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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사드, 공포와 효율의 암살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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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살당한 아들 마무드 알 마부의 사진을 들고 있는아버지.ⓒAF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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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08년 8월 1일 무하마드 술레이만(Suleiman) 장군은 시리아 북부의 지중해변 휴양지 타르투스의 한 빌라 뒷뜰에서 일광욕을 즐기고 있었다. 따뜻한 햇볕이 내리쪼였고, 주변은 조용하고 평화로웠다. 빌라 문 앞엔 무장한 경호원들이 물 샐 틈 없이 경비를 섰다. 그 때 빌라 앞 바다 위로 작은 요트 한 척이 느리게 미끄러지듯 지나갔다. 갑자기 술레이만 장군이 쓰러졌다. 저격수의 총알이 머리를 관통한 것이다. 현장 즉사였다. 누구도 총성 조차 듣지 못했다. 술레이만은 바샤르 알 아사드(Al-Assad) 시리아 대통령의 안보 보좌관이자, 북한과의 핵프로그램 협력 연락책을 맡은 시리아 권부의 핵심 인사였다. 시리아 당국은 “모사드 저격팀의 소행”이라고 했다. 아무도 이 발표를 의심하지 않았다.

#2

앞서 2008년 2월 12일, 레바논 무장정파 헤즈볼라의 핵심 지도자 이마드 무그니예(Mughniyeh)는 시리아 수도 다마스커스의 크파르 수세 거리 주차장에 세워 놓은 자신의 은색 미츠비시 파제로 승용차에 올라탔다. 헤즈볼라는 2006년 남부 레바논에서 이스라엘군과 전면전을 벌였던 무장조직. 무그니예는 이란 대사가 주재한 ‘이란 이슬람 혁명 29주년 기념 리셉션’에 참석했다 돌아가는 길이었다. 운전석 쿠션에 머리를 기대고 심호흡을 했을 때 쿠션 속에 심어둔 폭탄이 터졌다. 무그니예의 머리는 문자 그대로 ‘작은 핏덩어리들로 잘게 부서졌다(shattered into bloody pieces)’. 다마스커스는 시리아 정부의 비호 아래 헤즈볼라 핵심 지도자들이 망명 지도부를 세운 곳이다. 무그니예 암살 이전엔 헤즈볼라의 ‘안전지대’였다. 무그니예는 1983년 베이루트 미 해병대 막사 폭탄 테러와 미국 대사관 폭탄 테러로 350명 이상의 사망자를 냈다. 9·11테러로 오사마 빈 라덴이 그를 앞서기 이전엔 가장 많은 미국인을 죽인 테러리스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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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라덴의 9.11 테러 이전 미국인을 가장 많이 죽인 레바논 헤즈볼라의 무장조직 지도자 이마드 알 무그니예.그는 안전지대로 여겨지던 시리아 수도 다마스커스에서 승용차 운전석 머리 쿠션에 심어놓은 폭탄이 터져 사망했다. 모사드의 암살임을 의심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Ha’aretz

"지략이 많으면 백성이 평안을 누리느니"

“지략이 없으면 백성이 망하여도 지략이 많으면 평안을 누리느니라.(Where no stratagem is, the people fall; but in the multitude of counsellors there is salvation)” 공식 명칭이 ‘이스라엘 정보 및 특수작전국’인 모사드의 휘장에는 구약성서 잠언 11장 14절의 구절이 새겨져 있다. 실제로 모사드는 이집트나 요르단과의 수교, 이라크와 시리아의 핵시설 공습 등 외교나 분쟁의 무대 뒤에서 적지 않은 기여를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모사드의 역사 전체를 살펴보면, ‘지략’보다는 ‘공포’나 ‘암살’ 같은 어두운 단어를 먼저 떠올리게 된다. 1월 19일 두바이에서 발생한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 간부 암살 사건을 계기로 세계가 다시 모사드의 행보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중동에서 암살 사건이 벌어진 뒤, 모든 아랍국과 이란이 모사드가 암살의 배후라고 비난하는 것은 흔한 풍경이다. 하지만 이를 증명해내는 일은 거의 드물다. 이스라엘 채널2 TV는 술레이만과 무그니예가 암살된 2008년 연말 메이어 다간(Dagan) 모사드 국장을 ‘올해의 인물’로 선정했다. 다간 국장에 대한 이스라엘 현지 여론은 대개 찬사 일색이다. 영국 일간지 더 타임스는 무그니예의 장례식이 열린 날 에후드 올메르트(Olmert) 당시 이스라엘 총리가 다간 국장을 은밀히 만나 그의 노고를 치하했다고 보도했다. 하산 나스랄라(Nasrallah) 헤즈볼라 지도자는 무그니예의 장례식에 영상 메시지를 보내 “(모사드) 너희는 국경을 넘었다. 시오니스트들, 너희들이 전면전을 원한다면, 어디서건 전면전으로 맞서 주겠다”고 경고했다. 사실상의 선전포고였다. 레바논의 고위 이슬람 성직자 모하마드 후세인 파드랄라(Fadlallah)는 "저항 운동의 기둥 하나를 잃었다"고 탄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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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살자들은 두바이 최고급 호텔 알 부스탄 로타나에서 반바지 차림에 테니스 라켓까지 들고 하마스 간부 알 마부의 뒤를 쫓아 투숙 객실을 확인하는 대담함을 보였다. ⓒDubai Police via gulfnews

"중요한 건 이스라엘이 지구상에 존재해야 한다는 사실"

