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TV에서 외화를 볼 때마다 기준은 오로지 하나였다. 누가 좋은 사람이고 누가 나쁜 놈이냐가 바로 그 기준이었다. ‘600만불의 사나이’를 볼 때도 그랬고 ‘A특공대’를 볼 때도 그랬으며 ‘맥가이버’나 ‘에어울프’를 볼 때도 그랬다. 그리고 언제나 좋은 사람이 나쁜 놈들을 물리치면서 정의로운 세상을 구현하곤 했다. 외화 속에서의 세상은 언제나 좋은 사람들이 지배하는 세상이었던 셈이다.
세상에는 좋은 놈도 있지만 나쁜 놈도 존재한다. 하지만 어릴 적 외화에서처럼 누가 좋은 놈이고 나쁜 놈인지를 따지는 건 부질없는 짓이다. 인간 세상에서 절대 선과 절대 악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은 탓이다. 상대적인 선과 상대적인 악만 있을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인간은 모두가 좋은 사람이자 동시에 나쁜 놈이라고 할 수 있다. 누구에 비하면 좋은 사람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또 다른 누구에 비하면 나쁜 놈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착하다는 말과 나쁘다는 말은 비교급의 대상일 뿐이다. 100만원을 가졌어도 부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가난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200만원 보다는 적고 10만원 보다는 많은 100만원이라는 금액이 가치판단의 절대적인 기준이 될 수 없는 까닭이다. ‘개콘’의 인기 코너 ‘정여사’에서 송병철이 ‘있는 사람들이 더 해’라고 외치듯이 가진 자들의 탐욕도 거기에서 비롯된다.
영화 ‘분노의 윤리학’은 그처럼 인간의 이중성에 대해서 고찰한 영화다. 그러면서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감정이자 희노애락(喜怒哀樂) 중에서 가장 통제하기 어려운 감정인 ‘분노’ 대해서 말한다. 사랑하는 여인의 마음을 돌리지 못한 것도, 채무자가 죽음으로써 5천만원을 떼이게 생긴 것도, 몰래 엿보던 여인을 다시는 볼 수 없게 된 것도, 억울하게 살해범으로 몰린 것도 모두 분노를 일으키게 만드는 요인들이다.
하지만 사랑하는 여인을 죽였다는 자책감보다는 누군가 자기 여자를 엿보고 있었다는 사실에 분개하고, 돈을 떼였다는 사실보다는 살인자가 자신의 죄를 다른 사람에게 뒤집어씌웠다는 점에 분개하며, 몰래 사생활을 엿보던 여인의 죽음보다는 자신이 그동안 모아온 하드디스크와 CD를 빼앗겼다는데 분개하고, 살인범으로 몰렸다는 억울함보다는 간통을 들켰다는 사실에 분개하는 감정에 촛점을 맞추고 있다. 그리고 영화는 묻는다. ‘누가 제일 악인이지?’
그리고는 네 명의 남자들을 골고루 비추면서 죄질의 경중을 따져본다. 그들이 누구인지, 뭐하는 사람들인지, 왜 그런 행동을 보여야 했는지에 대해서 하나씩 살펴보면서 그 판단을 관객에게 떠넘기는 것이다. 이를 위해 카메라는 최대한 객관적인 자세를 유지한다. 특별히 누가 더 나쁘다는 섣부른 판단도 하지 않는다. 보는 이들의 관점에 따라 악인이 달라질 수밖에 없는 이유일 것이다.
보기에 따라서 나쁜 놈은 진아의 옛 애인이자 진아를 교살한 현수(김태훈)이기도 하고 사채업자로 진아에게 금전적 고통을 안겼던 명록(조진웅)같기도 하며 낮에는 경찰이면서 밤에는 진아의 스토커로 변신하는 정훈(이제훈)처럼 보이기도 하고 고매하신 국립대 교수님이자 호스티스인 진아와 살을 섞었던 수택(곽도원)인것 같기도 하다. 어쩌면 누가 더 나쁜 놈인지 이들을 비교하는 건 그다지 의미 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렇지만 정훈은 진아의 방에 설치한 몰카를 통해서 진아의 사생활을 은밀히 엿보기는 했어도 아무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았고, 현수는 진아의 목을 조르기는 했어도 자신도 진아의 뒤를 따를 생각이었으며, 명록은 인간쓰레기에 불과할지라도 진아의 진범을 잡아 억울한 누명을 쓴 수택을 구해주려고 했고, 수택은 이중인격일지는 몰라도 직업의 귀천을 가리지 않고 본능에 충실했을 뿐이었다. 이쯤 되면 선과 악의 구분이 묘해진다. 이 영화가 ‘윤리’를 내세우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일게다.
사실 이 영화는 누가 더 나쁜 놈이냐 하는 줄거리보다 그들 간의 관계를 지켜보는 재미가 더욱 쏠쏠하다. 서로가 서로에게 느끼는 분노라는 감정과 그 감정에 대처하는 자세들이 비교적 설득력 있게 묘사되고 있고 위트와 재치로 가득한 대사들도 찰지다. 또한, 각자의 대사 한 마디 한 마디를 음미해보면 의미심장한 내용들로 가득하다. 이 영화를 보면서 참 잘 만들었다고 생각했던 것도 극본의 완성도도 좋았고 출연진들의 연기도 좋았으며 사건의 전후 관계를 증명해 보이는 편집 또한 좋았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 영화에 대한 반응은 그리 호의적이지 못하다. 심지어는 이 영화를 보고 분노를 느꼈다는 의견도 있을 정도다. 이런 반응은 대체적으로 이야기가 평면적이지 못하기에 생기는 것일게다. 즉, 한 명의 여자를 둘러싼 네 명의 남자의 관계가 입체적으로 진행되다 보니 혼란스러웠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그 부분에 대해 나처럼 감탄했던 사람도 있겠지만, 그 수는 그리 많지 않은듯하다.
나름대로 웰메이드 영화라고 생각하기에 흥행에 성공하기를 바라는 마음이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해 보이지 않는다. 일단 관객들의 반응이 싸늘한 편이고 알바들이 판을 치는 포털 영화에서도 6점대 평점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또한, 천만 관객을 돌파한 ‘7번방의 선물’은 여전히 건재하고 앞으로도 ‘스토커’를 비롯해서 화제작들이 줄줄이 기다리고 있는 형편이다. 이 영화에 불리하게 돌아가는 이런 상황에 대해 개인적으로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
분노의 윤리학(2012)
범죄, 드라마 | 한국 | 110분 | 2013.02.21 개봉 | 감독 : 박명랑
출연 : 이제훈(정훈), 조진웅(명록), 김태훈(현수), 곽도원(수택), 문소리(선화), 고성희(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