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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불문 파멸로 이끄는 ‘달콤한 연인의 덫(Honey Trap)’

1986년 이스라엘의 디모나 핵시설에서 일했던 기술자 모르데차이 바누누(Vanunu)는 이스라엘의 비밀 핵 개발에 관한 증거사진과 자료를 들고 영국 일간지 더 타임스의 런던 편집국을 찾아갔다. 기자들은 바누누를 근교의 안가에 은신토록 하고 추가 취재에 들어갔다. 조바심이 난 바누누는 놀이공원에 놀러갔다가 신디라는 이름의 미국인 여성을 만났다. 바누누가 “신디와 함께 일주일간 로마 여행을 다녀오겠다”고 했을 때, 더 타임스 기자들이 막을 방법은 없었다. 하지만 바누누는 로마에 도착한 뒤 이스라엘 해외정보국 모사드 요원들에 붙잡힌 뒤 약물 중독 상태로 이스라엘로 보내졌고, 18년형을 살았다. 그 중 11년은 독방 신세였다. 신디는 셰릴 본 토브(Tov)라는 이름의 모사드 요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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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pyright – Ronald H. Miller.
2004년 4월 21일, 반역죄로 18년 수감 생활을 마감한 뒤 예루살렘 성 조지 성당 뜰에 선 모르데차이 바누누. 그는 이스라엘의 비밀 핵개발을 폭로하려다 모사드 여성 요원에게 유혹당해 이스라엘로 압송된 뒤, 18년 감옥생활 동안 11년을 독방에서 보냈다. 현재도 사실상 가택연금 상태로, 외국인과의 접촉이 전면 금지돼 있다.

◆파멸로 이끄는 달콤한 ‘연인의 덫(Honey Trap)

작년 영국 정보국 MI5는 영국내 은행·기업·금융기관 등에 ‘중국 스파이의 위협’이라는 제목의 14쪽짜리 보고서를 보냈다. 여기에는 중국 인민해방군 등이 성적(性的)으로 핵심 인사들을 유혹해 “장기적 관계”를 맺으려는 다수의 사례들이 포착됐다고 경고하는 내용이 포함됐다. 첩보전의 세계는 성(性)을 무기로 써온 역사가 깊다. 외교전문지 포린폴리시(FP) 온라인판은 최근 ‘연인의 덫(honey trap)’으로 불리는 첩보활동 방식을 재조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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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세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프로푸모 스캔들’의 주인공 크리스틴 킬러. 킬러는 옥스퍼드대를 나온 전쟁영웅 출신의 스타 정치인 존 프로푸모 전쟁장관과, 런던 주재 러시아 대사관의 잘생긴 해군 무관 예브게이 이바노프 두 사람 모두의 정부였다. 이바노프는 이후 소련으로 돌아간 뒤 영국 언론의 호들갑을 조롱하며 "당신 같으면 ‘오, 내사랑, 그런데 이번에 핵무기는 독일 어디에 배치되는 거예요?’하고 묻겠느냐"고 말했다. 하지만 당시 크리스틴의 조사기록에는 그녀가 일반 대중에게 익숙치 않은 핵이나 안보 관련 용어를 예사롭게 사용하는 등 의혹의 여지가 컸던 것으로 나온다. 그녀의 이야기는 영화나 논픽션으로도 다수 만들어졌다.

◆유혹은 남녀불문

1960년대 영국 일간지 데일리 텔레그래프의 모스크바 특파원 제레미 울펀든(Wolfenden)은 남자에게 유혹당한 경우다. 소련 정보국 KGB는 울펀든이 동성애자라는 걸 알고 외무부 이발사를 그에게 접근시켰다. 증거사진을 확보한 뒤엔 모스크바의 미국·유럽인들 사이에서 첩자 노릇을 하도록 협박했다. 이를 눈치챈 영국 비밀정보국(SIS)는 그를 이중간첩으로 활용했다. 울펀든은 결국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하고 알콜중독 상태에서 낙상(落傷)해 사망했다.