이스라엘은 국민 대다수가 “국가의 존재를 위해”라는 이유로 암살에 찬동하는 지구상 거의 유일한 나라다. 암살에 대한 유대인들의 ‘긍정적’ 인식을 확인시켜주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이스라엘이 독립한 뒤 7년이 지난 1955년, 저명한 평화운동가이며 철학자인 예샤야후 레이보비츠가 이스라엘 건국의 아버지 격인 다비드 벤 구리온(Ben Gurion) 당시 총리 앞으로 편지를 보냈다. “무고한 팔레스타인 인들이 이스라엘의 군사·정보 작전에 의해 매일 죽어가고 있다. 용납될 수 없는 일이다.” 벤 구리온의 대답은 간명했다. “나는 당신의 주장에 동의할 수 없다. 세상이 평화, 화해, 정의, 정직 같은 말들로 가득찬다면 물론 좋은 일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 이스라엘이 그 세상 위에 존재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정보전의 세계에서 모사드는 전설적 존재다. 소련과 미국의 정보기관들이 최고의 요원들을 동원해 맞서던 냉전 시대에도 미 중앙정보국(CIA) 조차 모사드의 정보력에 의존했다. 1956년 모사드는 니키타 후르시초프(Khrushchev)의 비밀 문건을 빼냈다. 후르시초프가 육성으로 요세프 스탈린(Stalin)의 인명 학살을 범죄라며 비판하는 내용이었다. 중동의 군사 강국들에 둘러싸여 국가 존재 자체를 위협받던 1966년, 모사드는 이라크에서 미그21 전투기를 빼돌려 이스라엘 본토로 실어왔다. 미그21은 유사시 이스라엘 본토 공습에 사용될 중동 국가들의 주력기였다. 1981년 이스라엘의 F16 전투기들이 핵개발 의혹을 받던 이라크 오시라크 원자로를 폭격했을 때도, 적국 내에 침투해 정보를 빼내 길을 열어준 모사드 요원들의 활약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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뮌헨 올림픽에서 살해된 이스라엘 대표선수 11명의 복수를 위한 지상 최대의 암살작전 ‘신의 분노’ 작전을 그린 영화 ‘뮌헨’의 한 장면. 골다 메이어 당시 이스라엘 총리는 정부 내에’X위원회’를 조직해 직접 암살 대상자 명단을 검토하고 승인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Universal Pictures

검은 9월단을 말살하라 : ‘신의 분노’ 작전

세계가 모사드의 이름에 공포를 느끼는 가장 큰 이유는 무엇보다도 ‘지상 최고 효율의 살인 기계’(미국 독립라디오 방송 렌스닷컴)로 불리게 한 암살의 역사 덕이다.
가장 유명한 건 원조 ‘철의 여인’ 골다 메이어(Meir·1898~1978) 전 총리가 승인한 ‘신의 분노(Wrath of God) 작전’이다. 1972년 뮌헨 올림픽 때 팔레스타인 무장단체 ‘검은 9월단’이 이스라엘 선수단 숙소를 습격해 국가대표선수 11명을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한 직후, 모사드와 이스라엘 방위군(IDF)은 최고의 정예 요원들을 뽑아 암살단을 조직했다. 학살 사건을 실행한 검은 9월단 조직원은 물론, 기획 과정에 연루된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의 고위 관계자들이 목표물이었다. 메이어 총리는 전쟁 영웅 모셰 다얀(Dayan) 국방장관과 함께 ‘X 위원회’라는 특별기구를 정부 내에 조직해 직접 암살 대상자를 선정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스라엘 암살단은 이후 약 20여년에 걸쳐 세계 곳곳에서 테러 관련자들을 추적해 독살, 총격, 폭살 등 상상조차 하기 힘든 다양한 방법으로 죽였다. 이 과정은 스티븐 스필버그(Spielberg)의 영화 ‘뮌헨(2005)’에도 그려졌다. 모사드는 앞서 1960년대에는 이집트의 미사일 개발 프로그램을 도와준 독일 과학자들에게 폭탄 편지를 보내 다수를 살해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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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세르 아라파트의 손발과 같았던 남자, 칼릴 이브라힘 알 와지르, ‘아부 지하드’. 아라파트와 함께 현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집권당인 파타당의 창설자 중 한 명이며, 초기PLO 무장투쟁의 뛰어난 지도자였다.

1987년 튀니지에서 발생한 PLO 지도자 칼릴 알 와지르(Wazir) 암살 사건은 모사드가 실행한 것으로 여겨지는 여러 암살 사건 중에서도 가장 스펙터클했던 것으로 꼽힌다. 알 와지르는 ‘아부 지하드(이슬람 성전의 아버지)’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PLO 핵심 중 핵심이었다. 독일 주간지 슈피겔의 최근 보도에 따르면, 당시 30여명의 모사드 요원은 작은 보트에 나눠 타고 튀니지 해안을 통해 침투했다. 몇몇은 관광객으로 가장해 아부 지하드의 집에 접근했다. 몇 명은 튀니지 군복을 입고 거리를 봉쇄했고, 하늘에는 이스라엘 공군이 보잉707 전자전기가 떠서 지상의 모든 통신을 방해했다. 암살단은 아부 지하드의 집에 침투한 뒤 아내와 아이들의 눈 앞에서 그의 몸에 70여발의 총알을 박아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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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바이 경찰이 공개한 용의자들의 암살사건 전후 두바이 입출국 흐름도. ⓒDubai Police via The National

아내와 자식들 눈 앞에서 총알 70발 ‘벌집’으로

1995년 팔레스타인 테러조직 ‘이슬람 지하드’ 지도자 파티 시카키(Shikaki)는 지중해 휴양지 몰타에서 암살됐다. 모사드로 추정되는 암살자들은 두달 전 미리 훔쳐둔 현지 모터사이클을 타고 시카키의 머리에 정확히 세 발의 총탄을 쐈다. 암살자들은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 1996년 가자지구에서 발생한 하마스 폭탄 전문가 예히예 아이야시(Ayyash) 암살 사건은 최초로 휴대전화 폭탄이 사용된 것으로 유명하다. ‘기술자’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아이야시는 자기 휴대전화에 심어진 폭탄이 폭발해 죽었다. 당시 그의 먼 친척이라는 19살 청년이 아이야시의 집을 방문했고, 집에 전화하겠다며 휴대전화를 빌린 뒤 폭탄을 심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2004년에는 시리아 수도 다마스커스에서 하마스 지도자 이즈 엘딘 수비 셰이크 칼릴(Khalil)이 차량 폭탄으로 암살됐다.

“테러 공격을 기획한 자들을 죽이면 테러를 막을 수 있다. 테러리스트를 죽이는 것이 마냥 유쾌한 일은 아니다. 체포할 수 있다면 그것도 좋다. 하지만 그들이 우리의 통제 밖 영토에 있고, 이스라엘 젊은이들의 생명을 위험에 빠뜨리면서 그들을 체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우리는 죽여버리는 것을 선호한다.”
메이어 다간(Dagan) 모사드 국장은 암살 정책을 비난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유대인·이스라엘 전문 미디어 JTA 통신은 보도했다. 슈피겔은 두바이 암살사건에 대해 “모사드가 실행한 것이 맞다면, 그들은 국제법 위반, 온건한 아랍국과의 관계 악화, 핵심 요원들의 신원이 노출될 위험을 모두 무릅쓴 것이다. 이란의 핵 프로그램으로 이스라엘의 안보가 어느 때보다 위험에 처한 가운데, 모사드는 이스라엘을 지키기 위해 이전보다 더 큰 위험을 감수하고 더 과감해질 수 있음을 과시했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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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면을 한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 조직원들이 지난 2월 17일 가자지구 베이트 라히야에서 두바이에서 암살된 무장조직 ‘이즈 알 딘 알 카삼 여단’ 창설자 마무드 알 마부의 추도식을 열고 이스라엘 국기를 밟으며 헌화하고 있다.ⓒAP

※ 주간조선 2095호(3월 6일자)에 게재한 글입니다.

