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에서 고양이가 튀어 나오리라.
‘시골의사 박경철의 자기혁명’을 읽고
이제 가을도 깊어 뜰에는 해국의 보라색이 아름답고 자목련 잎이 갈색으로 물들기 시작하였으며 모과의 푸른 빛에 노란 기운이 번지기 시작한다. 아직도 한쪽에선 푸르디푸른 잎 사이로 하얗고 앙증맞은 꽃을 피우고 조그맣고 예쁜 풋고추가 달리는 반면 한쪽에선 고추들이 빠알갛게 익어가고 있다. 지난 수요일에는 출장 갈일이 있어서 역으로 향하던, 새벽 기운이 채 가시지 않은 차창의 풍경에는 백화점의 성탄절 장식을 하는 듯 크레인에 사람들이 매달려 있었고 그 옆에는 2012년형 SM 5를 선전하는 현수막이 수은등 아래서 빛나고 있었다. 역 앞 광장에는 일찍 잠을 깬 비둘기들이 먹이를 쪼고 있었고 그 뒤로 몇몇 노숙인들이 해장술을 하는 듯 떠들썩했다.
박경철 선생님의 글은 이전에도 경제학이나 주식과 관련된 책을 읽었던 적이 있어서 문체나 글의 전개가 비교적 익숙한 편이다. 단지 그때는 단순히 받아들여서 소화시키는 입장이었던 반면에 이제는 다소 세월의 때가 묻어서 일까 책을 읽으면서 나름대로 떠오르는 생각의 편린들이 많아서, 그리고 또 이 책이 주로 저자도 밝히고 있듯이 “지난 6년간 중고등학생과 대학생, 학부모, 선생님들과 필자가 나눈 대화의 기록”이라고 하고 또 이미 이 책도 이전의 책들처럼 서점가의 베스트셀러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바 있어서 즐겁게 우리 아이들에게 건네주면서 몇 마디 덧붙이고 싶은 마음으로 글을 씁니다.
이 책은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자아 찾기, 사회와 역사에 대한 인식, 시간활용 등의 다양한 주제에 대하여 매우 친절하고 설득력 있게 기술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지적들은 지금 교정에서 커가는 아이들의 태도나 행동들을 보면서 매우 시의 적절한 가르침이라는 공감을 하게 된다.
나도 고교시절이 있었고 입학 초기에 쇼펜하우어와 니이체를 탐독했었고 많은 감탄도 했다. 그러나 서양 철학의 문제는 수와 언어를 사용한 사유로서 결국은 언어와 수에 갇히고 만다는 것이다. 이 책 297쪽에서 298쪽에 인용되고 있는
“우주론자들은 우주는 빅뱅에서 시작되었다고 말하는데, 그럼 빅뱅 이전에는 무엇이 있었는가? 이 질문의 답은 당연히 ‘아무것도 없었다’다. 빅뱅 이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는 것은 빈 공간, 즉 단조로운 진공상태의 공간만 존재했다는 뜻이고,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고 시간만 존재하는 그런 공간을 상상해야 한다. 소위 영겁의 시간만이 존재하는 그런 상태다. -중략- 그때 빅뱅 이전의 영겁의 시간 자체도 지금 시간의 개념으로 볼 때는 아무런 시간도 존재하지 않았다고 보아야 한다.
-Robin Le Poidevin, The Discovery of Time.”
그럼 없다는 것은 무엇인가? 내가 보기에는 시간이란 정보가 전달되는 속도의 한계 때문에 발생하는 겉보기의 값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정말 시간도 존재하지 않고 단조로운 진공상태의 공간만 존재했을까? 그렇지 않다. 빅뱅이 없었다면 시공간도 존재할 수 없다. 그렇다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허구에 불과하다.
이 책 253쪽에 “시간은 직선이 아니라 곡선이다.”라는 구절이 있는데 시간만 그런 것이 아니라 시공간 자체가 중력과 반중력의 평형 위에서 역동적인 곡면을 구성한다.
이 책 253쪽에 “청년에게 예의가 필요한 이유”를 밝히고 있는데 저자는 “지금 우리시대는 예의의 중요성이 완전히 경시되어 인내심과 자제력을 기를 수단을 상실해버렸다.”고 탄식하고 있다. 너무도 뼈아프고 가슴을 찌르는 지적이다. 요사이 아이들은 스승을 존경하지 않아서 그 피해는 고스란히 학생 몫으로 돌아가고 있다. 스승이 학생 눈치를 보고 학생이 스승을 우습게 아는데 어떻게 교육이 이루어 질수 있겠는가? 그럼 그것은 학생들만의 잘못일까?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우선 핵가족을 구성하면서 기본적인 예의를 배우기보다는 어리광과 과잉보호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촌지 몇 푼 갖다 주면서 우습게 보는 부모로부터 스승을 우습게 보는 법을 배웠으며 일부의 스승도 스스로 노동자가 되었다. 비록 일부이기는 하지만 돈 몇 푼에 내신 성적을 조작하고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대학은 학위 장사를 하고 그도 저도 안 되면 조기 유학이다 뭐다 해서 현대판 이산가족이 되고 그쪽 삶에 적응된 가족들은 돌아오지 않겠다고 고집피우고 그러다 시민권 얻겠다고 협의이혼한 후에 그쪽 시민권자와 다시 계약 결혼하는 요지경이 되었다. 교육감이라는 분은 제 앞가림도 못하면서 학생 권익을 외쳐서 교정은 지금 난장판이 되었다.