◆구 동독, 국가차원에서 ‘연인의 덫’

구 동독 정보국 슈타지의 수장이었던 마르쿠스 볼프(Wolf)는 국가 차원에서 ‘연인의 덫’을 쳤다. 그가 훈련시킨 여성 첩보원들은 나토의 핵무기 배치 정보를 빼오고, 헬무트 슈미트 당시 독일 총리 사무실에 직원으로 취직할 정도로 독일 사회 깊숙이 침투했다.
FP는 이밖에 1차 세계대전 때 독일에 고용된 여성 첩보원으로 프랑스의 기밀을 팔아넘겼던 마타 하리(Mata Hari), 1960년대 초 영국 전쟁장관과 러시아 대사관 해군 무관 양쪽의 정부(情婦)였던 크리스틴 킬러(Keeler) 등의 사례도 소개했다.

모사드, 공포와 효율의 암살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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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살당한 아들 마무드 알 마부의 사진을 들고 있는아버지.ⓒAF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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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08년 8월 1일 무하마드 술레이만(Suleiman) 장군은 시리아 북부의 지중해변 휴양지 타르투스의 한 빌라 뒷뜰에서 일광욕을 즐기고 있었다. 따뜻한 햇볕이 내리쪼였고, 주변은 조용하고 평화로웠다. 빌라 문 앞엔 무장한 경호원들이 물 샐 틈 없이 경비를 섰다. 그 때 빌라 앞 바다 위로 작은 요트 한 척이 느리게 미끄러지듯 지나갔다. 갑자기 술레이만 장군이 쓰러졌다. 저격수의 총알이 머리를 관통한 것이다. 현장 즉사였다. 누구도 총성 조차 듣지 못했다. 술레이만은 바샤르 알 아사드(Al-Assad) 시리아 대통령의 안보 보좌관이자, 북한과의 핵프로그램 협력 연락책을 맡은 시리아 권부의 핵심 인사였다. 시리아 당국은 “모사드 저격팀의 소행”이라고 했다. 아무도 이 발표를 의심하지 않았다.

#2

앞서 2008년 2월 12일, 레바논 무장정파 헤즈볼라의 핵심 지도자 이마드 무그니예(Mughniyeh)는 시리아 수도 다마스커스의 크파르 수세 거리 주차장에 세워 놓은 자신의 은색 미츠비시 파제로 승용차에 올라탔다. 헤즈볼라는 2006년 남부 레바논에서 이스라엘군과 전면전을 벌였던 무장조직. 무그니예는 이란 대사가 주재한 ‘이란 이슬람 혁명 29주년 기념 리셉션’에 참석했다 돌아가는 길이었다. 운전석 쿠션에 머리를 기대고 심호흡을 했을 때 쿠션 속에 심어둔 폭탄이 터졌다. 무그니예의 머리는 문자 그대로 ‘작은 핏덩어리들로 잘게 부서졌다(shattered into bloody pieces)’. 다마스커스는 시리아 정부의 비호 아래 헤즈볼라 핵심 지도자들이 망명 지도부를 세운 곳이다. 무그니예 암살 이전엔 헤즈볼라의 ‘안전지대’였다. 무그니예는 1983년 베이루트 미 해병대 막사 폭탄 테러와 미국 대사관 폭탄 테러로 350명 이상의 사망자를 냈다. 9·11테러로 오사마 빈 라덴이 그를 앞서기 이전엔 가장 많은 미국인을 죽인 테러리스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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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라덴의 9.11 테러 이전 미국인을 가장 많이 죽인 레바논 헤즈볼라의 무장조직 지도자 이마드 알 무그니예.그는 안전지대로 여겨지던 시리아 수도 다마스커스에서 승용차 운전석 머리 쿠션에 심어놓은 폭탄이 터져 사망했다. 모사드의 암살임을 의심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Ha’aretz

"지략이 많으면 백성이 평안을 누리느니"