두바이 암살의 총지휘자? 메이어 다간 모사드 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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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략이 없으면 백성이 망하여도 지략이 많으면 평안을 누리느니라(Where no stratagem is, the people fall; but in the multitude of counsellors there is salvation.)" 모사드의 휘장에는 구약성서 잠언 11장 14절의 구절이 새겨져 있다.

이스라엘 텔아비브 북부 교외의 야트막한 언덕에 가면,현지에서 ‘미드라샤(Midrasha˙유대학교)’라 불리는이스라엘 정보 및 특수작전국, ‘모사드’의 건물이 있다.메이어 다간(Dagan·65) 모사드 국장 방에는 나치 친위대(SS) 장교의 장총에 머리가 겨눠진 채 도랑 끝에 위태롭게 서 있는 유대인 노인의 사진이 있다. 다간의 할아버지다. “이스라엘은 강해져야 한다. 머리를 써야 한다. 스스로를 지켜야 한다. 다시는 홀로코스트가 반복되지 않도록.” 다간 국장은 입버릇처럼 이렇게 말한다.

◆다간, 거리에서 잔뼈가 굵은 정보전사(戰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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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 충격에 빠뜨린 두바이 암살 사건의 배후에는 모사드가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 모사드의 수장(首長)이 다간이다. 영국 출신으로 외교관 파티에서 오래 수다떠는 걸로 유명해 ‘칵테일 할레비’라는 별명으로 불렸던온건파 전임자 이프라임 할레비(Halevy)와는 딴판인 강경파다.

다간은 이스라엘방위군(IDF) 공수여단 소속으로 1967년 3차 중동전쟁(6일 전쟁) 당시 골란고원 전투에 참여한 군인 출신이다. 1970~80년대에는 팔레스타인 무장조직을 상대로 비밀작전을 수행하는 특수부대에서 활동했다. 특히 인권 유린과 학살 사건으로 지탄받은 1982년 1차 레바논 전쟁 때는 레바논 내부 정보활동을 전담한 특수부대를 지휘했다. 레바논전의 야전 지휘관이었던 아리엘 샤론(Sharon)과의 인연도 이 때 부터다.

◆인명희생 무릅쓰고 적을 분열시켜라… 작전명 ‘정의의 복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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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엘 샤론 총리(오른쪽)와 메이어 다간 모사드 국장.

퇴역 이후 정부의 테러 대응업무를 맡았던 다간은 2000년 매파 정치인 아리엘 샤론 진영에 국가안보보좌관으로 참여한다. 이 때 입안한 것이유명한 ‘다간 계획(Dagan Plan), 작전명 ‘정의의 복수(Justifed Vengence)’다. 이스라엘최대 일간지 예디오트 아하라노트, 유력지 마리브, 프랑스 르몽드 등의 당시 보도에 따르면 이 계획은 2차 인티파다 당시 줄을 잇던 자살폭탄테러에 대응해 유대인 수백명, 팔레스타인인 수천명의 희생을 무릅쓰고 압도적 물리력으로 보복에 나설 것을 제안했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PA)의 내부 분열을 유도하는 것은 물론, 야세르 아라파트(Arafat) PA 수반의 정치적 혹은 물리적 ‘제거’까지 포괄하는 광범위한 내용이었다.

결과적으로 다간의 구상대로, 팔레스타인 정파인 파타와 하마스는 요르단강 서안과 가자지구에 분리·고립됐다.두 세력은 하마스가 장악한 가자지구에서 총격전까지 벌이며 피를 흘렸다. 적전분열이다.다간은 또 샤론 총리와 함께 가자지구에서 유대인 정착민 7000여명을 완전 철수시키는 작업도 밀어붙였다. 유대인 정착민들이 전부 소개된 뒤, 이스라엘은 가자지구를 완전히 봉쇄했다. 가자지구는 지금하늘 아래 가장 거대한 ‘감옥’이다. 작년초 1000명 이상의 팔레스타인인 사망자를 낸이스라엘의 일방적 가자지구 공세, ‘캐스트 리드’ 작전도 다간과 샤론이 정착민을 미리 철수시켰기에 가능했다.

◆"이스라엘은 여러분을 믿고 있소. 행운을 빌겠네."

지난 1월초, 두 대의 검은색 아우디 A6 리무진이 모사드 본부 건물 정문을 통과했다. 차에서 내린 사람은 베냐민 네타냐후(Netanyahu) 총리. 영접 나온 다간 국장은 총리를 브리핑룸으로 안내했다. 영국 일간지 더 타임스가 모사드 내부 소식에 정통한 소식통을 인용해 보도한 바에 따르면, 당시 브리핑룸 안에는 ‘두바이의 11인’으로 불리는 암살단 멤버 중 일부도 함께 자리했다. 네타냐후는 가자지구로 무기를 밀수하는 일을 맡은 하마스 간부 마무드 알 마부에 대한 암살 작전 내용을 브리핑 받았다. 암살단 멤버들은 이미 텔아비브의 한 호텔을 활용해 두바이 호텔 암살의 예행 연습까지 마친 상태였다. "이스라엘 국민들은 여러분을 믿고 있소. 행운을 빌겠소." 총리의 승인이 떨어진 것이다.

◆총리 셋 바뀔 동안 굳건히 자리 지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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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간은 총리 3명이 바뀐 지난 8년간 흔들림없이 모사드의 수장 자리를 지켰다. 그동안 하마스 지도급 인사들은안전할 것으로 여겼던 시리아의 심장부인 다마스커스에서까지 암살당했다. 이스라엘은 확인도 부인도 않고 있지만(NCND·No Confirm No Deny), 배후에는 모사드가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다간은 이 과정에서 이스라엘 국민들 사이에 높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 이번 두바이 사건으로 국내외의 사퇴 압력이 거세지만, 하레츠 등 현지 언론은 “다간은 여전히 물러날 생각이 전혀 없다”고 보도했다. 정해진 임기는 올 연말까지다.익명을 요구한 이스라엘 정보 관계자는 로이터통신에 "정보기관 특성상긴장을 유지하기 위해선 자연스런 인사 이동이 필요하다"며 연말 교체 가능성을 시사했다.

