상처이다.

그러나 그런 아픔의 추억도 없는 것보다는 없는 것보다는 좋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사랑이라는 걸 해 봤으니 말이다.

몇 해 전에 미국 대법원 판사인 오코너 여사가 치매로 요양원에 입원중인 남편(78세)을 간호하기 위하여 사표를 냈었다. 그런데 그 남편은 자기 부인을 알아보지 못한다. 더 기막힌 일은 같이 입원 중인 다른 여자환자와 사랑에 빠져 있었다.

실화 영화인 Away from her도 비슷한 내용이다. 치매 요양원에서 환자들끼리 사랑에 빠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한다. 망각의 질병 속에서도 다시 심어 놓는 게 사랑인 셈이다.

상대의 과거나 어떤 타산적인 계산이 배제된 오직 현재의 모습에서 사랑을 느끼게 되는 것이 치매환자의 사랑일 것이다. I love you because you’re you.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이유는 바로 당신이기 때문’이라는데 그 보다 더 진정한 사랑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진정한 사랑을 찾기 위하여 일부러 치매에 걸리지는 마시라. 3/15/16
cane0913@hanmail.net


The end of the world

두려워 마라, 아직 멀었음이라.

asimo

1999년 미국에서 사회적 불안 심리가 팽배했었다. 소위 말하는 Y2K(Year 2000) 컴퓨터 버그문제 때문이었다.

그 때까지 모든 컴퓨터의 프로그램의 년도 표시가 끝에 두 자리 숫자, 즉 1999년을 99로만 표기 되었는데 2000년 1월1일에는 00으로 돌아 가버리는 문제 때문이었다.

은행의 계좌가 개설 이전으로 돌아가 버리니 잔고가 제로가 될 것이고, 항공이나 선박, 철도의 관제 시스템에 오류가 생겨서 사고가 속출하겠고 정전, 단수가 일어 난다는 것이었다.

그 덕분에 소프트웨어를 업데이트(Update)하는 회사들이나 발전기 제조사들이 돈을 많이 벌었었다. 교외에 사는 사람들은 정전되면 지하수 펌프(Well Pump)가 작동을 안 하여 물을 사용할 수가 없는 이유에서이다.

그러나 그런 씨나리오는 실현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컴퓨터 알파고와의 바둑 대국에서 인공지능에 대한 공포감이 조성되는 것 같다. 다른 것보다 현재의 일자리를 빼앗길 수 있다는 막연한 불안감에서 상당수가 예비 실업자가 된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킬 수도 있다.

기업은 이윤창출이 그 생명이다. 만일 회사에서 근로자 대신 기계를 도입하려면 미국의 경우 7년간의 인건비보다 기계 값이 싸야 한다. 그러나 아직 그런 값의 로봇은 없으며 가까운 장래에도 없을 것이다. 미국의 세제(稅制)에서 생산장비의 감가상각(減價償却, Depreciation)을 7년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개성공단 철수 회사들이 투자금 수십억을 날렸다고 하지만 미국의 세제를 대입하여 7년이 지났다면 생산장비의 자산(Assets)가치는 제로(Zero)가 된다.

2005년 일본 혼다에서 아시모라는 인간 로봇(Humanoid)을 발표 하였다. 인간처럼 걷고, 말하고, 춤추고, 악기를 연주하여 찬사를 받았다. 덕분이 일본이 로봇강국으로 인식되었으나 후쿠시마 원전 사고 때 원전 내부에 들어가서 밸브를 잠글 수 있는 로봇은 없었다. 그게 현실이다.

로봇을 가장 많이 사용하는 곳이 자동차 생산라인이다. 그럼에도 근로자들의 숫자가 많은 것은 로봇의 한계와 그 가격에서의 메리트(Merit)가 없기 때문이다.

friend일반 민수용으로 당장 로봇의 수요가 될 수 있는 곳은 고령자들이나 장애자들의 행동보조를 할 수 있는 로봇이지만 그 역시 가격에 의한 장벽이 높다. 그것을 살만한 노인이나 장애자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하여, 차후에라도 신기술에 의한 새로운 기계가 나왔을 때는 그냥 개발자에게 찬사를 보내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이 좋은 봄날, 기분전환을 위하여 주말에 가족과 함께 봄나들이를 해 보심이 어떨는지? 3/14/16


Sun of Jamaica

바둑 / 인간의 패배라고 할 수 없는 이유.

