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각에 취해 꿈을 쫓는 사람들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을 읽고
지난 구정 연휴에 뿌렸던 상추가 중순의 서설을 맞으면서 며칠 전 봄비 속에 새싹을 틔운 모습이 앙증맞다.
스웨덴하면 21년 전, 햄릿의 무대였던 크론보어성이 있는 덴마크 헬싱괴르에서 Ferryboat를 타고 입항하였던 헬싱보리의 움울한 도시풍경과 암스텔르담으로 떠나기 전날 서울 동생 집에서 보았던 Susan Brink라는 스웨덴 이름을 가진 4 살 때 한국으로부터 스웨덴으로 입양된 소녀가 27 세의 성인이 되어서 한국의 친 엄마를 찾게 되는 모녀의 끈질긴 인연과 함께, 2009년 2월 20일 폐암으로 향년 46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신유숙씨를 떠올리게 된다.
이번에 읽게 된 Stieg Larsson의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을 읽으면서 구름이 낮게 드리워진 그때의 도시풍경들과 소설의 배경이 너무도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 소설은 뉴밀레니엄이 시작되는 시기에 스톡홀름을 무대로 사회문제와 부조리를 고발하는 ‘밀레니엄’ 잡지사의 편집장겸 공동소유자인 미카엘 블롬크비스트가 사업가 한스에리크 베네스트룀을 고발하는 기사로 소송을 당해서 명예훼손죄로 3개월의 징역을 선고받고 형이 집행 되기 전에 스톡홀름에서 3시간 거리에 있는 가상의 지명 ‘헤데스타트’에 거주하는 방예르 그룹의 헨리크 방예르가 ‘밀레니엄’의 이사로 등장하면서 이 잡지사를 파괴하려는 한스에리크 베네스트룀에 대항하는 구도를 취하고 있다.
한편 또 다른 등장인물로서 등에 용 문신을 한 24세의 리스베트 살란데르는 해커이자 보안업체 사설 조사원으로서 청소년기의 일탈로 금치산자 선고를 받아 법적 후견인의 보호라는 미명하에 성적 학대를 받고 있다. 이소설의 저자 Stieg Larsson은 원래 10부작을 구상하고 있었으나 3부를 탈고하고 2004년 11월 9일 심장마비로 급사했다.
이 소설은 정치 경제 법조계에 만연해 있는 현대 사회의 부조리와 인간의 탐욕을 여과 없이 보여 주어서 흥미롭기는 하나 대부분의 서구의 스릴러물이 그렇듯이 개인적으로는 다소 실망스럽기도 하다.
나는 평소에 현대 사회에서 남녀의 차이를 너무 과장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사실 남녀의 차이는 태아의 발생 10주경에 wolfian 관이 발달하느냐 아니면 mullerian관이 발달하느냐의 차이일 뿐이고 오히려 성장하면서 사회적으로 교육받는 역할(gender role)의 차이일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남녀가 서로 동등하고 모두가 사회구성원의 일부라고 생각한다면 이성이 착취나 학대 증오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서구의 세계관과 문명을 비판 없이 수용한 우리들의 근대화 과정은 이제 많은 사회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모든 것이 너무 상업주의로 흐른 결과 저녁 시간 가족들이 모여서 보는 soap drama는 너무도 가족이나 인간관계가 왜곡된 막장형의 드라마가 판을 치고 오락 영화들도 인간의 도리나 윤리와는 담을 쌓은 종교나 자유의 가면을 쓴 폭력과 탐욕, 여과 없는 욕망의 발산과 파괴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이제 인간의 욕망과 무절제한 과소비는 지구의 자연환경이나 사회적인 환경이 수용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서고 있는 것 같다. 초등학교 학생의 반이 결손가정 출신이고 이들의 양부모와 이복 형제들 간의 갈등과 마찰은 더욱더 심각한 사회문제를 야기할 것이며 단지 내가 돈을 지불했기 때문에 내 마음대로 차를 끌고 다녀도 된다는 생각이나 돈을 지불할 것이므로 한 테이블 가득 날라온 음식을 먹지 않고 모두 쓰레기로 만드는 철없는 사람들을 보면 너무도 한심한 생각이 든다.
한편에서는 공전의 흥행을 선전하고 있지만 그저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것이 전부인양 감각에 취해 꿈을 쫓고 있는 우리들의 현실을 보면 착잡한 마음 금할 길이 없다. 얼마나 세월이 흘러야 우리들은 감각을 떠나 감동과 영감을 추구하고 누릴 수 있는 삶의 양식을 택하게 될까?
감사합니다.
2011년 3월 6일
고신대학교 의과대학 약리학교실 이 대 희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