부르즈 칼리파, 우리 시대의 바벨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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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일 두바이의 세계 최고층 빌딩 ‘부르즈 칼리파’ 개장 축하 불꽃놀이.

부르즈 칼리파 우리 시대의 바벨탑

세계 최고 마천루들은 역사적으로 경제가 곤두박질칠 때 더 높이 솟아올랐다. 4일 아랍에미리트 두바이에서 개장식이 열린 ‘부르즈 칼리파’ 역시 세계 최고(最高)인 828m 높이를 자랑한다. 바로 전 날까지 세계 최고였던 대만의 101층짜리 건물 ‘타이페이 101 타워’(509m)보다 319m가 높고, 2012년 완공 예정인 상하이 타워(631m) 보다도 197m가 높다. 당분간 세계 최고 지위를 위협받을 가능성은 없는 셈이다. 부르즈 두바이는 상하이 타워가 세계 최고 지위를 위협하자 2005년 2월 착공 이후 계속 최종 높이를 높여 잡았다. 828m라는 최종 높이도 개장식에서 카운트다운을 하듯 전광판을 통해 확정 발표하며 분위기를 띄웠다. 하지만, 마천루의 높이가 갖는 상징성으로만 보면 부르즈 칼리파는 최악의 경제위기를 예고하는 이정표처럼 보인다.

최고 마천루와 경제위기의 상관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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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싱어 빌딩(1908년)과 메트 라이프 빌딩(1909년)은 1907년 경제 공황의 와중에 완공됐다. 크라이슬러(1930)과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1931)은 대공황의 상징이었다. 뉴욕 세계무역센터(1972)와 시카고 시어스타워(1974)는 1970년대 세계를 휩쓴 스태그플레이션의 한 가운데 세워졌다. 말레이시아 페트로나스 타워(1997)는 아시아 금융위기의 예고편이었다. 2005년 세계 최고 마천루의 등장과 경제위기의 상관관계를 분석한 보고서를 냈던 마크 손튼은 “나라마다 최고 건물을 이것저것 내세우고 세계 언론이 이를 비교해 가며 떠들썩하게 보도하는 것은 글로벌 위기의 때에 나타나는 전형적 증상”(크리스천사이언스모니터, 2010.1.4)이라고 했다.

텅 빈 세계 최고?

부르즈 칼리파의 1∼39층은 아르마니 호텔, 40∼108층은 고급 아파트, 109층 이상은 사무실이다. 아파트는 이미 3년 전에 다 팔렸다. 문제는 대부분 투자 목적 매입이었다는 점이다. 직접 들어가 살 목적이 아니었다는 거다. 개발사인 에마르 자산운용 측은 사무실과 아파트 분양률 및 거주 비율 등을 정확히 밝히지 않고 있다. 부르즈 칼리파는 너무나 아름다운 건물이다. 하지만 앞으로도 다른 두바이 거품시대에 지어진 최고급 주거·사무빌딩들처럼 빈 채로 한동안 유지될 가능성 높아 보인다.

‘공(空·emptiness)’에 사로잡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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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마침 ‘오마하의 현인’ 워런 버핏(Buffet)이 투자한 라스베이거스 사하라 호텔과 카지노가 숙박 손님이 없어 3개 타워 중 2개 타워를 폐쇄한다고 발표했다. 한 때 미국 제조업 붐의 상징이었던 자동차 도시 디트로이트는 사람들이 떠나면서, 농업기업이 도시 한 켠을 아예 논밭으로 바꾸는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이번에 개봉하는 영화로, 2006년 코믹 매커시(McCarthy)의 베스트셀러 소설을 영화화한 ‘더 로드(The Road)’는 마천루로 상징되는 도시문명이 잿더미로 변한 묵시록적 풍경을 걸어가는 부자(父子)의 이야기다. 덴젤 워싱턴이 출연하는 ‘엘리의 책(The Book of Eli)’, 제이슨 라이트먼의 ‘창공 저 위에(Up in the Air)’ 등도 도시의 폐허나 ‘비어 있음’의 이미지에 집착한다. 비어 있는 도시를 그려내는 수많은 사진과 영화 프로젝트들도 화제다. 미국 문화는 그 어느 때 보다 ‘공(空·emptiness)’에 사로잡혀 있다. 지갑이던 위장이던 혹은 집안이던, 뭐든 가득 채우고, 소비하고, 떠들썩한 파티를 즐겼던 미국 대중문화에서 드물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막판에 이름 바꿔 ‘부르즈 칼리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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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visitor walks past a display featuring Sheikh Mohammed bin Rashid Al Maktoum, at the entrance to ”At the Top” visitor center in the Burj Dubai, the world’s tallest building, in Dubai, United Arab Emirates, on Monday, Jan. 4, 2010. Dubai’s Sheikh Mohammed bin Rashid Al Maktoum will open the world’s tallest tower today. It won’t be the world’s fullest. The occupancy rate at the 160-story Burj Dubai may reach 75 percent this year, with office leasing proving the biggest challenge for investors, said Roy Cherry, an analyst at investment bank Shuaa Capital PSC. Photographer: Charles Crowell/Bloomberg

두바이의 통치자 셰이크 모하메드(Mohammed)는 개장식에서 “오늘 UAE는 인류 최고 높이의 건물을 갖게 됐다. 이 위대한 프로젝트는 위대한 인물의 이름을 붙이는 것이 합당하다”며 ‘부르즈 칼리파(Khalipa)’로 개칭하겠다고 선언했다. 칼리파는 아랍에미리트(UAE)의 현 대통령이자 수도 아부다비의 셰이크인 칼리파 빈 자이드 알 나흐얀의 이름이다.
두바이는 작년 말 국영 투자개발 지주회사 두바이 월드가 채권단에 채무 이행 연기 요청을 하면서 세계경제를 충격에 빠뜨렸다. 이후 두바이 위기의 구원투수로 나선 것이 아랍에미리트연합 내 최대 토후국인 아부다비였다. 두바이를 통치하는 알 마크툼 가문과 아부다비를 다스리는 알 나흐얀 가문은 한 뿌리에서 나온 혈족이지만, 서로 경쟁하며 아라비아반도의 새로운 경제 모델을 추구해왔다. 두바이가 아부다비에 손을 벌리게 되면서, 두바이의 정치·경제적 독립성이 훼손될 거라는 우려도 컸다. ‘부르즈 칼리파’라는 이름은 그래서, 아부다비와 두바이 두 토후국 사이의 역학관계가 바뀌고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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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벨탑 이미지의 원형이 된 것으로 여겨지는 이라크 사마라 ‘그레이트 모스크’의 미나렛(첨탑)과 피에르 브뤼겔의 그림 바벨탑.