“지략이 없으면 백성이 망하여도 지략이 많으면 평안을 누리느니라.(Where no stratagem is, the people fall; but in the multitude of counsellors there is salvation)” 공식 명칭이 ‘이스라엘 정보 및 특수작전국’인 모사드의 휘장에는 구약성서 잠언 11장 14절의 구절이 새겨져 있다. 실제로 모사드는 이집트나 요르단과의 수교, 이라크와 시리아의 핵시설 공습 등 외교나 분쟁의 무대 뒤에서 적지 않은 기여를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모사드의 역사 전체를 살펴보면, ‘지략’보다는 ‘공포’나 ‘암살’ 같은 어두운 단어를 먼저 떠올리게 된다. 1월 19일 두바이에서 발생한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 간부 암살 사건을 계기로 세계가 다시 모사드의 행보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중동에서 암살 사건이 벌어진 뒤, 모든 아랍국과 이란이 모사드가 암살의 배후라고 비난하는 것은 흔한 풍경이다. 하지만 이를 증명해내는 일은 거의 드물다. 이스라엘 채널2 TV는 술레이만과 무그니예가 암살된 2008년 연말 메이어 다간(Dagan) 모사드 국장을 ‘올해의 인물’로 선정했다. 다간 국장에 대한 이스라엘 현지 여론은 대개 찬사 일색이다. 영국 일간지 더 타임스는 무그니예의 장례식이 열린 날 에후드 올메르트(Olmert) 당시 이스라엘 총리가 다간 국장을 은밀히 만나 그의 노고를 치하했다고 보도했다. 하산 나스랄라(Nasrallah) 헤즈볼라 지도자는 무그니예의 장례식에 영상 메시지를 보내 “(모사드) 너희는 국경을 넘었다. 시오니스트들, 너희들이 전면전을 원한다면, 어디서건 전면전으로 맞서 주겠다”고 경고했다. 사실상의 선전포고였다. 레바논의 고위 이슬람 성직자 모하마드 후세인 파드랄라(Fadlallah)는 "저항 운동의 기둥 하나를 잃었다"고 탄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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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살자들은 두바이 최고급 호텔 알 부스탄 로타나에서 반바지 차림에 테니스 라켓까지 들고 하마스 간부 알 마부의 뒤를 쫓아 투숙 객실을 확인하는 대담함을 보였다. ⓒDubai Police via gulfnews

"중요한 건 이스라엘이 지구상에 존재해야 한다는 사실"

이스라엘은 국민 대다수가 “국가의 존재를 위해”라는 이유로 암살에 찬동하는 지구상 거의 유일한 나라다. 암살에 대한 유대인들의 ‘긍정적’ 인식을 확인시켜주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이스라엘이 독립한 뒤 7년이 지난 1955년, 저명한 평화운동가이며 철학자인 예샤야후 레이보비츠가 이스라엘 건국의 아버지 격인 다비드 벤 구리온(Ben Gurion) 당시 총리 앞으로 편지를 보냈다. “무고한 팔레스타인 인들이 이스라엘의 군사·정보 작전에 의해 매일 죽어가고 있다. 용납될 수 없는 일이다.” 벤 구리온의 대답은 간명했다. “나는 당신의 주장에 동의할 수 없다. 세상이 평화, 화해, 정의, 정직 같은 말들로 가득찬다면 물론 좋은 일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 이스라엘이 그 세상 위에 존재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정보전의 세계에서 모사드는 전설적 존재다. 소련과 미국의 정보기관들이 최고의 요원들을 동원해 맞서던 냉전 시대에도 미 중앙정보국(CIA) 조차 모사드의 정보력에 의존했다. 1956년 모사드는 니키타 후르시초프(Khrushchev)의 비밀 문건을 빼냈다. 후르시초프가 육성으로 요세프 스탈린(Stalin)의 인명 학살을 범죄라며 비판하는 내용이었다. 중동의 군사 강국들에 둘러싸여 국가 존재 자체를 위협받던 1966년, 모사드는 이라크에서 미그21 전투기를 빼돌려 이스라엘 본토로 실어왔다. 미그21은 유사시 이스라엘 본토 공습에 사용될 중동 국가들의 주력기였다. 1981년 이스라엘의 F16 전투기들이 핵개발 의혹을 받던 이라크 오시라크 원자로를 폭격했을 때도, 적국 내에 침투해 정보를 빼내 길을 열어준 모사드 요원들의 활약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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뮌헨 올림픽에서 살해된 이스라엘 대표선수 11명의 복수를 위한 지상 최대의 암살작전 ‘신의 분노’ 작전을 그린 영화 ‘뮌헨’의 한 장면. 골다 메이어 당시 이스라엘 총리는 정부 내에’X위원회’를 조직해 직접 암살 대상자 명단을 검토하고 승인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Universal Pictures