저자는 “세 시대의 패러다임 이해하기”에서 ‘추격과 질주의 세대가 잃어버린 것들’에 대하여 기술하면서 “당대의 관점에서 기성세대는 성공의 경험을 말한다. 경험은 무서운 것이다. 세상의 모든 주의 주장가운데 체험을 바탕으로 한 것만큼 강고한 것은 없다. 기성세대는 헐벗고 굶주리던 우리가 이만큼 성장한 배경에는 일사분란하고 획일적인, 소위 ‘국론통일’로 상징되는 일체화된 질주만한 것이 없다고 체험적으로 믿는다. 부모는 자식에게, 국가는 국민에게, 기업은 노동자에게 이 체험을 강요한다. 글로벌 기업이라고 자랑하는 한국 기업들이 지금도 신입사원을 데리고 눈 내린 태백산을 오르거나 해병대 극기 훈련에 참여하면서, 그것을 단합이라고 부르는 것도 바로 그런 사고의 산물이다.”라고 밝히고 있는데 이 기성세대라는 것이 저자의 세대를 말하는지 지금 70대를 넘은 아버지 세대를 말하는 지는 불확실하나 50대인 나의 입장은 이러하다. 나는 1977학번이나 의과대학을 10년 늦게 입학하여 나보다 10년 정도 젊은 학우들과 의예과 공부를 시작해서 1987년 1학기는 조용했으나 6월부터 몇 년 동안은 학사 일정이 제대로 진행된 적이 없었다. 모두 거리로 달려 나가거나 동맹 휴학이다 시험거부다 해서 학기 중에는 데모하고 방학 때 몇 자 공부하다가 기말시험치고 추석 끝날 때쯤 2학기 시작해서 또 데모하고 제대로 공부를 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밤에 독서실에 책을 쌓아 놓고 공부하면 그 책을 모두 불태워 버리고 했으니 젊은 사람들이 어떻게 그렇게 야비하고 무모할 수 있는지 실망스러웠다. 그들이 지금의 40대중의 일부를 구성하고 있다. 나는 시골에서 자라 고생도 조금은 했지만 아직 아버지 세대에 대하여 진심으로 감사하게 생각한다. 우리들은 초가집 흙바닥에 시멘트 포장지 바르고 살았다. 비판은 좋다. 그러나 너무 세태에 영합하지 말았으면 한다.
지금 아이들 토익이네 토플이네 그렇게 점수가 높다는데 약리학교재를 공부해서 발표하라고 해보면 교단에 서서 입이 떨어지지 않는 학생이 부지기수다. 의과대학 입학한 수재들이 그 모양이다. 연구 과제를 주면 해결은 못하고 하지 못한 변명이나 핑계만 늘어놓기 일쑤다.내가 느끼기에 같이 공부한 지금 40대, 일부이긴 하지만 자기 말에 책임질 줄 모른다. 그리고 1996년 전후로 MS window 95가 보급되면서 컴퓨터 세대와 컴맹 세대가 갈라졌고, 이제 은퇴를 앞둔 친구들을 만나보면 모두 하나같이 자기 살만큼은 되었는데 그동안 젊은 시절부터 상사에게 어깨 너머로 눈치 보며 배우고 익혀왔던 know-how는 하나도 전수를 못해줬다고 한다. 왜냐고 물으면 젊은 사람들이 모두 자기보다 더 똑똑하고 예전의 자기들처럼 배우고 싶은 열정이 없단다. 모두는 아니겠지만 그저 편하고 즐거우면 그만이고 의무나 책임보다는 자신들의 권리만 주장하고 있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너무도 훌륭하다. 저자가 인용한 논어 술이(論語 述而)편의 한 구절 “열정이 끓어오르지 않으면 가르치지 않고, 표현하려고 더듬거리지 않으면 말을 거들어 주지 않는다. 하나를 가르치는데 세 개를 깨우치려 하지 않으면 더는 가르치지 않는다.”정말 공감하는 명구다.
굳이 한마디 더 보탠다면, 저자는 ‘학과 습이 병행되어야 진짜 공부다’에서 이 책의 276쪽 ‘깨달음이 있어야 진짜 공부다’라는 글에서 “‘진리를 마음에서 구한다.’는 말이 이 글의 절정이다.”라고 기술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정말 저자는 마음을 보고나서 이런 글을 쓰는가? 묻고 싶다.
물속의 달이 손 안에 들어 올 때는 어떠한가? 그것을 체득했다면 저자 스스로 그려 둔 것처럼 책에서 배가 손 안에 들어올 것이고 고양이가 책에서 튀어 나오리라.
감사합니다.
2011년 10월 30일
고신대학교 의과대학 약리학교실 이 대 희 드림