부르즈 칼리파, 우리 시대의 바벨탑?

두바이 셰이크 모하메드는 “이집트의 피라미드가 그랬듯 현재 두바이가 공사 중인 대규모 인공 조형물들도 시간이 지나면 후대를 위한 유적이 된다”고 말했었다. 이 때 셰이크 모하메드의 비전은 5000년 뒤의 후손들의 손에도 먹고 살 수단을 쥐어주겠다는 데까지 가 있었다. 반면 로스앤젤레스 타임스의 건축 비평가 크리스토퍼 호손(Hawthorne)은 부르즈 칼리파를 ‘오만함의 사원(Temple to Hubris)’라고 불렀다. 기독교 성서에 등장하는 바벨탑은 신에게 가닿으려는 인간의 오만의 상징이었다.
“현금 더미를 깔고 앉아 지속가능하지 않은 개발을 지속하던 시대는 갔다. (…) 두바이의 경제는 회복하겠지만, 최소한 과거의 오류를 바로잡은 형태일 것이다. 하지만 지난 10년간 두바이가 이 거대한 건축물을 세워 얻으려했던 상징성은 넓은 의미에서 이미 죽었다. 부르즈 칼리파가 스스로 폐허가 된다면, 그것은 폐허가 된 이상(理想)에 바쳐진 묘비석일 것이다.”(LAT 20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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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날아라, 두바이!

<YONHAP PHOTO-0263> A man with a falcon attends the opening ceremony for the 200-story Burj Khalifa building in Dubai, United Arab Emirates, on Monday, Jan. 4, 2010. Dubai’s Sheikh Mohammed bin Rashid Al Maktoum opened the world’s tallest tower today and renamed it the Burj Khalifa after the ruler of neighboring Abu Dhabi, which bailed out Dubai during the country’s debt crisis last year. Photographer: Charles Crowell/Bloomberg

두바이, 정말 망할까 : ‘두바이 쇼크’ 뜯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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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바이 한 호텔 로비의 對십자군 이슬람 전쟁 영웅 살라딘 像. 14세기 아랍의 역사철학자

이븐 할둔은 “사막의 유목 부족들은 끊임없이 무정하고 냉혹한 자기 변신의 순환을 거듭하기

때문에 도시의 엘리트들을 점령하고 지배한다”고 말했었다. 두바이가 이븐 할둔의 예언을

현대에 재현해갈 것인가, 혹은 사막의 신기루에 그칠 것인가.

두바이 신화의 주역이었던 투자지주회사 ‘두바이 월드’가 25일 채권자들에게 채무상환을 유예해달라고 요청했다. 두바이 월드 채무가 두바이 전체 채무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70%가 넘기 때문에 사실상 두바이 정부의 디폴트(default.채무불이행) 선언으로 받아들여졌다. 세계 금융시장은 민감하게 반응했다. 이른바 ‘두바이 쇼크’다.
두바이의 신용부도스와프(CDS·국채 부도 가능성에 대비해 들어두는 일종의 보험 성격을 띄는 금융파생상품) 금리가 폭등했고, 아부다비와 사우디아라비아, 카타르 등 주변국들까지 도미노처럼 영향을 받았다. 터키, 그리스, 러시아 등 경제규모에 비해 빚이 많은 나라들도 타격을 입었다. 빚더미 국가들의 국채 위험성에 대한 경고가 이어지고, 제2 금융위기설까지 솔솔 새어나온다. 두바이 쇼크는 실제로 있었다. 여기까지는 현상(現象)에 관한 팩트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9/11/27/2009112700140.html

세계가 경악한 건 급작스러웠기 때문이다. 올 초부터 두바이가 아부다비의 돈을 빌리고 국채를 발행할 때 디폴트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있었다. 하지만 디폴트 바로 전날까지도 대세는"아부다비가 도와줄 거라 괜찮다", "부동산경기가 풀리고 공급초과 문제가 해소되는 2011년 초쯤부터 급속히 회복될 것"이라는 쪽이었다.

그렇다면 두바이가 정말 국가 부도 사태를 맞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가능성 자체를 배제할 수는 없지만,서서히 해결책을 찾아갈 가능성 쪽에 무게가 실린다.

위기임에는 분명하지만, 과장할 필요도 없다. 두바이가 망할 거라고 섣불리 단정하거나 정치적 취향에 맞춰 단죄하려 들기 전에, 먼저 사태의 배경과 경과를 찬찬히 살펴 보는 것이 옳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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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벨탑일까. 두바이의 새 랜드마크가 될 부르즈 두바이는 내년 1월 완공을 목표로 공사 중이다.

두바이가 맘에 들지 않는 주변 아랍국들

두바이에 물려 있는 돈은 상당 부분이 걸프국가들 돈으로 알려졌다. 두바이가 무너지면 손해보는 건 걸프국가들이라는 얘기다. 그런데도 왜 아부다비를 비롯한 주변 투자자들은 두바이의 디폴트 위기를 외면했을까.

두바이 면적은 제주도의 두 배 정도 밖에 안 된다. 인구는 120만명 정도로 추산되는 데, 그 중 두바이 원주민은 20만명 정도다. 주변 걸프국가들처럼 짱짱한 석유 매출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1인당 국민소득은 4만불에 육박한다. 인도네시아부터 북아프리카까지, 이민자들에게 두바이는 꿈이 이뤄지는 땅이다.