검은 9월단을 말살하라 : ‘신의 분노’ 작전

세계가 모사드의 이름에 공포를 느끼는 가장 큰 이유는 무엇보다도 ‘지상 최고 효율의 살인 기계’(미국 독립라디오 방송 렌스닷컴)로 불리게 한 암살의 역사 덕이다.
가장 유명한 건 원조 ‘철의 여인’ 골다 메이어(Meir·1898~1978) 전 총리가 승인한 ‘신의 분노(Wrath of God) 작전’이다. 1972년 뮌헨 올림픽 때 팔레스타인 무장단체 ‘검은 9월단’이 이스라엘 선수단 숙소를 습격해 국가대표선수 11명을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한 직후, 모사드와 이스라엘 방위군(IDF)은 최고의 정예 요원들을 뽑아 암살단을 조직했다. 학살 사건을 실행한 검은 9월단 조직원은 물론, 기획 과정에 연루된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의 고위 관계자들이 목표물이었다. 메이어 총리는 전쟁 영웅 모셰 다얀(Dayan) 국방장관과 함께 ‘X 위원회’라는 특별기구를 정부 내에 조직해 직접 암살 대상자를 선정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스라엘 암살단은 이후 약 20여년에 걸쳐 세계 곳곳에서 테러 관련자들을 추적해 독살, 총격, 폭살 등 상상조차 하기 힘든 다양한 방법으로 죽였다. 이 과정은 스티븐 스필버그(Spielberg)의 영화 ‘뮌헨(2005)’에도 그려졌다. 모사드는 앞서 1960년대에는 이집트의 미사일 개발 프로그램을 도와준 독일 과학자들에게 폭탄 편지를 보내 다수를 살해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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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세르 아라파트의 손발과 같았던 남자, 칼릴 이브라힘 알 와지르, ‘아부 지하드’. 아라파트와 함께 현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집권당인 파타당의 창설자 중 한 명이며, 초기PLO 무장투쟁의 뛰어난 지도자였다.

1987년 튀니지에서 발생한 PLO 지도자 칼릴 알 와지르(Wazir) 암살 사건은 모사드가 실행한 것으로 여겨지는 여러 암살 사건 중에서도 가장 스펙터클했던 것으로 꼽힌다. 알 와지르는 ‘아부 지하드(이슬람 성전의 아버지)’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PLO 핵심 중 핵심이었다. 독일 주간지 슈피겔의 최근 보도에 따르면, 당시 30여명의 모사드 요원은 작은 보트에 나눠 타고 튀니지 해안을 통해 침투했다. 몇몇은 관광객으로 가장해 아부 지하드의 집에 접근했다. 몇 명은 튀니지 군복을 입고 거리를 봉쇄했고, 하늘에는 이스라엘 공군이 보잉707 전자전기가 떠서 지상의 모든 통신을 방해했다. 암살단은 아부 지하드의 집에 침투한 뒤 아내와 아이들의 눈 앞에서 그의 몸에 70여발의 총알을 박아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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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바이 경찰이 공개한 용의자들의 암살사건 전후 두바이 입출국 흐름도. ⓒDubai Police via The National

아내와 자식들 눈 앞에서 총알 70발 ‘벌집’으로

1995년 팔레스타인 테러조직 ‘이슬람 지하드’ 지도자 파티 시카키(Shikaki)는 지중해 휴양지 몰타에서 암살됐다. 모사드로 추정되는 암살자들은 두달 전 미리 훔쳐둔 현지 모터사이클을 타고 시카키의 머리에 정확히 세 발의 총탄을 쐈다. 암살자들은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 1996년 가자지구에서 발생한 하마스 폭탄 전문가 예히예 아이야시(Ayyash) 암살 사건은 최초로 휴대전화 폭탄이 사용된 것으로 유명하다. ‘기술자’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아이야시는 자기 휴대전화에 심어진 폭탄이 폭발해 죽었다. 당시 그의 먼 친척이라는 19살 청년이 아이야시의 집을 방문했고, 집에 전화하겠다며 휴대전화를 빌린 뒤 폭탄을 심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2004년에는 시리아 수도 다마스커스에서 하마스 지도자 이즈 엘딘 수비 셰이크 칼릴(Khalil)이 차량 폭탄으로 암살됐다.