GO2

호사가들의 이벤트에 대하여 미국신문은 조용한데 한국신문에서는 그렇지가 않다.

물론 대국장소가 한국이고 이세돌 9단이 한국인이라는 것을 감안한다 해도 좀 지나친 면이 있다.

모 신문에서 기사 제목을 ‘인간의 패배’라고 꼭지를 달고 종말론자들 같은 소위 전문가라는 사람들의 논평을 게재하고 있으니 말이다.

인공지능(AI, Artificial intelligence)은 이미 의료, 교육, 경영, 서비스, 제조업, 농업 등등 여러 분야에서 활용하고 있다. 물론 해당분야의 일자리를 기계로 대체한 파급으로 실업자가 생겨 나겠지만 생산성을 제고하면 그 영향은 미미하다.

과거 산업혁명 후에 이와 같은 우려가 대두 되었었다. 그러나 다른 분야에서 노동자를 흡수하였고 제조원가를 낮출 수 있는 여건에 의하여 생필품의 가격이 저렴해져서 저소득층에도 도움이 되었다.

인공지능은 컴퓨터의 계산이나 알고리즘에 의하여 처리된다. 때문에 인공지능이 아무리 발달을 해도 인간의 생각이나 감정, 의식은 처리할 수가 없다. 즉 자아실현이 불가능한 게 기계라는 말이다. 그럼에도 ‘섬뜩하다’는 표현을 하는 것은 인공지능에 대한 이해부족에서 오는 것이다.

알파고의 출현으로 새 기술시대의 서막이라는 표현도 있으나 그보다 더 정교한 기계가 산업현장에서 이미 활용되고 있다. 그럼에도 다른 회사에서 알파고와 같은 기계를 만들지 않는 것은 시장성이 없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에서 알파고를 양산할 계획은 없을 것이다. 광고효과로 투자비는 이미 상계되었다.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바둑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바둑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상류층의 게임으로 무궁무진한 수에 대하여 철학적인 해석을 한다. 바둑은 승패 이전에 사교적인 영역으로 자리매김을 한 것이 그 태생만큼이나 길다.

그럼에도 만일 기원에 수퍼 컴퓨터를 들여 놓는다면 처음에는 호기심으로 사람들이 가겠지만 그 지속성에 대해서는 장담하기 어렵다. 투자대수익이 불분명 하다는 것이다.

가로와 세로 각각 19줄에 의하여 만들어진 361개의 교차점에 돌을 놓을 수 있다. 바둑의 발상지인 중국에서는 위기(圍棋 또는 圍碁) 즉 포위하는 게임(Surround game)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일본에서는go (碁) 혹은 igo (囲碁)로 부른다. 미국에서도 go game 이라 한다.

컴퓨터에 최소 361개의 watch dog를 각 교차점에 배열하고 거기에서 파생될 수 있는 수들을 방대한 데이터에 의하여 대응하도록 한 것이 그 프로그램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 한 사람과 361개의 훈수 꾼을 거느린 컴퓨터와의 게임은 애초부터 공정한 것이 못 된다.

올림픽 메달리스트가 나중에 도핑테스트에 걸려서 그 자격을 박탈 당하는 것처럼 기계와의 대결에 큰 의미를 둘 이유가 없다는 게 내 생각이다.

바둑을 수담(手談)이라고도 한다. 내가 좋아하는 명칭이다. 그 수담에는 피아간(彼我間)에 실수도 있고 또 그것을 극복하기도 하는 묘미에서 인생이 있고 서로 철학을 공유하면서 친분을 쌓게 되는데 그걸 컴퓨터와 하려는 사람이 있을지 그게 의문이다. 3/12/16

춘심(春心)을 두견(杜鵑)이 먼저 아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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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계(四季)가 분명한 곳에서 사는 것도 축복 중의 하나다. 계절에 따라 긴장도 하고, 이완도 하면서 은연중에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자정작용(自淨作用)이 있기 때문에 그렇다.