통치자 셰이크 모하메드는 세계의 주목을 한 몸에 받았다. 손톱만한 나라 지도자가 주변의 쟁쟁한 대국들을 제치고 스포트라이트를 독차지한 것이다. 거기다 말도 잘 듣지 않는다. 주변 대국들의 눈에 곱게 비칠 리 없다. 아랍에미리트(UAE)는 걸프국가들의 연합인 걸프협력위원회(GCC) 단일 통화 논의에서도 탈퇴했다. 가장 발언권이 센 사우디 아라비아가 GCC 중앙은행을 두바이가 아닌 자국 상업도시 제다로 가져가려 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유력하다. 최근 카타르가 언론과 교육 중심으로, 사우디아라비아가 산업과 금융 중심으로 발돋움하려 애쓰지만, 두바이의 휘황함에 가려 빛이 나질 않는다.

아부다비도 두바이가 고깝긴 마찬가지인 것 같다. 정치적, 역사적으로 두바이는 항상 맏형 토후국 아부다비의 그늘 아래 있었다. 아부다비는 UAE 국토의 80%, 석유 생산량의 95%를 차지한다. 두바이를 포함해 나머지 6개 토후국은 다 고만고만하다. UAE는 아부다비 통치자가 대통령, 두바이 통치자가 총리를 맡는 구조로 유지된다. 연방국가라기보다는 셰이크(Sheik·족장)가 지배하는 부족국가(sheikdom) 연맹체에 가깝다. 국방과 외교 일부를 제외하면 나머지 분야는 거의 각각의 독립국에 가깝다.그 중에서도 두바이는 10여년 전까지 별도의 군대를 유지할 만큼 독립성을 유지하려 애써왔다. 두바이를 다스리는 알 마크툼 가문과 아부다비를 다스리는 알 나얀 가문은 보일 듯 보이지 않게 경쟁하며 협력해왔다. 두 가문의 경쟁심은 낙타미인대회에까지 미칠 정도다. 우수한 낙타를 누가 더 통크게 많이 사느냐를 놓고도 백성들 사이엔 ‘올핸 누가 어쨌다더라’는 쑥덕공론이 이어진다.

두바이는 상상력과 비전 만으로 현재의 성장과 발전을 이뤘다. 다른 산유국들은 아무리 돈이 많아도 할 수 없었던 일이다. 두바이 기업 법인의 40%가 사실상 이란인 소유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서방의 경제 제재에 목이 죄여 있는 이란도 두바이를 통해 숨을 쉬어왔다. 9·11 테러 이후엔 미국이 마뜩찮았던 걸프지역 투자자들이 두바이에 고유가로 얻은 달러를 쏟아 부었다. 이들 역시 사막 한 가운데서 스키를 즐기고, 에어컨 빵빵한 쇼핑몰에서 루이비통 가방을 사들이며 보수적 본국 사회를 벗어나 숨을 쉴 공간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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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바이 쇼핑몰. 검은 차도르 차림여성들이 루이비통 가방과 에르메스 스카프를 두르고 누빈다.

게다가 두바이는 개혁 개방 정책을 통해 걸프 국가들 중에 가장 서구 문물을 빨리 흡수했다. 이집트를 제외하면, 중동·북아프리카 지역에서 여성들이 히잡이나 니캅을 쓰지 않고도 경찰의 제지를 받지 않고 다닐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나라다. 여성 5만명이 일자리를 갖고 있고, 그 중 30%는 정부 기관이나 국영기업에서 일한다. 호텔에선 맥주도 팔고, 밤이면 나이트클럽이 불야성을 이룬다. 이럴 때 마침 미국발 금융위기가 들이닥쳤다.

세간에는 “이번 기회에 걸프 지역 투자자들이 두바이의 버릇을 고쳐놓으려 한다”는 얘기가 연초부터 돌았다. “내 돈 빌려가 폼 잡았으니 한 번 당해봐라”는 것이다. 게다가 두바이의 위기는 국부펀드의 막대한 달러를 깔고 앉아 있는 걸프국가들에겐 공들여 지어 올린 자산을 손쉽게 꿀꺽할 기회다.

과거 아부다비 정부는 돈을 빌려주는 대가로 두바이의 에미레이트 항공을 요구하기도 했다. 아부다비의 UAE국영 항공사인 이티하드 항공을 타 보면, 고급스러운 실내장식에 깜짝 놀란다.사막 혹은 황금을 상징하듯 모든게 반짝반짝한다.이슬람여성의 머리장식을 형상화한 스튜어디스의 복장은 아마 세계 항공사를 통틀어 가장화려할 것이다. 그런데도 아부다비의 이티하드 항공은 두바이의 에미레이트 항공을 넘어서지 못했다. 내가 만들 수 없다면, 뺏는 것이 사막의 생존 법칙. 이번 두바이 월드의 사실상 디폴트 선언 뒤에는 퀸엘리자베스 2호 호텔이나 턴베리 골프장 등 아부다비가 눈독을 들이는 두바이 자산의 구체적 목록까지 오르내린다.

그러니 걸프국가들이 두바이 국영 투자지주회사 두바이 월드가 채무 이행 유예를 요청토록 코너로 몰아넣은 것은 다목적이다. 버릇도 고쳐 놓고, 알짜 자산도 손에 넣을 일석이조의 기회다. 이에 맞서 두바이는 “채무 이행 유예요청은 채무 구조조정을 위해 면밀히 계획한 일”이라며 자산 매각보다 채권 발행을 통한 현금 확보 쪽으로 방향을 잡고 있다. 피땀흘려 쌓은 자산을 헐값에 잃지 않겠다는 몸부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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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서 가장 큰 냉동고, 두바이의 실내 스키장. 그 자체로 관광객을 유인하는 어트랙션이다.

유럽 금융시장이 홍역을 치른 이유

물론 이번 ‘두바이 쇼크’의 가장 직접적 원인은 분에 넘치는 외자 차입 경영이었다. 제조업 기반도 없는 나라가 매년 11% 경제 성장률을 목표로 잡았다. 산업연구원(KIET) 주동주 박사는 국내 학자들 중에 눈에 띄게 두바이 성장 모델의 지속 가능성에 의문을 제기한 학자다. 그는 “두바이는 GDP의 열 배 가까운, 감당할 수 없는 규모의 사업을 너무 많이 벌렸다”며 “수요 측면에 대한 고려없이 무작위적 공급 위주 정책으로 벌려 놓으면 수요가 따라온다고 생각했다. 분명한 실책”이라고 했다. 정확한 지적이다.

