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살피고 교감하는 삶
-’Mandela’s Way’를 읽고
태풍 톈무(天母)가 부산을 지나간 지 세 시간쯤 지난 6시 경에 저녁 산책을 나섰다. 아직도 건너편 영도 쪽의 남항 입구 방파제에 부딪히는 파고는 3m가 넘어 보였고 하얀 포말이 해안선을 따라 길게 부서지고 있었다. 산책길 곳곳에 태풍이 할퀴고 간 상흔이 역력했고 특히 남쪽 해안, 산 사면의 약 50년은 족히 된 아카시아 나무 한그루가 줄기가 꺾인 채 부러져 있었으며 그 건너편의 아카시아는 한쪽 가지가 찢어져 있었다. 1시간쯤 걸리는 산책로의 약 2/3 지점의 전망대가 있는 곳인데 긴 의자에 누워서 하늘을 보면 5월의 향을 뿌렸던 하얀 꽃 위로 여객기가 지나가던 바로 그 나무였다.
넬슨 만델라에 대한 이야기는 언젠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인종차별주의와 흑인들의 가난한 삶을 고발한 기록 영화를 보면서 알게 되었다. 그러나 ’Mandela’s Way’를 읽게 되면서 넬슨 만델라가 27년이라는 긴 시간을 감옥에서 억울하게 억류되어 있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의 억압 속에서도 자신의 삶이 파괴되지 않고 온전하게 유지 될 수 있게 하는 저력이 무엇이었는지 궁금해졌다.
그는 왕의 자문관이었던 부친이 “아버지가 만델라가 처음 학교 가던 날 자신의 승마복을 잘라 바지 한 벌을 만들어 주었다.”고 기술하는 내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유전적인 요인과 함께 부친의 사후에 아프리카 왕족 마을에서 자랐기 때문에 유년 시절부터 귀족과 같은 태도를 지녔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는 유년 시절 소 떼를 모는 방식에서 아프리카식 리더십의 전통을 익혔고 어린 시절 오래된 개미굴에 불을 붙여 검게 탄 옥수수를 먹던 시절을 회상하며 일찍부터 자연과의 대화에서 많은 위로를 받는 지혜를 터득한 것으로 보인다.
로벤섬의 감옥에서 “적은 양의 배식과 고된 육체노동의 세월”을 보내면서도 그는 자신의 텃밭을 가꾸면서 삶의 위로와 즐거움을 추구하고 있었다.
그는 옷차림을 비롯한 겉모습의 중요함과 상징의 힘 그리고 미소를 지으며 분노를 삭여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그는 동료 수감자가 아파서 자신의 요강을 닦을 힘도 없었던 때에 자신의 닦은 요강을 바꿔 주는 따뜻함도 있었다. 그는 요하네스버그의 알렉산드라 흑인 거주 지역에서 주인 가족의 식사에 초대 받았을 때 나이프와 포크 사용법이 익숙하지 않아서 손으로 먹는 대신 식사를 포기할 정도로 자존심이 강했다.
그는 비트바테르스탄트 대학교에서 법률을 공부하면서 그 당시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법은 단지 조직화된 폭력이었으며 그는 법이 평등한 정의를 실현시켜 주는 불변의 도덕적 원칙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그가 볼 때 서양은 개인적인 야망으로 가득찬 곳이며 사람들은 남들보다 앞서려고 싸운다. 개인주의라는 르네상스적 개념과는 달리 아프리카의 리더십 모형은 우분투(ubuntu)라는 개념으로 잘 표현되는데 이것은 권위는 다른 사람에 의해 부여받는 것이라는 개념이다. 우분투는 사람을 개별적인 인간으로 보기 보다는 다른 사람들과 맺어진 무한하고 복잡한 관계망의 일부로 본다. 우리는 모두가 서로 연관되어 있다. 나는 항상 우리에 종속된다, 어떤 사람도 섬이 아니다, 라는 생각을 담고 있다. 만델라의 관점에서는, 우리 모두는 같은 뿌리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넬슨 만델라는 ‘인종, 계급, 성별에 관계없이 모두에게 평등한 권리’라는 단 하나의 원칙만을 분명히 지켜온 사람이다. 1980년대와 1990년대 남아공의 고귀한 목표는 단 하나였다. 그것은 아파르헤이트 체제의 전복과 인종에 관계없이 1인 1표를 행사할 수 있는 민주주의 확립이었다.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고, 흑인들의 권리를 부정하고, 흑인들의 가치관과 꿈에 대해 적대적이었던 그런 세상에서 1994년 5월 넬슨 만델라의 집권 이후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인종차별정책은 철폐되었다.
만델라는 말한다. 자연을 가까이 하고 산책하면서 문제를 충분히 심사숙고 하시오. 그리고 자신만의 텃밭을 가꾸시오.
감사합니다.
2010년 8월12일
고신대학교 의과대학 약리학교실 이 대 희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