엄동설한(嚴冬雪寒)이 아니라면 봄을 기다리는 마음 또한 그렇게 간절하지는 않을 것이다. 기다림에는 희망이라는 의미가 내재(內在)되어 있으니 봄이 되면 누구나 다 작은 소망 하나를 이룬 셈이다.

어느 날 갑자기가 아니라 기다림 후에 얻어 지는 것, 그 환희(歡喜) 역시 상대적으로 클 것이라 생각된다.

매운당(梅雲堂) 이조년(李兆年)의 다정가(多情歌)엔 봄의 정경이 다 들어 있다. 휘영청 달 밝은 밤에 하얀 배꽃, 거기에 초롱초롱한 은하수가 하늘을 장식하고 있는데 두견의 울음소리, 설령 시인이 아닐지라도 뭔가를 써 보고 싶은 충동이 일어날 만 하다. 달 빛에 잘 어울리는 꽃이 또 있다. 박꽃이나 메밀 꽃이 그렇다.

꽃은 가끔 철없이 피기도 하지만 짐승들은 그런 실수가 없다. 생겨날 새끼들이 무난히 성장할 수 있는 기후를 계산하여 짝짓기를 한다. 일면 신기하기도 하지만 사실은 그들이 현자(賢者)일지도 모른다.

애절하게 우는 두견의 소리에 옛 시인들이 시정(詩情)을 일으키는 것은 당연하겠지만 두견은 탁란(托卵)을 하는 새라서 새끼는 다른 새가 키운다. 그것도 입양된 어미의 새끼는 둥지 밖으로 밀어내어 죽게 만드는 좀 고약한 DNA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나는 그 새를 별~로 안 좋아한다.

이곳엔 두견대신 딱따구리가 봄의 전령이다. 두견처럼 구슬피 우는 게 아니라 목탁을 두드리며 봄을 맞으니 훨씬 개운하다. 신방(新房)을 꾸미려고 나무에 구멍을 뚫는 소리이다.

집을 크게 멋지게 만들어야 짝을 쉽게 찾을 수 있다고 한다. 딱따구리도 어쩔 수 없는 속물(俗物)인 셈이다. 아직 그 녀석들이 조용한 걸 보면 봄은 아니다. 그럼에도 이곳 날씨는 섭씨 25도이다.

봄이 되면 흔히 봄은 왔으나 봄 같지 않다(春來不似春)는 말을 한다. 그러나 내가 늙으며 보니 봄은 갈수록 반가운 계절이 되는 것 같다. 우선은 기후가 따뜻해지니 좋고, 새 순을 내는 나무며, 새 싹을 내는 풀들이나 꽃들이 반갑고 또 사랑스럽다. 녹색(綠色)도 더 선명해지는 것 같다.

多情歌 _ 梅雲堂 李兆年(1269년~1343년)

이화(梨花)에 월백(月白)하고 은한(銀漢)이 삼경(三更)인제
일지춘심(一枝春心)을 자규(子規)야 알랴마는
다정(多情)도 병(病)인양 하여 잠못들어 하노라

梨花月白三更天 (이화월백삼경천)
啼血聲聲怨杜鵑 (제혈성성원두견)
儘覺多情原是病 (진각다정원시병)
不關人事不成眠 (부관인사부성면)

말 없이 왔다가 다시 말없이 떠나는 그 계절들 속에서 우리는 그렇게 늙어가고 있는 것이다. 내년 이맘때가 되면 또 다시 초조하게 기다릴 봄이 이제 문턱에 와 있다. 봄이여 어서 오소서. 3/8/16

Moonlight on The Colorado.

 

04

살구꽃이 필 때.