두바이의 GDP 대비 부채 규모는 103% 정도로 추산된다. 800억 달러 조금 넘는다. 두바이가 벌려놓은 개발프로젝트 총액은 3000~4000억 달러인 걸로 추정된다. 그런데 두바이의 정부 및 민간부문 자산의 가치는 3000억 달러에 가까운 걸로 알려져 있다. 호경기일 땐 버틸 수 있었다. 하지만 유동성의 흐름이 널을 뛰는 불경기엔 삐끗하면 카운터를 맞기 쉬운 체질이었다.

그런데 이번 ‘두바이 쇼크’를 대하는 서방의 태도를 살펴 보면 미묘한 차이가 있다. 먼저 표를 보자. 서방국가들 중심으로 두바이에 물린 채권액을 보고, ‘두바이 쇼크’ 이후의 태도와 비교하면 꽤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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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가장 민감한 반응을보인 건영국 언론들이었다. 당연하다. 금융위기로 죽을 쑤고 있는 영국이 가장 많은 돈을 물렸기 때문이다. 파이낸셜타임스는 ‘두바이 채무상환 유예요청 충격’이라고 제목을 뽑고, 내달 14일 만기가 도래하는 나킬(두바이 월드 자회사로, 팜 아일랜드 등 대규모 사업을 주도한 부동산 개발사)의 수쿠크(이슬람 채권) 문제도 정면으로 제기했다. 게다가 영국은 1960년대까지 아랍에미리트 지역을 실질 지배했다. 세계를 지배한 제국의 옛 습관일까. 영국 입장에서는 ‘거긴 원래 내 땅’이라는 의미도 있어 보인다. 두바이 채권에 상대적으로 많은 돈이 물려 있는 유럽 금융시장도 함께 요동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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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바이의 랜드마크, 칠성급 호텔 부르즈 알 아랍. 해변에는 비키니 차림의 여성들이 일광욕을 즐긴다.

반면 미국 언론들의 첫 반응은 시큰둥했다. 25일 디폴트 발표가 나온 뒤에도 뉴욕타임스 온라인판의 메인 화면에선 두바이 기사를 찾아보기 어려웠다. 역시 매우 단순한 이유로 보인다. 미국이 물린 돈은 경제규모에 비해얼마 안 되고, 자국의 금융위기에 비하면 작은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던 미국 언론들이 주말부터는 “제2 금융위기”(블룸버그), “채무국 국채 도미노 부도 우려”(WSJ) 등의 보도를 내놓기 시작했다. 당장의 금융시장 타격보다 “두바이 사태가 더 큰 위기의 시발점이 될 수 있다”는 논리다. 뱅크오브아메리카 보고서는 러시아와 아르헨티나의 디폴트 사태로 일반화된 용어인 ‘테일 리스크(tail risk)’를 끄집어 냈다. “두바이가 국가 부도를 낼 경우 신흥시장에 대한 자금유입이 급속히 멈춰 경기 회복을 크게 후퇴시키는 결과를 낳을 우려가 있다”고도 했다. 뉴욕타임스는 “두바이 사태는 공공부채율 높은 나라들의 잇따른 부도사태 예고하는 ‘탄광 속의 카나리아’일 수 있다”고 했다. 이런 보도는 오히려선진국 투자자들에게 ‘리스크를컨트롤할 수 있다면, 지금이 신흥시장에 투자할 때’라고 알려주는 것처럼 보인다.

좀 더 설득력있는 상황 분석을 보자. 런던 바클레이스 캐피털의 수석 이코노미스트인 알리아 무바예드는 “두바이가 처한 상황이 심각하긴 하지만, 재정적인 측면에서 볼 때는 아부다비의 도움으로 충분히 극복할 수 있는 수준”이라고 했다. 또 ‘뱅커 매거진’의 에디터 브라이언 캐플런은 “두바이가 채무 불이행을 한다고 해도 그 충격파는 1조 달러 디폴트가 걸렸던 미국 서브프라임 사태에 비하면 미미하다. 새로운 세계 금융위기를 촉발할 정도는 아니다”고 했다.

셰이크 모하메드, 위기 극복의 리더십도 증명할 것인가

그렇다면, 두바이는 현재의 위기를 극복해낼 수 있을까. 지금까지 두바이의 기념비적 성공이 셰이크 모하메드의 지도력에 크게 의존했듯, 앞으로 두바이의 위기 극복도 그의 행보에 크게 좌우될 것이다.

“나도 미친(crazy) 사람 취급을 받았다.”
셰이크 모하메드는 2007년 4월 당시 이명박 시장을 만나 “청계천을 추진할 때 처음엔 많은 사람들이 나를 어리석다고 했다”는 말을 듣고는 이렇게 말했다. 셰이크 모하메드는 “어려운 생활환경이고 서방에 비해 뒤쳐져 있었지만 우리는 비전을 품고 있었다. 남들이 의심해도 멈추지 않고, 경험과 비전을 갖고 앞으로 나아갔다. 중동에서 더 나은 국가를 만들고 싶었다”고 말했다. (『셰이크 모하메드 : 상상력과 비전의 리더십』,최진영).

두바이는 여전히 지도자의 혜안(慧眼)이 한 나라의 미래를 어디까지 변화시킬 수 있는지 보여주는 모범 사례다. 여기엔 단순히 국영지주회사의 한 차례 디폴트 선언 때문에 도매금으로 팔아넘길 수 없는 피땀과 고민이 배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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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바이 크리크. 넓은 인공수로에는 아직도 오래된 동력어선들과 돛배들이 가득하고, 수상택시가 강변을 오간다.

두바이는 작은 나라다. 원래 진주를 캐던 작은 어촌마을이었다. 일본에서 진주 양식에 성공하자 자연산 진주 가격이 폭락했고, 살기 위해 다른 길을 찾아야 했다. 두바이를 통치해온 알 마크툼 가문은 일찍부터 먼 바다로 눈을 돌렸다. 현 통치자 셰이크 모하메드의 아버지 셰이크 라시드는 ‘사막의 맨해튼’이라는 두바이의 명성에 기틀을 놓았다. 무모하다는 비난을 온몸으로 견디며 어촌 마을에 걸프 물동량을 빨아들일 최초의 항구 라시드 항을 완공했다. 다들 미쳤다고 했지만, 완공된 뒤 해상 운송수요가 몰리며 오히려 너무 작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에 세계 최대 인공 항구인 자벨 알리 항을 건설했다. 맏형격 에미리트(토후국)인 아부다비나 대국 사우디아라비아에 비하면 ‘새발의 피’지만, 1960년대에 발견된 소량의 석유는 두바이의 야심에 밑불이 됐다.