“테러 공격을 기획한 자들을 죽이면 테러를 막을 수 있다. 테러리스트를 죽이는 것이 마냥 유쾌한 일은 아니다. 체포할 수 있다면 그것도 좋다. 하지만 그들이 우리의 통제 밖 영토에 있고, 이스라엘 젊은이들의 생명을 위험에 빠뜨리면서 그들을 체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우리는 죽여버리는 것을 선호한다.”
메이어 다간(Dagan) 모사드 국장은 암살 정책을 비난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유대인·이스라엘 전문 미디어 JTA 통신은 보도했다. 슈피겔은 두바이 암살사건에 대해 “모사드가 실행한 것이 맞다면, 그들은 국제법 위반, 온건한 아랍국과의 관계 악화, 핵심 요원들의 신원이 노출될 위험을 모두 무릅쓴 것이다. 이란의 핵 프로그램으로 이스라엘의 안보가 어느 때보다 위험에 처한 가운데, 모사드는 이스라엘을 지키기 위해 이전보다 더 큰 위험을 감수하고 더 과감해질 수 있음을 과시했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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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면을 한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 조직원들이 지난 2월 17일 가자지구 베이트 라히야에서 두바이에서 암살된 무장조직 ‘이즈 알 딘 알 카삼 여단’ 창설자 마무드 알 마부의 추도식을 열고 이스라엘 국기를 밟으며 헌화하고 있다.ⓒAP

※ 주간조선 2095호(3월 6일자)에 게재한 글입니다.

두바이 암살의 총지휘자? 메이어 다간 모사드 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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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략이 없으면 백성이 망하여도 지략이 많으면 평안을 누리느니라(Where no stratagem is, the people fall; but in the multitude of counsellors there is salvation.)" 모사드의 휘장에는 구약성서 잠언 11장 14절의 구절이 새겨져 있다.

이스라엘 텔아비브 북부 교외의 야트막한 언덕에 가면,현지에서 ‘미드라샤(Midrasha˙유대학교)’라 불리는이스라엘 정보 및 특수작전국, ‘모사드’의 건물이 있다.메이어 다간(Dagan·65) 모사드 국장 방에는 나치 친위대(SS) 장교의 장총에 머리가 겨눠진 채 도랑 끝에 위태롭게 서 있는 유대인 노인의 사진이 있다. 다간의 할아버지다. “이스라엘은 강해져야 한다. 머리를 써야 한다. 스스로를 지켜야 한다. 다시는 홀로코스트가 반복되지 않도록.” 다간 국장은 입버릇처럼 이렇게 말한다.

◆다간, 거리에서 잔뼈가 굵은 정보전사(戰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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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 충격에 빠뜨린 두바이 암살 사건의 배후에는 모사드가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 모사드의 수장(首長)이 다간이다. 영국 출신으로 외교관 파티에서 오래 수다떠는 걸로 유명해 ‘칵테일 할레비’라는 별명으로 불렸던온건파 전임자 이프라임 할레비(Halevy)와는 딴판인 강경파다.

다간은 이스라엘방위군(IDF) 공수여단 소속으로 1967년 3차 중동전쟁(6일 전쟁) 당시 골란고원 전투에 참여한 군인 출신이다. 1970~80년대에는 팔레스타인 무장조직을 상대로 비밀작전을 수행하는 특수부대에서 활동했다. 특히 인권 유린과 학살 사건으로 지탄받은 1982년 1차 레바논 전쟁 때는 레바논 내부 정보활동을 전담한 특수부대를 지휘했다. 레바논전의 야전 지휘관이었던 아리엘 샤론(Sharon)과의 인연도 이 때 부터다.