---“살구꽃이 처음 피면 한 번 모이고, 복숭아꽃이 처음 피면 한 번 모이고, 한여름에 외가 익으면 한 번 모이고,

초가을 서늘할 때 서지(西池)에서 연꽃 구경을 위해 한 번 모이고, 국화가 피면 한 번 모이고, 겨울철 큰 눈이 내리면 한 번 모이고,

세모(歲暮)에 분매(盆梅)가 피면 한 번 모이되, 모임 때마다 술ㆍ안주ㆍ붓ㆍ벼루 등을 설비하여 술 마시며 시 읊는 데에 이바지한다.

모임은 나이 적은 사람부터 먼저 모임을 마련하여 나이 많은 사람에 이르되, 한 차례 돌면 다시 그렇게 한다.
아들을 낳은 사람이 있으면 모임을 마련하고, 수령으로 나가는 사람이 있으면 마련하고, 품계가 승진된 사람이 있으면 마련하고, 자제 중에 과거에 급제한 사람이 있으면 마련한다.”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이 쓴 ‘죽란 시사첩(竹欄 詩社帖)’의 서문(序文) 중 일부이다. 다산의 나이에서 아래, 위로 네 살 범위내에서 15인으로 친목계를 만들었다. 하필이면 같은 시대에 같은 나라에서 태어나서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기에 그 정을 나누자는 게 친목계의 목적이었다.

자연을 칼렌다(calendar)로 삼은 그의 발상(發想)에서 낭만(浪漫)과 정감(情感)이 배어 나온다.

당시 남인들은 벽파에 밀려서 거의 벼슬을 못하고 있었다. 황인경의 소설 목민심서에 윤지눌 선비의 이야기가 나온다. 형편이 어려워서 친구들의 술만 얻어 먹어야 했든 남편이 고민하는 것을 본 부인이 집을 팔자는 제의를 했다.

집 팔아서 술값을 댄다는 게 말이 안 되었지만 부인은 지혜로운 여자였었다. 흉가는 집값이 싸니 이 집을 팔아서 사면 돈이 남을 것이라는 논지인데, 대신 친구들이 관복을 입고 와서 밤샘을 해 주어야 귀신을 쫓아 낼(防) 수 있다는 것이었다.

부인의 계획대로 집을 팔고 흉가로 이사하려고 도배를 했는데 다음 날 가보니 도배며 창호가 다 찢어져 있었다. 도배 꾼들이 무서워서 못하겠다고 도망을 갔다. 다시 도배를 하고 이사를 하여 친구들을 불러다가 방(防)을 한 후에는 그런 문제가 안 생겼다.

부인의 기지로 더 크고 좋은 집으로 싼 값에 집을 늘려간 셈이 되었다. 윤 선비는 본인 몫은 물론 친구들의 외상 술값까지 다 갚아 주는 호기까지 누릴 수 있었다.

옛날 한국에서 복부인들이 유행 했었다. 대부분 그들을 비난 했지만 나는 그들이 사업가라는 생각이었다. 돈이 될 몫을 용케 알아 본 사람들이고 그게 사업가적인 안목이니 그렇다.

이야기가 딴 곳으로 흘렀지만 나는 고향의 봄 노래를 들으면 내 고향이 눈에 선하다. 노래에 나오는 그 살구나무가 우리 동네에 많았기 때문이다. 학교를 파하고 집에 돌아 오다 보면 화사한 살구꽃이 아침보다 더 많이 피어 있고는 하였었다.

살구의 신 맛, 어쩌면 다산도 18년간의 강진 유배생활에서 그 신 맛을 그리워했을지도 모른다. 이제 곧 살구꽃이 필터인데 그 죽란시사의 회원들은 그것을 알고나 있을까? 3/3/16

(배경음악은 노부부가 연주한 것입니다. 남편은 키보드, 부인은 오까리나, 유 투브에 올린 것을 MP3로 컨버트하여 올립니다. 노년의 삶, 이 정도라면 만점이 되겠지요?)

cane0913@hanmail.net

꽃에도 관상(觀相)이 있다.

nari200이제 곧 봄의 전령인 화신(花信)이 올 때가 되었다. 꽃은 이목구비(耳目口鼻)가 없는데 무슨 관상이 있으랴마는 꽃마다 묻어나는 분위기가 있다.

