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평화로우시기를.

이제는 평화로우시기를.

-장영희 교수님의 ‘이 아침 축복처럼 꽃비가’를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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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장맛비에 난만하던 장미 꽃잎들이 낙엽처럼 져서 뜰을 붉게 물들이고 그 동안 가뭄에 움츠려 있던 고추와 상추와 깻잎과 방울토마토가 제철을 만난 듯 싱싱함을 자랑하고 있다. 너무 일찍 뿌려서 냉해로 죽은 표주박 씨를 다시 뿌렸는데 뾰족뾰족 새싹을 밀어 올리는 모습이 앙증스럽다. 지난 수요일 4시간 동안 약리학 강의를 마치고 연구실에 들어서자 조교 선생님이 우편물을 전해주는 데 알 수 없는 슬픔의 무게가 손끝으로 전해져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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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대학에서는 이미 기말고사가 끝나고 방학을 준비하고 있겠지만 의과대학은 아직 한창 수업이 진행 중이어서 아마도 학생들은 7월 중순은 지나야 잠깐 동안 방학을 맞이하게 되리라. 오늘 아침에도 토요일이지만 세 시간에 걸쳐서 약리학 시험 감독을 하면서 장영희 교수님의 ‘이 아침 축복처럼 꽃비가’의 마지막 부분을 읽었다. 끝부분의 ‘어머니와 집 정원에서’라는 사진을 보다가 나는 학생들이 있다는 것도 잊은 채 눈시울을 적셨다. 다소 그을린 얼굴의 모친의 모습에는 시골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촌부의 모습이었으나 무한한 인고와 강인함이 배어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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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표지 안쪽에 장영희 교수에 대한 소개에서 “1952년 9월 14일, 서울에서 태어났다.”는 그 한 구절이 모든 것을 말해 주는 듯 했다. 전쟁의 와중에 아이가 태어나고 생사의 기로의 나날들로 이어지는 혼란 속에서 예방 접종이 제대로 되었을 리 만무했으리라.

글을 읽으면서 참으로 마음이 따뜻한 분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평생 장애 때문에 얼마나 괴로웠을까?’하는 생각에 깊은 연민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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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글에 고식병(孤食病)에 대한 글이 있었다. 참으로 공감이 가는 내용인데 ‘가족생활의 핵심은 바로 아침 저녁으로 식탁에 마주 앉아 식사를 함께 하는 것’이라는 것을 며칠 전에 새삼 깨닫게 되었다. 지난 금요일 저녁 사하구의사회 주최 학회가 있어서 집사람은 아이들과 함께 참석을 하고 나는 오랜만에 혼자 저녁시간을 가지게 되었는데 뭔가 집이 너무 허전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보통 9시쯤에 잠자리에 들지만 그날은 집사람과 아이들이 걱정되어서 결국 늦게까지 잠을 설쳤다. 행복해 보이는 가정도 사실은 별것이 없고 그저 평범한 일상의 연속이다. 산부인과 의사인 집사람도 집에 오면 영락없는 부엌데기이다. 밥하고 청소하고 마늘 까고 아이들 공부안한다고 다그치고. 나 또한 집에 오면 설거지와 청소와 세탁물 정리는 당연히 맡아서 한다. 그리고 그것이 지고의 행복이라는 것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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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여성들이 결혼하기를 무서위하고 힘들어 한다. 그리고 사실 결혼식하고 난 후부터는 고난의 가시밭길이다. 그러나 그 형극의 세월이 흘러 10여년 정도가 지나면 남편 끌고 시장 다니면서 이것도 참 행복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속만 썩이던 남편도 철이 들어서 위로와 사랑과 고마움을 말하기도 한다. 그리고 테라스에 앉은뱅이 의자를 놓고 앉아서 아이들 웃음소리를 흘려 들으면서 저물어 가는 바닷가 풍경을 보고 있노라면 이것이 바로 사는 즐거움이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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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학을 전공하신 교수님다운 당찬 한마디가 가슴에 와 닿는데 ‘영어 때문에 재능 묻히면 안돼요’라는 글이 있었다. “우리가 학교에서 영어를 배우는 이유는 더욱 당당하게 우리의 정체성을 갖고, 세계에 한국과 한국사람임을 내세우기 위함입니다. 영어로 수집돼 있는 고급 정보를 더 편리하게 흡수하고 그것을 기반으로 나만의 실력을 다지고 전파하기 위한 방편입니다.” 어설프게 생활영어 몇 마디 하는 것으로 공부다 한 것으로 착각하는 젊은이들은 깊이 반성해야 문제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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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처럼 마음이 예쁜 민수야’라는 글에 1952년 생 다운 구절이 있는데 “전쟁을 겪고, 전쟁이후에도 어떻게 살아가는가 보다는 어떻게 살아남는가를 생각하며, 아름다운 마음보다는 싸워 이겨야 하는 투지, 남을 배려하는 마음보다는 남이 먹는 것이라도 뺏어야 하는 독기를 배웠기 때문이다. (중략) 그때 파리를 잡던 손기술, 오징어 다리를 쥐꼬리로 만드는 창의성, 눈을 보고 떡가루를 상상하는 헝그리 정신이 지금 우리가 누리는 물질적 안정을 가져왔는지 모르지만, 슬프게도 악착같이 살아온 우리의 정서와 양심은 많이 퇴화해 버린 것 같다.” 글을 읽으면서 우리들보다 슬픔과 고뇌가 많았던 누님과 형님들에게 깊은 고마움을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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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미문학 소개에서 롱펠로의 ‘화살과 노래’ 중의 한 구절이 특히 마음에 와 닿는데 “공중을 향해 노래를 부르니 땅에 떨어졌네 내가 모르는 곳에” 그 낙처(落處)를 장영희 교수가 알았더라면 좀더 느긋하고 넉넉한 삶을 사셨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다. 그러나 이제는 온전한 자신으로 돌아가셨으니 평화로우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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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지난한 회한의 세월을 보내셔야 했던 모친께서도 이제는 평온이 함께 하시기를 진심으로 빕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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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6월 19일

 

고신대학교 의과대학 약리학교실 이 대 희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