두바이를 통치하게 된 셰이크 모하메드의 눈은 선왕(先王)들보다 더 먼 미래에 가 있었다. 2006년에 왕위를 계승했지만, 10여년 전부터 사실상 두바이를 통치했다. 그는 자서전에서 “가젤은 사자보다 느리면 잡혀 먹힌다. 사자는 가젤보다 느리면 굶어 죽는다. 당신아 가젤이건 사자건, 동이 튼 뒤에도 살아 남으려면 남보다 빨리 뛰어야 한다”고 반복해 말했다. 2020년이면 고갈될 석유, 검은 황금이 사라진 미래에 어떻게 다음 세대의 아이들이 초원에서 가장 빠른 사자처럼 풍요롭게 살아가도록 할 수 있을까. 그의 고민은 항상 과거가 아니라 미래에 있다.

“시간과 싸우는 경주에서 우리는 승리를 거뒀다. 그러나 경주는 이제 시작이다. 새로운 경주를 준비해야 한다. 더 큰 장애물과 도전에 대비해야 한다.”

2007년 2월 두바이 전략계획 2015를 발표하며 셰이크 모하메드는 이렇게 말했다. 셰이크 모하메드는 2000년 전략계획 2010을 발표하며 2010년까지 국민소득 2만3000달러, GDP 300억 달러를 달성하겠다고 했었다. 그런데 2005년 두바이의 GDP는 이미 370억 달러, 1인당 국민소득은 3만1000달러였다. 놀라운 초고속 압축 성장이다. 2000년 당시 10%였던 GDP 중 석유 매출 비중을 6%로 낮추겠다고 발표했고, 2005년말 3%까지 낮췄다. 1970년대 두바이 GDP에서 석유 비중이 절반을 넘었다. 5년 만에 10년 목표를 초과 달성한 뒤 새로운 10년의 목표를 세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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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바이의 마천루 숲과 녹색 잔디밭. 사막의 맨해튼은 입으로 만든 게 아니다.

셰이크 모하메드는 시를 사랑하는 시인으로도 유명하다. 두 아들 라시드와 함단이 영국 왕립사관학교를 졸업할 때도 축하시를 보냈다.

“라시드와 함단, 내일의 밝은 꿈들아
나는 그 꿈들을 그려왔다.
요람에서부터 나는 그 꿈들을 보았고,
포수에 희생되지 않을 사자와 매로 키웠다.”

그의 목표는 오직, 자신의 백성들이 강성한 주변 걸프국가나 서방국가에 휘둘리거나 희생되지 않도록 강하고 부유한 나라를 세우는 것이다. 이것이 개인과 가문의 치재에 집중하고, 특권계층에 재부를 나눠주는 지대국가로 국체를 유지하는 다른 산유국들과의 근본적 차이점이다.

셰이크 모하메드는 “이집트의 피라미드가 그랬듯 현재 두바이가 공사 중인 대규모 인공 조형물들도 시간이 지나면 후대를 위한 유적이 된다”고 개발자들을 격려했었다. 그는 이 말을 할 때 5000년 뒤의 미래를 보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위기를 헤쳐나가지 못하면, 두바이의 마천루들은 5000년이 아닌 50년도 되기 전에 유적이 돼 버릴 수도 있다. 성공가도를 달려온 셰이크 모하메드에게, 이제 위기극복에도 호경기 때와 같은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음을 증명해야 할 결정적 순간이 찾아왔다.

정리해보면…

1. 두바이를 (사실상) 디폴트로 몰아넣은 직접적 원인은 도를 넘은 외자 차입경영이었다.

하지만 두바이 개발 모델 특성상 언젠가 한 번은 겪고 넘어서야 할 시련이기도 하다. 셰이크 모하메드는 이미 개발 황금시대를 이끌었던 최측근 엘리트들을 가지치기하며 국영 기업 네트워크에 대한 장악력을 강화하고 있다. 채무 구조조정 뿐 아니라 조직과 사업에 피비린내나는 쇄신이 시작됐다. 여기서 셰이크 모하메드의 위기 극복 리더십이 검증될 것이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9/11/28/2009112800124.html?srchCol=news&srchUrl=news2

2. 주변국들의 시샘과 두바이 자산에 대한욕심도 원인으로 지목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부분은 상황 변화에따라 유동적인 결과를 낳을 것이다. 현재 예측할 수 있는 것은, 최소한 두바이를 쓰러지도록 방치하는 것은 주변국들의 이익에도 부합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3. 서방국가들의 ‘호들갑’에 가까운 반응은 실제적 위험보다 감성에 휘둘린 측면이 적지 않다.

원래 금융시장이란 지나친 공포와 환호 사이를 오가는 법이다. 게다가 두바이 디폴트는 서브프라임모기지사태 급도 아니다. 투자심리를 악화시킬 수 있겠지만,금융시장에 미치는 직접 영향은 크지 않다고 보는 쪽이 설득력 있다.

4. 두바이의 위기를 ‘두바이 모델의 종언’이라고 예단하는 것은 섣부르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두바이 모델은 모래사막과 바다 외엔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나라가 지도자의 상상력과 비전, 놀라운 추진력만으로 일궈낸 것이다. 개발의 목표도 시작도 과정도 모두 유니크하다.국내에서 추진되는 정부 프로젝트와 연관지으려는 정치적 노력도참 볼썽사나운 아전인수다.

한국외대 서정민 교수는 "두바이는 이미 사회적 제도적으로 많은 개혁을 이뤘다. 이번 위기만 잘 넘기면 충분히 다시 일어설 수 있다. 두바이가 특별히 잘해서라기보다 다른 아랍국가들이 워낙 지지부진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두바이 모델이 다른 중동국가에서 복제 가능한가의 질문은 미뤄두자. 현재 중동에는 두바이 외에 대안이 없다.

두바이는이번 위기를 딛고 다시 일어설것인가,그냥 주저앉아 버릴 것인가. 일시적 유동성 위기인가, 두바이 성장 모델의 근본적 위기인가. 예단은 금물이다. 일단 14일로 예정된 나킬의 수쿠크 상환, 내년 초에 도래하는 다른 두바이월드 채권 상환이 원만히 이뤄지느냐 여부가 앞으로 두바이가 얼마나 더 오래 비틀거릴 것인지 가늠할 척도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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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바이 통치자 셰이크 모하메드(왼쪽)와 아부다비 통치자 셰이크 칼리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