거기에 더하여 전해오는 꽃의 전설(Legend of the Flower)은 대부분 사랑이야기이거나 슬픈 이야기들이니 꽃 앞에서는 경건한 마음이 되기도 한다.

불교의 연꽃이나 부활절의 백합처럼 종교적인 꽃도 있다. 꽃은 군락(群落)지어 피는 것이 더 아름다운 것도 있고, 홀로 피는 게 더 제 멋이 나는 게 있다.

사람마다 취향이 다르겠지만 내가 칸추리 보이(country boy)인 탓인지 화분에서 흔히 보는 고급스런 꽃들은 별로다.

몇 해 전, 이곳 산에서 나리꽃을 보고 얼마나 반가웠든지 마치 고향에 온 기분을 느꼈었다. 고향의 산에서 종종 보던 꽃이기 때문이다. 초록의 풀밭에서 홀로 빨간색으로 우뚝 솟은 나리꽃은 성깔이 있으며 도도한 여인을 연상케 한다. 미국에서는 빨간 머리와 얼굴에 죽은깨가 있는 여자는 성깔이 있는 여자라는 속설이 있다.

나는 하얀 코스모스가 좋다. 요염하지도 화려하지도 않으며 고급스럽지도 또 그렇다고 천하지도 않은 그 편한 모습 때문이다. 키는 멋없이 크나 그걸 감당 할 만큼 줄기나 잎새가 공학적으로 설계된 그런 모습이 좋다.

동서를 막론하고 꽃을 여자로 비유한 글들이 많다. 아름답기 때문이리라. 흔히 말하는 꽃처럼 아름다운 여인이란 외모가 전부는 아니다. 크레오파트라도 절세미인이 아니었으며 고종이 사랑한 여인도 민비가 아니라 엄상궁이었으니 그 점은 동서가 마찬가지인 것 같다.

date300그럼 외모가 아닌 그 무엇이 여성의 매력을 더 하는 것일까?

사실 그 답은 나도 모른다. 사람마다 그 관점이 서로 다르겠지만 설령 안다 해도 그걸 말하면 당장 ‘당신 주제파악이나 제대로 해라’는 말이 나올 것 같아서 입을 다물 것이다.

다만 재벌 2세들이 유명 여배우와 결혼 후에 이혼하는 것을 보면 외모보다는 그 내면(內面)이 더 중요하다는 말일 텐데 어쩌다가 한국이 성형대국이 되었는지 그게 걱정이다. 사랑을 하게 되면 곰보자국도 보조개로 보인다는데 본인 고유의 개성미를 지우고 ‘탤런트 아무개처럼’ 만들었으면 직업도 그렇게 바꾸는지도 궁금하다.

사랑의 여신 비너스(Venus)는 금성에서 따 온 말이다. 일몰(日沒) 직후와 일출(日出) 직전에 볼 수 있는 가장 밝은 별이다. 그래서 동양에서는 계명성(啓明星), 영어에서는 Evening Star 혹은 Morning Star라 부른다.

국화 앞에서 / 김재진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더 많은 사람들은 모른다.
귀밑에 아직 솜털 보송보송하거나
인생을 살아도 헛살아 버린
마음에 낀 비계 덜어내지 못한 사람들은 모른다.

사람이라도 다 같은 사람이 아니듯
꽃이라도 다 같은 꽃은 아니다.
눈부신 젊음 지나
한참을 더 걸어가야 만날 수 있는 꽃.

국화는 드러나는 꽃이 아니라
숨어 있는 꽃이다.
느끼는 꽃이 아니라 생각하는 꽃이다.
꺾고 싶은 꽃이 아니라 그저
가만히 바라보는 꽃이다.

살아갈 날이 살아온 날보다 적은
가을날 국화 앞에 서 보면 안다.
산다는 것이
얼마나 많은 굴욕을 필요로 하는가를.

어쩌면 삶이란 하루를 사는 것이 아니라
하루를 견디는 것인지 모른다.
어디까지 끌고 가야 할지 모를 인생을 끌고
묵묵히 견디어내는 것인지 모른다.

3/1/16
cane0913@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