◆인명희생 무릅쓰고 적을 분열시켜라… 작전명 ‘정의의 복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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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엘 샤론 총리(오른쪽)와 메이어 다간 모사드 국장.

퇴역 이후 정부의 테러 대응업무를 맡았던 다간은 2000년 매파 정치인 아리엘 샤론 진영에 국가안보보좌관으로 참여한다. 이 때 입안한 것이유명한 ‘다간 계획(Dagan Plan), 작전명 ‘정의의 복수(Justifed Vengence)’다. 이스라엘최대 일간지 예디오트 아하라노트, 유력지 마리브, 프랑스 르몽드 등의 당시 보도에 따르면 이 계획은 2차 인티파다 당시 줄을 잇던 자살폭탄테러에 대응해 유대인 수백명, 팔레스타인인 수천명의 희생을 무릅쓰고 압도적 물리력으로 보복에 나설 것을 제안했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PA)의 내부 분열을 유도하는 것은 물론, 야세르 아라파트(Arafat) PA 수반의 정치적 혹은 물리적 ‘제거’까지 포괄하는 광범위한 내용이었다.

결과적으로 다간의 구상대로, 팔레스타인 정파인 파타와 하마스는 요르단강 서안과 가자지구에 분리·고립됐다.두 세력은 하마스가 장악한 가자지구에서 총격전까지 벌이며 피를 흘렸다. 적전분열이다.다간은 또 샤론 총리와 함께 가자지구에서 유대인 정착민 7000여명을 완전 철수시키는 작업도 밀어붙였다. 유대인 정착민들이 전부 소개된 뒤, 이스라엘은 가자지구를 완전히 봉쇄했다. 가자지구는 지금하늘 아래 가장 거대한 ‘감옥’이다. 작년초 1000명 이상의 팔레스타인인 사망자를 낸이스라엘의 일방적 가자지구 공세, ‘캐스트 리드’ 작전도 다간과 샤론이 정착민을 미리 철수시켰기에 가능했다.

◆"이스라엘은 여러분을 믿고 있소. 행운을 빌겠네."

지난 1월초, 두 대의 검은색 아우디 A6 리무진이 모사드 본부 건물 정문을 통과했다. 차에서 내린 사람은 베냐민 네타냐후(Netanyahu) 총리. 영접 나온 다간 국장은 총리를 브리핑룸으로 안내했다. 영국 일간지 더 타임스가 모사드 내부 소식에 정통한 소식통을 인용해 보도한 바에 따르면, 당시 브리핑룸 안에는 ‘두바이의 11인’으로 불리는 암살단 멤버 중 일부도 함께 자리했다. 네타냐후는 가자지구로 무기를 밀수하는 일을 맡은 하마스 간부 마무드 알 마부에 대한 암살 작전 내용을 브리핑 받았다. 암살단 멤버들은 이미 텔아비브의 한 호텔을 활용해 두바이 호텔 암살의 예행 연습까지 마친 상태였다. "이스라엘 국민들은 여러분을 믿고 있소. 행운을 빌겠소." 총리의 승인이 떨어진 것이다.

◆총리 셋 바뀔 동안 굳건히 자리 지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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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간은 총리 3명이 바뀐 지난 8년간 흔들림없이 모사드의 수장 자리를 지켰다. 그동안 하마스 지도급 인사들은안전할 것으로 여겼던 시리아의 심장부인 다마스커스에서까지 암살당했다. 이스라엘은 확인도 부인도 않고 있지만(NCND·No Confirm No Deny), 배후에는 모사드가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다간은 이 과정에서 이스라엘 국민들 사이에 높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 이번 두바이 사건으로 국내외의 사퇴 압력이 거세지만, 하레츠 등 현지 언론은 “다간은 여전히 물러날 생각이 전혀 없다”고 보도했다. 정해진 임기는 올 연말까지다.익명을 요구한 이스라엘 정보 관계자는 로이터통신에 "정보기관 특성상긴장을 유지하기 위해선 자연스런 인사 이동이 필요하다"며 연말 교체 가능성을 시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