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의 집을 찾은 지난 10일 런던 날씨는 여전히 변덕스러웠다. 아침에 조금 흐리다 싶더니 이내 장대비가 쏟아졌다. 노리치 경은 “험한 날 오게 해서 미안하다”고 말했다. “그건 당신 잘못이 아니다” 했지만 미안한 기색을 고치지 못했다. 그는 낯선 동양 기자에게 우산 놓을 위치를 알려주고 거실 소파 어디든 편한 곳에 앉으라고 했다. 고급 양장본 책들이 가득했다.
―서재가 꽤 오래돼 보인다.
“이 서재는 40년째 사용하고 있다. (런던 서남부) 바스(Bath) 남쪽 30분 거리의 별장에도 서재가 있다. 세보지는 않았지만 책은 3000~4000권 정도 될 거다.”
―서재를 부모로부터 물려받았나.
“서재뿐이 아니다. 여기 보이는 모든 것을 물려받았다. 책은 물론 벽에 붙어 있는 그림, 이 전화기, 작은 물품들 모두 부모님의 손때가 묻어 있다.”
―아버지가 자주 하던 말씀을 기억하는 게 있나.
“아버지는 ‘모든 것을 미워하고 모든 것을 사랑하라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 라틴어로 ‘오디 에트 아모(Odi et amo)’다. 세상의 모든 것에 자신을 내던지고 모든 것을 끝까지 겪은 뒤에 미워하든지 사랑하든지 결단하라는 이야기다.”
―서재에서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것 외에 다른 일도 하나.
“편지를 쓴다. 요즘은 서재에서 글을 쓰지 않는다. 집에서 가까운 사설 도서관에서 글을 쓴다. 전화벨 소리 같은 생활소음을 떠난 조용한 곳이다. 내 전용 자리가 있다. 도서관에는 세계의 모든 책이 있다. 몰두할 수 있는 공간이다. 아침 11시쯤 도서관에 가서 밤 늦게 집에 돌아온다. 나는 침대에 누우면 단 두 페이지도 읽지 못하고 곯아 떨어진다.”
―서재가 자녀 교육에도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하나.
“딸은 작가고, 아들은 건축가다. 아들은 책 읽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딸에게는 영향을 준 것 같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영향을 줬는지는 모르겠다. 딸이 더 잘 알고 있을 거다.”
―서재를 자녀에게 물려줄 생각인가.
“(단호하게) 물론이다.” … 이하 생략
출처 : 서재에서 길을 찾다[3] 영국 역사 저술가 존 줄리어스 노리치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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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부터 우리에게 서재는 그저 부의 상징일 뿐이었습니다. 잡념을 버리고 맑은 정신으로 책을 읽는다거나 집중해서 글을 쓰는 공간이라는 개념보다는 먹고 살만한 집에서 자랑삼아 만들어 놓은 공간이라는 시기어린 장소일 뿐이었지요. 웬만한 집에서는 입에 풀칠하기에도 어려운 가정 형편에 책을 사본다는 것 자체가 사치였으니 그럴만도 했지요. 하기사 단칸셋방에 서재가 왠말이란 말입니까. 그야말로 꿈같은 소리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지난 3월부터 조선일보와 대한출판문화협회가 공동으로 ‘거실을 서재로’라는 캠페인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남는 공간이 없다 핑게만 대지 말고 TV가 차지하고 있던 공간을 과감히 서재로 바꿔보라고 합니다. TV와 함께하는 거실은 대화가 단절되고 지식이 단절되는 단절의 공간이지만 책과 함께하는 거실은 대화가 이어지고 지식이 늘어나는 창조의 공간이라는 것이지요.
영국의 귀족이며 외교관으로도 활동했던 작가 존 줄리어스 노리치(John Julius Norwich·78) 경은 그의 서재를 부모로부터 물려받았고 앞으로 자식에게도 물려주겠다고 합니다. 독서를 강요할 수는 없겠지만 자연스럽게 책을 접할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은 부모로서 당연한 의무이며 또한 물질적인 재산보다 더 가치있는 유산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군요.
가을은 천고마비 독서의 계절이라 하지요. 지금부터라도 자녀에게 물려줄 서재를 꾸며보는건 어떨까요. 차곡차곡 쌓여가는 책의 분량만큼 가족의 사랑도 쌓여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