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뉴턴’나 같은 죄인 살리신’

단풍옷입은우리교회

나같은죄인살리신주은혜놀라워

잃었던생명찾았고광명을얻었네

큰죄악에서건지신주은혜고마워

나처음믿은그시간귀하고귀하다

이제껏내가산것도주님의은혜라

또나를장차본향에인도해주시리

거기서우리영원히주님의은혜로

해처럼밝게살면서주찬양하리라

존뉴턴의‘나같은죄인살리신’
영국성공회사제인존뉴턴신부는그의나이54세되던1779년“다윗왕이여호와앞에들어가앉아서이르되여호와하나님이여나는누구이오며내집은무엇이기에나에게이에이르게하셨나이까하나님이여주께서이것을오히려작게여기시고또주의집에대하여먼장래까지말씀하셨사오니여호와하나님이여나를존귀한자들같이여기셨나이다”(역대상17:16〜17)의말씀을바탕으로‘나같은죄인살리신(Amazinggrace)’을작사했습니다.

이찬송은자신의죄,즉아프리카에서흑인들을마구잡이로잡아다가미국남부농장에팔던일,노예선선장으로서노예들이반란을일으킬까봐발과손에착고를채워배의갑판에생선을잡아말리듯,노예들을죽인죄를회개하는마음에서고백했던기도를적은것입니다.흑인노예무역에관여한것을깊이후회하고,모든죄를사하여준하나님의은총에감사하는마음을담고있습니다.

존뉴턴은1725년영국런던에서상선을탔던가톨릭교도인아버지와독실한개신교도인어머니에게서태어났습니다.모친은그를성직자로키우려했으나,그가겨우6세였을때결핵으로사망합니다.그후아버지가바다에가있는몇년동안은사이가좋지못한계모의손에자랐고,부당한대우를받았던선원학교에한동안다니게됩니다.11살때부터존뉴턴은상선의선원인아버지를따라도제로배를탔으며,여러곳을다녔습니다.특히그는흑인노예를수송하는소위노예무역에종사했습니다.당시노예로납치된흑인은가축이하의대우를받았고,수송선의위생상태가열악해목적지에도착하기전에간염,탈수증,영양실조등으로부지기수가사망했다고합니다.

존뉴턴도노예에대한이러한대우를당연하게생각했지만,1748년5월10일그가22세일때전기를맞이하게됩니다.선장이된그가탄배가폭풍우를만나좌초될위기에빠지게됩니다.이에그는하나님에게기도를드리게됩니다.모친이독실한개신교신자였어도,이전까지마음에서우러난기도는이때가처음이라고합니다.배는기적적으로폭풍우를벗어났으며무사히귀선합니다.1755년존뉴턴은병을이유로하선하였고,면학에매진해성공회사제가됩니다.뉴턴신부의설교와저술의주제는언제나‘주의놀라우신은혜’였습니다.

백인의언어와문자그리고기독교를일부수용함으로써‘문명화된다섯인디언부족’이라고평가받은부족중의하나인체로키부족도이노래를애창했습니다.1838년에시행된미국의강제적인인디언이주는이후오클라호마주가되는지역에강제로체로키부족을이동시키는정책으로‘눈물의길’로불렸습니다.1만5천명체로키부족민중약4천명이사망한힘든이주도중힘을북돋워주기위해체로키어로번역된이노래가불렸고,이후체로키의애국가가되었습니다.죽은자를땅에묻으며살아남은자의용기를북돋우는노래,고난과슬픔을삭이고승화시킨노래가바로‘나같은죄인살리신’이었습니다.

남북전쟁(1861년~1865년)기간에도이찬송은남북양군모두에의해불렸던아이러니한일화도있었습니다.1960년대흑인시민운동과베트남전쟁을반대하는반전운동에도어김없이‘어메이징그레이스’가불리었습니다.찬송가의여왕마헬리아잭슨은시민운동의행진가로이노래를불렀습니다.이찬송은빼앗기고고통당하는이들을위로하고용기를북돋아주는노래가되었습니다.마틴루터킹목사가워싱턴링컨기념관앞에서자신의꿈을이야기했던그날에도,남아프리카공화국의넬슨만델라가석방되었을때에도이찬송은울려퍼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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