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금의 중국의 모습
-‘후진타오 이야기’를 읽고
세 송이의 장미 꽃망울로 시작된 5월은 격일로 매일 4시간씩 계속되는 약리학 강의와 연구비 심사, 연구 윤리 심사, 학술대회, 교수 연수회 등으로 경황없이 지나가고 있다. 이제 뜰에는 난만한 장미와 새로 핀 수선화의 노오란 빛깔이 아름답고 뒷산에는 아카시아의 향기가 저녁 노을 속에 눈발처럼 흩날리고 있다.
어릴 때 받은 반공 교육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여행을 좋아해서 젊은 시절 정말로 종횡으로 많이도 다녔지만 중국에 발을 디딘지는 채 10년이 되지 않는다. 2003년 가을 학기에 한국해양대학교의 실습선 ‘한나라’호의 선의(Ship’s Doctor)로 한 달간 동승을 하면서 입항했던 샤먼(廈門)이 처음으로 가본 중국의 여행지였다.
그 후 2004년 겨울에는 약 2주 동안 운남성의 쿤밍, 대리, 리짱을 여행한 적이 있으며 그리고 정말 오지 중에 오지인 양쯔강의 최상류에 속하는 금사강(金沙江)이 흐르는 봉과(奉科)라는 곳에서 의료지원 팀의 일원으로 3일 동안 머무른 적이 있었다.
그 이후에 2006년 북경에서 세계약리학회가 열려서 다시 2주 정도 북경을 방문하게 되었다. 그 후에도 상해를 두 번 더 방문한 적이 있지만 중국이라는 나라는 한마디로 감상을 적기에는 너무도 복잡하고 복합적인 나라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고교 시절 제목이 좋아서 사 모은 책 중에 펄 S. 벅이 쓴 ‘어머니’라는 책이 아직도 이층 서재의 한 구석에 자리 잡고 있는데 배경은 흙먼지가 사시사철 날리는 황하의 어느 시골이었다. 아이는 자주 씻지를 못해서 안질을 항상 눈에 달고 다녔다. 또 하나 중국에 대한 상념이 머무는 자리에 외항선 해기사로 근무할 당시에 보았던 1910년경의 중국이 배경이 되었던 ‘sand pebbles’라는 영화가 떠오른다. 그 이후 비교적 최근에 보았던 ‘마지막 황제’에서도 중국에 대한 강렬한 인상을 받고 있는데 무엇인가 쉽게 접근하기가 꺼려지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후진타오 이야기’를 읽으면서 2004년 발간된 션판(沈凡)이 쓴 자전적인 기록인 ‘홍위병’과 많은 장면들이 서로 섞이는 것을 느낀다. 타도의 대상이 되면 죽여서 내장을 꺼내 잘라서 한 조각씩 기름에 튀겨 먹는 군중들의 광기를 결코 잊을 수 없다. 그러한 광기의 시대를 인내와 자중으로 헤쳐 나가는 주인공의 이야기에 많은 감명을 받게 된다. 대약진운동 때의 중국의 기근과 관련된 일화 하나가 떠오른다. 먹을 것이 모자라게 되자 아버지가 자식을 위해 굶어 죽으면서 자신의 시신을 아이들에게 먹이라고 유언을 하였다는 것이다.
후진타오의 아버지도 자신의 얼마 되지 않는 재산을 공산당에 바치면서 서운한 내색 한번 하지 못한다. 그리고 후진타오 자신도 상처받은 영혼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아마도 그 시대의 중국의 사람들 모두가 그렇게 살았을 것이다.
정말로 훌륭한 인품의 지도자이지만 1989년 라싸의 독립요구를 무력으로 진압한 사건은 이해는 가지만 너무도 안타까운 일이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또한 북경의 천안문 광장을 거닐어 본 적이 있지만 나는 등소평이 “20만 명을 죽여 20년을 안정시키자.”고 한 말에 동의하기가 어렵다. 이러한 인명 경시 풍조는 아직도 중국의 역사에 연면히 이어져 오고 있다고 여겨진다.
그리고 무엇보다 1900년대 이후의 중국의 현대사를 개괄하는데 매우 유익하며 저자는 매우 객관적으로 역사적 사실을 기술하고 있어서 중국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나는 젊은이들이 이 책을 읽고 보다 인내하고 자신의 내실을 기하는 계기로 삼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감사합니다.
2010년 5월 27일
고신대학교 의과대학 약리학교실 이 대 희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